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표지 디자인은 림재님(@LimJae_books)께서 커미션 제작해주셨습니다.
2017년 9월 3일 오소마츠 상 통합 온리전 <오소마츠리>에서 발간 예정인 카라오소 소설 개인지 <자양화> 샘플 페이지 입니다.
▶ A5 / 떡제본 / 170P / 3부작 / 16000원
▶ 모브녀 등장
▶ 오소마츠와의 이별 후 다른 여자와 결혼했다가 2년 만에 이혼한 뒤 다시 돌아온 카라마츠와 이별 후 힘들어하다가 카라마츠에 대한 감정을 정리하게 된 오소마츠의 이야기입니다.
▶ 본 회지의 표지 및 내지 디자인은 림재님께서 커미션 제작해주셨습니다.
▶ 본 회지는 오직 선입금 판매로만 이루어집니다.
현장판매 & 통판 선입금 페이지 : https://goo.gl/ZzfKYd (~8/27)
<1부 : 물그릇에 잠긴 것>
그녀에게 변화라는 것은 사전에 연락도 없이 무례하게 들이닥치는 불청객 같은 거였다. 불청객이 찾아오는 것은 언제나 불쾌하고 꺼림칙한 일이지만, 매정하게 쫓아내거나 피할 수도 없는 난감한 것이기도 했다. 태풍이 온다는 걸 알면서도 막을 방도가 없어 집안에 틀어박혀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는 것처럼, 불청객 또한 그렇게 대우해줘야 했다. 그러한 불청객의 난입을 몇 번 당하니 그녀의 안에 조금의 여유가 생겨났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녀는 진흙발로 무례하게 성큼성큼 제 안으로 들어오는 변화 속에서 자기 위안으로 써먹기 위해 사금과 같은 좋은 점들을 찾아내고자 무척이나 애를 썼다.
“운이 좋으시네요. 마침 딱 하나 나와 있었던 차였는데 말입니다. 워낙 찾으시는 분들이 많은 곳이거든요.”
가장 먼저 폐부에 스며드는 것은 시원하게 흐르는 강물의 내음이었다.
중개인의 안내를 받아 들어간 원룸은 딱 기대했던 대로였다. 방 크기는 여자 혼자서 살기에 적당했고, 교통편도 이럭저럭 괜찮으며, 주변 치안도 합격점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옆에서 한창 이곳의 좋은 점들을 과장된 표현들을 나열하며 열변을 토하는 중개인을 뒤로 한 채 가슴 깊이 밀려드는 강물의 내음의 근원지를 찾아 베란다로 향했다. 꼬질꼬질 때가 낀 베란다 문을 여니 곧이어 축축하지만 시원한 강바람이 그녀의 단정한 적갈색 머리카락과 새하얀 목덜미를 순식간에 훑고 지나갔다. 베란다에서 내다본 밖에는 커다란 강이 잔잔히 흐르고 있었다. 봄을 떠나보내고 다가오는 여름을 기다리는 잠시의 틈새 속에서 맴도는 바람은 티 없이 맑고 상쾌했다. 약간 강물의 비린내도 나지만 그녀는 거부감 없이 그마저도 가슴을 크게 젖히고 들이마셨다.
“보는 눈이 있으시군요. 여기가 경치도 무척 좋습니다. 보시는 것처럼 베란다로 나오시면 바로 하천이 보이거든요. 사람들이 이곳을 마음에 들어 하는 이유도 다 저 하천 덕분입니다.”
그녀는 중개인의 소개말 중에서 지금 들은 것이 가장 진솔하고 사심이 섞인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 또한 이곳에서 바라보는 하천이 얼마나 근사한지 알고 있을 것이다. 큰 너울을 몇 번이고 겹치며 흐르는 하천과 그 위를 가로지르는 대교도 멀리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잔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잠시 바람이 안겨주는 하천의 냄새와 습기를 음미했다. 베란다 창틀 위에 서있자니 팬티스타킹만 신은 발바닥이 욱신거렸으나 그녀는 그 위에 꼿꼿이 서서 하천과 마주했다.
