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닌타마 덕심이 차올라서 써보는 글. 의식의 흐름대로 써서 그런지 감수성 터지는 잣토씨가 나왔습니다(...)
희미하게 식어가는 싸구려 화약 냄새, 비린내가 심하여 헛구역질을 나게 하는 오래된 피 냄새, 매캐한 먼지구름 고막을 찢는 포탄 발사음, 멀리서 들려오는 악에 찬 비명소리와 가까이서 속삭여지는 반송장의 신음소리. 이 모든 것들이 무엇 하나 너와 어울리지 않는데도, 너는 오늘도 그 중심에 홀로 앉아 죽음으로 넘어가려는 무지하고 가엾은 자들을 생으로 넘겨주는 자비를 베풀어주고 있었다. 그 모습은 참으로 고결하고 숭고하여 이미 오래 전에 온갖 더러운 것으로 점철된 나는 감히 다가갈 수 없었다. 그래도 나는 발걸음을 내딛어 너에게 다가갔다. 네가 품고 있는 이상이 나 같은 것이 범접할 수 없을 만큼 고고한 것이어도, 너의 사랑스러움에 다가가 곁에 머무는 것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안녕, 이사쿠 군.”
소리 죽인 발걸음으로 몰래 너의 지척에 다가가서야 나는 너의 이름을 불렀다. 내 기척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정신없이 붕대를 감고 있던 새하얗고 둥근 어깨가 놀란 듯 작게 떨리더니 비로소 고개가 내가 서 있는 곳으로 돌려졌다. 드디어 마주하게 된 너의 얼굴은 여전히 앳되었고, 그에 어울리지 않게 고생과 피로의 흔적이 덕지덕지 묻었으나 그럼에도 구김살 하나 보이지 않았다. 기억 속의 너와 지금 눈앞의 있는 네가 그대로 일치하여 작은 안도를 얻을 수 있었다. 너는 앞으로 얼마나 이렇게 변함없는 모습을 유지할 수 있을까. 먼 미래를 생각하기에는 지금의 순간만을 충실해지고 싶었기에 생각이 퍼져나가는 것을 막아냈다. 인사 다음으로 한쪽 밖에 드러나 있지 않는 오른쪽 눈을 활처럼 둥글게 휘어서 눈웃음을 지어주자 뒤늦게야 너는 내가 누군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는 환히 웃으며 반겼다.
“오랜만이네요, 잣토 씨.”
나보다도 더 곱게 접혀진 웃음이 참으로 애살스러웠다. 그 안에서 나를 만나서 진심으로 반갑다는 마음이 고스란히 보여서 참으로 좋았다. 그 반가움과 미소를 매번 보고 싶어서 나는 항상 너를 만날 때마다 내가 먼저 나서서 말을 걸게 된다. 하지만 지금은 보건실에서 만났을 때와 같이 여유롭게 너의 미소를 관찰하고 만끽하고 있을 때는 아니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전쟁터의 소리를 통해 전쟁의 이동 방향을 짐작해봤다. 아직은 여기서 제법 멀리 있지만, 언제 이곳까지 몰려들어올지도 모른다.
“너는 여전하구나.”
“네.”
너는 여러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내 말을 그저 한 마디로 정리해서 답했다. 정말로, 젠포우지 이사쿠는 여전한 모습이었다. 실습을 위한 위장용으로 입은 새하얀 승려복도, 손에 들고 있는 붕대도, 피아 구별 없이 일렬로 누워 신음소리를 흘리며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패잔병들도. 굳이 다른 점을 꼬집는다면 패잔병의 얼굴들이나, 너와 나의 관계 정도일까. 그러나 그런 특이사항들을 제외하면 처음 만났을 때의 모습 그대로라 기시감에서 찾아낸 그리움과 향수가 물에 번져나가듯 짙게 흩어졌다. 너무나 예전 그대로의 모습이라 앞으로도 너는 그 모습 그대로를 간직할 것이라는 불안한 확신마저 생겨든다. 그리고 그 안에서 피어나는 어찌할 방도 없는 애착까지.
