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로우루
가디언즈+현대 AU. 루피+로우. 사실 웨이터로 일하는 로우가 쓰고 싶었다고.
첫 만남은 둥근 달이 뜬 날 밤이었다.
평소와 같이 책을 읽은 후 잠에 들려고 했던 나는 문득 어제 도플라밍고가 외국에 나갔다가 내 생각이 나서 구입했다는 동화책이 생각나 그것을 읽기로 결정했다. 동화책을 처음 받았을 때는 더 이상 어린애 취급 하지 말라고 투덜거렸지만 외국에서의 동화책이라는 말에 혹해서 결국 받게 되었다. 영어 원문이었지만 이미 또래 아이들보다 영어를 일찍 깨우친 나로서는 그다지 어려운 문제도 아니었다. 시간 죽이기에는 충분하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책을 펼쳤다. 변덕이라고 할 수 있었다. 동화책의 이름은 가디언즈(GUARDIANS). 요정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야기는 동화책답게 단순하고 아이들의 흥미를 끌만한 신기하고 모험적인 요소로 이루어진 책이었다. 시시해. 동화책을 다 읽은 나의 첫 소감이었다. 외국의 동화책이라고 해도 수준은 똑같구나. 어쩔 수 없이 품었던 기대가 눈처럼 사르르 녹아버리던 때였다.
이제 그만 자야지. 책을 덮어 선반 위에 올려놓고 방을 비추던 작은 등을 끄고 누우려고 할 때, 등이 꺼짐으로서 그 때까지 보이지 않았던 그림자가 눈에 들어왔다. 넓은 침대를 가로지르는 긴 그림자. 처음 보는 형태의 그림자에 나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침대 옆 창문을 보았다. 창문은 어느새 열려 차가운 바람이 안으로 가볍게 들어왔다. 새하얀 커튼이 펄럭이며 마치 동화책의 삽화의 한 부분과 같은 신비한 장면을 연출했다. 푸른 후드티와 곤색 바지, 검은 머리카락과 눈 밑의 흉터. 맨발에 자신의 키보다도 긴 지팡이를 들고 창가에 선 남자는 10대 중후반으로 추정되는 인물로, 남자라는 말보다 소년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자였다. 창가에 쭈그려 앉은 소년은 시원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낯선 인물이 가택 침입을 했다 던가 그런 현실적인 이유로 놀란 것이 아니었다. 그가 입고 있는 복장, 그리고 장난끼가 잔뜩 묻어있는 미소는 조금 전까지 읽고 있던 동화책에 나오는 주인공과 꼭 닮았기 때문이다. 정말로 동화책에 사람이 튀어나올 수 있는 걸까. 하는 바보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우연찮게 소년과 나의 시선이 맞아 떨어졌다. 시선이 부딪치자 소년은 잠시 미소를 거두고 깜짝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번에는 전보다 더 활짝 미소를 만면에 띠어서 기대와 기쁨으로 가득 찬 목소리로 말했다.
“너, 내가 보여?”
보이는 게 당연하지 않는 건가? 그것보다 여기는 3층인데 어떻게 올라 온 거지? 하는 수많은 질문들이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사라졌지만 그것들을 입 밖에 내지 못하고 멍하니 소년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놀라게 되면 말문이 막힌다는 어른들의 말이 맞았다.
고개로 끄덕인 무언의 대답에 소년은 더 환히 웃으며 아예 방 안으로 들어와 순식간에 침대 옆에 도착해서는 내 작은 두 손을 맞잡았다. 너무 기쁘고 감동했다는 것이 표정에, 몸짓에 그대로 다 드러나 나보다도 더 어린아이 같아 보였다. 맞잡은 손에는 한기가 느껴졌지만 소년의 얼굴에는 열기가 느껴졌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나에게 얼굴을 들이민 소년으로 인해 내 몸이 저절로 뒤로 물러났다.
“정말로 내가 보이는 거야!? 우와! 날 볼 수 있는 인간은 정말 오랜만이야! 이시싯. 진짜 기쁘다! 있지, 네 이름은 뭐야? 난 루피라고 해. 다른 사람들은 날 ‘잭 프로스트’라고 부르는데 그냥 이름으로 불러줘.”
