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환생 AU.
그리움이란 멀리 있는 너를 찾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남아 있는 너를 찾는 일이다.
너를, 너와의 추억을 샅샅이 끄집어내 내 가슴을 찢는 일이다.
그리움이란 참 섬뜩한 것이다.
ㅡ신경숙, <외딴 방>
「언젠가 제가 죽을 때, 남은 사람들이 저를 그리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넋두리처럼 낮게 읊조리던 이사쿠의 작은 바람을 잣토는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그가 자신보다 먼저 죽은 뒤에도, 새로운 시대에 다시 태어나게 된 지금도 여전히 그 말만큼은 기억되고 있다. 고해성사를 하듯이 작게 속삭였던 그의 바람은 이유 모를 간절함이 느껴져서 더욱 잊지 못한 건지도 모른다. 잣토는 오늘따라 조금 더 씁쓸한 맛이 느껴지는 담배를 태우며 하늘을 올려봤다. 새파란 하늘은 어느 시대든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젠포우지 이사쿠는 그 시대의 기준으로 봐도 이른 나이에 요절했다. 인술학원을 졸업한 뒤, 닌자로 살아가기에는 불편해진 다리와 선한 심성이 발목을 붙잡는다는 사실을 스스로 납득한 이사쿠는 그 후로 전장의로서 살아갔다. 처음에는 자신이 오래 전부터 품어온 미래와 6년을 함께한 동급생들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간다는 것에 죄책감과 괴리감을 느껴 조금 방황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마음을 새로이 다잡고 자신이 앞으로 짊어질 사명을 다하기로 결심했는지 그 후로 더는 망설임을 보이지 않았다. 이사쿠의 졸업 후에도 잣토는 보건실의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들 때처럼 종종 이사쿠를 찾아왔다. 그의 거처가 항상 바뀌는데도 어떻게 알았는지 금방 이사쿠의 행방을 찾아내 모습을 드러냈고, 그럴 때마다 이사쿠는 마시 숨바꼭질을 하는 것 같다며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어주고는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거나 때때로 당고를 사서 나눠먹기도 했다. 연인들의 밀회처럼 그들의 만남은 은밀히 이어졌다. 우리들은 연인이었을까. 확답을 내리기에는 그 당시의 관계는 애매한 부분이 많았다. 하지만 명확히 결론을 내리고 싶지 않았기에 방치한 부분도 분명 있었다. 애매하고 불확실하기에 이런 관계를 길게 이어갈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저 서로가 만나는 것에 가치를 두었다. 이사쿠도 그리 생각했는지 단 한 번도 잣토가 자신을 찾아오는 이유에 대해 묻지 않았다. 그는 잣토가 처음 붕대를 요청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줬다. 그런 이사쿠의 포용에 이끌렸던 같다. 그렇게 몇 년 간 만남을 이어갔지만, 이별이라는 것은 예상조차 하지 못할 때 찾아왔다. 뜻밖에도 잣토에게 이별을 선고하러 온 인물은 이사쿠의 동급생 중 한 명이었다. 타치바나 센조라는 이름의 소년은 이제는 닌타마가 아닌 어엿한 프로 닌자가 되어 앳된 티를 벗어내고 성숙하면서도 닌자로서의 퇴폐함까지 갖추고만 그는 잣토를 보자 잠시 망설임을 보인 뒤에 이사쿠가 죽었다는 말을 전했다. 잣토는 어떻게 해서 죽었는지, 시신은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물어보지 않았다. 이사쿠가 죽었다. 그 사실 하나만 알면 충분한 일이었다. 센조도 그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아는지 가타부타 설명을 덧붙이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그런가, 죽은 건가. 이사쿠에 대한 마지막 사실을 깨닫게 되자 잣토는 이제는 옛날이 된 인술학원 시절에 이사쿠가 자신에게 들려준 바람을 떠올렸다. 마치 잣토의 앞으로 남긴 유언 같았다.
“생각해보면, 나는 자네를 위해 해준 것이 별로 없었지.”