“여기로 계약할게요.”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녀는 뒤이어 두 세 차례 다른 원룸들을 살펴볼 예정이었으나 그 집들을 보지 않고 당장 부동산으로 찾아가 강변이 보이는 원룸에 지내기로 하면서 계약을 성사시켰다. 원룸이 위치한 지역이 카츠시카 구(区)라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자신이 이곳에 산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직까지 자신 외에는 없었다. 입조심만 하면 다른 쪽으로 흘러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이곳을 앞으로 자신이 살 거주지로 정한 이유는 주변 경치가 좋아서도, 교통편이 나아서도, 치안이 보장되어서도 아녔다. 물론 그것들도 마음에 들게 한 요소들이었으나 결정적이지는 못했다. 자신의 적갈색 머리카락 사이를 시원히 훑고 지나가는 하천의 선선한 바람과 힘차게 흐르는 물줄기로부터 흘러나오는 물 내음에서 그녀는 가슴을 울렁이게 만드는 직감을 가졌다. 여기가 아니면 안 된다는 충동으로 그녀는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조건이 좋은 만큼 다른 곳보다 시세가 사전에 정해놓은 한도보다 살짝 웃돌았으나 후회와 망설임은 생각보다 적었다.
볼일을 마친 그녀는 저녁에 도쿄 역에서 신칸센을 타고 구마모토로 돌아갔다. 기차 안에서 그녀는 천천히 숨을 고르며 그 때 맡았던 하천의 내음과 강바람의 결을 떠올려보고자 했다. 그러나 아무리 숨을 들이마셔도 자신의 몸을 관통하고 지나간 그 감각이 좀체 되살아나지 않았다. 몇 번의 시도를 반복한 뒤에 그녀는 서글픈 기분이 들어 차가운 차창에 머리를 기댔다. 가슴이 답답했다. 가슴을 말아 쥐고 주먹으로 가볍게 쳐도 응어리가 되어 꾹꾹 누르는 답답함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녀는 눈을 감고 힘겹게 숨을 들이마시고, 다시 내뱉었다. 누구나 해낼 수 있는 간단한 일을 그녀는 매우 어려운 일처럼 대했다. 그러는 동안 신칸센은 우직하고 의무적으로 그녀를 구마모토까지 무사히 데려다줬다. 과거의 그녀가 살았고, 지금의 그녀가 떠날 곳이며, 지금은 법적으로 완전히 남남이 된 그녀의 전 남편이 있는 곳이었다.
원룸 계약 당시, 그녀가 무심코 적었다가 퍼뜩 깨닫고는 다시 계약서에 고쳐 쓴 이름은 ‘마츠노 유코(松野 結子)’가 아닌 ‘미즈하라 유코(水原 結子)’였다.
(중 략)
아뇨, 선배. 오해하지 마세요. 저는 선배는 원망하고자 여기에 온 게 아니에요. 설령 정말로 이 모든 일의 시발점이 선배라고 한들 그 책임마저 선배가 가지고 있는 건 아니잖아요. 설마 일이 이렇게까지 꼬여버릴 줄 누가 조금이라도 예상 했을까요. 잘못도, 책임도 모두 골고루 가지고 있죠. 무엇보다 이혼은 어디까지나 저와 그 사람 사이에서 일어난 일이에요. 그 사이에 선배가 끼어들 수는 없어요. 제가 선배와 그 사람 사이의 일에 간섭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죠.
알아요. 저라고 딱히 그 사람을 나무랄 입장은 되지 못한다는 거. 오히려 여기서 선배에게 욕을 먹어도 할 말은 없잖아요. 선배 입장에서 볼 때 저는 좋아하는 사람을 가로채 간 나쁜 년이니까. 저도 그 사람과 비슷하게 지극히 이기적인 목적으로 일을 이 지경까지 끌고 와버렸으니까요. 그래서 이해되는 부분도, 어느 정도의 연민도 조금은 들지만 그래도 화가 나요. 내 안에 들끓는 화를 진정시킬 수가 없어요. 저는 정말로 선배와 이런 사이가 되고 싶지 않았는데. 내 청춘을 다 바친 사랑이었고, 지금도 동경하는 대상이고, 이룰 수 없다면 내가 가장 사랑했던 모습 그대로 박제해서 추억 안에 고이 넣어 소중히 간직하고 싶었다고요. 그런데 어째서 온통 구겨지고 눈물로 얼룩져서 본래의 모습조차 알아볼 수 없을 만큼 꼴사납게 되었을까요. 저는 그게 가장 속상해서 견딜 수가 없었어요.
