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약중독자의 이야기.
계기는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침투되어 들어왔다.
과거의 나는 상당한 문제아로 알려져 있었다. 불우한 가정환경을 면죄부 삼아 어린 나이에서부터 탈선을 시작한 나는 누구도 말릴 수 없을 정도의 가속도로 추락하게 되었으며 경찰들도 내가 구제불능이라는 사실을 오래 전에 깨닫고는 체포하는 것을 포기했을 정도였다. 사회의 쓰레기. 자칭 올바르게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나에게 멋대로 붙여준 호칭. 그리고 스스로 인정한 호칭에 걸맞은 쓰레기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 시기에, 계기가 찾아온 것이었다. 계기를 제공한 인물은 친구의 소개로 알게 된 마약상이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마약을 크게 즐기는 편이 아니었다. 어울리는 패거리들과 함께 파티를 벌일 때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피워본 적 이외에는 개인적으로 찾지 않았던 나는 친구가 좋은 마약을 찾아냈다면서 억지로 끌고 간통에 만나게 되었다. 골목길에서도 가장 구석에 위치한 자리에 앉아있는 마약상은 검은 후드로 얼굴을 가린 채 우리를 맞이하였다. 마약상이 나에게 내민 것은 붉은색과 푸른색이 칠해진 캡슐 형태의 알약이었다. 가루나 스카치테이프 형태로 된 기존의 마약들과는 달리 그것은 겉보기로 봐서는 약국에서 흔히 파는 일반 약들처럼 보였다. 마약상은 말했다. 이 약은 다른 마약들과는 다르다고. 특별한 경험을 하게 해주는 마약이지만 그 대상은 지극히 한정적이라고. 나는 그 말을 깊게 듣지 않았다. 어차피 약을 팔아넘기기 위한 입에 발린 말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이 약을 통해 특별한 경험을 하고 싶으면 약에게 선택 받아야 합니다. 그 말까지 듣게 되자 나와 친구는 큰 소리로 웃으며 마약상의 말을 비웃었다. 세상에, 약에게 선택을 받다니! 아무래도 이 마약상은 어지간히 약에 중독된 것으로 보였다.
마약상은 제법 싼 값에 알약 하나를 넘기며 경고했다. 이 약은 아주 독해서 한 번 먹으면 절대로 벗어날 수 없으며 설령 약을 그만 먹는다고 해도 중독은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고. 그 경고를 나와 친구는 무시했다. 어차피 마약이라는 것 자체가 위험했으며 우리의 몸은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상황이다. 어차피 몸도, 마음도, 인생도 망가졌는데 여기서 더 망가질 수 있겠는가. 나와 친구는 잔말 말고 약이나 내놓으라는 식으로 마약상의 말을 맞받아치고는 돈을 지불하고 약을 받아 골목길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그 날 밤, 나는 금단의 약을 거리낌 없이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증상은 다음날부터 즉각 나타났다. 반면 친구는 엉터리 약이었다며 욕을 있는 대로 쏟아 부으며 마약상에 대한 분노를 표출했다. 나는 친구의 말에 굳이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 당시에 나타난 증상은 정말로 사소한 것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바다 소리가 들렸다. 밀물과 썰물이 번갈아 가며 울리는 파도 소리와 일렁이는 물결 소리가 잔잔하게 귓가에서 울렸다. 정말로 내가 바다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면서 나는 제법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귀에 거슬리기는 하지만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어렸을 적부터 바다를 좋아했다는 점도 이유 중 하나가 될 것이다. 그 다음에는 바다내음을 맡을 수 있었다. 코를 자극하는 짠내에 이렇게까지 생생한 감각은 처음이라며 어린아이처럼 좋아했었다. 그러나 마약이 주는 환각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어느 날, 평소처럼 길거리를 걷다가 쇼윈도에 비춰진 내 모습에 기겁을 하며 물러났다. 유리에 비춰진 내 모습은 지금껏 보지 못했던 낯선 것이었다. 불처럼 타오르듯이 위로 솟구친 붉은 머리에 털코트를 어께에 걸치고 요란한 장신구들을 몸 여기저기에 걸치고 다니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다. 나는 재빨리 내 모습을 살펴보았다. 싸구려 후드티에 찢어지고 헐렁한 반바지, 회색 비니를 쓴 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환상은 너무나도 생생했고, 또 섬뜩할 정도로 익숙해서 나는 한동안 쇼윈도에서 발을 떼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
