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에이스와 사진작가 로우. 3부작 중 1부.
3부작 중 1부작이라는 말을 보면 후속편이 있다는 말처럼 들리지만 언제 나올지는 모릅니다./도망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어느 한 시인이 ‘아드리아 해의 진주’라는 찬사를 남길 정도로 지중해와 연결되어 있는 작은 바다 아드리해의 아름다움을 한껏 담아내고 있는 크로아티아의 작은 도시에는 그 명성을 익히 들어 정말로 그만한 아름다움을 담고 있는지 제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가득했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과 그 하늘에 맞닿아 있는 에메랄드빛의 바다, 동화 속에 나올 법한 붉은색과 하얀색의 벽돌로 지어진 집들은 화려하면서도 꾸밈이 없으며, 사람들의 웃음이 가득하면서도 잔잔하며 차분한 분위기를 공존하고 있었다. 이 도시에 ‘아드리아 해의 진주’라는 찬사를 남긴 시인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정말인지 절묘하면서도 시적인 명칭을 남겼다며 두 손 붙잡고 칭찬하고 싶었다.
그만큼 포트거스 D. 에이스의 눈에 들어오는 두브로브니크의 절경은 그의 가슴에 벅찰 정도로 만족스럽고 아름다운 것이었다. 역시 오기를 잘했어. 손으로 눈 위에 그늘을 만들어 높은 곳에서 마을의 전경을 내려다보는 에이스는 벅찬 감동을 끌어안고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선택을 자랑스러워했다.
노을색 사진
W. 아르카디
포트거스 D. 에이스가 이 머나먼 크로아티아까지 홀로 배낭여행을 온 것은 특별히 거창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저 자신도 이제 20대가 되었으니 더 많은 세상을 보고 싶다는 동경과 주변에서 들려오는 배낭 여행기를 들으면서 자신만의 여행을 다녀보고 싶다는 낭만이 있었기에 배낭여행을 기획하게 된 것이었다. 첫 배낭여행의 장소를 크로아티아로 정한 것은 이미 한 번 그곳에 다녀온 친구가 처음에는 관광 차 가볍게 다녀오는 것이 좋다면서 연습 코스로 추천해주는 나라였기 때문이다. 처음 에이스는 배낭여행하면 당연히 떠올리는 프랑스, 영국, 오스트리아 같은 유럽의 주요 국가들을 떠올렸기에 친구의 추천이 당혹스러웠지만 그 말대로 처음이니 조용한 나라에서 경험을 쌓고 그 뒤에 다른 나라를 가도 늦지는 않겠다고 생각하여 받아들이게 되었다.
사실 혼자 올 생각은 없었다. 처음이다 보니 혼자서 낯선 이국에 가는 것은 아무리 에이스 자신이라고 해도 부담이 어느 정도 되었기에 사보에게 같이 가자고 청했고, 사보 또한 에이스의 부탁을 흔쾌히 받아들였지만 여행을 떠나기 며칠 전, 사보가 돌연 집안 사정으로 배낭여행을 못 가게 되었다고 통보를 보냈다. 갑작스런 약속 취소에 에이스는 화나고 어이가 없었지만 전화로 몇 번, 직접 만나서도 몇 번, 심지어 배낭여행을 떠날 때도 미안하다며 두 손을 싹싹 빌며 용서를 구하는 사보의 모습에 에이스도 화를 내지 못하고 결국 체념하듯이 혼자만의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그래, 영어도 어느 정도 되는데다가 누군가에게 주먹으로 당하는 일은 지금까지 없었으니 무슨 일 있겠어.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자고 다짐하며 에이스는 크로아티아 행 비행기에 몸을 싣게 되었다.