이런 제 마음을 어딘가에 하소연하고 싶어서 미치겠는데 제 심정을 숨김없이 마음껏 털어놓을 수 있고,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 선배 밖에 없어서 더 서글퍼요.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요, 우리.
선배는 그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선배의 안에서 그 사람은 지금 어떤 모습인가요. 언행은 안쓰럽지만 힘들 때는 제법 의지가 되는 남동생인가요, 제 곁을 떠났다가 다시 제멋대로 돌아오려고 하는 옛 연인인가요, 아니면 그냥 나쁜 사람인가요.
선배에게 있어서 그 사람은 대체 무엇인가요.
<2부 : 수국의 색채>
둘이 본격적으로 같이 붙어 다니기 시작한 건 고등학교 시절부터였어요.
그쯤부터 오소마츠 형하고 사이가 좀 껄끄러워졌어요. 나하고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다 딱 들어맞는 줄 알았는데, 어느 날 살펴보니 못 보던 어긋남을 발견해버렸어요. 성장하면서 서로 생각하는 것이, 가치관이 조금씩 달라져 버렸어요. 뭐, 친구 사이에서도 그리 드문 일은 아니잖아요. 어느 날 나하고 잘 맞았던 친구가 알고 보니 나하고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된 것과 비슷했어요. 형은 나이를 먹어도 여전히 철없이 말썽만 부려서 선생님과 부모님 속을 뒤집어 놓았고, 저는 그런 형이 조금씩 부끄러워지면서 같이 어울려 다니는 걸 피하기 시작했어요. 말썽도 정도껏 해야지 대체 언제까지 저렇게 살 셈이지? 형을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하루도 그만둘 수 없었어요. 지금이야 저건 고칠 수 없는 천성이라 받아들이면서 반쯤 포기하게 되었지만, 그 때는 저도 한창 예민했을 때라 고등학교 들어가기 직전에 형하고 크게 싸워버렸어요. 그래서 입학하고 한 학기 동안은 서먹하게 지냈어요.
저는 그게 둘이 가까워 질 수 있었던 계기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뭐, 가장 큰 원인은 1학년 당시 둘이 같은 반이었다는 거겠죠. 고등학교 들어가면서 우리들은 각자의 일에 집중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오소마츠 형은 그런 우리들의 주변을 겉돌기만 했어요. 그 중에서도 카라마츠의 주변을 항상 맴돌았죠. 같은 반이고, 다른 애들에 비해서 그나마 형을 잘 받아줬던 사람이었거든요.
「어라? 쵸로마츠, 아직 안 갔어?」
학기 초에 학생회 일로 남아 있다가 빈 교실로 짐작되는 곳에서 인기척이 느껴져서 무심코 뒷문을 열었더니, 오소마츠 형이 그곳에 혼자 덩그러니 있었어요. 왜 여기 있냐고 물었더니 카라마츠랑 같이 돌아가려고 부 활동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고 대답했어요. 그 말을 듣고 속으로 내심 놀랐어요. 원래 혼자서 누굴 기다리는 걸 그렇게 싫어하던 사람인데 말이죠.
「쵸로마츠는 먼저 집으로 돌아가. 난 기다렸다가 카라마츠가 돌아오면 같이 집으로 갈게.」
‘그렇게 기다리지 말고 그냥 나랑 같이 집에 갈래?’라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오소마츠 형이 먼저 말했어요. 그래서 그냥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고서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어요.
