잭 더 리퍼 ver. 로우+지킬 앤 하이드 ver. 캐번디시. 734화 스포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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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런던의 겨울은 특히나 추위가 칼 같이 차갑고 날카로우며 섬뜩했다.
런던의 겨울은 다른 곳보다도 기온이 낮다고 할 수 있지만 올해의 겨울은 다른 때보다도 특별했다. 살인마. 그것이 겨울의 한기조차 얼어붙게 만들어 사람들을 밤의 길거리에서 사라지게 만들었다. 최근 런던 전역을 들쑤시는 살인마에 대한 소문들. 살인마의 등장으로 희생된 자들의 수는 이미 셀 수 없을 정도이며 밤의 런던을 불길한 고요함 속에 억지로 가둬버릴 정도였다. 더욱이 최악의 상황은 그 살인마가 한 명도 아니고 두 명이라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본 자들은 없지만ㅡ봤다고 해도 그들 또한 살인마의 희생자들 중 하나가 되었다.ㅡ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살인마가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데, 그 이유는 각자의 살인방법과 살인 대상이 달랐기 때문이다. 한 명이 잔혹하고 무차별적인 살인을 저지른다면 다른 한 명은 정교하고 특정 대상이 정해진 살인이었다. 상반된 살인방식으로 사람들은 살인마가 두 명이 있다는 추측을 내놓을 수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런던을 공포로 몰아넣은 원흉인 두 명의 살인마들에게 두려움을 담아 별명을 지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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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러 여기까지 보러 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화려하고 웅장한 저택의 앞에서 두 명의 남녀가 서 있었다. 저택의 하우스키퍼(메이드장)인 중년의 여성이 허리를 굽혀 자신보다도 훨씬 젊고 어린 사내에게 감사를 표하고 있었으며 사내는 묵묵히 부인의 감사 인사를 익숙하다는 듯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짧게 친 검은 머리에 검은 양복을 입고 손에는 왕진 가방을 든 그는 런던에서도 실력 높은 외과의사로 유명한 트라팔가 로우였다. 26세라는 젊은 나이에 런던의 수많은 목숨들을 살려냄으로서 실력으로 런던의 많은 사람들의 신임을 얻었으며 그 명성은 귀족층에도 널리 알려져 귀족들이 자주 찾아오는 의사 중 한 명이었다. 소문에 따르면 여왕의 진찰을 봐준 적이 있다고 할 정도의 젊은 천재 의사는 오늘 어느 한 백작의 사용인을 진찰하기 위해 직접 저택까지 찾아와 왕진을 했다. 사용인이 직접 찾아갈 수도 있지만 환자인 정원사가 나무치기를 하다가 사다리에서 추락한 탓에 다리가 부러져서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낫기에는 시간이 걸리겠지만 일을 그만둘 정도는 아닌데다가 로우의 치료로 회복 기간이 단축되었기에 메이드장이 직접 나와 감사의 인사를 한 것이었다.
“실력 좋은 정원사라 그만두게 되면 어쩌나 걱정이었거든요.”
“한동안 일을 시키지 말고 푹 쉬게 해주시면 됩니다. 혹시나 해서 묻습니다만 여기의 주인이 그 정도의 도량은 있으신 분이겠지요?”
“걱정하지 마세요. 백작님께서도 사정을 설명해 드리시면 이해해주실겁니다. 아, 오신 김에 백작님을 만나고 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조금 있으면 돌아오실 시간인데요. 백작님도 선생님에게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어 할 겁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아직 일이 남아서 말입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고 말이죠.”
메이드장의 제안을 로우는 정중한 말투로 거절하고는 품 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하였다. 지금 마차를 타고 런던으로 돌아가면 초저녁에야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메이드장은 로우의 말에 시계 대신 하늘을 살펴보며 해가 질 시간을 가늠해보더니 이내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어두운 낯빛으로 말했다.
“그렇네요. 게다가 요즘 런던은 밤에 돌아다니지 않는 편이 낫고 말이죠. 여기는 런던하고 좀 떨어진 곳이라서 다행이지만 요즘 런던은 밤에 돌아다니기가 무서우니까요.”
걱정이 담긴 메이드장의 중얼거림에 로우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그녀의 말을 들었다. 애써 태연하게 말하려고 하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지울 수 없는 두려움이 새겨져 있었고, 그 이유를 로우는 잘 알고 있다.
