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2. 27 작성.
누구나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다.
예를 들면 부모. 어렸을 적에는 부모님의 얼굴이나 그와 관련된 추억들이 선명하게 떠올랐지만 지금에 와서 다시 생각해보면 부모님의 얼굴은 새까맣게 칠해져 있어서 보이지 않았고 추억은 짙은 안개에 가려져 있는 듯이 흐릿해져 있었다. 그러나, 그리움은 남아 있다. 예전에도, 지금도. 도이 선생님이 그리움은 만나지 못하기에 생기는 감정이라고 한다. 만날 수 없기에, 만나지 못하기에 생기는 감정. 그렇다면 부모에 대한 그리움은 영원토록 남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에 조소에 가까운 미소를 띄고 만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이미 그분들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어서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기에.
또 다른 그리움. 5년 동안 지속되었던 그리움은 부모의 그리움과 다른 형태로 고착되었다. 만날 수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불안함과 함께 자신 안의 그 사람은 그리움과 불안감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부모와 달리 만날 수 있다는 가능성이 그리움을 가중시키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그리움도 오늘은 잠시 지워버릴 수 있다. 5년 동안의 그리움이 잠시 쉼표를 새길 때가 온 것이었다.
그러한 생각을 하며 기다리고는 키리마루에게 저 멀리서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戀着
written by. Arcadia
서로가 서로를 관찰하며 기억속의 상대방을 지우고 새롭게 그려가고 있었다.
쵸지가 키리마루를 본 첫 인상은 '성숙함'이었다. 기억 속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철부지에 장난스러운 모습은 사라지고 더 길어진 머리카락에 어른의 면모가 남아있는 얼굴과 여유로움이 넘치는 미소, 적당히 근육이 붙은 몸은 그의 5년의 세월을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잘 자라주었구나. 쵸지는 안도의 한숨을 속으로 쉴 수 있었다. 키리마루가 쵸지를 본 첫 인상은 '관록'이었다. 과거에도 흉터가 얼굴에 남아있었지만 5년 사이에 흉터는 손과 얼굴에 한두개 정도 더 늘어난 것을 볼 수 있었다. 눈빛은 프로닌자의 눈빛을 띄어서 5년 전보다 관록과 경험이 묻어나 있었다. 변했다면 변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키리마루는 나카자이케 쵸지라는 인물의 자상한 분위기는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속으로 쉴 수 있었다.
일주일 전, 쵸지에게서 임무를 가기 전에 잠시 학원에 들른다는 편지를 받은 키리마루는 긴장과 흥분으로 가득 찬 일주일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쵸지가 학원에 오겠다는 날짜는 닌자학원의 방학 기간이었고 같이 기다리고 싶었던 아야카시마루는 본가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에 키리마루에게 안부인사를 대신 전해달라고 부탁하고 발걸음을 무겁게 띄어야 했다. 돌아갈 본가가 없었던 키리마루는 늘 그랬듯이 도이 선생의 집에서 지냈고 어제, 도이에게 "쵸지 선배와 만나고 싶습니다."라고 정직하게 대답하더니 도이는 살며시 웃으면서 교장 선생님에게는 위원회 일로 키리마루가 학원에 왔다고 전하겠다고 말하므로서 허락해주었다. 그리고 지금, 닌자학원 정문 앞에서 아침 일찍부터 기다리던 키리마루는 드디어 쵸지와 재회할 수 있었다.
"잘 지내셨어요, 나카자이케 선배."
"그래. 키리마루도 잘 지낸 것 같구나."
여전히 다른 사람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속삭이는 낮은 목소리. 키리마루는 그 목소리에서 안정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웠다. 모습도. 목소리도. 정문에서 계속 서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여러모로 불편했기에 키리마루는 도서실을 추천했고 쵸지도 오랜만에 도서실에 가고 싶었는지 선선히 응하였다. 닌자학원 안에 들어서서 도서실에 가는 지금까지 쵸지는 고개를 이리저리 둘러보며 오랜만에 보는 학원의 풍경을 살펴보았다. 키리마루도 쵸지가 곁에 있다는 점에 색다름을 느꼈는지 자신도 학원 풍경을 살펴보았다. 키리마루의 눈에는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이지만 쵸지의 눈에는 달라진 것이 확실하게 보였다. 하나하나가 쵸지에게는 색다르게 다가왔고 추억을 불러들였다. 쵸지의 눈빛이 다소 누그러진 듯한 변화를 보며 키리마루는 다시 예전의 1학년 닌타마가 된 기분이 들었다. 긴 복도를 지나 도서실에 도착한 두 사람은 문을 열어 안으로 들어갔다.