둘은 제법 잘 지냈어요. 오소마츠 형이 무슨 장난이라도 치면 카라마츠는 바로 망설임 없이 따끔하게 제지를 걸었어요. 엄하게 잔소리를 하거나, 조금 심하다 싶으면 꿀밤을 먹이는 정도였죠. 원래 동생들한테는 상당히 약해서 자신을 함부로 대해도 절대로 화를 안 내고, 장난으로라도 때리지 않는 녀석이지만, 오소마츠 형은 ‘형’이라서 그런지 상대적으로 좀 더 확실하게 화를 내거나 스스럼이 없었어요. 그래서 오소마츠 형이 동생들한테만 잘해주지 말고 나한테도 좀 상냥하게 대해달라고 땡깡을 부린 적이 종종 있었어요. 그래봤자 씨알도 안 먹혔지만요. 하지만 제가 봤을 때 카라마츠의 그런 점이 둘 사이를 다른 형제들과의 관계와 차별 시 되게 만드는 것 같았어요. 저희들은 모르는 장남과 차남 사이의 관계 같은 게 말이죠.
(중 략)
어느 날부터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불면증이 생긴 것이다.
이유는 굳이 찾으려 나서지 않아도 눈에 뻔히 보였다. 망할 쿠소마츠. 당사자가 없으니 애꿎은 제 머리채만 쥐어 잡아야 했다. 실연에 대한 충격인지, 이제는 다섯이 누워야 하는 잠자리가 익숙지 않은 것인지. 그는 평소처럼 다른 동생들과 나란히 누워 이불을 덮고 잠을 청하려고 하면 자꾸만 어색하고 불편했다. 두 눈은 기분 나쁘도록 말똥말똥 했고, 정신은 기이하게도 또렷했다. 억지로 눈을 감고 양을 수 백 마리나 반복해서 세어도 간절히 원하는 잠은 야속하게도 그를 찾아오지 않았다. 그에 비해 다른 형제들은 그의 사정은 전혀 모른 채로 쿨쿨 잘만 자고 있으니 그는 억울해 미치고 팔짝 뛸 것 같았다. 수면제를 구해 몰래 먹은 뒤 잠을 청해 봐도 처음에만 효과가 있었지, 나중에는 약을 먹어도 효과가 나타나지 않게 되었다. 더 먹고 싶어도 이 이상 먹었다가는 반대로 잠에서 영원히 못 깨어날 것 같아 겁이 났다. 잠을 자지 못하니 가슴이 한없이 답답했고, 충분히 휴식을 취하지 못한 몸은 점차 무기력해져갔다. 한참을 천장과 눈싸움을 하고 나면 그는 참다못해 자리에서 일어나 몰래 방에서 나와서는 거실로 내려가 맥주 캔을 들고 새벽까지 TV를 시청했다. 맥주를 홀짝홀짝 마시면서 총천연색의 빛들이 뿌옇게 뿜어져 나오는 브라운관을 초점 흐릿한 눈동자로 멍하니 시청하면서도 그는 여전히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하얗게 새는 밤이 늘어나갈수록 그는 자신이 메말라가고 있다는 것을 생생히 실감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지겹도록 TV를 보고, 고주망태가 되어 쓰러질 만큼 술을 마시고, 폐를 거멓게 태울 때까지 담배를 피우다가, 여명이 지평선을 비출 때쯤에 다시 잠자리로 슬금슬금 돌아가 아침까지 잠든 척 누워있는 것이었다.
TV 드라마를 보다보면 연인에게 버림받아 실연을 겪은 등장인물이 나오게 된다. 어떤 이들은 자신을 버림받은 연인에 대한 복수를 불태우고, 어떤 이들은 다른 사람을 만나 새로운 사랑에 빠지게 되고, 어떤 이들은 실연의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고 극적으로 망가져간다. 그는 전병을 먹으며 자신의 어머니가 애청하는 주말 드라마를 옆에서 구경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실연으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보며 뭘 이렇게 유난을 떠는가 싶었다. 그렇게까지 슬퍼할 일인가? 그는 무심히 그런 생각을 하며 과연 이 드라마가 자신이 보려고 하는 프로그램이 시작하기 전에 마무리 될지 초조하게 기다렸다.
공감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현실은 픽션보다 더 사실적이고 극적이었으니까.
