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날조 주의.
피아의 분별없이 치료해 준다는 의무 정신은 분명 올바르고 본받을만한 선행이지만, 위험한 일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기에 언제나 걱정이 든다. 케마는 언제나 이사쿠를 걱정으로 바라봤다. 단순히 위험에 처하지는 않을까하는 종류의 걱정은 아니었다. 물론 이사쿠의 불운과 전장이라는 장소의 특성상 뜻하지 않는 해를 입을까에 대한 걱정도 들었지만 케마는 기본적으로 이사쿠의 실력을 신뢰하기에 자신의 몸 정도는 너끈히 지킬 수 있다고 믿고 있다. 불운이 아니면 기술적인 면에서는 학년에서 가장 우수한 타치바나 센조를 앞설 정도다. 제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들다면 애초에 이 인술학원에 6년 동안 남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이사쿠의 신변을 걱정하는 이들은 아직 그의 진면목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어린 후배들뿐이었다. 케마의 걱정은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걱정이 싹튼 시작은 케마와 이사쿠가 4학년이 되었을 때, 그가 보건위원회에 소속된 의료 닌자로서 처음으로 동기들보다 한 발 앞서 전장으로 떠났을 때였다. 그 시기에는 5,6학년들의 합동 실습으로 다소 정신없었고, 선배들은 실습에 대한 각오를 다지는 반면 후배들은 아직 나가지 못한 실전에 대해 이것저것 이야기 하며 선배들이 어떤 실습을 할지, 어떤 활약을 할지에 대해 저마다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그리고 케마와 이사쿠를 포함한 4학년들은 다른 후배들과는 달리 선배들의 실습이 어떤 것인지 대략적이나마 알고 있어 밑의 후배들보다는 무게감 있는 의견들을 나눴다. 그리고 실습이 얼마 안 남았을 때, 니이노 선생이 한창 수업 중이던 4학년 하반에 찾아와 젠포우지 이사쿠를 데려갔다. 니이노 선생님을 따라간 이사쿠는 수업이 끝나고 저녁때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다가 해가 저물고 저녁 식사 시간이 지나서야 기숙사로 돌아왔다. 한참 늦게야 기숙사로 들어온 이사쿠의 모습에 안그래도 걱정되어 보건실로 가서 니이노 선생님에게 물어볼까 고민하던 케마는 재빨리 앉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사쿠를 맞이했다. 그리고 왜 이렇게 늦었느냐, 무슨 이야기를 나눴느냐는 케마의 속사포 질문에 이사쿠는 일단 진정하라며 케마를 달래고는 천천히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니이노 선생을 따라 교장실로 간 이사쿠는 교장 선생님으로부터 한 가지 제안을 받았다. 5,6학년 합동 실습 때 니이노 선생님을 도와 의료 닌자로서 특별 실습 참가를 하지 않겠냐는 제안이었다. 이사쿠의 바로 윗 학년 선배들은 실습 때문에 부상자들을 때 맞춰 치료할 수 없을 테고, 니이노 선생님께서도 혼자서는 벅찰 테니 조수 역할로 참가하라는 것이다. 많은 보건 위원 중에 이사쿠를 선택한 것은 이사쿠의 치료 기술이 뛰어났기에 니이노 선생이 추천했다는 말도 덧붙여졌다. 물론 참가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전적으로 이사쿠의 의견에 달려있고, 거절해도 충분히 괜찮은 일이었다. 선생님들도 아직 본격적인 실습을 나가지 않은 4학년을 전장에 데려가는 무모한 일을 피하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이사쿠는 조금 생각한 끝에 교장 선생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괜찮겠어?”
“응, 걱정 마. 무슨 일이 있으면 선생님들이 지켜주신다고 했고, 나도 이제 4학년 이니까 내 몸 하나 정도는 지킬 수 있어. 선배들에게 짐이 되지 않도록 열심히 해야지.”
그렇게 말해도 쉬이 이사쿠에 대한 걱정을 물리지 못하는 케마의 눈빛에 이사쿠는 케마를 달래는 의미에서 선연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괜찮아, 토메사부로. 틀림없이 괜찮을 거야.”
그리고 이틀 뒤, 이사쿠는 그렇게 특별 허가로 선배들의 실습에 따라가게 되었다.
