칼이야기(카타나가타리) 패러디. 원작하고는 설정이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섬에 찾아온 외지인은 화려한 옷과 장밋빛 머릿결을 우아하게 갖춘 앳된 외모의 여자였다. 새하얀 피부와 뚜렷한 이목구비, 단아한 몸가짐에서 숨기려고 해도 완전히 감출 수 없는 범상치 않은 고결함을 갖춘 여인은 낡은 오두막집 안에 정좌로 앉으면서도 그 품위와 드높음이 흐려지지 않았다. 척 봐도 높은 신분으로 보이는 여인이 육지와의 교류가 전무한 무인도에, 아니 정확히는 체격이 크고 상시 웃옷을 벗어 반라로 지내는 남자 혼자만이 반평생을 살아가고 있는 섬에 무슨 볼일이 있어서 찾아온 것일까. 사실 첫 만남부터가 평범한 것을 넘어 어떤 의미에서는 비범하기까지 했다. 남자, 나나마츠 코헤이타는 바로 몇 시간 전의 일을 회상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아침, 잠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시원하게 켠 뒤 가볍게 사안하고 밥을 차려먹기 위해 물을 확인하러 가다가 물통 안에 담겨있어야 할 물이 바닥났다는 사실을 알고는 바로 물통 째로 등에 업어서 집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샘으로 향했다. 수풀을 헤치고 잔가지들을 뚝뚝 꺾고서야 도착한 맑은 샘은 이 무인도에서 유일하게 마실 수 있는 식수였다. 샘물 앞에서 통을 내려놓고 이전에 샘 옆에다가 배치해놓은 바가지를 이용해 물을 뜨려는 순간, 근처에 우거진 수풀에서 인기척과 바스락 소리가 들렸다. 짐승의 것이라고는 확연히 다른, 이 섬에 살면서 처음으로 감지하는 기척. 그것은 코헤이타가 자신 이외에 겪어보는 낯선 인간의 기척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상대가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 공격하는 것이 옳지만, 이 섬에 제 평생을 홀로 살아와서 그런지, 자신 이외의 사람을 만난 적이 없어서 그런지. 코헤이타는 처음으로 마주하게 될 타인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가 앞서 공격 대신 상대가 모습을 드러내기를 기다리는 걸 택했다. 그리고 마침내 힘겹게 수풀 사이로 몸을 빼내어 코헤이타 앞에 선 인물은 뜻밖에도 여자였다. 붉은 기가 화려하게 감도는 갈색 머리카락을 하나로 높이 묶고, 화려한 자수와 고운 색조, 그리고 부드러운 비단으로 짜여 진 고급 의복을 최소 10벌 이상 껴입은 여자는 눈이 아플 만큼 화려한 생김새를 가졌고, 그에 뒤지지 않은 경국지색의 미모까지 갖추었다. 도저히 이런 외지고 사람과의 교류가 단절된, 죄인만이 홀로 살아가는 무인도에 찾아올 손님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대가 나나마츠 코헤이타인가?”
“응. 그런데?”
“흠. 이거 운이 좋군. 섬에 들어오자마자 바로 찾아내다니 말이야.”
단도직입적으로 코헤이타의 이름을 물어오는 여인의 질문에 코헤이타가 순순히 대답하자, 여인은 만족스러운 미소로 고개를 끄덕인 뒤 바로 자신의 허리에 찬 검에 손을 올려 천천히 뽑아냈다. 손에 검은 고사하고 물 한 방울 묻히지 않았을 것 같은 외양과는 달리 흠 잡을 데 없는 완벽한 발도를 취한 여인의 자세에 코헤이타는 속으로 감탄하면서도 반사적으로 자신도 자세를 취해 검을 빼든 여인을 경계했다. 아무래도 여인은 섬에 휴양으로 찾아온 느긋한 손님은 아닌 것 같았다. 검을 든 여인과 격투 준비 자세를 취한 사내. 두 사람 사이에 기묘한 공기가 잠시 흘렀다. 그리고 잠시 뒤, 적막 뒤에 가장 먼저 움직인 쪽은 여자였다.
“받아라!!”
머리 위로 검을 높이 치켜들고 높게 고함을 지르며 여인은 사내에게로 달려 나갔고, 사내는 언제든지 여인의 공격에 반격하기 위해 몸에 긴장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대결의 결말은, 세 발자국 만에 돌부리에 게다가 걸려 그대로 앞으로 꼴사납게 엎어져버린 여인의 자폭으로 마무리 되었다.