마약의 증세는 점점 더 악화되었다. 쇼윈도에서 비춰진 또 다른 나의 모습에서 여러 정보가 마치 누군가가 직접 머릿속에 밀어 넣어지듯이 마구 들어오게 되었다. 환상 속의 나는 바다를 누비는 악명 높은 해적이었다. 현실의 나보다도 더 잔혹하며 악명 높은 또 다른 나는 요상한 능력을 쓰며 나를 추격하는 해군들을 따돌리며 자신의 목에 걸어진 현상금의 액수를 늘려가고 있었다. 환상은 점차 나타나게 되는 빈도수를 늘려갔고, 나는 점차 환상과 현실을 겹쳐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환상은 현실로 바뀌어가게 되어 나는 정말로 내가 해적이라고 생각하게 될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렇게 생각하게 되면서 나는 두려울 것도, 꺼릴 것도 없어지면서 이전보다도 더 막나가게 되었다. 함께 어울리던 패거리들도 내가 미쳤다고 생각하여 점차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환상 속의 나는 제법 큰 해적단을 꾸려가며 많은 부하들을 거느리고 있었기에 어중이떠중이 녀석들이 떠나가는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해적답게 약탈을 하게 되었고, 경찰들을 상대로도 주먹과 흉기를 휘두르며 타락하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 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상점 중 하나를 불시에 습격하여 상점 주인을 구석에 묶어두고 물건들을 가져가려고 할 때, 나는 환상을 보게 되었다. 그 환상은 내가 팔이 잘려나가는 환상이었다. 어찌할 도리도 없이 잘려나간 팔은 붉은 피를 덩어리째로 뚝뚝 흘리고 있었으며 그 안으로 새하얀 뼈와 끊어진 근육들이 추하게 덜렁거리며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등골이 오싹해지는 공백과 함께 벼락처럼 내리꽂는 격통에 나는 비명을 질렀다. 실제로 나는 팔이 잘려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 격통만큼은 환상이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너무 현실적이라 나는 생전 처음 느껴보는 고통에 미쳐 그 자리에서 쇠파이프를 집어 들어 죄 없이 묶여있던 가게 주인을 마구잡이로 내리쳤다. 머리통이 깨지고 뇌수가 흘러나와 그 형체도 알 수 없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속해서 그것을 내리쳐 완전히 고깃덩어리로 만들어 놓았다. 그 순간, 나는 완전히 미치게 되었다. 아니. 처음부터 나는 미쳐있었다. 단지 나를 제어하던 이성이 그 때를 계기로 완전히 끊어져나간 것이었다.
끝날 줄 모르던 행위가 끝날 수 있게 된 것은 신고를 받고 달려 들어온 경찰들의 제지덕분이었다. 소란스러워진 주변에 나는 그제야 이성을 되찾고 주변을 살펴보았다. 산산이 부서진 고깃덩어리와 너무 내리친 탓에 거의 끊어질 듯한 쇠파이프, 피로 뒤덮여진 몸, 새하얗게 질려 차마 다가가지 못한 채 괴수를 보고 있는 듯한 경찰들의 모습. 그 아수라장 속에서 나는 너무나도 늦게 그 약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말았다.
미쳤어.
나는 나 자신을 향해 스스로 그렇게 말하는 것으로 경찰들의 손에 이끌려 정신병원에 들어가게 되었다.
Yellow Submarine (前)
W. 아르카디
탁. 책을 덮는 메마른 소리가 이야기의 끝맺음을 장식했다. 환자는 오랜 이야기를 혼자서 주절주절 떠든 탓인지 목과 입이 잔뜩 말라있었다. 이때까지 아무 말 없이 들어주던 청중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근처 테이블에 올려 져 있는 주전자에 담겨있는 냉수를 컵에 따라 곧바로 환자에게 내밀어주었다. 상대의 호의를 남자는 한 손으로 받아들어 바로 차가운 물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입에 시릴 정도로 차가운 냉수가 목구멍을 타고 흘러들어가며 목과 입 안을 적셔주었다. 그 사이에 상대방은 다시 환자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아 그때까지 쓰고 있던 검은 뿔테안경을 벗어 옆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이야기는 잘 들었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죠. 내일 이 시간에 다시 찾아오시면 됩니다.”
상담 종료를 알리는 낮은 목소리에 환자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뻣뻣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하고는 조용히 상대가 앉아있는 소파를 지나쳐 상담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것으로 기나긴 상담 치료의 시작과 두 사람의 첫 만남이 이어져가게 되는 것이었다.