속사포로 말을 내뱉은 소년, 루피의 말에 나는 다시금 동화책에서 봤던 주인공을 떠올렸다. 잭 프로스트(동장군). 과연 동화책에서만 나오는 요정이 현실에서도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지금껏 이 나이 대에 어울리지 않게 현실적인 사고를 가지며 살아왔기에 충격은 더해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나 또한 지금껏 들어온 환상 속 이야기들이 실제로 일어나기를 기대했는지도 몰랐다. 이것이 꿈인지, 동화책 속에 들어온 것인지, 환상인 것인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지금은 내 이름을 듣기를 무엇보다도 간절히 원하는 이 순수하고 순진한 이방인에게 이름을 가르쳐줘야 할 것 같았다. 어… 잠시 망설이듯이 말문이 열리고 나는 더듬더듬 입술을 오물거리며 말했다.
“내 이름은….”
* * * * *
“로우.”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트라팔가 로우는 대화를 잠시 멈추고 문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문에 기대어서 로우를 부른 사람은 레스토랑의 부지배인인 나미였다. 오렌지색 웨이브 머리를 우아하게 늘어뜨리고 흑백의 유니폼을 입은 채 서 있는 나미의 모습은 활기와 고혹의 매력의 동시에 소유하고 있었다. 나미의 등장에 이제까지 로우와 진상 손님들에 대한 뒷담화로 스트레스 해소를 하고 있던 주방장인 산지가 로우보다도 먼저 나미의 목소리에 반응했다. 나미 씨! 오늘도 아름다우시네요! 고마워, 산지 군. 평소와 같이 산지의 칭찬을 능숙하게 고맙다는 립 서비스로 넘긴 나미는 원래 볼일이 있던 상대인 로우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미안하지만 시간 되면 밖에 있는 눈 좀 치워주지 않을래?”
“다른 녀석들은?”
“에이스 씨는 눈 때문에 차가 막혀서 조금 늦을 것 같다고 연락이 왔고, 코비 군은 감기 때문에 결근, 브룩 씨는 저녁에 올 예정이고, 사장님은 약속이 있어서 출타 중. 그렇다고 눈 치우는 험한 일을 나나 페로나 같은 여자들이 할 수 없는 일이잖아.”
“바로 옆에서 놀고 있는 주방장에게는 어째서 물어보지 않는 거지?”
“산지 군은 바로 지금부터 저녁 예약 되어있는 손님들을 위해 요리를 해야 하기 때문이거든. 그렇지, 산지 군.”
“네에~ 나미 씨~!”
“그러니까 로우 군, 부탁해도 되지? 아 싫으면 하지 않아도 돼. 다만 다음 달 월급에 약간의 불이익이 있을 뿐이지.”
악덕 고용주 같으니. 로우는 속으로 나미의 협박에 투덜거리면서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눈을 치우기 위해 가게 뒤쪽에 배치되어 있는 제설용 삽을 가지러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 사이 나미는 여전히 자리에서 떠나지 않고 아직도 할 말이 남은 것인지 팔짱을 끼고 로우보다도 더 불만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그나저나 이번 겨울은 왜 이렇게 눈이 많이 오는지 모르겠다니까. 에이스 씨도 그것 때문에 늦는다고 하고, 코비 군도 감기로 결근이고. 가게 앞에 눈이 잔뜩 쌓이니 치우기도 번거로운데다가 손님들이 넘어지면 가게에 불평을 한다고. 정말인지, 불평은 하늘에다가 할 것이지 왜 우리한테 하고 그러는거야!”
“자, 자. 진정해요 나미 씨. 확실히 올해 겨울은 눈이 많이 오고 있지만 이것도 다 풍류라고 생각하면 되잖아요?”
“장사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손님 다 떠나가게 해서 짜증나거든? 게다가 왠지 눈이 우리 가게 주변에만 잔뜩 내려서 더 짜증난단 말이야. 뭔가 있는 게 아닐까?”
“설마요. 그냥 기분 탓이겠죠.”
두 사람의 대화에 로우는 괜히 미안하다는 느낌이 들어 두 사람의 시선을 피한 채 잰걸음으로 두 사람에게서 멀어져갔다.
* * * * *
잠시 후, 로우는 가게 뒤에 나와 있었다. 가게 뒷문으로 나오면 곧장 골목길이 나오면서 쓰레기통과 여러 용도의 도구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종종 직원들이 여기서 담배를 피우는 일종의 간이 흡연실이라고 할 수 있는 장소에서 로우는 곧장 제설용 삽을 챙겨들지 않고 미간을 잔뜩 좁힌 채 허리에 손을 얹고 조용히 읊조렸다.
“거기에 있는 거 아니까 당장 나와. 루피.”