가장 먼저 느낄 수 있었던 것은 후각. 책들의 종이 냄새와 도서실 특유의 냄새가 두 사람의 민감한 후각을 자극했다. 방학철이여서 한동안 비워서 그런지 건조한 느낌도 들었기에 키리마루는 맨 먼저 도서실의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켰다. 그 사이, 쵸지는 어느틈엔가 책장 앞에 서서는 자신이 없던 사이에 들어온 책들을 하나하나 체크하였다. 프로닌자가 되었어도 책을 좋아하는 선배는 그대로구나. 키리마루는 생각했다.
대각선으로 보이는 쵸지의 모습에서 키리마루는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는 기시감을 느꼈다. 작은 키로 큰 키의 선배를 올려다보던 자신. 선배는 언제나 조용하였고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차분한 얼굴로 책을 읽는 선배의 얼굴을 보면 평소에는 수다스럽고 장난을 좋아하는 키리마루가 얌전히 있을 수 있었다. 떠들고 노는 것보다, 선배의 책 읽는 모습을 보는 것이 키리마루는 좋았다.
순간, 자신이 과거의 일을 회상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머쓱해진 키리마루는 괜시리 뒷머리를 긁적이고는 쵸지에게 차를 준비하겠다고 말하며 접수처 책상 밑에 있는 다기세트를 꺼내 준비하였다.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조용한 도서실 내를 울려퍼졌다. 책을 읽다가 키리마루의 말에 시선을 그쪽으로 돌린 쵸지는 아무런 표정을 짓지 않고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천천히 시선을 원래 있던 곳으로 돌렸다.
잠시 후, 책상 위에는 김이 오르고 있는 차가 담긴 두 잔이 각각 키리마루와 쵸지의 자리에 준비해 있었고 키리마루가 조심스럽게 두 손으로 잔을 잡아 먼저 차를 한모금 마셨다. 선배가 먼저 마셔야 하는 것인가 하고 잠시 생각했지만 워낙 목이 말랐다는 것과 쵸지 선배는 그런것에 신경 쓰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자신이 먼저 잔에 입을 대었다. 오랜만에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할까 고민하던 키리마루는 역시 도서위원회 이야기를 하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하고 말문을 열었다.
"선배, 저 도서위원장이 되었어요."
그 말에 쵸지는 고개를 살짝 들어 키리마루와 눈을 맞추었다. 의외라는 눈빛인지 축하한다는 눈빛인지 키리마루는 잘 알지 못하였다. 꿈보다는 해몽이라고 키리마루는 후자의 눈빛으로 받아들이고는 부끄럽다는 듯이 검지로 볼을 긁적이고는 계속 이야기 하였다.
"처음 그 이야기를 큐사쿠 선배ㅡ그 전까지는 큐사쿠 선배가 위원장이었어요ㅡ에게 들었을 때 사실 엄청 놀랐거든요. 저보다는 아야카시마루가 위원장에 어울리지 않을까 했는데 큐사쿠 선배도 아야카시마루도 제가 위원장인 것이 더 낫다면서 선생님들에게 추천했다고 하더라고요. 얼떨결에 위원장을 맡았지만 둘 다 절 위원장으로 인정해줘서 고마웠어요. 아야카시마루도 도서위원회에 있어요. 제가 워낙에 서툴다보니 옆에서 자주 도와주고 그래요. 어떨때 보면 제가 아니라 아야카시마루가 위원장 같다니까요.
아, 그러고보니 올해 새로 들어온 1학년닝 두 명 있어요. 한명은 사사키라는 녀석인데 얌전하고 똑부러져서 자기 일은 스스로하고 성실하고 착한데 너무 잘하다보니까 선배로서의 위엄이라고 해야하나, 가르치는 맛이 별로라고요. 그녀석을 보면 누가 선배고 누가 후배인지 분간이 안간다니까요.
다른 한 녀석은 아키야마라는 녀석인데 이사쿠 선배처럼 잘 넘어져요. 란타로처럼 안경을 썼는데 란타로보다도 눈이 안 좋고 집안사정이 안 좋아서 도수가 안 맞는 안경을 써서 자주 뭐에 걸려 넘어진다고 하더라고요. 덕분에 책을 운반하다가 돌부리에 걸려서 넘어저 책을 더럽힌다거나 문지방에 걸려 넘어져 지나가던 사사키를 넘어뜨린다거나... 덕분에 둘 다 티격태격하고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에요. 뭐, 싸우면서 정든다는 말도 있으니까 말은 그래도 둘 다 사실 친한거에요. 이러니 저러니 해도 같이 다니고 기숙사도 같으니까. 그리고..."
