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요? 사람은 결국의 결국에는 타인에게서 사랑받고 싶어지는 법이에요.
가족이 아무리 자신을 사랑해준다고 해도 그건 아무런 증거도 될 수 없으니까.
내가 나 자신만으로 사랑받을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것은 타인의 애정밖에 없어요.
ㅡ윤지운, 「시니컬 오렌지」 中
사랑은 철저히 이기적인 것이다.
사랑이라는 가장 불가사의한 추상적 개념을 두고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지론을 내세워 주장했다. 어떤 사람은 사랑은 인류가 가지고 있는 가장 숭고한 것이라며 섬겼고, 어떤 사람은 사랑이 있기에 사람은 추하게 타락한다며 경계했다. 현대에 와서도 사람들은 사랑을 두고 갈팡질팡 헤매면서 명확한 의미를 찾아내지 못했기에 다양한 주장을 내세우고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사랑을 낭만의 상징이자 가장 고결한 감정이라는 불가침영역으로 지정하여 그것이 지니고 있는 자비와 숭고, 그리고 이타심을 피력했다. 사랑이 있기에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다고, 사람은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기에 사랑이라는 감정을 품고서 자신보다도 더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존재를 발견하게 된다고.
내 입장에 빗대어 그 주장들에 대해 한 마디 하자면, 전부 좆같은 헛소리들이다.
사랑은 철저히 이기적인 감정이다.
여기, 그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사례가 있다. 마츠노 가의 차남, 마츠노 카라마츠.
그는 만인에게 꿈과 희망을 선사하는 것과 세계평화를 장래의 꿈이라고 내세우는 안쓰러운 녀석이다. 그는 타인에게 외면당하고 제 형제들에게 물리적 폭력까지 부당하게 당할지언정 타인을 미워하거나 외면하지 못한다. 생판 처음 보는 상대가 곤경에 처해있으면 제 나름의 방식대로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고-물론 그 방법이 한참 어긋나있어 되려 역효과나기 일쑤였다-특히나 저와 한 배에서 태어난 쌍둥이 형제들에게는 그야말로 지극정성이었다. 그는 살면서 결코 누군가를 미워한 적이 없었고, 보답 받지 못하는 사랑이라 해도 그것도 사랑이라며 겸허히 받아들이는 성인군자였다. 이런 척박한 현대에 아가페를 몸소 실현시키는 희귀종인 셈이다. 다만 그 방식들이 하나 같이 그의 하나 뿐인 형의 갈비뼈를 대 여섯 개를 부러뜨리고도 남을 만큼의 파괴력을 지녀 그의 아가페의 위대함이 제대로 드러나지 못한다는 점이 지극히 유감스럽지만.
여기서 반론이 들어온다. 저렇게 타인에게 헌신적인, 사랑의 이타심을 가장 잘 실현시키는 그가 어째서 그와 대척점인 사랑의 이기심을 대변한다는 건가. 음, 충분히 나올 수 있는 반론이다.
자, 그럼 여기서 자세한 설명을 위해 태어나서 지금까지 20년 넘게 그와 한 지붕 아래에 살면서 꾸준히 관찰을 이어온 인물을 모셔보도록 하겠다. 마츠노 가의 사남, 마츠노 이치마츠이다.
마츠노 이치마츠는 강력하게 주장한다. 쿠소마츠, 그러니까 마츠노 카라마츠는 비겁하고 치사할 만큼 철저한 에고이스트(자기중심 주의자)이다.
그는 먼저, 사랑의 이타성을 부정했다. 일반적으로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그 상대에게 헌신하게 된다. 그 사람과 함께 있고 싶어서, 행복해지고 싶어서, 소중히 대해주고 싶어서라는 갖은 이유로 상대를 손에 넣고자 노력한다. 여기서 이치마츠는 교묘하게 감춰진 사랑의 이기성을 끄집어낸다. 상대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은 것도, 소중히 대해주는 것도, 함께 있고 싶어하는 것도 결국에는 자기만족으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상대를 위해서라고 말하고 있지만 근본을 따지고 들어가면 자신의 행복과 만족을 충족시키기 위해서였고, 그를 통해 자신의 애정에 취해버리고 싶어서기도 하다. 상대가 행복하면 자신이 행복해지니까,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랑 함께 있고 싶으니까, 좋아하는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으니까. 알고 보면 자신을 위한 모든 행동들이 타인을 위한 것이라며 교묘히 포장된다. 사랑은 무서울 정도로 영악한 감정이었다.