실습에서 돌아오려면 족히 일주일은 걸렸다. 그동안 케마는 평소와 다름없는 나날을 보냈다. 이사쿠가 자신을 제치고 실습을 나간 것에 분통을 터트리는 몬지로를 상대하고, 자리를 비운 위원장을 대신해 용구위원회를 이끌어 나가고, 열심히 수업을 들으며 케마는 이사쿠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그 당시만해도 케마는 이사쿠의 신변에 대한 걱정만을 했다. 어디서 다치지는 않을까. 후방이라고 해도 불운으로 인해 무슨 봉변이라도 당하지 않을까. 그래도 선생님들도 계시니 괜찮지 않을까. 하는 걱정과 변명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져갔다. 케마는 얼른 이사쿠가 돌아오기만을 고대하며 하루하루를 흘려보냈다.
이사쿠가 돌아온 날은 예정일보다도 하루 늦은 비오는 날 밤이었다. 그 날 밤은 비가 쉴 새 없이 세차게도 내려서 빗방울 소리 때문에 쉽사리 잠들지 못해 어수선했다. 케마는 잠들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뜬눈으로 밤을 보냈다. 돌아올 날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비어있는 이사쿠의 빈자리가 더욱 눈을 감지 못하게 했다. 이사쿠. 텅 빈 잠자리를 바라보며 케마가 이사쿠의 이름을 그리움으로 속삭여 불렀을 때, 인술학원 입구 쪽에서 수런수런 인기척이 몰려들었다. 선생님들과 몇 번 들은 선배들의 목소리가 빗소리에 가려져 드문드문 들려오자 케마는 바로 이불을 걷어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사쿠가 돌아왔다. 케마는 재빨리 방에서 뛰쳐나가 맨발로 인술학원 입구까지 달려갔다. 이사쿠. 이사쿠. 혹시 다쳤을까? 많이 다쳤으면 어쩌지? 케마의 머릿속을 차지하는 것은 오로지 그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입구에 도착했을 때, 케마는 몰려있는 인파 사이로 가장 먼저 이사쿠를 발견했다. 다행히도, 이사쿠는 다친 곳 하나 없이 멀쩡했다.
하지만 멀쩡하지 못했다.
니이노 선생과 선배들의 손길에 떠밀려 스쳐지나가는 이사쿠의 난생 처음 보는 얼굴을 눈앞에 두고도, 케마는 일주일 넘게 쌓아둔 말들을 단 한 마디도 꺼내지 못했다.
실습 도중 죽은 선배들이 있었다. 그 중에는 이사쿠가 따르던 보건위원회의 선배도 한 명 있었다.
몰래 선생님들이 나눈 대화를 엿들은 센조의 증언에 따르면 이사쿠는 돌아오기 전 날 폭약을 맞고 절반 가까이가 날아가 버린 선배를 치료하려고 애를 썼지만 결국 살리지 못하고 허무하게 떠나보내야만 했다고 한다. 케마도 그 선배를 알고 있었다. 항상 상냥하고 후배들에게 친절히 잘해줘서 인기가 많은 선배였고, 불운한 이사쿠를 싫은 내색 하지 않고 항상 챙겨주며 귀여워해준 온화한 사람이었다. 케마는 이사쿠가 선배의 앞에 섰을 때 존경어린 눈빛을 반짝이며 얼굴을 분홍빛으로 물들였던 모습을 기억했다. 이제는 볼 수 없게 된 모습이라 여기니 아릿한 추억이 되어버렸다. 전사한 선배들의 장례 준비로 수업이 연기된 틈을 타 케마는 기숙사에서 요양 중인 이사쿠를 찾아갔다. 외상으로 크게 다친 부분은 없으나 직접적으로 참가하진 않았다 해도 실습을 눈앞에서 보고, 선배가 죽은 정신적 충격이 클 테니 한동안 기숙사에서 몸을 추스르라는 학원의 배려 덕분에 이사쿠는 이틀 동안 수업에 나가지 않고 기숙사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이사쿠, 들어갈게. 조심스런 목소리로 우물우물 말한 뒤 케마는 살그머니 문을 열어 안으로 들어갔다. 일주일 동안 텅 비었던 자리에는 이제 이사쿠가 이불 위에 멍하니 앉아있게 되었다.
“어서와, 토메사부로.”