장황하게 자신과 주변 사람들 이야기를 하던 키리마루의 말이 갑자기 끊겼다. 말하던 도중, 자신 혼자서만 너무 떠들어 댔다는 것이다. 평소에도 말은 많았지만 이정도는 아니었는데, 라며 자신의 경솔함을 탓하였다. 오랜만에 만나는 선배를 눈 앞에 둬서 그런지 너무 들떠 있던 것이었다. 6학년이 되어서 이제는 어른이 다 된 줄 알았는데. 쵸지 앞에만 서면 자신은 언제나 1학년 닌타마라는 사실이 키리마루는 기쁘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속상했다. 말을 하면서 동시에 휘젓던 손을 얌전히 무릎 위에 내려놓고는 아까와는 정 반대로 조심스럽게 말하였다.
"죄송해요. 저 혼자서 많이 떠들었죠? 저... 나카자이케 선배는 하고 싶은 이야기 없으세요? 아니, 아무 이야기나 상관 없어요. 저도 선배 이야기를 오랜만에 듣고 싶으니까."
자신의 행동에 대한 변명이었지만, 쵸지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키리마루의 이야기는 진심이었다. 5년 동안 만나지 못한 만큼 당사자의 입을 통해서 그 사람의 인생을 듣고 싶어하는 것은 당연하다. 프로닌자로서의 활약상은 다른 사람들의 입을 통해 들었지만 사적인 이야기는 듣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키리마루는 눈 앞의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다.
키리마루의 말에 지금까지 묵묵히 그의 말을 듣기만 했던 쵸지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키리마루의 이야기가 더 재밌어."
아. 그 말에 키리마루는 속으로 탄식을 내뱉고는 아까 전보다 두배로 자신을 책망했다.
프로닌자. 닌자. 죽음과 삶의 경계를 넘나드는 존재. 그곳에는 웃음도, 즐거움도 아무것도 없었다. 있던 것은 절망과 죽음 뿐. 키리마루 또한 알고 있다. 그 또한 실습으로 전쟁터에 가보고, 사람을 죽여보기도 했으니까. 지천에 깔린 죽음을 보며 키리마루는 선배의 안위를 걱정했었다. 알고 있었는데. 나카자이케 쵸지라는 인물이 어떤 일을 하고 있고 어떤 곳에 있는지 자신이 잘 알고 있었는데. 그렇기에 쵸지에게 있어서 키리마루의 이야기는 듣기만해도 그립고, 따스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햇빛을 쐬고 있는 사람처럼 쵸지는 평소와 다르게 긴장을 풀고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자신의 두번째 경솔함에 키리마루는 죄스러움이 머리 위에 올라와 있는 것처럼 고개를 깊게 숙였다. 이게 아니었다. 좀 더, 아니 최소한 예전처럼 다정하고 즐거운 분위기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 때처럼, 무뚝뚝해 보이지만 자상한 선배와 함께 있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자상하고, 따스하고, 친절하고, 그리고ㅡ
"도서실 분위기가 변했구나."
"...네?"
"오랜만에 와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아늑한 느낌이 들어. 예전보다 더."
쵸지의 뜻밖의 화제전환에 키리마루는 얼빠진 표정으로 그의 이야기를 들을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의 이야기 보다는 도서실 이야기를 하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한 쵸지는 그 말을 마치고는 다시 도서실을 둘러보았다. 아늑함. 키리마루도 도서실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만 쵸지는 그 아늑함 속에서 추억을 찾고 있었다. 카운터, 책상, 의자, 책장, 책 하나하나에 담겨 있는 추억. 그 추억 속에서 쵸지는 안정감을 찾고 있었다. 죽음의 경계에서는 결코 손에 얻지 못하는 따스함. 쵸지는 눈 앞의 풀죽은 후배의 기운을 북돋기 위해서, 다른 이야기를 하기로 했다.
"예전부터, 키리마루는 나와 닮았다고 생각했어."
"네? 제가 나카자이케 선배를요?"
"그래. 너처럼 장난도 잘 치고 말도 많고, 잘 웃는 아이였지. 지금와서는 잘 기억이 안 나지만."