그리고 현재, 앞으로 넘어져버려 얼굴부터 박아서 그런지 그대로 기절해버린 여인을 집으로 데려오게 된 시점이 여기다. 여인의 이마는 아직도 넘어진 후유증으로 빨갛게 부어올랐지만 여인은 앞전에 자신이 저지른 민망한 모습을 철저히 부정하기 위해서인지 더욱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태연한 척 굴었고, 사내는 그런 여인의 체면을 위해서 일단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섬에 홀로 살아왔다고 해도 기본적인 분위기는 읽을 줄 아는 사내였다. 그러나 궁금한 것이 있어 코헤이타는 조금 전의 일과 연관되어 있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저기, 하나 물어봐도 돼?”
“뭔가요?”
“검은 처음 다뤄보는 거야?”
“네. 실전은 처음이네요. 저는 책사라서 무기를 들 필요가 없기에 자연히 검을 다룰 필요도 없습니다.”
“하지만 발도하는 자세만큼은 꽤 좋았잖아.”
“물론이죠. 거기까지 만큼은 확실하게 연습했으니까요!”
주변에 여러 빛들과 장미꽃을 활짝 피우며 자신 있게 외치는 여인의 말에 코헤이타는 ‘그렇다면 끝까지 연습하라고.’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섬에 유배를 오고 나서 처음으로 사람과, 그것도 이성과 대화를 나누는 것은 코헤이타로서는 이때가 최초이기에 아직은 츳코미라는 기술이 익숙지 않아 제때의 타이밍에 대사를 말하지 못하고 그대로 가슴 속으로만 말하는 것에 그쳐야만 했다. 훗날 나나마츠 코헤이타가 나중에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기 자랑과 탐미에 심취해 아예 다른 세계로 날아가기까지 하는 자칭 기책사, 타키의 속칭 ‘구다구다’에 적응하여 능숙하게 넘기고 츳코미를 거는 방식을 넘어 아예 자기 페이스로 끌고 가 장차 폭군으로 휘두르는 경지에까지 도달하겠지만, 그것은 아직 뒷날의 이야기이니 지금은 일단 언급만 하고 넘어가도록 하자.
“그래서, 너는 누군데?”
“아, 이런. 제 소개를 깜빡했군요.”
어느 틈엔가 자신이 발도술을 익히는 과정에 대해 일장연설을 늘어놓으며 자신이 책사에 이어 검술에도 희대의 재능을 가지고 있을지 모른다며 자화자찬을 늘어놓으려던 여인의 말을 적당한 타이밍에 끊은 코헤이타 덕분에 여인은 다행히도 이 이상의 불필요한 말을 하지 않고 본론으로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흠흠. 여인은 기침으로 제 자신을 가다듬은 뒤 두 손을 무릎위에 얹어 올곧은 자세와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자기소개를 했다.
“저는 막부에 소속되어 있는 군소 총감독이자 기책사인 타키라고 합니다. 나나마츠 코헤이타. 당신의 힘이 필요합니다. 당신의 이야기는 막부의 사람인만큼 익히 잘 들어왔습니다. 저는 막부에서 내려진 명을 수행하기 위해 여행을 시작한 몸인데, 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당신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러니 저를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헤에. 하지만 난 그쪽을 도와줄 이유 같은 건 전혀 없는데? 나하고 너는 오늘 처음 만난 사이잖아.”
“뭐, 그렇죠. 그 점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저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문제점이니까요. 하지만 저는 막부에서 가장 우수하고 유능하고 아름답고 뛰어나기까지 한 수준 높은 기책사! 그 문제점이라면 제 완벽한 기책을 통해 해결할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오, 그게 뭔데?”
저렇게까지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보이며 당당하게 문제점을 기책으로 해결했다는 타키의 자신감에 코헤이타는 상체를 앞으로 숙여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타키를 빤히 쳐다봤다.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는 결심이 선 것은 아니나 저렇게까지 자신 있게 내놓은 기책이 대체 뭔가 싶은 궁금증이 생겼기에 코헤이타는 일단 그녀의 해결책을 들어보기로 했다. 타키는 자신의 말을 경청할 청중이 있다는 것에 더 기분이 좋아졌는지 극적인 효과를 위해 일부러 뜸을 들였다가 불현 듯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한 손으로는 자신의 가슴에 얹고, 다른 한 손은 코헤이타에게 뻗으며 말했다.
“당신이 저에게 반하면 됩니다!”
…그 말을 듣고, 나나마츠 코헤이타는 이 세상에는 자기보다 더 바보인 사람도 있구나 하는 것을 처음으로 깨닫게 되었다.
(중략)
“그 여자는, 아니 여자도 아니지! 그 녀석은 바로 몇 십 년 전에 막부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몰락한 반역자 가문으로 알려진 타이라 가문의 유일한 생존자이자 종자(宗子)인 타이라노 타키야샤마루다!”