그리고 어제, 크로아티아에 도착하여 가장 먼저 두브로브니크에 당도하게 된 에이스는 크로아티아에 오길 잘했다며 몇 번이고 기쁜 기색을 진정시키지 못했다. 아아, 사보도 여기에 왔으면 좋았을 텐데. 같이 오지 못한 친구에 대한 원망은 썰물처럼 물러나게 되고 그 대신 이 멋진 풍경을 함께 보지 못하게 된 친구에 대한 아쉬움이 밀물처럼 몰려왔다. 대신이라고 하기 에는 그렇지만 사보의 몫까지 더 많은 것을 보면서 사진으로 간접적으로나마 감동을 전달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 에이스는 미리 챙겨온 디지털 카메라로 가는 곳마다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그처럼 다른 관광객들도 서두르듯이 카메라의 셔터 단추를 눌러댔다. 조금이라도 더 많이 이 풍경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다. 사람들이 사진을 찍을 때마다 그러한 바람들이 한 조각씩 담겨 들어간다.
정신없이 사진을 찍다보니 어느새 마을에서 나와 해안가를 걷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에이스는 잠시 사진 찍는 것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에이스가 있는 해안가는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곳인지 인적이 드물었으며 뒤를 돌아보니 저 멀리 붉은 지붕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런, 조심해야지. 에이스는 마을 위치를 확인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런 곳에서 길을 잃으면 제대로 도움을 청할 수 없기에 항상 정신을 바짝 차리며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인지해야만 한다. 에이스는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하였다. 오후 4시. 조금 있으면 해가 저물 시간이다. 날이 어두워질 때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장소를 돌아다니는 것은 위험할 수 있으며 이제 슬슬 미리 예약해 놓은 숙소로 가봐야 했다. 그만 사람들이 있는 마을로 돌아갈까 생각하던 에이스는 문득 눈앞에 펼쳐진 해안가가 눈에 들어왔다. 서쪽으로 서서히 기울어지는 진홍빛 태양을 중심으로 하늘과 바다가 물들어지고 있었다. 물감을 풀어놓은 것처럼 퍼져나가는 노을색은 창공의 하늘색과 바다의 청록색과 섞여져 오묘한 빛깔을 자아내고 있었다. 새하얀 파도가 감히 인간이 흉내 내지 못할 자연의 빛을 싣고 부서지게 된다. 쏴아아. 철썩. 청명하게 바위를 두드리는 파도 소리는 그 풍경에 어울리는 맑은 음색을 지니고 있었다. 태어나서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은 처음 본다. 에이스는 이전보다도 더 샘솟아 오르는 감동에 눈을 반짝이며 그대로 아드리아 해의 노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근사하다. 에이스는 넋이 나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근사하다는 말이 턱없이 부족할 정도의 진경이었지만 자신이 지금 떠올릴 수 있는 표현력은 이정도가 한계였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과연 이 풍경을 그대로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이 세상에 존재할지 의문이 들었다. 여신의 드레스를 펼쳐놓은 것처럼 부드럽게 넘실거리는 바다의 물살을 감상하던 에이스는 화들짝 정신이 든 사람처럼 몸을 움찔거리더니 손에 들고 있던 디지털 카메라를 허둥지둥 들어올렸다. 이런 풍경이야 말로 나중에 일본에 가서 사보와 루피에게 보여줘야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을 위한 의무감으로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려던 때였다.
찰칵.