쵸지는 생각해본다. 어렸을 적, 아무것도 모른채 닌자학원에 입학해서 천진하게 웃던 자신을. 그 때의 자신은 같은 반의 코헤이타와 같이 지내면서 거의 악동처럼 지냈었다. 자주 넘어지고, 다치고, 실수만 잔뜩하고. 어쨌든 한 곳에 가만히 있지 못했던 것이 10년 전의 나카자이케 쵸지였다. 그런 그가 지금의 모습이 되었는가. 직접적인 계기는 3학년 때부터 익히기 시작한 줄표창과 그로 인한 상처 때문이지만, 기원을 더 거슬러 올라가자면 지금의 쵸지가 있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우연히 학원 안을 둘러보다가 발견했지. 도서실이 있다는 건 들었지만 얌전히 앉아서 책을 읽는 성격도 못 되서 잘 찾아가지 않았는데 그 때는 호기심에 무심코 안에 들어가봤던 것 같아. 아무도 없는가 싶어서 주변을 둘러보다가, 그 당시 도서위원회 위원장 선배를 만났지. 당시의 나랑 정 반대로 어른스럽고 지적인 사람이었어. 몇번 본 얼굴이었지만 그 때는 아무런 감흥 없이 지나치기만 했지.
그런데, 그 때는 달랐어. 책장 앞에 서서 책을 유심히 보는 선배의 얼굴을 한참이나 넋놓고 봤어. 지금 생각하면... 동경이었지. 어른스럽고, 지적이고, 차분한 모습이 인상 깊었어. 당시의 나랑 정 반대여서 그런지 몰라도, 다음날에 선생님을 찾아가 도서위원회를 들겠다고 말했지."
그 뒤에 코헤이타에게 체육위원회에 왜 들어오지 않냐며 잔소리를 조금 들었지만 말이야. 라고 쵸지는 말을 매듭 지었다.
거의 처음이라고 할 수 있는 쵸지의 장문의 말에 키리마루는 신기함과 색다름으로 멍하니 쵸지를 보았다. 쵸지의 어린 시절이라면 다른 6학년 선배들을 통해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당사자에게 어린 시절 쵸지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어쨌든 본인이든 아니든 키리마루는 여전히 과거의 쵸지와 현재의 쵸지를 겹쳐보지 못하겠다. 아무리 들어도 과거의 쵸지는 저 멀리 다른 나라 사람 이야기를 듣는 것 같으니까.
자신 답지않게 긴 이야기를 해서 그런지 목이 마른 쵸지는 차를 한모금 마셨다가 찻잔 안을 보았다. 서있는 찻잎. 운이 좋다는 미신을 떠올리는 그였다.
"예전에는 그랬지만, 지금은 스스로도 책을 읽는걸 좋아하고 있어. 그러다보니 많은 지식을 습득하고 싶었고, 여러 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졌지. 지금도 마찬가지야. 키리마루, 다른 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듣거나 읽은 적이 있니?"
"아, 몇 번 책으로 훓어본 적이 있어요. 실제로 우리나라 말고 다른 나라가 있다는 사실이 별로 와닿지는 않지만요. 아, 신베라면 실감하고 있겠지만요."
"...시간이 되었구나."
키리마루 뒤에 있는 창문에 들어온 해를 본 쵸지는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키리마루 또한 얼결에 같이 일어나고 말았다. 익숙치 않은 정좌를 오랜만에 하니 다리에 쥐가 난 듯한 느낌이 들어서 다시 한쪽 무릎을 꿇었다. 끙하는 소리를 내며 무안해진 그의 앞에, 굳은살과 흉터로 가득한 커다란 손이 눈 앞에 나타났다. 쵸지의 손이었다. 잡으라는 의미로 내민 손에 키리마루는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한 손을 뻗어 쵸지의 손을 잡았다. 투박하지만, 따듯한 손. 예전에 자신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었던 그 손이다. 따스함은 여전하구나. 다시 한번 느끼는, 좀 전보다 더 커진 그리움과 연모의 감정에 키리마루는 무의식적으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닌자학원을 나선 두 사람은 쵸지가 가기로 한 항구로 가기로 했다. 처음에는 쵸지 혼자서 가기로 했지만 어차피 할 일도 없는데 항구까지 바래다 주겠다고 제안한 키리마루 덕분에 쵸지는 오던 길과 달리 옆에 키리마루를 데리고 함께 걷고 있었다. 얼마만일까. 두 사람이 이렇게 나란히 걸어본 순간이. 왠지 모르는 감격에 키리마루는 쵸지의 얼굴을 살며시 보았다. 자신의 키가 많이 컸다고 자부하고 있고 실제로 현재 6학년들 중에서 장신에 속하는데 여전히 쵸지보다도 작다는 사실에 키리마루는 분하면서도 한구석으로는 기쁜 미묘한 감정을 느꼈다.