제 섬에 불청객으로 찾아온 습격자의 충격적인 고백에 코헤이타는 순간적으로 대치하던 경계 자세를 풀어버렸을 정도로 크게 동요하는 기색을 보여줬다. 그 이름을, 코헤이타는 익히 잘 알고 있었다. 모를 리가 없었다. 과거, 막부의 쇼군 밑에서 충신으로 지내오며 주인에게 대항하는 적들을 무수히 쓰러트린 나나마츠 일족이 마지막으로 몰락시킨 가문이자, 일족의 마지막 계승자인 자신이 이런 무인도에 유폐하게 된 간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가문의 이름이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코헤이타가 아직 어렸을 적, 귀족 가문들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실세를 가져 막부와 대등했다고까지 알려진 무가 가문인 타이라 가문은 갑자기 어떤 전조도 없이 막부를 상대로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켰다. 권세 높은 무가 가문의 반란은 상당한 여파를 줬고, 막부 측에서도 그 세력에 밀려 막부의 존립 자체가 위험하기까지 했다. 결국 사태가 악화일로로 접어들자 막부 측에서는 대대로 자신들을 섬겨왔고, 가장 강력한 무력을 가져 막부의 무력 그 자체를 상징하는 나나마츠 일족에게 반란을 제압할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아직 어린 코헤이타를 제외하고 일족들은 주인의 명을 수행하기 위해 소수의 인원으로 적진에 쳐들어갔고, 결과는 그들의 승리였다. 그야말로 괴물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 만큼 무서운 기세로 반란 분자들을 없앨 뿐만 아니라 주동자인 타이라 가문의 가주와 더불어 그들의 씨족들까지 몰살시켰다. 그렇게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은 타이라 가문은 허망하게 몰락했고, 승자가 된 나나마츠 일족은 ‘영웅’이라는 칭송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막부가 영웅의 일족에게 보답한 것은 포상이 아닌 토사구팽이었다. 상상 이상의 혁혁한 공을 세우자 막부는 일족의 강함에 두려움을 가지게 된 것이다. 결국 두려움을 이기지 못한 막부는 그들이 타이라 가문과 과거에 혼약을 맺었다는 빌미로 같은 반역자으로 치부해 숙청해버렸고, 유일하게 코헤이타만큼은 아직 어리고 그의 아버지가 선처한 덕분에 무인도로 유배를 떠나는 것에 그치게 되었다.
과거 영웅으로 추앙받던 일족의 마지막 생존자와 그들의 손에 몰락하고 만 귀족 가문의 유일한 생존자. 그들이 세월을 넘어 발길이 닿지 않는 무인도에서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그것도 세간에는 죽었노라 여겼던 귀족 가문의 그 귀한 도련님이 먼저, 가문의 원수의 혈족이 있는 섬에 발을 내딛어 직접 찾아온 것이다.
코헤이타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아니 그는 어떤 심정으로 이 섬에 온 것일까. 가문의 복수를 위해 자신의 이름을 숨기고, 성별을 숨기고, 원수에게 머리를 숙여 밑바닥에서부터 아득바득 기어올라, 그럼에도 아직도 장군의 목에 칼을 겨누지 못하는 먼 거리에 있다는 것에 복수의 정염으로 제 몸을 불태우면서, 급기야 복수를 위해 또 다른 원수의 힘을 빌리러 이 섬에 당도한, 복수라는 단 하나의 일념을 위해 자존심을 포함한 모든 것을 망설임 없이 던져버린 그는, 과연 어떤 심정이었을까.
“…뭐야. 그 녀석, 정말로 대단한 녀석이잖아.”
조금이라도 빈틈이 생기면 바로 습관처럼 자기 자랑으로 빠지며 허세 같이 줄줄 늘어놓는 미사여구들보다도, 제 3자나 다름없는 습격자가 비밀리에 입수하여 자신 앞에서 동요와 분란을 조장하기 위해 내뱉은 충격적인 고백이 코헤이타의 마음을 더욱 움직이게 만들었다. 그녀, 그의 가슴 속에 품은 감히 헤아릴 수 없는 결연함이, 진창을 구르고 복수에 미쳐있어도 잃지 않는 고결함이 코헤이타의 가슴 안에 하나의 결심을 세우게 만들었다. 습격자에게는 유감스럽게도, 그가 원하던 예상과 정 반대의 결과물이 나온 것이다.
“이제 알겠어? 그 녀석한테 계속 붙어있다가는 너도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른다고. 그러니까 순순히 손을 떼는 게….”
“아니, 그거 이제 무리야.”
“뭐?”
코헤이타는 다시 자세를 바로잡았다. 전의 의욕 없는 자세와는 달리 이번 것은 확실하게 각이 잡혀진, 각오가 깃든 제대로 된 자세였다. 나나마츠 코헤이타가 자신의 인생 전반에 걸쳐서 처음으로 그 이름에 걸맞게 취한 것이었다. 그의 생기어린 눈빛에는 그가 그녀를 만나고 처음으로 눈에 들어왔던, 반짝반짝 윤기 있게 빛나던 적갈색의 장밋빛이 서려 있었다.
“나는 그 녀석에게 반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