생생히 전해지는 카메라의 셔터 소리. 아드리아 해의 풍경과는 어울리면서도 낯선 기계음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에이스의 디지털 카메라의 셔터 소리가 아니었다. 낯선 소리에 에이스는 사진을 찍으려던 것을 잠시 멈추고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에이스가 서 있는 자리에서 몇 미터,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에이스와 마찬가지로 바다의 석양을 지켜보고 있는 인물의 손에는 조금 전 에이스가 들었던 셔터 소리의 근원지인 카메라가 쥐여져 있었다. 에이스가 쥐고 있는 디지털 카메라는 그의 한 손에 쏙 들어갈 정도로 작고 무게도 부담 없이 가벼웠으나 남자의 카메라는 겉보기에도 무게와 크기가 디지털 카메라의 약 2배 정도는 되어보였다. 에이스는 카메라에서 시선을 돌려 이번에는 남자의 전체적인 모습을 살펴보았다. 노을을 바라보고 서 있는 남자는 대부분이 노을의 빛에 깊게 물들여져 있었다. 옅은 물빛 청바지와 검은 재킷을 가볍게 걸친 남자의 몸매는 눈대중으로 살펴봐도 균형 잡히면서도 가늘고 적당히 근육이 붙어 길거리에 걸어 다니면 모델 제안을 받지 않을까 생각할 정도로 훌륭하다고 할 수 있었다. 에이스는 시선을 점점 위로 올려 드디어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하얀 바탕에 검은 얼룩이 그려진 털모자를 깊게 눌러 쓴 탓에 관찰하기 힘들었지만 시력이 남들보다 좋은 에이스의 눈에는 들어올 수 있었다. 모자로 드리워진 작은 그늘 아래서 석양을 바라보는 남자의 옆모습은 붉은 빛이 섞여 들어간 주홍색으로 칠해져 따스하고 안정적인 낯빛으로 완성시켜 주었다. 에이스는 저 멀리 펼쳐진 경관을 잊은 채 남자의 얼굴을 멍하니 보았다. 온갖 미사여구를 쓸 정도로 대단한 미모를 지녔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충분히 세간에서 작용하는 ‘미’의 기준에 합격점을 받을 수 있는 남자의 외모는 사람들의 시선을 주목하게 만드는 기이한 매력이 있었다. 단순하면서도 강하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이끌려 지듯이. 정신을 차려보면 오로지 한 곳만을 바라보게 만드는 미혹이었다.
동쪽에서 서서히 드리워지는 쪽빛의 옅은 장막과 서쪽에서 바다에 잠겨가는 태양을 중심으로 지평선에 넓게 퍼지는 노을의 다홍빛. 그리고 두 가지 색의 경계에 서 있는 남자. 이 모든 것이 자연이 만들어 낸 경관이며 그것을 자신이 보고 있다는 것에 에이스는 과연 이것을 자신 같은 인물이 봐도 되는 것인지에 대한 과분함을 느꼈다.
그 때, 에이스의 시선을 느낀 것인지 남자는 경관을 보는 것을 중단하고 고개를 옆으로 돌려 에이스의 시선에 자신의 시선을 맞추었다. 노을의 온기와는 대조적으로 건조하고 적당히 식은 남자의 옅은 청색 눈동자에 에이스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화들짝 놀란 반응을 보여주었다. 하마터면 들고 있던 디지털 카메라를 땅에 추락시킬 뻔 한 에이스는 놀란 나머지 우왓 하고 야단스럽게 카메라를 쥔 손을 바로잡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다시 남자를 살며시 보자 그는 에이스를 낯선 이에 대한 경계와 의문, 그리고 이전부터 에이스의 시선을 느낀 것인지 자신을 계속 쳐다본 것에 대한 불쾌함이 섞인 시선으로 살펴보고 있었다. 에이스는 남자의 시선에 자신이 남을 너무 오래 쳐다본, 예의 없는 짓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자각하고는 민망함에 얼굴을 살짝 붉히고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나름대로 예의를 지키며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자신이었기에 조금 전까지 벌인 무례함이 어떤 것인지 잘 알 수 있었다. 어떡하지. 화난 건가. 에이스는 재빨리 남자의 기분을 짐작하며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계산했다. 그 와중에도 남자의 눈동자 색이 지금도 환하게 빛나고 있는 노을색과 닮은 금색이라는 감상을 하는 자신을 속으로 야단치면서.