이사쿠는 웃는 얼굴로 케마를 반겼다. 정신적 충격을 아직 전부 추스르지 않았음에도 이사쿠는 케마를 위해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이 애잔해 보여 케마는 차마 이사쿠의 미소에 자신도 미소로 답해줄 수 없었고, 그것이 무척이나 미안했다. 케마는 이사쿠의 옆에 앉았고, 이사쿠는 케마가 앉자마자 조금 전에 센조와 몬지로, 쵸지, 코헤이타가 차례대로 다녀갔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내일부터 자신도 수업에 참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재잘재잘 이야기 하는 이사쿠의 모습은 평소와 다름없어 보였다. 정말로 괜찮은 걸까. 이제 이사쿠는 전부 괜찮아진 걸까. 케마는 혼란스러운 심정이 들어 저도 모르게 한창 이야기 중이던 이사쿠의 말을 끊어버리고 말았다.
“그나저나 수업 내용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해서 걱정이야. 그래서 센조한테 도와달라고 부탁했는데….”
“정말로 괜찮은 거야?”
“응?”
“그런 일이 있었잖아. 그런데도… 정말로 괜찮은 거야?”
케마의 질문에 이사쿠는 말을 멈추고 한참동안 침묵만을 이어나갔고, 케마는 잔뜩 울상이 된 얼굴을 보이기 싫어 고개를 푹 숙인 채 주먹을 꽉 쥐었다. 바보. 이사쿠한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자신이 내뱉은 말을 후회했지만 이미 쏟아진 말을 다시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서로가 침묵만을 공유했을 때, 이사쿠는 천천히 손을 뻗어 케마의 주먹 쥔 손을 잡아다가 양 손으로 감쌌다. 따스한 이사쿠의 손길에 케마가 고개를 들어보니, 그곳에는 이사쿠의 차분한 얼굴이 보였다. 실습에서 돌아온 비오는 날의 그 황망한 얼굴과는 다르지만, 그 공허함은 똑같이 품은 얼굴은 먼젓번과 마찬가지로 케마가 처음 보는 이사쿠의 모습이었다.
“나는 앞으로도 보건 위원으로서 많은 사람들을 치료하고, 최선을 다해 사람을 살리겠지만 때로는 내 힘으로도 어쩔 수 없이 사람을 살리지 못할 때가 올 거야. 그리고 그런 순간은 항상 찾아올 테고. 그럴 때마다 매번 너무 힘들고, 슬프고, 내 무력함에 화도 날 테지만… 그래도 여기서 주저앉으면, 내 아픔만 신경 쓰고 있으면 그 사이에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르는 환자들을 그저 보내버릴지도 모르니까.
그러니까, 괜찮아, 토메사부로. 틀림없이 괜찮아. 틀림없이 괜찮아야 해.”
그 날, 이사쿠의 작은 각오와 아픔과, 고백을 들은 케마는 이사쿠를 끌어안고 펑펑 울었다. 그리고 이사쿠는 그런 케마를 조용히 토닥여 달래주었다. 자신을 대신해서, 자신을 위해서 울어주는 단짝친구를 위해 이사쿠가 할 수 있는 일은 이정도가 전부였다. 그래서 이사쿠는 계속 미안하다는 의미의 슬픈 미소만을 지으며 케마를 안아주고 달래주며 곁에 있어줬다.
그 후로 케마는 전장으로 나가 환자들을 치료하는 이사쿠를 보며 항상 걱정했다. 혹시나 이사쿠가 살리지 못한 환자가 있을까, 그 환자들로 인해 이사쿠가 또 한 번 마음에 응어리를 가지지 않을까. 늘 노심초사하며 이사쿠가 전쟁이 일어나는 곳으로 갈 때마다 케마는 항상 조심하라는 안부를 전했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 몸조심하라는 인사처럼 보이겠지만, 케마는 이사쿠의 마음을 걱정했다. 너는 온화하고, 타인을 우선시 여기는 상냥한 녀석이니 행여 그 마음이 다치고 무뎌져 그 상처들에 파 묻혀 종국에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게 될까 그것이 언제나 걱정된다. 그리고 그 깊은 걱정을 아는지 이사쿠는 케마의 배웅을 웃으면서 답해준다.
“괜찮아, 토메사부로.”
이사쿠의 대답은 항상 같았다. 그는 언제나 괜찮아야 했기 때문에. 그래서 자신이 이사쿠를 대신해 괜찮지 않은지도 모른다. 케마는 오늘도 환자를 만나 상처를 입을지도 모르는 이사쿠의 맑은 미소를 보며 한 박자 늦게 어쩔 수 없다는 미소를 짓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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