"그나저나, 항구에는 어쩐 일로 가세요?"
"나가사키의 데지마(出島)에 가야해서."
데지마는 나가사키(일본 큐슈 최서부에 위치한 현.)에 위치한 섬으로 쇄국 정치를 펼치던 무로마치 막부가 유이하게 포르투칼, 네덜란드에게 제한적 개항을 허가한 섬으로서 두 나라에서 흘러들어온 서양 문물들이 데지마에 모여들고 있었다. 상인들은 데지마에 들어올 수 있었지만 본토는 엄중한 경비로 인해 결코 들어갈 수 없었고 문물도 본토에는 데지마 섬에 비해서 적게 들어오는 편이었다.
언젠가 신베에게 남만(포르투칼의 옛 호칭)에 대해 여러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특이한 무늬와 촉감의 옷감부터 자극적인 향신료까지 전부 별세계의 물건으로 보였다. 그 때 이야기를 들으면서 외국 문물이라면 더 잘 팔리겠지 하는 생각에 신베가 가져온 물건들의 반 이상은 받아냈지만, 솔직히 생소하고 이런게 정말 필요한가 싶은게 키리마루의 본심이었다. 머릿속으로 자신의 남만 지식을 대충 정리한 키리마루는 질문을 이었다.
"데지마에는 어쩐 일로 가세요?"
"임무 때문에. 영주님이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는 상인이 있는데 그 상인을 만나 물건들을 몰래 밀입시키라는 임무를 내리셨어. 그리고 그쪽에 있는 상인이 닌자 한명이 필요하다고 해서 말이지......아마 장기적으로 머물러야 할거야."
그 말을 듣자, 키리마루는 자신의 발걸음이 이렇게 무거웠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키리마루는 알 수 있었다. 여기서 데지마 까지는 먼 거리로 예측된다. 그리고 쵸지조차 확신할 수 없는 임무 기간. 분명히, 몇년은 걸릴 것이다. 키리마루는 그렇게 확신했다. 묵직한 기분이 들었다. 아까전까지 선배와 함께 걷는 것이 그렇게 좋았던 자신이 먼 과거의 일처럼 느껴진다. 또, 그리움만 남겨지고 이 사람은 떠나는 것인가.
연모했다. 말하지 못했지만 키리마루는 쵸지를 연모하고, 사랑한다. 그것이 언제부터 생긴 감정인지 짐작할 수 없지만 어렸을 적의 동경이 이성적 감정으로 변모된 것은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언제, 어떤 경위로 좋아하게 되었는지 알지 못해도 된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이 쵸지를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키리마루는 그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조차도. 어째서인가, 하고 물어보면 키리마루는 확언을 할 수 없었다. 단지, 지금 와서 고백하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쵸지는 닌자다. 그리고 자신도 언젠가 닌자가 될 몸이다. 죽음을 눈 앞에 놔두는 몸으로 사랑을 말할 수 없다. 감정을 말하면 불확실한 미래가 눈 앞에 펼쳐진다. 이 시대에서 닌자에게 사랑이란 최대의 사치다. 내일 살아남을지 확실치 않은 몸으로 사랑을 외칠 수가 없다. 키리마루는 그렇게 생각하고 가슴에 깊은 응어리를 남기는 것으로 감정을 묻어두었다. 그리움을 끌어안고 울어본 적도 있다. 후회도 했다. 차라리 말해볼까 하는 갈등도 겪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키리마루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지금 와서는 단지, 이 사람이 이 시대에 무사히 살아 남아 주었으면 하는 바람 뿐이었다.
풀 죽은 키리마루를 내려다보며 쵸지는 무심결에 손을 들어 올리다가 다시 내렸다. 이제는 예전처럼 후배라는 이유로 쓰다듬어 줄 수가 없었다. 과거, 키리마루는 쵸지의 손을 보고 따스하다고 말했다. 포근하고 따스한 손. 그 손에서 키리마루는 따스함을 보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본 그 손은 피투성이로 가득한 추잡한 손이었다. 죽이고, 또 죽이는 손. 단지 죽이는 것밖에 못하는 손. 누군가를 쓰다 듬어주기 보다는 찔러 죽이고 누군가의 손을 잡아주기 보다는 목을 졸라 죽이는 손이었다. 후배의 말처럼 다정하지가 않다. 죽이는 것밖에 못하는 한심한 손이었다.
