솜털과도 같은 흰 거품이 얼굴의 밑 부분을 뒤덮었다. 입 안에 약간 스며든 거품의 맛은 솜사탕을 닮은 생김새에 비해 혀를 찌릿할 정도로 썼다. 입을 벌려 함부로 혀를 내보일 수 없기에 입 안에서 침으로 쓴맛을 덮어냈다. 잠시 다른 곳에 신경을 둔 사이, 상대가 바로 코앞까지 다가왔다. 남자와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할 때는 키스할 때를 제외하고는 드물었기에 제법 생소했다. 그러나 아무리 남자의 얼굴과 가까워져도 그의 눈은 선글라스의 검은 장막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남자의 손에는 그의 덩치와는 어울리지 않는 작은 면도기가 쥐어져 있었다. 면도기를 보자 그것이 남자가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첫 경험을 위해 사놓은 것인지 궁금해졌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지만 굳이 고르자면 전자가 좋다. 남자의 피부에 스쳐 지나갈 칼날이 자신의 피부에도 스쳐 지나간다면 그 이상의 과분함은 없을 것이다.
고개를 들어라, 로우.
남자의 명령이 내려왔다. 명령조로 말하지 말라고 그렇게 부탁했거늘. 속으로 투덜거리며 순순히 남자의 말대로 고개를 살짝 들어올렸다. 착한 아이구나. 고개를 들자 바로 보이게 되는 남자의 미소가 그렇게 칭찬해주고 있었다. 이제 자신은 어린아이가 아닌데. 어린아이라고 하기 에는 이제 덩치도 어느 정도 커졌고, 목소리도 굵어졌으며, 성인 남성의 증표라고 할 수 있는 수염도 나게 되었다. 그러나 남자에게는 자신이 아무리 어른으로서의 2차 성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고 해도 여전히 작은 어린애에 불과한 모양이었다. 지금도 자신이 남자에게 첫 면도를 가르쳐 달라고 부탁하는 입장이니 당연한 것일까. 남자는 면도기를 든 손을 들어올렸다.
움직이지 마라.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에는 걱정이 일부 담겨있는 것 같았다. 혹여나 자신을 걱정하는 것일까 하는 기대가 불쑥 솟아났다.
작고 서늘한 칼날이 거품에 닿았다. 거품이 일종의 보호막 역할을 해주어서 그런지 실제로 칼날이 닿는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내심 섭섭한 기분이 들었다. 남자의 손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각거리는 소리가 남자의 손을 타고 들려왔다. 짧고 굵은 수염이 깎여나가는 소리였다. 의외로 경쾌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수염과 함께 얼굴을 덮은 거품들도 깎여 나가면서 조금씩 살이 드러나게 되었다.
아아, 그러고 보니 오랜만이다. 남자가 자신의 피부에 칼을 댄 것은. 그것도 이렇게 가까이서, 얼굴에 직접적으로 칼날을 맞대고 있었다. 그리고 칼날이 지나갈 때마다 피부가 무방비하게 노출되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오싹거리는 고양감이 용암처럼 끓어올랐다. 남자가 조금이라도 다른 마음을 먹는다면 작은 면도날을 아래로 내려 목의 경동맥을 잘라버릴 수 있다. 고작 이 날붙이 하나로 속살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면서 그 아래서 미약한 생명의 끈 하나가 떨리고 있었다. 남자도 그것을 눈치 챈 것인지 인내심으로 자신의 충동을 억누르기 위해 혀를 내밀어 마른 입술을 축였다. 아아. 이건 이것 나름대로의 쾌락이 될지도. 직접적으로 칼날을 세우는 것보다도 더 긴장감과 충동을 두드리고 있었다. 이 면도날처럼, 우리는 단 한 치의 오차로 쾌락에서 죽음으로 추락할 수 있다. 우리의 관계는 저 작은 날붙이로도 충분히 끊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이 남자의 곁에 계속 머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면도는 거의 끝나있었다. 남은 것은 약간의 거품과 멋들어지게 다듬어진 턱수염뿐이었다. 임무를 마친 면도기가 서서히 멀어졌다. 아쉬운 감정이 불시에 찾아오면서 채워지지 않은 갈증이 들끓었다.
메마름을 채우기 위해, 잠시간의 긴장을 추스르기 위해 나와 남자는 곧바로 잡아먹을 듯이 서로의 입을 맞추었다. 그와 함께 면도기가 남자의 손에 떨어져 나와 바닥에 굴렀다. 오늘 밤은 평소와 달리 조금 더 길어질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