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완성 도플로우.
눈을 뜨고 가장 시야에 먼저 들어온 것은 햇빛을 등지고 받아 반짝이는 분홍빛이었다. 그것은 절망의 빛이었다.
분명이 환각이라고 생각해, 그렇게 애써 자신을 침착하게 달랜 후 로우는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서서히 트여지는 시야와 함께 의식을 끌어올리는 통증으로 윽 하는 신음소리가 절로 튀어나오며 로우는 먼저 자신의 몸을 살펴보았다. 흉하기 짝이 없었다. 의사로서의 의료적 지식을 바탕으로 보지 않아도 충분히 그의 몸이 만신창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몸을 감은 붕대들과 거즈들은 피가 스며들어 검붉은 빛으로 더럽혀져 있었다. 최소한의 응급처치만 해놓은 것은 자신의 몸을 죽지 않을 정도로만 만들어 놓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로우는 괴로움이 섞인 한숨을 몰아쉬며 몸을 살피는 것은 여기까지로 해놓고 이번에는 자신이 있는 곳을 살펴보았다. 여러 개의 창, 최소한의 가구들만 있지만 하나 같이 고급스러워 보였으며 바닥에는 붉은 벨벳 카펫이 멋들어지게 깔려있었다. 그리고 자신은, 어느 의자에 묶여 있는 상태였다.
의자. 그것은 하나가 아니라 자신의 오른쪽으로 다른 의자들이 죽 놓여 있었다. 의자의 형태는 일반적인 모양이 아니라 어떠한 기호들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클로버, 스페이드, 다이아.
그리고 하트.
자신이 앉은 의자의 디자인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자 로우는 화들짝 놀라 몸을 앞으로 일으키려고 했으나 자신의 몸을 구속시키고 있는 붉은 끈으로 인해 무산되었다. 트럼프들의 의자. 그 의자들을 로우는 알고 있었다.
후후훗. 기다렸다는 듯이 웃음소리가 앞에서 들려오자 로우는 그제야 줄곧 무의식적으로, 의식적으로 외면하고 있던 정면을 똑바로 보게 되었다. 그토록 부정하려고 했던 최악의 상황은, 악몽은 현실이었다. 분홍빛 코트를 몸에 두른 선글라스를 낀 사내.
“잘 잤나, 로우.”
조커. 돈키호테 도플라밍고.
“이제야 일어났군. 하도 안 일어나서 기다리는 걸 포기하고 그냥 깨울까 했다고.”
창가에 앉아 와인 잔을 이리저리 기울이던 도플라밍고는 잠이 많은 어린아이가 스스로 깨어날 때까지 기다렸다는 것처럼 말하며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창가에서 내려와 등을 구부정하게 굽힌 자세로 섰다. 도플라밍고의 작은 몸짓 하나만으로도 로우의 오감이 예민하게 반응했다. 움직임 하나, 말 하나, 눈빛 하나, 손길 하나. 어느 무엇도 방심할 수 없다. 그것이 자신이 오랜 세월 동안 알고 있는 돈키호테 도플라밍고라는 남자였다. 천천이 보폭이 큰 발걸음으로 서서히 로우에게 다가오던 도플라밍고는 이제 로우의 바로 앞에 서게 되었다. 커다란 그의 몸이 로우의 위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어린아이를 내려다보듯이 로우를 보는 도플라밍고는 특유의 웃음소리를 내며 말했다.
“훗훗. 의자에 앉은 소감이 어때? 얌전히 내 밑에서 착한 아이로 있었다면 굳이 이런 식으로 나오지 않아도 언젠가 앉혀줄 생각이었는데 말이야.”
“네가 주는 자리 따위 필요 없다. 나는 더 이상 네 부하가 아니야.”
“하지만 너는 여전히 나의 귀여운 로우지. 하지만 귀엽다고 해서 너무 오냐오냐하는 것도 안 좋고.”
점점 도플라밍고의 상체가 아래로 내려가면서 로우와의 간격이 좁혀지고 있었다. 은근슬쩍 그의 다리 한 짝이 로우의 다리 사이로 들어가자 로우는 앞으로 도플라밍고가 자신에게 무슨 짓을 벌일 것인지 직감하고는 몸을 이리저리 비틀어 어떻게든 그에게서 벗어나려고 시도해보았다. 그러나 도플라밍고의 능력으로 억압된 몸은 쉽게 풀리지 않았으며 오히려 얇은 실이 살 안을 파고드는 것과도 같은 통증을 느낄 뿐이었다. 큭 하는 소리를 내며 빠져나오지 못하는 대신이라는 듯이 이를 악 물고 자신을 쏘아보는 로우에 도플라밍고는 오히려 재밌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는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자신을 즐겁게 해주었다. 혐오와 노기를 띈 로우의 눈빛은 도플라밍고의 어느 감정을 충분히 자극시키는 각성제와도 같았다. 도플라밍고는 손을 뻗어 로우의 얼굴을 붙잡아 끌어당겼다. 거미와도 같은 그의 크고 커다란 손이 로우의 양 볼을 움켜잡고 있었다. 손 안에 그대로 들어오고도 남는 로우의 얼굴은 어렸을 때와 다를 바 없었다. 얼얼할 정도로 잡혔지만 로우는 아픈 기색 하나 없이 오히려 눈빛을 더욱 강하게 다졌다. 한동안 보지 못한 사이에 로우의 눈빛에는 이전과는 다른 투기가 있었다.
“훗훗훗. 어쩔 수 없지. 어른으로서 아이의 반항기는 받아줘야 하니까. 하지만 너무 길어지면 다시 착한 아이로 되돌리기 위해 직접 [교육]을 시키는 수밖에 없단다.”
그 빛도 지금 여기서 꺼뜨리면 된다.
도발하듯이 계속해서 로우를 어린아이처럼 달래는 어투로 말한 도플라밍고는 그대로 로우와 입을 맞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