일단 자신이 먼저 나서서 사과하자. 그렇게 결론을 내린 에이스는 고개를 들어 다시 시선을 남자에게 맞추고 흠흠 기침소리로 긴장을 푼 다음 머쓱한 얼굴로 뒷목을 잡으며 말했다.
“아, 죄송합니다. 계속 쳐다봐서… 혹시, 기분 나쁘셨나요?”
“…딱히 기분이 나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좋은 건 아니군. 계속 시선이 느껴져서 불편하던 차였거든.”
“하, 하하… 죄송합니다.”
괜찮다는 말 대신 자신이 에이스의 시선으로 느낀 기분을 그대로 전달하는 남자의 말에 에이스는 다시금 얼굴이 붉어지면서 재차 사과의 인사를 언급했다. 남자는 에이스의 두 번째 사과에 잠시 그의 기색을 살펴보더니 이내 시선을 카메라로 전환시켜 몇 번 만지작거리더니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과를 받으려고 그렇게 말한 건 아니니 신경 쓰지 마. 하지만 이런 타국에서 외국인을 빤히 쳐다보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 행동이니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누구나 과도한 시선을 받으면 좋지 않게 생각하니까.”
“아, 충고 감사합니다. 명심할게요.”
확실히 모르는 외국인이 자신을 관찰하듯이 쳐다보면 기분 나쁠 수도 있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에이스는 남자의 말로 다시금 명심하며 자신의 부주의를 반성했다. 크게 화를 내지 않고 충고까지 곁들인 것을 보면 품성은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에이스는 짧은 남자의 대화로 그의 인성을 조금이나마 짐작해보았다. 좋은 사람이네. 에이스는 금방 남자에 대한 호감도를 높였다. 단편적인 대화만으로 상대의 전부를 알 수 없었지만 제법 믿을 법한 자신의 촉이 좋은 인물이라고 알려주고 있었다. 계기가 좀 안 좋았지만 모처럼 대화가 성립 되었으니 이 기세로 좀 더 대화를 시도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에이스는 용기를 내어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갔다.
“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 여행 중이신가요?”
“뭐, 그렇지. 그쪽이야말로 행색을 보아하니 배낭여행 중인 것 같은데 말이야.”
“아, 네. 배낭여행은 처음이라 이래저래 서투른 부분이 많네요. 친구가 추천해줘서 한 번 와봤는데 좋은 곳이더라고요.”
“확실히 크로아티아는 조용한 편이지. 여기 경치도 소재로 괜찮은 편이고.”
“소재?”
대화에서 낯선 뜻의 단어가 들리자 에이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으나 남자는 자신이 나서서 ‘소재’라는 의미를 설명해줄 생각이 없는 것인지 대화는 거기서 끊어지고 말았다. 다시금 입을 다문 채 경치를 잠시 보다가 재차 사진을 찍기 위해 카메라의 렌즈를 이리저리 돌리며 초점을 맞추는 남자의 모습에 에이스는 다시금 말을 걸고 싶지만 남자의 일을 방해할 수 없을뿐더러 이번에는 어떤 소재로 대화를 이끌어가야 할지 몰랐기에 그저 남자의 행동을 멍하니 지켜볼 뿐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에이스의 눈길에 남자가 쥔 카메라가 눈에 들어왔다. 제법 가격이 나가 보이는 카메라였지만 카메라에 대해 단순히 사진 찍는 기계 이외의 흥미가 없던 에이스로서는 카메라의 기종이 어떤 것인지, 얼마 정도의 가치가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찰칵. 다소간의 조정 끝에 카메라의 셔터 소리가 들리고 남자는 다시 카메라를 원위치로 내려놓았다. 지금이 기회였다. 에이스는 방금 막 떠오른 소재로 대화를 재기하기 위해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남자의 카메라를 가리키며 물어보았다.
“카메라가 꽤 좋아 보이네요.”
“캐논 EOS-1Ds Mark III. 캐논 카메라들 중에서는 그나마 좀 나은 편이지.”