로우의 말이 끝나고 잠시의 정적이 흐른 후,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로우의 앞에 얼음 조각들이 작은 소용돌이를 만들더니 이윽고 공중에서 파란 후드티를 입은 소년이 사뿐히 내려와 로우의 앞에 등장하였다. 기다란 지팡이를 손에 쥔 소년은 이 추운 날씨에도 맨발로 다니며 보는 사람이 걱정될 정도로 얇은 옷을 입고 있었지만 소년은 전혀 추위를 느끼지 않는 모습이었다. 로우가 자신을 불렀다는 사실이 기쁜 것인지 미소를 지어보이는 루피였지만 로우는 평소와는 다르게 화가 난 표정으로 루피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로우가 먼저 자신을 부른 것에 반가운 것인지 루피는 지표면에 살짝 뜬 상황에서 두 팔을 쫙 벌리며 로우에게 말했다.
“트랑아! 어쩐 일이야? 여기서는 말 걸지 말라고 네가 하도 주의를 줘서 가만히 있었는데!”
“나는 말을 걸지 말라는 말 이외에도 가만히 있으라는 말도 했을 텐데.”
“응?”
“응? 이 아니잖아. 요즘 들어서 우리 가게 주변에만 눈이 많이 오는데 그거 네 짓이냐.”
“아.”
로우의 날카로운 추궁에 루피는 말문이 막힌 듯 조금 전의 물 흐르듯이 재잘대던 입이 꾹 다물어지면서 어색하게 시선을 돌리며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 그 어설픈 모습에 로우는 자신의 말이 맞다고 생각하며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짚었다. 한동안 잠잠하다 싶었더니 또 이런 식으로 장난을 치는 루피의 모습이 익숙해질 때도 되었는데도 아직도 이렇게 곤혹스러워 하는 자신이 이제는 한심할 지경이었다. 하아. 새하얀 입김과 함께 큰 소리로 나온 로우의 한숨을 들은 루피는 혹여나 로우에게 밉보일까봐 걱정된 루피는 로우의 주변을 배회하며 애써 자신의 행동에 대해 변명했다.
“하, 하지만 로우가 여기에 있을 때는 나하고 안 놀아주고 말도 안 걸어줘서 얼마나 심심하다고. 그래서 나도 모르게….”
“눈이 많이 내리면 여기 찾아오는 손님들이 곤란해 한다고. 게다가 우리 직원 중 한 명도 감기에 걸렸고 말이야.”
“으… 그건 미안해. 그래도… 로우가 없으면 심심하고… 외로운걸.”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인 루피의 모습은 딱 봐도 깊이 반성하고 미안해하는 모습이라 오히려 단단히 혼을 내려고 찾아온 로우가 미안한 감정이 들 정도였다. 오죽하겠는가. 루피에게 있어서 로우는 처음으로 자신을 봐준 유일한 인간이었으며 로우에게도 지금까지 신기할 정도로 자신의 눈에만 보이며 유년시절부터 함께 지내온 비밀스러운 친구였다. 누구보다도 순수하고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루피의 모습에 로우도 많은 위안을 받아왔다. 그러나 종종 이렇게 겨울철이 되면 로우의 주변에 눈을 많이 내리게 해서 곤란하게 만든 적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루피에게 따끔히 혼내려고 애쓰는 로우였지만 늘 루피의 풀 죽은 모습을 보면 벌써부터 마음이 약해지고 만다. 아마 자신은 앞으로도 계속 루피에게 진심으로 화를 낼 수 없을 것이다.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로우는 다시금 약해지는 자신의 모습에 다시금 한숨이 나왔다. 그 한숨이 또 로우가 자신에게 화가 났다는 것으로 생각한 루피가 더욱 더 고개를 푹 숙이고 말자 로우는 이제는 훤히 보이는 루피의 뒷통수를 물끄러미 보다가 이내 픽 하고 웃어버리고는 자신의 커다란 손으로 루피의 후드를 쓴 뒷통수를 쓰다듬어주었다. 쓱쓱 쓰다듬는 로우의 손길에 루피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지만 이미 로우의 손은 루피를 떠나있었다. 어느새 몸을 돌려 제설용 삽을 챙기는 로우는 루피에게 말했다.
“일 끝나면 상대해줄 테니까 조용히 기다리고 있어. 다음에 또 눈을 많이 내리게 하면 그 때는 정말로 혼낼 테니까.”
자신을 용서한다는 의미가 들어간 로우의 말에 루피는 언제 풀죽었냐는 듯 다시 평소와 같이 환히 웃으며 트랑아, 고마워! 하며 그대로 로우의 허리를 향해 자신의 몸을 날렸다. 갑작스런 루피의 어택에 로우는 윽! 하는 소리를 내며 루피의 돌진을 그대로 받아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