런던에는 두 명의 살인마가 있다.
한 명은 주로 여인네들을 표적으로 삼아 살인을 저지르는 살인마로 피해자들의 시체를 살펴보면 전문가의 손길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정교한 흔적이 남아있어 살인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실험을 떠올렸다.
사람들은 그를 ‘잭 더 리퍼(살인마 잭)’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
또 다른 한 명은 잭과는 정 반대의 살인방식을 저질렀다. 살인대상도 무작위로 선별한 것처럼 특정 대상이 없었으며 살인 현장은 이 이상 악취미는 없다고 할 정도로 온 몸이 난도질이 되어 끔찍하다는 말 이상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살인마 잭이 효율적이고 의무적으로 사람을 죽인다면 이 자는 유흥의 일종으로 사람을 죽인 것처럼 보였다.
사람들은 그에게 ‘백마(하쿠바)’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
두 명의 살인마는 제각기 따로 행동하며 런던을 충분히 살인의 공포에 떨게 만들었으며 덕분에 요 근래 런던은 해가 지면 사람들이 밖에 돌아다니려고 하지도 않으며 문을 꼭꼭 닫은 채 숨죽이며 다시 아침 해가 떠오르기만을 기다렸다. 경찰들이 총력을 다해 두 명의 살인마들을 잡으려고 애를 쓰며 여왕의 어명도 있었지만 살인마들은 그들을 농락하듯이 모습조차 보여주지 않았다. 그렇게 런던의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밤이 오늘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로우는 겉치레마냥 메이드장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그녀를 위로해주었다. 의미 없는 위로였지만 안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경찰들도 병력을 증가시켰고 여왕폐하의 명도 있었으니 금방 잡힐 겁니다.”
“그러면 좋겠지만요. 이제는 낮의 런던을 돌아다니는 것도 겁이 나서… 아, 저기 백작님이 돌아오시네요.”
메이드장의 말대로 로우의 뒤로 저 멀리 한 대의 마차가 달려오고 있었다. 메이드장은 잠시 보여줬던 불안한 낯빛을 금방 지우고는 다시 하우스키퍼로서의 의연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녀의 사용인들을 이끄는 대표이자 프로로서의 모습에 로우도 속으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윽고 마차는 저택 앞에 도착하였고, 마부가 자리에서 내려와 문을 열어주자 마차에서 한 명의 사내가 내려왔다. 나이는 대략 로우와 비슷한 나이대로 보이는 사내는 반짝이는 긴 금발머리를 느슨하게 묶어 어깨에 걸치고 사내의 용모를 돋보이게 해주는 귀족으로서 어울리는 옷차림에 허리춤에는 칼을 차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로우의 시선에 강하게 들어오는 것은 백작의 외모였다. 상당히 중성적인 외모를 가진 사내는 새하얀 피부, 큰 눈동자, 자그마한 입술은 여성의 그것보다도 더 아름다웠지만 사내의 눈동자에 새겨진 사내로서의 기개는 비범함을 상징하였다.
백작 캐번디시. 젊은 백작은 사교계에서 이미 그 수려한 외모로 널리 알려진 인기인으로서 본인도 자신의 외모와 그에 따르는 인기를 잘 알고 있다는 듯이 그것을 만끽하며 즐기고 있었다. 그런 한편으로는 뛰어는 검술 솜씨로 귀족들 중에서 검술로서 그를 당해낼 자가 없었으며 최고의 실력자들만 선별하는 여왕의 호위기사단들도 그의 실력 앞에서는 한 수 접고 들어갈 정도였다.
소문대로 대단한 외모로군. 로우는 오늘 처음 만나게 된 캐번디시의 실제 모습에서 그러한 감상을 품었다. 딱히 다른 이들처럼 그의 외모에 넋이 나가지는 않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기에 그렇게 납득한 것이었다. 마차에 내린 캐번디시를 가장 먼저 반긴 것은 로우와 조금 전까지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메이드 장이었다. 그녀는 로우에게 감사 인사를 나눌 때보다도 허리를 더 깊게 숙여서 자신의 주인을 반겼다.
“오셨습니까, 주인님. 예정보다 일찍 도착하셨네요.”