극단적이지 않으나 확실하게 망가져가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감정들과 그것을 기반으로 쌓아온 지난 일들이 사실은 상대에게 있어서 무의미한 일이었고, 그래서 모든 것이 부질없는 짓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생각 외로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자신은 대체 뭘 해온 것인지에 대한 허탈함이 가장 괴로웠다. 심지어 자신이 누구를 좋아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것조차 모호해질 지경이었다. 그러한 갑갑함에 이렇게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인가 싶었다.
그래도 그는 희망의 끄나풀을 차마 놓지 못했다. 그는 학창시절의 일을 회상했다. 모두가 떠난 빈 교실에서 그는 혼자 얌전히 앉아 부활동이 끝나고 돌아올 상대를 기다렸다. 기다리고 있으면 반드시 제 곁으로 돌아와 줬다. 교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와 이제 집으로 돌아가자고 말해줬다. 그것이 내심 좋아서 굳이 혼자서 기다리는 것을 감당해냈다. 그는 그 시절을 떠올리며 이번에도 얌전히 기다렸다. 언젠가 제 곁으로 돌아와 줄 것이라는 너덜너덜한 믿음을 놓칠세라 미련으로 꼭 쥐었다.
하지만 카라마츠는 항상 그에게만 매정하게 굴었다.
「저, 이 사람하고 결혼할 겁니다.」
카라마츠가 처음 유코를 데리고 마츠노 가를 방문한 날, 공교롭게도 그는 단골 빠칭코 가게에 신식 기계가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아침 일찍부터 외출해 있었다.
처음에는 딱히 내키지 않았으나 연이은 불면으로 짜증이 쌓였던 차였기에 기분 전환 삼아 오랜만에 가게를 찾아가게 되었다. 과연 신식 기계라서 그런지 기대 이상으로 대박이 연달아 터져 나왔고, 그는 간만에 기분이 좋아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유흥을 만끽했다. 오늘은 운이 좋네. 그는 기계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어깨를 들썩였다. 그는 두둑해진 양쪽 주머니에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가게에서 나와 단골 술집으로 가서 밤늦게까지 실컷 먹고 마시면서 지금의 유쾌함을 즐겼다. 빠칭코도 대박이 났고, 술맛도 좋았고, 안주도 서비스로 받았다. 아, 오늘은 간만에 제대로 잘 수 있을지도 몰라. 그는 천박한 웃음소리를 크게 터트리면서 숙면의 밤을 고대했다. 그리고 그는 늦은 시각에 집으로 들어와 가족들의 말을 전혀 듣지도 않고 바로 잠자리에 엎어져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그리고 기대대로 과연 그 날은 어려움 없이 푹 잘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 그는 카라마츠의 결혼 소식을 듣게 되었다.
다른 형제들은 이런 중요한 날에 혼자 빠칭코를 하러 나가고 밤늦게 술을 퍼마시다가 집으로 돌아온 장남을 나무랐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곧바로 그들은 그에게 이 사실을 사전에 알고 있었냐고, 언제부터 두 사람이 저런 관계가 되었냐고 속사포처럼 물어왔다. 정말 아무것도 몰랐냐는 질문 공세에 그는 아무것도 대답할 수 없었다. 그는 엄마가 끓여준 북엇국은 입에도 대지 못하고 숙취 때문에 머리가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서 자리를 피했다. 그는 2층 방으로 올라가 홀로 빈 방에 누워 망연히 천장을 올려다봤다.
카라마츠가 결혼을 한다.
자신을 좋아한다고 고백했던, 교복의 두 번째 단추를 받고서 수줍게 고맙다며 미소를 짓던 후배와 결혼을 한다.
뜻밖에도 슬픔도, 배신감도, 원망도, 절망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들은 먼 바다에서 둥둥 떠다니는 불순물처럼 까마득하게만 다가와 현실감이 전혀 없었다. 그 대신 방바닥에 누운 그의 온몸을 내리누르고 있는 것은, 이제 아무리 기다려도 영영 자신의 곁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깨달음에서 비롯된 허탈함과 상실감이었다.
아아, 그래.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너는 정말로, 나를 좋아하지 않았구나.」
새하얗게 비워진 그의 머릿속에는 그런 깨달음만이 새까맣게 떠올랐다.