“가격이 좀 나가 보이는 것 같은데….”
“최소 3백 이상, 최대 천만 가까이니 그렇게 보일만 하지.”
“사, 삼백…!?”
예상을 훌쩍 뛰어넘은 카메라의 충격적인 가격에 에이스는 입이 떡 벌어진 채 남자의 손에 든 카메라를 이전과는 다른 시선으로 보았다. 삼백이라니. 내 대학 한 학기 등록금이네. 남자의 말을 듣고 본 카메라의 모습은 적어도 에이스의 눈에는 삼백만원 이상의 가치를 가진 금덩어리 그 자체로만 보였다. 에이스의 반응을 이미 예측한 것인지, 이런 반응을 많이 봐온 것인지 남자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숙소에 가면 비슷한 가격의 녀석들도 있어. 기술도 중요하지만 카메라도 어느 정도 받쳐줘야 한다고 생각하거든. 내 직업적 의식으로는.”
“어, 직업이라면….”
“사진작가. 그렇게 유명한 건 아니지만.”
아, 사진작가였구나. 남자의 직업에 에이스는 어째서 그가 그만한 값어치의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여전히 카메라의 가격에는 평범한 대학생으로서 납득할 수 없는 문제였지만. 에이스는 그제야 남자의 반대쪽 옆에 놓여 진 커다랗고 새하얀 가방을 발견할 수 있었다. TV에서 종종 사진작가들이 들고 다니던 가방과 비슷해 보였다. 여기에 사진을 찍고 있었던 건 단순히 기념용 사진을 찍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사진작가로서 작품을 남기기 위해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 에이스와의 대화가 끝나자 남자는 세 번째로 사진을 찍을 준비를 했다. 에이스는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고개를 돌려 남자가 사진으로 남길 풍경을 바라보았다. 아드리아의 경치는 조금 전과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겉으로는 달라질만한 요소를 찾기 힘들겠지만 석양은 좀 더 붉게 변하였고 그에 따라 바다와 하늘도 지평선을 경계에 두고 석양의 빛을 짙게 담아내고 있었다. 아찔할 정도의 진홍빛에 에이스는 다시금 감탄했다. 그리고 남자를 보았다. 입을 꾹 다문 채 카메라에 집중하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 사람이 자아낼 사진 속 풍경은 과연 어떤 것일까. 분명 실물의 아름다움을 최대한 자연스럽게 끌어낸 사진이 탄생할 것이다. 이제 막 만나 방금 직업을 알아내고 그의 작품을 한 장도 보지 못했지만 에이스는 그런 확신이 들었다. 분명 아름다울 거야. 어쩌면 실물보다도 더. 감히 저 자연의 경관과 저울질을 하며 단순히 인간이 기계를 통해 그려낸 사진을 높이 평가하는 것은 충분히 어리석은 일이었지만 그래도 에이스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찰칵. 세 번째 듣게 되는 셔터 소리가 울렸다. 다시 카메라를 내려 작품을 검토하는 남자에게 에이스는 혹여나 방해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 말을 거는 것이 망설여졌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대화를 하고 싶다. 자신도 모르는 초조함을 느끼며 안절부절 하는 에이스를 눈치 챈 로우가 흘긋 그를 보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다시 사진으로 시선을 원위치 시키고 이번에는 자신이 에이스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나한테 뭐 할 말이라도 있나?”
“네? 아 그게… 저, 혹시 제가 말을 거는 게 방해 되는 건 아니죠?”
“옆에서 뭐 마려운 듯이 안절부절 하는 게 더 신경 쓰이니까 말할 게 있으면 확실히 해. 지금은 딱히 방해 되는 건 아니니까.”