“사교 모임이 일찍 끝나서 말이야. 다 그 빌어먹을 살인마 녀석들 때문에 말이지. 다들 해가 지기 전에 저택에 돌아가고 싶어서 시계만 쳐다봐서 별로 재밌지도 않았어. 하여튼 간에 귀족이라는 자들이 그렇게 겁이 많아서야.”
“금방 살인마가 잡힐 테니 마음을 편히 가지도록 하세요.”
“무능한 경찰들이 과연 살인마를 잡을 수 있을지 그거 기대되는군.”
빈정거리는 어투로 저택에 들어가려고 했던 캐번디시는 그제야 그동안 아직 떠나지 않고 서 있던 검은 남자를 발견하고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자신보다 키가 조금 큰 남자는 캐번디시와 눈이 마주치자 조용히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처음 보는 남자에 캐번디시가 의아함을 품자 그것에 눈치를 챈 메이드 장이 캐번디시 옆에 다가와 속삭였다.
“오늘 정원사의 다리를 진찰하러 와주신 의사입니다.”
“그런가? 흠. 이름이 어떻게 되지?”
“트라팔가 로우라고 합니다.”
“오, 트라팔가라. 그 이름이라면 몇 번 들어본 적 있지. 젊은 나이에 뛰어난 실력을 가진 의사라고 말이야.”
“과찬이십니다.”
“정원사를 보러 여기까지 온 건가. 그래, 상태는 어떻지?”
“다리가 부러지기는 했습니다만 며칠 요양하면 일하는 것에 지장을 없을 겁니다.”
“그런가. 그럼 다행이군. 한동안 정원사보고는 집으로 돌아가 쉬라고 하는 편이 났겠어. 아무튼 고맙네. 사례는 부족함 없이 하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로우가 다시 한 번 가볍게 고개를 숙여 감사 인사를 올리고는 고개를 들어 캐번디시를 정면에서 바라보았다. 캐번디시도 그제야 로우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자신만큼은 아니지만 제법 여인들에게 인기가 있을 법한 준수한 외모를 가졌으며 청회색 빛 눈동자에는 다른 이들과는 사뭇 다른 빛이 섞여 들어가 있었다. 전체적으로 꽤나 기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이미지에 캐번디시는 흐음 하고 로우에 대한 감상을 마쳤다. 나름 유명한 의사이며 어딘지 석연치 않은 분위기를 풍겼지만 딱히 나쁜 인상도 아니며 자신의 정원사를 치료해 준 의사 그 이상도 아니었기에 캐번디시는 로우에 대한 일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로우는 캐번디시와의 인사도 끝났겠다, 이번에야 말로 돌아가기 위해 가방을 챙겨들고 마지막으로 떠나는 인사를 올렸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무슨 일이 있으시면 연락 주시길 바랍니다.”
“아, 그래. 수고했네.”
그 대화를 마지막으로 로우는 대기하고 있던 마차에 몸을 실었고, 마차는 런던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달려 나갔다. 캐번디시는 잠시 그런 마차의 뒷모습을 잠시 살펴보더니 이내 미련 없이 몸을 돌려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 * *
런던의 밤은 안개가 자욱했다.
뿌연 런던의 안개는 하수구에서 올라오는 악취가 섞여있어서 안개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불쾌함을 선사했다. 더욱이 살인마가 활동하기 시작하는 밤에는 안개는 훌륭한 극적 효과를 줘서 불길함을 조성했다. 가로등불이 켜지며 어둠을 조금이나마 밝히고 있는 런던의 밤에는 사람들 기척이 전혀 없었으며 오직 순찰 중인 경찰들과 그들이 이끄는 사냥개만이 있을 뿐이었다. 괜히 무모하게 런던 거리를 배회하다가 살인마의 희생양이 되기를 바라는 정신 멀쩡한 자들은 없을 것이다. 만약 밤거리를 홀로 배회하는 자가 있다면 술에 취해 런던의 상황을 잠시 망각한 주정뱅이거나 아니면 먹잇감을 찾아 헤매는 살인마,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런 밤의 거리를 조용히 떠도는 인물이 한 명 있었다. 긴 칼을 어깨에 짊어지고 뒷골목을 중심으로 돌아다니며 경관들의 눈을 피해 어디론가 발걸음을 옮기는 자는 런던의 밤거리에 어울리는 검은 재킷을 몸에 걸치고 머리에는 겨울에 어울리는 털모자를 쓴 채 이윽고 인적이 드문 곳에 도착하여 발자국 소리를 조금씩 울렸다. 누군가에게 들킬 수 있으며, 그렇게 되면 살인마로 몰릴 수 있음에도 불구했는데도 사내는 크게 개의치 않아했다.