<3부 : 자양화의 꽃말>
남자는 꿈을 꾼다.
남자의 꿈에는 자양화가 나온다. 은은한 물빛으로 수려하게 피어난 수많은 자양화가 남자를 중심으로 하여 피어나있다. 자양화는 무리를 지어 남자를 에둘렀다. 빈틈없이 빽빽하게 심어진 자양화는 많다는 표현이 턱없이 부족할 만큼 지평선 너머까지 광활하게 펼쳐져 있었다. 보고만 있어도 절로 압도되는 광경이었다. 남자는 살면서 이토록 많은 자양화를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남자는 낯선 광경에 뒷걸음질을 쳤다. 하나씩 살펴보면 어디를 내놓아도 부족하지 않은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내는 어여쁜 꽃이지만, 그러한 아름다움도 과하면 독이 되는 법이었다. 시야가 아득해지는 푸른빛에 눈이 멀 것 같았고, 진한 향기가 코가 마비되어 숨 쉬기가 버거워졌다. 마치 세상이 멸망하여 인류는 멸종되고, 지구상에 오직 자양화만이 생존해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자신은 지금 멸망한 세상에 당도한 것이 아닐까 남자는 상상했다. 그렇다면 지금의 광경은 아름다우면서도 어떤 의미로는 섬뜩하다고 평할 수 있다.
남자는 일단 앞으로 나아가보기로 했다. 이대로 가만히 서있는 것은 의미가 없었고, 무엇보다도 얌전히 꽃에 둘러싸여 있다가는 조만간 미쳐버릴 것 같아서였다. 남자는 앞길을 막는 자양화들을 밀쳐내며 힘겹게 나아갔다. 서로를 얽매어 촘촘히 심어져 있는지라 걸음을 떼어내는 것조차 힘들었다. 대체 어디의 한가한 사람이 이 많은 꽃들을 구해다가 심어놓은 것인지. 하지만 사람의 힘으로 이정도의 자양화를 심을 수 없으니 자양화들이 인류를 몰아내고 지구를 독차지 했다는 것이 좀 더 설득력 있지 않을까. 남자는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해봤다. 그보다도 어째서 자양화가, 그것도 푸른색만 가득한지가 제일 신경이 쓰였다. 분명 다른 꽃들도, 하물며 여러 색들도 많은데 그 많은 것들 중에서도 푸른빛 자양화만 있는지 의문이었다. 그러한 의문을 품고서 남자는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걸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몇 분, 몇 시간, 어쩌면 수일이 흘렀을지도 모른다. 여전히 남자의 주위에는 자양화가 잔뜩 피어나 있었다. 하늘과 땅을 포함하여 주위에 어떠한 변화가 없다보니 남자는 시간적, 공간적 개념을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남자는 자신이 어느 바다 위에 표류한 난파선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때마침 자양화의 색깔도 푸른색이니 적절한 비유였다. 남자는 결국 앞으로 향하는 것을 멈췄다. 남자는 지친 숨을 몰아쉬었다. 오랜 걸음과 더불어 자양화의 짙은 향기가 남자의 숨통을 답답하게 만든 탓이었다. 머릿속 또한 향기에 취해 점차 몽롱해졌다. 대체 얼마나 더 가야지 이 지긋지긋한 꽃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남자는 막막한 심정에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비가 내렸다.
남자의 뺨 위로 가장 먼저 떨어져 내린 빗방울은 이윽고 수도 없이 늘어나 잔잔히 내리며 남자와 자양화들을 톡톡 건드렸다. 신기하게도 빗소리 하나 들리지 않고, 맞아도 젖지를 않는 고요하고 신비한 비였다. 비가 내리지 시작하자 자양화는 남자와 정반대로 이전보다 훨씬 더 생기가 넘쳐나게 됐다. 꽃들 중에서도 물을 가장 좋아하는 꽃으로 알려져 있으니 비를 반가워하는 것이 당연했다. 비에 촉촉이 젖은 푸른 자양화는 영롱하게 빛나며 더욱 제 몸을 부풀렸다. 수려한 자태를 뽐내며 남자를 유혹했지만, 이미 오래 전에 자양화에 질린 남자에게는 별 감흥이 없었다.