잣토는 허공에 툭하고 그런 말을 던졌다. 그래서 잣토는 이사쿠를 위해 그의 바람을 이뤄주기로 했다. 그 후로 잣토는 평생을 걸쳐 이사쿠를 그리워하지 않았다. 그의 기억에서 이사쿠는 가장 깊숙한 곳에 진귀한 보물처럼 보관되었다. 젠포우지 이사쿠는 잣토 콘나몬에게 충분히 그럴 가치를 가진 유일한 존재였다. 이사쿠를 떠올리지 않는 덕분인지, 잣토는 정말로 이사쿠의 바람처럼 그를 그리워하지 않았다. 그를 따르는 부하들은 이사쿠의 죽음 이후 그의 언급을 일체 하지 않는 두령을 보며 안타까워 여기는 시선도 있었고, 역시 냉철한 두령답다며 존경을 표하는 시선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잣토가 이사쿠를 그리워하지 않는 이유를 완전히 파악하고 이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잣토는 이따금 정말로 자신을 포함해서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이사쿠를 그리워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질 때가 있었다. 그의 친구들도, 후배들도, 그의 도움을 받은 환자들도, 그리고 자신도. 그럴 때가 되면 이유 없이 화가 울컥 치밀어 올라 닥치는 대로 분풀이를 하고 싶었지만 이제는 들리지 않는 왼쪽 귓가로 이사쿠의 목소리가 환청으로 들려왔다. 그러면 잣토는 더는 화를 낼 수 없어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아무래도 자신이 알고 있는 소년은 겉보기와 다르게 무정한 면도 있을지도 모른다는 체념이 깃든 공허한 웃음은 오래 이어가지 못하고 새파란 하늘에 올라 흩어져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몇 년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잣토도 생을 마감할 수 있었다. 닌자답게 주군을 지키다 대신 목숨을 잃은 최후였기에 잣토는 후회를 남기지 않아도 되었다. 생애 마지막 기억에서 그가 떠올린 인물은 이사쿠였다. 오랜만에 눈앞에 그려진 이사쿠의 얼굴은 많은 세월이 흘렀는데도 변치 않아 잣토는 주책없이 감정이 울컥 솟아나 흘러나올 뻔 했다. 하지만 잣토는 마지막까지 눌러 참았다. 그는 끈질기게 이사쿠의 소원을 들어주고자 했다. 그의 인생은 마지막까지 젠포우지 이사쿠를 위한 것이었다.
수많은 세월이 흘러 이제 전쟁도, 닌자도 없는 평화로운 시대가 도래 했고, 잣토는 마치 전생에 그렇게 고생한 것에 대한 보상을 받은 것처럼 다시 태어나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게 되었다. 비록 전생 때와 마찬가지로 불의의 사고로 반신 화상을 입어 여전히 흉한 모습을 지니게 되었으나 죄 많은 자신이 이런 시대에 살아가는 것에 대한 대가로 여겨 큰 불만은 가지지 않았다. 그는 평범한 회사원이 되어 자신을 따르는 후배들과 함께 평화를 만끽하며 지냈다. 지금의 삶에 큰 불만은 없지만, 가끔씩 궂은일들을 겪어도 순박한 미소를 자주 지어주던 소년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를 그리워하는지 아닌지 잣토는 분간할 수 없었다. 과거에 그를 그리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강박감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지, 잣토는 이제 이사쿠의 얼굴을 떠올려도 씁쓸한 기분만 느낄 뿐, 그 이상의 감정을 가지지 못했다. 쓸쓸한 일이지만 차라리 잘 되었다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이 시대에 다시 만날지 어떨지 모르는 과거의 사람에게 기대를 가져서는 안 되었다. 얄궂게도, 잣토는 여전히 이사쿠의 그 말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잣토에게 낙인이자 족쇄로서 옭아매고 있었다.
“잣토 씨. 슬슬 거래처에 가봐야 할 시간입니다.”
옥상으로 통하는 출입문을 열고 자신을 향해 큰 소리로 말하는 부하 직원의 말에 잣토는 한 손을 설렁설렁 흔들어 보여주는 것으로 알겠다는 뜻을 전한 뒤 몇 모금 밖에 마시지 못한 담배를 그대로 다 마시고 비워버린 음료수병에 넣어 버렸다. 치이익 소리를 내며 꺼져버린 담배의 모습이 어쩐지 눈에 밟혀 잣토는 잠시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얼마 되지 않아 시선을 돌려 그대로 지나가던 길에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거래처와의 만남 뒤 그대로 퇴근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은 잣토는 그대로 서류 가방을 챙겨들고 회사를 나와 전철역까지 도착했다. 예전에는 쿠나이를 다루는 방법이나 적에게 들키지 않고 잠입하는 노하우를 몸에 익혔다면, 지금은 반복되는 일상을 통해 전철 표를 구입하거나 승강장까지 가는 길을 몸으로 익혀두게 되었다. 이것도 평화로움의 증거가 되는 걸까. 평화로운 것은 기대 이상으로 무료한 일이라는 배부른 감상까지 품으며 잣토는 승강장에 서서 전철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전철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인파 사이에서 잣토는 멍하니 서 있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올렸다. 새파란 하늘이 눈에 익숙히 들어왔다. 그러고 보면 그의 말을 처음 들었던 날도 이렇게 맑은 날씨였다. 함께 다과를 먹고, 차를 마시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주고받던 날. 그 시대에도 분명 작지만 평화로운 일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일상의 중심에는 항상 당연하다시피 이사쿠가 중심에 있었다.