그가 바로 그 소문의 살인마 중 한 명이니까.
살인마 잭. 사람들이 지어준 자신의 별명을 트라팔가 로우는 별 감흥 없이 받아들였다. 딱히 그런 별명이 생기기를 원하지 않았을 뿐더러 그런 이름으로 불려봤자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세간의 인식 같은 것은 상관없었다. 다만 자신이 그 살인마 잭이라는 사실이 드러나지만 않으면 다행이었다. 젊은 천재 의사 트라팔가 로우가 사실은 살인마 잭이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과연 런던에 어떤 충격을 줄 것일까. 로우는 한 번 생각해 봤지만 일개 의사인 자신이 정체라고 해도 큰 파장을 몰고 오지는 않을 것이었다.
어째서 살인을 저지르는 것일까. 그 질문에 트라팔가 로우는 복수라고 대답할 것이다. 복수. 누구를 향한 복수인가. 사실 로우가 지금까지 벌인 살인들은 직접적인 복수가 아니었다. 그것은 복수의 대상을 향한 경고였다. 그라면 분명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알고 있을 것이며 그 안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지도 눈치 챘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지금까지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있다. 분명 자신을 여전히 어린아이 취급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길 것이다. 하지만 그 방심이 언젠가 직접적으로 자신의 목을 찌르게 될 최대의 실수가 될 것이다. 천천히, 인내하면서 로우는 언젠가 남자의 목에 칼을 꽂을 순간을 기다리고 있으며 그 때까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그 안에 희생된 자들의 목숨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지 않는다면 거짓이겠지만 로우는 애써 그것을 떨쳐내며 오늘도 밤거리를 배회하고 있었다.
화이트채플의 밤거리는 런던의 그림자였다. 누더기가 된 채 길바닥에 자는 노숙자들, 남자들에게 몸을 팜으로서 생계를 이어갈 수밖에 없는 창녀들, 부모에게 버려진 아이들. 그들은 살인마가 배회하는 밤거리에도 안식을 취할 집이 없는 자들이기에 위험 속에서 잠을 청하며 내일도 무사히 아침 해를 볼 수 있기를 기도할 수밖에 없는 자들이었다. 로우는 쓰고 있던 모자를 더 깊게 눌러쓰고 그들을 피해 더 깊은 곳으로, 가로등불의 빛조차 들어오지 않는 어둠 속으로 들어가며 이번의 희생자들을 찾아 나섰다.
그 때, 로우의 후각을 통해 안개를 타고 어둠 속에서 섞여 들어가는 미세한 기척과 냄새가 풍겨왔다. 그것은 하수구에서 올라오는 악취도, 안개의 축축한 냄새도 아니었다. 그것들의 냄새에 파묻혀서 쉽게 알아낼 수 없지만 의사로서, 살인마로서 지겹도록 느껴온 감각을 로우는 놓치지 않았다.
피. 그것은 깊고 짙은 피 냄새였다.
이정도의 피 냄새가 나려면 사람 하나가 내장이 터져 나올 정도로 처참하게 죽어야만 했다. 로우는 미간을 좁히고 피 냄새를 따라 걸어갔다. 이정도의 피 냄새를 풍길 수 있는 자가 자신 이외에도 한 명이 있다면 그 인물은 현재 자신과 함께 런던의 유명인이 된 그 녀석뿐이었다. 로우는 머릿속으로 하나의 이름을 떠올렸다. 하쿠바. 자신과는 정 반대의 성향을 가진 쾌락 살인마. 지금까지는 이름과 명성만 들어봤지 운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로우는 의사로서도, 살인마로서도 하쿠바와 마주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자신과 같은 시기에 활동하는 살인마라는 점에서 흥미가 갔지만 자신의 일을 방해하지 않는다면 아무래도 좋았기에 지금까지 굳이 찾으려고 나서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그 소문의 살인마를 실제로 만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한 생각에 로우는 칼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자신은 지금까지의 피해자들과는 달랐다. 순순히 당할 생각은 없었다.