얼른 이곳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순간, 남자의 직감이 등줄기를 타고 서늘하게 내려갔다. 남자는 다시 억지로라도 발걸음을 옮기려고 했다.
툭.
남자의 발에 무언가가 채였다.
이제까지 걸으면서 무언가가 발에 채인 적은 없었기에 남자는 무심코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처음에는 자양화들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니 자양화 밑에 무언가가 묻혀 있었다.
사람의 손.
티끌 하나 묻어나있지 않은 새하얀 손이 자양화 밑에 파묻혀진 채로 툭 튀어나와 있었다.
(중 략)
“오소마츠. 잠깐 시간 좀 낼 수 있을까.”
집으로 돌아온 첫 날, 카라마츠는 모두가 잠든 늦은 밤에 일어나 잠든 오소마츠를 따로 깨워내 불러냈다. 다행히도 이제 막 잠들려고 했는지 오소마츠는 아직 깨어있는 상태였다. 오소마츠는 자신의 머리맡에 앉아 간절한 시선으로 내려다보는 카라마츠를 잠시 아무 말 없이 올려다보다가, 이내 매정하게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리고는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싫어. 잘 거니까 저리 가.”
“오소마츠. 너한테 꼭 해야 할 말이 있어서 그렇다. 그러니까….”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싶든지 간에, 난 그걸 들어줄 생각이 없으니까 하지 마.”
“오소마츠!”
차가운 오소마츠의 반응에 초조해진 나머지 카라마츠의 목소리가 절로 커졌다. 그 때문에 오소마츠는 거칠게 이불을 걷어내고는 사나운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짜증이 가득 새어나오는 표정에는 혹여나 카라마츠로 인해 동생들이 잠에서 깰까봐 하는 걱정이 어려 있었다. 허리를 꼿꼿이 펴고서 카라마츠르 노려보던 오소마츠는 이윽고 몸을 돌려 먼저 방에서 나갔다. 카라마츠도 그것을 멍하니 지켜보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따라 나섰다.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마츠노 가의 대문 앞이었다. 얇은 잠옷 차림으로 나왔지만 낮의 열기가 아직 남아있는 여름의 밤은 미지근했기에 추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곳곳에는 비가 만들어낸 물웅덩이가 생겨났다. 물웅덩이 위로 두 사람의 인영이 어른거렸다. 오소마츠는 여전히 굳은 표정을 풀지 않았고, 그를 따라서 나온 카라마츠는 잠시 거리를 두고 머뭇거리다가 다시 오소마츠에게 말을 걸어보려고 했다.
하지만 그보다도 오소마츠의 말이 빨랐다.
“너 여기로 오기 전에, 유코 쨩이랑 만났어.”
뜻밖에도 그의 입에서 나온 이혼한 아내의 이름에 카라마츠는 방금 전에 자신이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를 잊어버렸다. 오소마츠는 여전히 카라마츠에게 등을 보이며 조금 굳어있지만 침착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걔가 한 번 만나자고 해서 만난거야. 그래서 사정도 어느 정도 들었고. 일단은 말해두는데, 나중에 그 녀석한테 뭐라고 따지지는 마. 걔도 나름대로 내 생각해서 그런 거니까. 하긴, 네가 올 걸 미리 유코 쨩한테서 듣지 못했다면 네가 현관에서 낯짝을 들이밀었을 때 무슨 짓을 했을지 나도 장담하지 못하겠는걸.”
“오, 오소마츠. 나는….”
“너 말이야, 대체 여기에는 왜 돌아온 거야?”
그 말을 한 뒤 오소마츠는 카라마츠 쪽으로 몸을 틀었다. 카라마츠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상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적대의 빛으로 날카롭게 서려있었다.