읏. 남자의 지적에 에이스는 민망한 기색을 채 숨기지 못하고 신음소리를 내고 말았다. 아직 어리네. 즉각적으로 드러나는 에이스의 반응에 남자는 그렇게 생각했다. 어른스러워 보이면서도 드문드문 어린애와 같은 미숙함이 드러난다. 에이스는 남자의 말에 자신의 속내를 들킨 것 같아 얼굴을 가리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허락도 받았겠다, 그냥 남자의 말은 못 들은 것으로 하고 대화를 진행하는 것이 낫겠다 싶어 흠흠 거리며 목을 가다듬고는 화제를 전환했다.
“아까부터 계속 여기의 풍경을 계속 찍으시는데 혹시 무슨 이유라도 있나요?”
“딱히 이유는 없어. 다만 여기가 노을이 가장 잘 보이는 곳이기도 하고, 지금은 기다리고 있는 중이거든.”
“기다리다니, 뭘요?”
“조금 있으면 알게 돼.”
그렇게 말한 후 남자는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며 앞으로 3분, 이라고 중얼거리고는 카메라 렌즈를 미세한 손놀림으로 조정해나갔다. 무엇을 기다린다는 것일까. 남자의 말을 전부 이해하지 못한 에이스의 머릿속에는 온통 물음표로 가득 차게 되었다. 다시금 남자에게 의미를 물어보고 싶었지만 남자는 다시금 작업에 들어갈 것인지 이전보다 조금 더 분주한 손놀림을 하고 있었기에 에이스는 이번에 말을 걸면 확실하게 방해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결국 남자와 함께 무언가를 기다려보기로 했다. 그러면 남자가 무엇을 바라게 되는 지 알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정확히 3분 후, 남자는 카메라를 들어 올려 지금, 이라고 속삭였다. 남자의 속삭임을 놓치지 않고 들은 에이스는 고개를 돌려 아드리아 해의 노을을 보았다.
그것은 이전과 다른 풍경으로 변하고 있었다.
수평선에 거의 가라앉은 노을은 마지막으로 자신의 모든 빛을 쏟아내어 그 어떠한 붉은색보다도 강렬한 열기가 느껴지는 생동감 있는 빛을 내뿜고 있었고 그렇게 뻗어나가는 빛은 구름과 하늘에 파스텔처럼 아스라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하늘에 떠있는 구름은 석양빛을 드리워 빛이 좀 더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퍼져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며 최고의 연출을 보여주고 있었다. 동쪽에서 찾아온 밤의 장막에는 작고 새하얗게 빛나는 별빛들이 정성스레 수놓아져 있었으며 남빛의 또 다른 하늘은 자신과 대조적인 노을색에도 쉽게 어울려들고 있었다. 당연하다는 듯이 두 가지, 아니 그 이상의 여러 색들이 공존하고 있는 하늘은 미의 여신이 자신의 실력을 한껏 발휘해서 베틀로 짜낸 비단과 같이 경탄이 저절로 나올 수밖에 없는 고운 빛깔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 더해 아드리아 해는 수평선조차 그 경계를 잃고 사라져 하늘을 비추며 그들과 동화되었다. 아아. 이것이 신의 역작이 아니라면 무엇이 그에 필적할 수 있겠는가. 한낱 피조물인 인간은 감히 흉내 내지 못할 절경에 전율하며 바라보던 에이스는 이것이 바로 남자가 그토록 기다리던 것이라는 걸 금방 알아차리고 이 풍경을 볼 수 있게 해준 것에 대한 감사를 표하기 위해 고개를 돌려 남자를 보았다. 찰칵. 셔터 소리가 들리고 남자는 카메라를 내려 조금 전의 에이스와 마찬가지로 풍경을 보았다.
미소.