이윽고 로우는 피냄새의 인도를 받아 마침내 어떤 장소에 도착했다. 미로같이 얽혀있는 골목길의 한 공간에서 로우는 놀라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인적이 끊긴, 밀실과도 같은 길에서 연인으로 추정되는 두 명의 남녀가 있었다. 아니, 상대가 남녀라는 것을 추리할 수 있었던 것은 로우가 의사로서의 지식과 살인마로서의 경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것은 이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난도질이 되어있다. 불규칙적으로 그어진 칼의 지나간 흔적들은 아이의 낙서와도 같이 보였다. 지나가고 남은 자리에는 내장이 튀어나와 피와 함께 길을 적셨으며 남자의 경우에는 한 번에 칼로 머리를 뚫은 것인지 뇌수가 보일 정도였다. 악취미로군. 로우는 덤덤히 시신들을 내려다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유심히 눈으로 시신들을 살펴보는 로우는 상대가 흉기로 검을 사용했다는 점과 상당한 실력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자신도 검을 다루는 것에는 어느 정도의 자신이 있었지만 실력자라고 말할 정도는 되지 않았다. 그러나 하쿠바의 경우에는 겉보기에는 아무렇게나 난도질을 한 것처럼 볼 수 있었지만 유심히 보면 뛰어난 실력이 없는 이상 뼈를 자르고 머리를 한 번에 관통해 넣을 수 없었다. 그 말은 뛰어난 실력이 뒷받침 되어야지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하쿠바는 전문적으로 검술을 배운 자라고 할 수 있겠군. 머리를 한 번에 찌른 것을 볼 때 검술의 종류는 펜싱인가.
“누구냐.”
로우의 생각을 방해한 자는 그의 뒤에서 등장했다.
순식간에 두 자루의 칼이 챙 하는 소리를 내며 강하게 부딪쳤다. 목소리가 들리자 로우는 직감으로 칼을 빼들어 뒤를 막아섰고, 로우의 예상대로 상대는 검을 빼든 채 로우를 공격했다. 자신의 칼을 사이에 두고 보여 진 상대의 칼에는 아직 채 지우지 못한 핏자국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잠시의 힘겨루기가 이어지고 로우는 있는 힘껏 상대를 밀어내었다. 잠시 상대와 로우의 간격이 생겼지만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듯이 다시 빠른 속도로 달려들어서는 공격했다. 눈으로 쫓기 힘든 엄청난 스피드에 로우는 아슬아슬하게 막아내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채 알기도 전에 희생자가 되었을 법한 속도였다. 이런 식으로 당한거로군. 로우는 속으로 냉정하게 판단했다. 확실히 이 스피드로는 자신이 이기기에는 버거울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여기서 죽을 생각도 없었다. 로우는 다시 한 번 간발의 차로 상대의 공격을 피하더니 이윽고 빈틈을 노려 찔러 넣었다. 로우로서는 아쉽게도 그의 공격은 옆구리를 살짝 스치는 것으로 실패로 돌아갔다. 자칫하면 당했을지도 몰랐던 로우의 공격에 상대는 놀란 것인지 잠시 간격을 벌렸다. 그도 로우가 지금까지 만난 상대들과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인지했다.
서로 거리를 둔 채 대치가 이뤄졌고, 로우는 가쁜 숨을 진정시키며 시간을 끌 요행으로 먼저 말을 걸었다.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군. 살인마 하쿠바.”
“호오. 그렇다면 너는 살인마 잭이로군.”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로우는 순간 멈칫하고는 머릿속에서 방금 들은 목소리를 되새겨 보았다. 그 아름다운 미성. 그것은 이번에 처음 들은 것이 아니었다. 한 번 들으면 잊을 수 없을 정도의 아름다움과 기사로서의 긍지를 동시에 가진 목소리. 그 목소리를 로우는 이전에 한 번 들은 적이 있으며 그가 누구인지도 알고 있었다.
로우의 궁금증을 완전히 해소시켜주겠다는 듯이 달빛이 구름 뒤에서 나타나 어둠에 잠겨있던 거리에 은은한 빛을 내려주었다. 빛이 비춰지면서 어둠이 물러나게 되었고 자연스레 장막이 걷어지듯이 로우와 상대, 하쿠바의 얼굴도 드러나게 되었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하쿠바의 얼굴에 로우는 이번에는 놀란 빛을 숨길 수 없었다. 태양빛을 머금은 듯한 눈부신 금발, 손에 쥔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은빛 레이피어, 호수의 표면과도 같이 선명하게 푸른 눈동자, 달빛과 같은 곱고 새하얀 피부, 남자인지 여자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의 미려한 외모. 상대의 정체를 알게 된 로우는 자신도 모르게 멍하니 그의 진짜 이름을 부르게 되었다.