“혹시라도 이제 와서 헛소리를 지껄이면, 당장 짐 싸서 나가. 뭣하면 내가 네 엉덩이를 걷어차서 쫓아낼 수도 있어. 아, 아니면 엄마 아빠나 애들한테 사실대로 다 말할까? 그 편이 나가기도 훨씬 쉽잖아, 안 그래? 사실은 옛날에 우리 둘이 사귀었다가 헤어졌는데, 네가 뒤늦게 근친 호모에 눈떠서 멀쩡히 잘 살고 있던 예쁜 아내랑 이혼하고 우리 집에 기어들어왔다고….”
“오소마츠!!”
비명을 닮은 카라마츠의 외침을 듣고 나서야 오소마츠는 말을 멈췄다. 어둠 속에서도 식은땀을 흘리며 새하얗게 질려있는 카라마츠의 얼굴이 또렷이 보였다. 오소마츠는 잠시 고개를 들고 하늘을 살폈다. 오늘은 보름달인줄 알았는데 애석하게도 구름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다. 아, 얼른 들어가서 자고 싶은데.
“왜, 그런… 그렇게 되면 가장 힘든 건 네가 되지 않은가…!!”
“…무슨 헛소릴 하는 거야? 네가 언제부터 내 생각을 했다고.”
하. 오소마츠의 입술 사이로 비소가 터져 나왔다. 누구를 향한 비웃음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제 와서 이러는 거, 솔직히 진짜로 짜증나고 어이없거든? 이해를 해주려고 해도 할 수가 없으니 이거야 원. 그래, 바보 같은 동생을 위해 이 형님이 너그럽게 참아줘야지, 안 그러냐?”
“오소마츠, 무슨….”
“나, 이제 너 같은 건 전혀 좋아하지 않아.”
그 말에, 심야의 고요조차 숨을 죽였다. 간간히 들려오던 풀벌레의 울음소리도 잠잠해졌다. 하늘에 뜬 달과 별들은 행여나 지금의 적막을 깨뜨릴까봐 구름 뒤에 숨어 최대한 몸을 웅크렸다. 그리고 카라마츠는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심장을 어딘가로 추락시킨 것 같은 감각에 피가 식었다. 오소마츠가 했던 말은 카라마츠가 이곳에 오면서 은연중에 생각했었으나 애써 부정해오던 만약의 가정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만약의 상황도, 가능성을 기반으로 세운 가정도 아녔다. 엄연한 현실이었다.
“이제 더 이상 널 좋아하지 않을 거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야. 그러기로 했어.”
오소마츠는 카라마츠를 똑바로 마주하며 어떤 감정도 비치지 않은 말간 얼굴로 말했다. 카라마츠에게 고백했을 때와는 전혀 다른, 그 뒤에 숨겨진 감정의 흔적조차 없는 깨끗한 무표정이었다. 원망도, 미련도, 슬픔도 없이 자신의 감정을 담담히 고하는 오소마츠에게 남은 것은 고작 카라마츠를 향한 무관심이 전부였다. 이제 와서 카라마츠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고백을 해도, 이미 모든 것이 때늦은 일이 되었다. 그것을 실감하여 점점 어두워져가는 카라마츠의 표정과는 상반되게 오소마츠의 마음은 무척이나 편안하고 홀가분했다. 줄곧 가슴속에 담아뒀던 말을 당사자 앞에서 당당히 말하니 결심은 오히려 더욱 확고해졌다.
“그러니까 너도 구질구질하게 사람 성질 돋우는 짓 그만하고 알아서 잘 지내자고. 아, 그렇다고 너무 자주 말 걸거나 마주치지는 말고. 엄마, 아빠랑 동생들 앞에서만 형제처럼 지내자 이거지. 사실 솔직하게 말하면 네 면상 보는 것도 미칠 듯이 싫지만, 어쩔 수 없잖아.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
그럼 늦었으니까 이만 들어가서 자자고. 먼저 들어간다. 잘 자.”
그 말을 끝으로 오소마츠는 늘어지게 하품을 한 뒤 느긋하게 집으로 먼저 들어갔다.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불벌레들은 다시 합주를 이어갔다. 그러나 카라마츠는 여전히 그 자리에 못 박힌 채로 서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다. 모두가 잠든 평온한 밤의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남겨진 카라마츠는 그 날 한숨도 잠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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