그 날, 처음으로 사람을 지독하게도 죽여 스스로가 미쳤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 이 후. 나는 주변 사람들의 강요와 스스로의 선택으로 정신병원에 들어가게 되었다. 첫 살인과 더불어 이제는 정말로 현실과 환상을 구별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이 나를 여기에 몰아넣게 되었다. 그러나 정신병원에 갇히게 되었다는 두려움과 수치심 보다는 정말로 정상이 되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더 컸다. 나는 정신병원에서 2년 동안 입원하여 치료를 받게 되었다. 새하얀 병원, 새하얀 환자복, 새하얀 의사와 간호사. 모든 것이 강박적으로 느낄 정도로 깨끗하고 새하얀 빛을 띠었다. 이런 곳에 있으면 나을 병도 낫지 않을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2년 동안 나는 의사들의 정기적인 검진을 받으며 형식적인 치료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서도 문제아였다. 치료는 허사였다. 나는 아직도 마약에 대한 환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여전히 파도 소리가 귓가를 맴돌았으며 자신이 해적이라고 느낄 때가 여전히 나타났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병원에 들어와 격리 치료를 받게 된 이후로는 환각이 조금은 잦아들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마약상의 말처럼 그 마약은 한 번 입 안으로 털어 넣으면 두 번 다시 뱉을 수 없는 것이었다. 영원히 이 환각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걸까. 두려움으로 날을 지새우는 것이 이제는 일상이 되어가던 2년째의 어느 날, 나는 내 담당의에게서 퇴원과 더불어 1대 1 상담치료를 받는 것이 어떠냐는 제안을 받았다. 그 때의 나는 입원하면서 환각이 보이는 것 이외의 큰 사고를 저지른 적이 없었으며 본인도 나으려고 하는 의지가 강했기에 살인마로 들어온 과거와는 달리 의사들의 신임을 어느 정도 받고 있었다. 퇴원을 한다고 해도 다소의 감시가 붙을 것이지만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마음이 들뜨게 되었다.
그렇게 퇴원하게 되어 바로 찾아가게 되어 처음으로 만나게 된 상담의는 생각보다 나이차가 크지 않았다. 20대 중후반의 의사는 짧게 깎은 검은 머리에 밤을 자주 지새우는 것인지 제법 짙은 다크서클을 가지고 있었으며 단조로운 검은 정장을 입고 있었다. 정장이 크게 어울리지 않은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그 옷차림은 나름 작업복으로 입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의사는 미리 나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것인지 내 이름을 부르며 먼저 악수를 청했고, 나도 그에 답하며 어색하게 상대의 손을 맞잡았다. 누군가와 악수를 해보는 것은 오랜만이라는 감상과 함께 길게 뻗은 손가락이 제법 근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 상담은 나의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이었다. 과거의 이야기를 스스로 말하는 것만으로도 심리적으로 큰 도움이 된다고 하며 어떤 이야기든 들어줄 테니 말하고 싶은 대로 말하라고 해서 나는 상담용 의자에 앉아 과거의 이야기를 말 하였고, 의사는 옆에서 내 이야기를 경청하며 때때로 수첩에다가 무언가를 메모해놓았다. 처음에는 서두를 어떻게 꺼내야 하나 고민되었던 이야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탄력을 받아 술술 내뱉게 되었고, 정신을 차려보니 반나절 가까이 나 혼자 떠들고 있었다. 하지만 상담의의 말대로 정말로 털어놓고 보니 속이 어느 정도 뚫린 느낌이었다. 그렇게 첫 상담은 제법 좋은 느낌으로 끝나게 되면서 나는 정말로 나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들뜨게 되었다.
* * * * *
두 번째 상담은 일주일 뒤였다. 상담은 일주일에 한 번씩 진행하도록 되어있으며 나는 약속된 시간에 맞춰서 상담실을 찾았다. 똑똑. 옻칠이 잘 되어있는 나무문을 두 번 두드린 후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 들어가자마자 맨 처음 들려오는 것은 파도소리였다. 나는 순간 또 환청이 들려오는 것인가 하는 두려움에 움찔 뒤로 물러났지만 뒤이어 파도소리를 배경으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에 나는 그것이 환청이 아니라 진짜 소리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콧노래처럼 흥얼거리는 듯이 들려오는 멜로디는 턴테이블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아직도 저런 것을 사용하는 사람이 있구나. 새삼스레 놀란 기분이 들어 나는 조용히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와 노랫소리를 들었다.
In the town where I was born Lived a man who sailed to sea
내가 태어난 도시에 한 바다 사나이가 살았어요.
And he told us of his life In the land of submarines
그는 잠수함 속에 살아온 자신의 삶에 대해 말했어요.
So we sailed up to the sun Till we found a sea of green
그래서 우리도 태양을 향해 항해했죠, 초록의 바다를 만날 때까지
And we lived beneath the waves in our yellow submarine
그리곤 우리들의 노란 잠수함 속에서 파도 아래서 살았죠.