“…캐번디시 백작?”
“음? 너 혹시 캐번디시를 아는 거냐?”
로우의 말을 놓치지 않고 들은 하쿠바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질문을 던지자 로우는 더 혼란스러운 기분이 되었다. 캐번디시 백작이 ‘캐번디시’가 누군지 물어보는데 당황하지 않을 사람이 과연 있을까. 로우는 잠시 뭐라 대답할지 망설였지만 직접적으로 묻는 것이 나을 것 같아서 대답대신 질문으로 돌려주었다.
“네가 캐번디시 백작 아닌가?”
“아, 난 아니야. 나는 딱히 이름은 없지만, 굳이 이름을 대자면 너희들이 지어준 ‘하쿠바’라고 할 수 있겠군. 참고로 캐번디시는 지금 ‘안’에서 세상 모르고 자고 있다.”
“…이중인격이라는 소리인가.”
하쿠바의 말을 토대로 한 가지 추리를 낸 로우는 해답을 내보였다. 이중인격. 그것이라면 캐번디시와 하쿠바 사이의 괴리감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간에서는 아직 이중인격이 낯선 용어였지만 정신학도 약간 공부한 로우로서는 쉽게 유추해낼 수 있는 답이었다. 외모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가진 백작 캐번디시와 무차별 살인마 하쿠바. 상반된 두 인격이 지금까지의 참사를 불러일으킨 것이었다.
로우의 대답에 하쿠바는 제법이라는 표정으로 답해주었다.
“맞아. 금방 알아채네. 생각 했던 것보다도 똑똑하네, 살인마 잭.”
“나에 대해서 알고 있나.”
“세간에 대해서 관심은 없지만 네 이야기는 간간히 들어서 말이야. 나랑 같이 살인을 저지르는 녀석이 있다기에 일단 기억해뒀지.”
“영광이로군. 그나저나 이거 놀랐는걸. 캐번디시 백작이 살인마라니. 알려지면 런던이 발칵 뒤집혀지겠군.”
“그러면 입 좀 다물어줬으면 좋겠는데.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건 상관없지만 캐번디시 녀석한테 좀 미안해서 말이지.”
“확실하게 입을 다물게 하는 방법도 있을 텐데?”
“그건 다음에 써보도록 하지.”
그렇게 말하며 하쿠바는 검을 검 집에 꽂아 넣었다. 상대가 무기를 집어넣는 모습을 지켜보며 로우는 아직 경계를 풀지 않고 검을 그대로 들고 있었다. 말로서 그를 떠보기는 했지만 만일에 그가 변심하여 자신을 입막음으로 살해할 가능성이 아직 있었기 때문이다. 로우가 아직 검을 들고 있는 모습에 하쿠바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오늘은 이정도로 하자고. 그렇게 긴장하지 않아도 되잖아?”
“어째서 날 살려두는 거지?”
“흥미가 생겨서 말이야. 나와 같이 살인을 저지르는 녀석이 있다는 사실이. 게다가 넌 나와 달리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살인을 저지르는 것 같은데, 또 거기서 나와는 정 반대라 더 관심이 있고 말이지.”
하쿠바의 빈정거리는 말에 로우는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나 실제로는 하쿠바의 통찰력에 놀라고 있었다. 단순히 살인을 즐기는 녀석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자신의 살인에 목적이 있다는 것을 간파했다는 점에서 무시할 수 없는 눈썰미와 직관을 가지고 있었다. 방심해서는 안 되겠어. 로우는 하쿠바에 대한 확실한 경계를 가지기로 하고 일단 그의 말대로 천천히 칼을 칼집에 꽂아 넣었다.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하쿠바는 이내 먼저 몸을 돌리고 발걸음을 옮겼다.
“그럼, 난 이미 할 거 다했으니 이만 가본다. 너나 나나 서로 입 다물고 있는 게 좋을 거야. 동업자끼리 앞으로 친하게 지내보자고.”
그렇게 말하고 유유히 사라지는 하쿠바의 뒷모습을 로우는 잠시 아무 말 하지 않고 그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