그것은 지금 눈앞에서 펼쳐진 경관과 닮은 것이었다. 희미하게, 그러나 분명히 떠오른 남자의 미소. 아름답고 가느다란 곡선을 입술에 그리고 눈꼬리는 부드럽게 휘어지며 눈앞에 놓여 진 경관을 두 눈동자에 한껏 담아내며 미에 대한 찬사를 대신하고 있었다. 아아. 이것을, 무어라 설명하면 좋을까. 이렇게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것은 처음이었다. 옅게 퍼져나가는 미소는 손을 뻗으면 곧바로 사라질 것 같은 위태로움이 기반이 되었으며 그렇기에 소중하고 애착이 가게 되었다. 저기 한 순간에 펼쳐지게 된, 기적과도 같은 한 폭의 풍경과 같이 그 미소 또한 한 순간에 떠오른 것처럼 소중하고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 있는 것이었다.
에이스는 가슴에 손을 얹고 옷을 말아 쥐었다. 이것은 무엇일까.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벅차오르는 감동과, 처음 느껴보는 생소한 감정은 무엇일까. 이것 또한 저 풍경을 만들어낸 신의 조화라는 것일까. 그렇다면 자신은 얼마나 많은 축복과 기적을 경험하고 있는 것일까. 남자는 미소를 간직한 채 천천히 에이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미소가 자신을 향해 바라본다. 심장이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뛰었다. 영원히 그 미소를 보고 싶었다. 모든 것을 잊고 시간이 이대로 멈춰져서 사라지지 않고 영구히 보존하고 싶었다. 그러나 에이스의 바람과는 달리 하늘색에 물들어진 남자의 미소가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아드리아 해에 완전히 잠겨버린 석양과 같이 남자의 미소도 자연스럽게, 한 밤의 꿈과도 같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아스라이 흩어지고 말았다.
남자의 얼굴에는 더 이상 미소가 존재하지 않고 이전과 같은 무뚝뚝한 인상만이 남게 되었다. 남자는 가슴에 손을 말아 쥔 채 멍하니 서 있는 에이스의 모습을 이상하다는 듯이 보고는 눈썹을 위로 올려 말했다.
“뭐해?”
“…에, 네?”
“이제 날도 저물었으니 돌아가야지. 아직 빛이 남아있을 때 시내로 돌아가는 게 좋아.”
그 말대로 이제 해는 거의 다 저물어 빛의 흔적만이 산산이 부서지며 밤하늘에 별들과 같이 뿌려져 있었다. 주섬주섬 짐을 챙기는 남자의 모습에 에이스는 가슴에 올린 손을 내리고 아직도 꿈에서 헤어나지 못한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다가 깜짝 정신을 차리고는 다급하게 남자에게 외쳤다.
“저, 저기! 호, 혹시… 그게….”
“? 뭔데?”
“시, 실례가 안 된다면… 묵고 계신 곳이 어딘지, 물어봐도 될까요?"
에이스의 질문에 처음으로 남자가 놀란 기색을 보이다가 잠시 에이스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에이스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푹 숙인 채 남자의 대답을 기다렸다. 마치 사형 선고를 기다리는 죄수가 된 것 같이 온 몸이 조여드는 감각을 느끼게 되었다. 제발. 부탁이야. 이대로 남자와 헤어져 다시 만나지 못하게 되는 것은 싫었다. 서로 여행을 떠나 타국에서 우연히 만난 사이. 너무나도 가늘고 얕은 인연은 여기서 아무런 연고 없이 헤어지면 금방 사라질 정도로 연약했다. 싫다. 싫어. 이대로 헤어지는 것은 싫다. 다시는 만나지 못하든 것도 싫다. 좀 더 만나보고, 알아가며, 대화를 나누며 인연을 만들어가고 싶었다. 이 사람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많은 것을 알고 싶다. 절박한 심정으로 애원하는 에이스는 두 손에 주먹을 불끈 쥐고 남자의 대답을 기다렸다.
잠시 후, 남자는 마침내 대답을 정한 것인지 자신보다 키가 조금 작은 에이스를 살짝 내려다보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만난 지 얼마 안 된 사이인데 함부로 숙소를 가르쳐줄 수 없어. 남이 내 숙소에 함부로 찾아오는 것도 별로 안 좋아하고.”