“이번에도 실습?”
“네. 이제 돌아가야 하지만 도저히 그냥 갈 수는 없어서요.”
잔잔히 스며드는 너의 목소리는 참으로 젠포우지 이사쿠 다운 말이었다. 그 말대로 너는 다치거나 죽어가는 이를 보면 절대로 지나치지 않는다. 차별 없는 이타심과 보건위원장의 숭고한 의무감으로 기꺼이 죽음의 늪에 질척이며 빠져들어가는 자들에게 손을 내민다. 그리고 나 또한 그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그리 생각하니 네가 나를 저기 누워있는 일개 패잔병들과 같은 취급을 한 게 아닌가 하는 불안과 약간의 화가 솟구쳤으나, 그것을 밖으로 표출해내는 것을 관두었다. 나는 저들과 달랐다. 한 번 상처를 치료해주고 헤어지게 되면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관계가 아니었다. 그리 생각하니 마음에는 다시 평온이 찾아왔다.
“그래도 여기에 더 오래 있다가는 전쟁에 휘말리게 될지도 모른다고. 아직은 괜찮지만 방심했다가는 병사들 발에 짓밟혀, 이사쿠 군.”
“알고 있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저도 제 몸 하나 정도는 충분히 지킬 수 있어요.”
그래. 네 실력이라면 이미 잘 알고 있다. 네가 가지고 있는 자부심만큼 너는 불운이라는 핸디캡을 안고서도 제 몸 하나 정도는 너끈히 지켜낼 수 있는 실력을 가지고 있다. 그래도 걱정이 된다. 어쩔 수 없이 눈에 밟힌다. 보호본능을 일으킨다는 말은 이럴 때 쓰이는 건가 싶었다. 너를 보면 너의 실력에 대한 신뢰와 상관없이 그저 지켜주고 싶게 된다.
다행히도 부상 치료는 다 끝나게 되었는지 너는 짐을 챙겨들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등에는 상자를 메고, 한 손에는 석장으로 땅을 짚는 모습이 영락없는 어린 승려였다. 백색의 옷은 흙과 피로 더럽혀져 본연의 색을 찾을 수 없게 되었더라도 너와 잘 어울렸다. 하지만 그 옷을 입은 너를 볼 때마다 너무나 잘 어울리기에 네가 앞으로도 그 옷을 입고 다니지는 않을까 하는 기우가 생겨든다. 그 옷을 입은 너는 감히 아름답다고 표현할 만큼 딱 맞지만, 오래 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럼, 잣토씨 말씀대로 이만 가보도록 할게요. 다음에도 또 보건실로 오실 건가요?”
“아아. 조만간 시간 내서 찾아가도록 하지.”
“기다리고 있을게요. 마침 향이 좋은 차를 얻었거든요.”
너는 가벼운 목례를 끝으로 나에게서 몸을 돌려 인술학원으로 향하는 귀로(歸路)에 발을 내딛었다. 나를 기다리겠다는 말. 다음의 만남을 기약하는 미래의 약속. 그것이면 충분했다. 머지않아 다시 만나서 차를 마시자는 약속 하나만으로, 너와 나 사이의 미래는 그것으로 족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미래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너와 내가 이뤄내야 할 일은 살아남는 것, 그것 하나뿐이었다. 차하나 얻어 마시는 것은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일이었지만, 너와 다시 만나기 위해서라면 그 정도 수고를 감수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와와거리는 함성소리가 아득히 멀어져갔다. 다행히도 전쟁의 이동 방향이 네가 가는 방향과 반대로 멀어져갔다. 그렇다면 내가 여기에 더 머물 필요는 없다. 나는 아직 못 다한 임무를 마무리하기 위해 부하들이 기다리고 있는 장소로 향했다. 전쟁터에는 여전히 화약 냄새와 피 냄새와 시체 썩는 냄새가 들끓었지만, 기이하게도 코끝에서 맡을 수 있는 것은 네가 대접해주기로 약속한 차의 은은한 향이었다.
꼭 너를 닮은 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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