We all live in a yellow submarine
우리 모두는 노란 잠수함 속에서 살아요.
Yellow submarine, yellow submarine
노란 잠수함 노란 잠수함
We all live in a yellow submarine
우리 모두는 노란 잠수함 속에서 살아요.
Yellow submarine, yellow submarine
노란 잠수함 노란 잠수함
“어서 오세요.”
멍하니 노래를 듣고 있을 때, 상담의가 어디에선가 불쑥 나타나 인사를 말한 통에 나는 깜짝 놀라 뒤로 한 걸음 물러나게 되었다. 그리고 고작 이런 일에 펄쩍 뛰어올랐다는 것에 창피해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인사와 함께 쑥스러움을 감추었다. 내 반응에 상담의는 살짝 미소를 짓는 것으로 넘어갔고, 그와 함께 그는 턴테이블의 바늘을 들어 올려 노래를 멈추었다. 바늘에 긁혀가며 돌아가고 있던 LP판은 여전히 뱅뱅 돌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노래를 듣고 있었는데 환자분이 찾아오시는 걸 깜빡했습니다.”
“아, 아뇨.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그 곡은….”
“비틀즈의 <Yellow submarine>이라는 곡입니다. 혹시 알고 계신가요?”
“비틀즈는 알지만, 제가 워낙 노래에 흥미가 없어서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가수라서 자주 듣습니다. Revolver(비틀즈의 7번째 정규 음반)에 수록된 곡인데 여러 가지 실험적인 곡들이 많이 들어가기로 유명하죠. 다음번에 기회가 된다면 한 번 들어보세요.”
“아, 네. 그러겠습니다.”
“아, 이런. 상담을 해야 되는데 사설이 길었군요. 이쪽으로 와서 앉으세요.”
상담의의 권유에 그제야 나는 어색하게 걸어와 지난주와 같은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그 사이 펜과 수첩을 챙겨드는 상담의의 뒷모습을 보며 조금 전, 그의 존댓말이 어색하게 들려왔다는 것을 떠올렸다. 아무래도 자기보다 연하인 상대에게 존댓말을 하는 것이 불편한 것일까. 아니, 애초에 그에게 존댓말 자체가 안 어울리는 것일 수도 있었다. 나 또한 상대에게 존댓말을 써본 적이 드물어서 그런지 대화를 하다가 말이 꼬일 뻔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이윽고 상담의는 지난주와 같이 맞은편 자리에 앉아 수쳡을 펴서 무릎 위에 올리고 오른손으로 펜을 들어 나를 마주보며 말했다.
“지난주에는 환자분의 과거에 대해 이야기를 했죠. 이번에는 환자분이 보시는 환각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해주셨으면 합니다.”
“그게 상담하고 관련이 있나요?”
“뭐든 자세히 파헤쳐 보는 것이 중요하니까요.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꽤 흥미가 생기기도 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눈웃음을 짓는 상담의의 모습은 정말로 내 환각에 관심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어쩐지 구경거리가 된 듯한 느낌에 기분이 상했지만 이것도 상담이니 참고 넘어가자는 심정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 * * * *
바다. 드넓은 바다. 지평선을 바라보면 세계가 바다와 하늘 두 가지로만 이뤄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시야에 가득 들어오는 곳. 그곳에 내가 있었다. 바다 위에 서서 하늘 아래에 살아가며 나는 거대한 배와 수많은 부하들을 이끌고 항해를 하고 있었다. 모두가 꿈을 꾸고 있었다. 낭만의 시대에서 젊은 해적들은 한 전설적인 해적이 남겨놓은 비보를 찾아 너도 나도 앞 다퉈서 여행을 떠났으며, 나도 그 중 한명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지평선을 가로지르며 꿈을 비웃거나 앞을 가로막는 녀석들은 가차 없이 없애갔으며, 있는지도 불확실한 것을 찾아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전설이 사실인지 아닌지 상관없다. 어차피 모두가 꿈을 꾸기 위해 이 바다에 나온 것인데 그런 사소한 것에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우리는 바다가 선사하는 모험에 취해있었다.
흐릿했던 세계는 이야기를 꺼내면서 점차 형태를 잡혀가기 시작했다.
모두가 위험하다고 고개를 저어버리는 항로, 그 항로를 양분하는 거대한 붉은 벽처럼 보이는 대륙, 낙원과 신세계, 신기한 힘과 거역할 수 없는 저주를 동시에 선사하는 기이한 열매, 하나로 잇는 대 비보의 전설, 바다를 지배하는 네 명의 왕, 세계 최강의 사나이가 일으킨 거대한 전쟁, 격전의 시대 속에서 태어난 최악의 문제아들.