그렇기에 쵸지는 이제 키리마루의 머리를 쓰다듬어 줄 수가 없었다. 더러운 손으로 사랑하는 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줄 수 없다. 손을 잡아줄 수 없다. 끌어안아주기는 커녕 만질 수도 없다. 도서실에서 손을 내밀고, 그 손을 붙잡아 주었던 키리마루였지만 쵸지는 속으로 말하고 싶었다. 그 손은 만져서는 안 되는 손이라고. 소중하기에, 사랑하는 이만큼은 깨끗한 존재로 남기고 싶었다.
그러나 시대는 이런 아이에게 죽음을 강요한다. 앞으로 반년 뒤에 이 소년은 자신과 같은 손을 지닐 것이다. 그것은 싫다. 이 아이의 손만큼은 더럽히지 않고 따스함만을 간직하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자신은 소년을 지킬수도, 막을 수도 없었다. 좋아한다, 속으로 되뇌어 보지만 자신의 말은 영원토록 후배에게 닿지 않는다. 지금 와서는 단지, 이 사람이 이 시대에 무사히 살아 남아 주었으면 하는 바람 뿐이다.
말 없이 길을 걸어 드디어 항구에 도착했다. 커다란 배가 가장 먼저 눈에 띄었는데, 사람들이 여러 상품들을 싣는 것을 보면 무역선으로 보였다. 데지마는 물건을 구하는 곳도 되지만 파는 곳도 되니까. 쵸지는 자신이 상인으로 변장하고 무역선을 타고 데지마에 들어갈 것이라고 한다. 저 멀리서 배가 조금 있으면 떠날 것이라는 안내가 들려온다. 키리마루는 다시 한번 기시감을 느낀다. 졸업식 날, 닌자학원 정문 앞에서 작별을 나누는 키리마루와 쵸지의 모습. 다른 점이라면 장소와 키리마루가 울고 있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키리마루도 이제는 이별로 울지 않는 나이가 된 것이다. 이제 가봐야 한다는 말을 하고 키리마루에게 등을 보이며 걸어가는 쵸지. 다시, 그리움이 다가온다. 이대로 괜찮은 것인가. 이대로, 괜찮은 것인가.
"쵸지 선배!"
막 배에 올라 타려는 쵸지를 붙잡는 키리마루. 쵸지 선배. 그 호칭을 5년 전 졸업식 이후로 처음 들었다는 것을 쵸지는 깨달았다. 바닷 바람이 두 사람 사이의 공간을 휘저었다. 두 사람의 긴 머리카락과 키리마루의 스카프가 짠내에 물들여지고 있었다.
무엇을 이야기해야 하는 것인가. 잠시 입을 열었다가 닫은 키리마루는 다시 입을 열었다. 자신이 할 말은, 정해져 있었다.
"다음에는, 선배가 좋아하는 팥떡 준비할께요."
기다린다. 결코 닿지 않을 마음이지만 키리마루는 언제나 기다리기로 했다. 이 시대에,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몸이지만 키리마루는 그럼에도 기다리겠다고 말하였다. 그 말이, 쵸지에게 놀라움과ㅡ고마움을 동시에 선사해주었다. 연모. 서로가 감정을 숨기고 있지만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시 기다리면, 다시 만날 수 있다.
"그래."
살며시 웃어주는 쵸지의 미소를 태우고 배는 목적지를 향해 달려갔다.
떠나는 배를 두 손을 깍지를 껴서 머리 뒤로 넘기고 평소의 여유로움으로 보는 키리마루. 멀리, 쵸지를 실은 배가 수평선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항구에 가만히 서있었다. 마침내 배가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자 키리마루는 그제야 발걸음을 뒤로 돌리고 걸었던 길을 다시 되짚으며 돌아간다.
연모하고 있어요. 마지막까지 전하지 못한 말이었지만 키리마루는 상관 없었다. 다시 만날 수 있다. 그 사실만으로도 키리마루는 그리움을 벗 삼아 기다릴 수 있다.
돌아가는 길에 팥떡을 사서 도이 선생님과 같이 먹자. 키리마루는 오랜만의 지출을 생각하며 저녁노을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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