결국, 사랑은 어떤 특정 대상이나 사물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닌, 그것들을 사랑하는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자기애의 연장선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누군가를 도와주면 자신이 훌륭한 사람이 된 것 같아 만족스럽고, 아무 조건 없이 누군가에게 헌신한다면 그런 자신이 스스로가 봐도 우러러 볼 만큼 존경스럽다. 사랑에 빠져 애를 태우는 소설 속 주인공에게 감정 이입을 할 수 있는 이유는 거울을 보는 자신에게 도취되는 것과 비슷한 원리였다.
마츠노 이치마츠는 오랜 시간에 걸쳐서 비밀리에 실행한 관찰에서 그런 결론을 도출해냈고, 그것을 검증하고자 몇 번의 실험을 거쳤다.
자신을 격려하는 말을 하는 그의 멱살을 잡아봤고, 그가 아끼는 선글라스를 친구(고양이)의 도움을 빌려 깨뜨려 봤고, 그가 뻔히 있는 자리에서 서슴없이 험담을 했고, 도는 넘지 않는 선에서 폭력을 행해봤고, 비방과 욕설로 악다구니를 질러보기도 했다.
그럼에도 카라마츠는 여전히 이치마츠에 대한 호의적인 태도를 거두지 않았다. 강인한 멘탈과 차남이라는 지위를 기반으로 형성된 동생에 대한 너그러움과 인내심으로 카라마츠는 이치마츠를 관대하게 포용했다.
그에 대한 이차마츠의 감상을 빌려 말하자면, ‘역겹다’였다.
이치마츠는 자신의 실험으로 카라마츠의 에고(ego)가 더욱 공고해진 것을 눈치 챘다. 자신에게 적대적으로 나오는 반항기 동생을 그럼에도 사랑해주는 형이라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 형제애인가! 카라마츠는 이치마츠의 그런 모습까지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모습마저 받아주는 자신의 모습을 더욱 애정 하였다. 이치마츠는 그런 카라마츠를 절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여기서 잠깐 이치마츠에 대해 언급하자면, 그는 카라마츠와 달리 자기애가 완전 바닥인 인물이었다. 마츠노 가 안에서 알고 보면 가장 냉정하고 객관적인 시선을 가진 그가 살면서 꾸준히 자기 자신을 분석하고 관찰한 결과로 내린 타이틀이 ‘타지 않는 쓰레기’인 만큼, 그는 자신을 전혀 사랑하지 않았다. 오히려 경멸이 더 적합할 정도니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할까. 그래서 이치마츠는 카라마츠를 용납하지 못했다. 자신과 정 반대로 자기에가 넘쳐나고, 그것을 타인의 애정으로 멋대로 착각하여 전하는 그의 모습이 치가 떨릴 만큼 가식적으로 비춰졌다. 사랑이 자기애에서 형성되는 것이라면, 미움 또한 자기혐오에서 파생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치마츠는 카라마츠가 자신을 애정 하는 만큼 미워했다. 그의 자기애를 받아들이지 못해 외면했고, 거부했고, 그 곱절만큼 미움을 되돌려줬다. 사랑으로부터 탄생한 미움은 그 애정의 깊이만큼 지독했다.
그래서 이치마츠는 일찍 결론을 내렸다. 비뚤어진 에고이스트인 자신이 쿠소마츠를 좋아할 일도, 저 지독한 자기애에 심취해있는 에고이스트가 자신을 좋아할 일도 전혀 없을 것이라고.
그러나 마츠노 이치마츠가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으니, 미움과 애정은 서로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누군가를 미워하기에 사랑하고, 사랑하기에 미워한다. 사람은 누구나 어느 하나가 부족한 채로 이 세상에 던져진 불완전한 존재다. 카라마츠는 미움이 부족했고, 이치마츠는 사랑이 부족했다. 그리고 누군가와 함께 한다는 것은 자신에게서 부족한 것을 상대에게서 찾아 메우는 행위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에 누가 비난을 던질 수 있을까.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기심을 지니고 있었다. 자신을 미워하는 것도, 사랑하는 것도 타인이 내세운 잣대가 아닌 스스로가 정하는 것이다. 자기만족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더라도 그마저도 우리들이 숭고하게 여기는 사랑이었다.
그러니 마츠노 가의 장남 마츠노 오소마츠 가라사대, 우리 집 차남과 사남은 답이 없는 근친 호모 커플이라 하지 않은가.
그렇기에 사랑은 운명의 또 다른 수식어라는 말처럼, 그들의 관계 또한 운명이라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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