“아… 그렇군요.”
역시. 에이스는 크게 실망한 표정으로 전보다도 고개를 푹 숙였다. 남자에게 자신의 감정을 최대한 숨기고자 하는 노력이었지만 충분히 남자의 말에 실망했다는 것이 눈에 훤히 보였다. 아직 내 말 안 끝났어. 이대로 포기해야하나 싶었던 에이스의 머리 위로 남자의 말이 이어오자 에이스는 에? 하는 소리를 내며 다시 고개를 살짝 들어올렸다.
“두브로브니크에 ‘로자리오’라는 유명한 식당이 있지. 음식도 괜찮은 편이야. 어디 있는지는 알아?”
“아, 네. 위치는 대강….”
“내일 아침 8시에 거기서 만나자고. 대신, 아침은 그쪽이 사는 걸로 해서.”
남자의 제안에 에이스는 잠시 그 의미를 파악하지 못해 멍하니 서 있다가 이윽고 한 박자 늦게 의미를 파악하고는 아 하고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철썩이는 파도 소리가 부서지며 밤하늘을 끌어당기며 밀려왔다 사라지고 있었다. 짐을 전부 챙겨든 남자는 에이스보다 한발 먼저 시내에 도착하기 위해 그를 지나쳐 해안가를 따라 걸어 내려갔다.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남자의 기척은 서서히 남빛으로 번져나가는 파도와 같이 찰나와 같이 느껴졌다. 아련히 바다의 잔향이 풍겨져 왔다. 아차. 에이스는 그제야 자신이 가장 먼저 물어봤어야 했던, 남자를 만나고 처음으로 물어봤어야 했던 질문을 마지막에야 떠올리고 몸을 돌려 멀어져가는 남자가 들릴 정도로 크게 외쳐 물었다.
“저, 깜빡하고 물어보지 못했는데, 성함이 어떻게 되 시나요!”
에이스의 부름에 남자의 또각 소리가 나는 발걸음이 딱 멈추었다. 그리고는 한 발을 주축으로 가볍게 빙글 몸을 돌려 경사 상 자신보다 조금 위에 서 있는 에이스를 올려다보았다. 어쩐지 시선이 그걸 이제야 물어보는 건가. 하는 한심하다는 시선 같아서 에이스는 몇 번째인가의 붉은 석양과 비슷한 채도의 다홍빛을 얼굴에 칠했다. 해는 이제 완전히 아드리아 해에 잠겨 모습을 감추게 되었으나 아직 지평선 자락에는 붉은 보석과도 같은 빛의 조각들이 바다에 뿌려져 아직 떠오르지 않은 달을 대신해서 빛을 선사해주고 있었다. 모자 아래에 있는 금빛 눈동자는 저 노을의 조각과 같은 색을 지니고 있었다.
넘실거리는 물결 소리가 잠시 공백을 채워준 후, 남자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이내 덤덤하게 자신의 이름을 상대에게 고했다.
“트라팔가 로우.”
트라팔가 로우. 그것이 남자의 이름이었다.
트라팔가 로우. 로우 씨. 드디어 알게 된 남자의 이름은 지중해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오래된 보물을 발견한 것과 같은 쾌감을 안겨주었다. 에이스는 속으로 남자의 이름을 몇 번이나 되새기며 의미를 음미하고는 보답으로 그에게 잘 어울리는 미소와 이름을 가르쳐주었다.
“저는 포트거스 D. 에이스라고 합니다.”
역시 오기를 잘했어. 여전히 아름다움을 유지하며 찬란히 빛나고 있는 아드리아 해를 배경으로 에이스는 전보다 더 짙은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들을 줄곧 바라보고 있던 바다도 두 사람의 만남을 축복해주겠다는 듯이 어머니의 자애로운 미소가 연상되는 물결을 그려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