「잠시 후, XX행인 열차가 들어오겠습니다. 승객 분들께서는 안전선 밖으로 한 걸음 물러나주시길 바랍니다.」
그래, 그렇게 생각하면 썩 불행한 삶도 아니었군. 그의 존재 하나만으로 자신의 인생에 대한 평가가 단번에 바뀌어 진다. 하지만 이제는 그게 다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허망함도 생겨났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는 얼굴조차 떠올리기 힘든 그 소년을 다시 만나기는 힘들…
“어이, 이사쿠! 조금 있으면 전철 들어오니까 서둘러!!”
“자, 잠깐만!”
기억이라는 것은 변덕스러운 것이다. 홀로 가만히 오래된 기억을 끄집어내보면 빛바랜 사진처럼 흐릿한 형체로 그려져 알아보기 힘든데, 그 대상의 주체가 눈앞에 나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선명히 바뀌어 진다.
그 말대로, 잣토의 기억도 선명히 바뀌어져 갔다. 빛이 드리워지는 것처럼, 그 날의 햇살이 따사로이 자신과 소년을 비췄던 것처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어떤 눈빛으로 자신을 봤는지, 어떤 입매로 호선을 그려왔는지, 어떤 목소리로 자신을 불렀는지 거의 기억해내지 못했던 소년이 자신의 눈앞에 기적처럼 모습을 드러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모든 기억이 선명히 되살아났다.
“…이사쿠 군?”
「누군가를 그리워한다는 건, 가슴 아픈 일이라고 생각해요. 저를 잊지 않아주고 소중히 기억해주는 건 분명 기쁜 일이지만, 저로 인해 남은 사람들이 슬퍼하는 건 더 가슴 아프니까요. 그래서 저로 인해 슬퍼하지 말아줬으면 좋겠어요. 저한테 있어서 소중한 사람이 저로 인해 슬퍼하는 일이 저에게는 가장 슬픈 일이니까요.
ㅡ그러니까 잣토 씨. 저를 그리워하지 마세요.」
그 날, 잣토는 이사쿠의 바람에 대한 의미를 물어본 적이 있었고, 이사쿠는 수줍은 얼굴로 조심스럽게 자신의 생각을 고백했었다. 그 말을 듣고 잣토는 참으로 닌자에 어울리지 않는 아이라 생각했었다. 죽는 그 순간까지도 남겨진 자들의 마음을 걱정하는 아이였다. 자신은 감히 헤아릴 수 없는 그 깊은 이타심이 너무나도 소중해서, 직시할 수 없을 만큼 눈부셨다. 그래서 잣토는 자신이 이사쿠의 바람을 이뤄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 이사쿠가 진정으로 걱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전부 이해하지 못한 채 감히 그런 분에 넘치는 결심을 한 것이다.
머지않은 곳에서 친구들과 함께 전철에 오르는 갈색 머리의 소년은 단 한 번도 잣토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소년에게 있어 잣토는 그저 수많은 인파들 중 일부분이었다. 소년은 친구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는 것이 그렇게 재밌는지 계속 웃으면서 이야기를 나눴고, 그 이외에는 관심도, 미련도 없는지 그대로 전철에 몸을 실어 떠나고 말았다. 소년을 태운 전철은 저 멀리 떠나버리고 말았고, 사람들이 많이 빠져나간 승강장에는 잣토만이 덩그러니 남겨져 떠나간 전철의 뒤꽁무니만을 지켜봤다.
그런가. 그래서 너는 그런 말을 나에게 남긴 건가. 잣토는 이사쿠가 염려했던 일이 무엇인지 진정으로 깨닫게 되었다. 그리움이라는 이름의 상처는 이렇게 아픈 것이기에, 전생의 일을 통틀어 여태껏 겪은 아픔 중에서 가장 괴롭고 지울 수 없는 상흔이기에, 이사쿠마저 감싸줄 수 없는 상처이기에 소년은 남자가 평생을 곯은 상처를 끌어안고 살아갈까봐 걱정되는 마음에서 그런 바람을 품은 것이었다. 그 의미를 잣토는 상처가 생긴 뒤에야, 너무도 많은 것이 늦은 뒤에야 깨닫고 말았다. 그 상처의 쓰라림에서 잣토는 자신이 꽁꽁 숨겨놓아 자각하지 못했던 이사쿠를 향한 그리움의 크기를 체감했다.
나는 너를 이다지도 많이 그리워했던 건가.
안도와 후회와, 그보다도 더 큰 그리움을 품으며 잣토는 천천히 승강장에서 발걸음을 돌렸다. 비척거리는 그의 발걸음은 마치 묵직한 무언가를 짊어진 사람처럼 갈피를 잡지 못해 자꾸만 헤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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