상담은 한동안 나의 환각이 보여준 세계에 대한 이야기들을 늘어놓는 것으로 진행되었다. 말을 꺼내놓으니 윤곽이 잡히는 세계에 상담의는 물론이고 나 또한 놀라울 지경이었다. 마치 그 세계가 정말로 있을 것 같은 생동감과 현실감에 우리 두 사람은 그 환상에 취해가고 있었다. 정말로 그런 세계가 있을까. 말을 하고 있는 나조차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놀라움만이 가득 찬 세계였다. 마치 이야기꾼이 되어 내가 아는 모든 표현을 총동원해서 세계를 설명하였고, 상담의는 그것을 들으면서 때로는 중간 중간 보충적으로 설명하거나 질문을 하는 것으로 구축에 도움을 주었다. 나와 그의 은밀한 공동 작업은 상대의 수첩에 빼곡히 정리되어가고 있었으며,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나는 오히려 환각에서 벗어나기는커녕 점차 환상에 깊이 들어가고 있었다. 노란 잠수함에 살아가는 한 남자의 삶처럼.
계속되는 이야기를 말하는 것도, 듣는 것도 서로 간에 지치는 일이라 상담의가 먼저 펜을 내려놓는 것으로 암묵적으로 휴식에 대한 제안을 청했으며, 나는 그것을 받아들여 이야기를 멈추고 피곤에 젖은 몸을 소파 등받이에 기대었다. 말하는 것만으로도 피로감이 쌓인다는 사실을 이번 상담을 통해 처음 깨닫게 되었다. 차를 내오겠습니다. 펜을 쥔 손을 다른 손으로 주물거리며 피로를 풀던 상담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차를 끓일 준비를 위해 잠시 상담실에 딸려있는 작은 식수대로 이동했다. 잠시 후, 상담의는 찻잔에 향긋한 홍차를 담아 돌아왔으며 그 중 하나는 나에게 주었다. 나는 몸을 일으켜 그것을 받아들고는 천천히 마셔보았다. 따뜻한 홍차가 목구멍으로 넘어가면서 칼칼했던 목을 풀어주었다. 상담의도 맞은편에 앉아 나와 마찬가지로 홍차를 마시더니 찻잔에서 입을 떼고는 감탄하듯이 말했다.
“그나저나 들을수록 흥미롭고 놀라운 이야기들이네요. 단순한 마약으로 인한 환각이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네. 저도 이렇게까지 제가 자세히 말할 줄은 몰랐어요. 마치 정말로 그런 세계가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하지만 그런 기분이 들수록… 점점 어디가 현실인지 갈피를 못 잡겠어요.”
“그럴 때일수록 마음을 단단히 잡으셔야 합니다. 이야기를 할수록 이것은 허구라고 생각하셔야 합니다. 자신은 그저 하나의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는 중이라고. 너무 몰입하지 마시고 제 3자의 시선에서 바라보세요.”
“네.”
상담의의 당부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가 말하는 대로 너무 이야기에 몰입하는 것은 좋지 않다. 어디까지나 이야기, 픽션으로 생각해서 제 3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이 중요했다.
“그러고 보니 당신에게 문제의 마약을 줬다는 마약상은 그 후로 만난 적이 있습니까?”
“아니요. 필사적으로 찾아봤지만 전혀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가요. 유감이군요.”
그렇게 말하고는 상담의는 찻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턴테이블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턴테이블 아래 수납장에는 여러 LP들이 가지런히 정돈된 채 꽂혀있었다. 상담의는 허리를 숙여 무언가를 찾듯이 손가락으로 LP들을 훑어보더니 그 중 하나를 꺼내들었다. 노랗게 퇴색되어 상당히 오래되어 보이는 표지에는 비틀즈를 중심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서 있어서 그런지 알록달록한 색채를 띄고 있었다. 표지에서 LP판을 꺼낸 상담의는 바로 턴테이블 위에 올려놓고는 바늘을 내려놓았다. 곧이어 바늘을 따라 턴테이블에서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이번에도 비틀즈의 노래였다.
“비틀즈의 8집인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입니다. 비틀즈의 역대 음반들 중 자주 1위로 거론되는 음반이지요. 지금 나오는 곡은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라는 곡입니다.”
상담의의 설명과 함께 흘러나오는 곡은 몽환적이면서 밝은 느낌의 곡이었다. 독특한 느낌의 음색은 마치 어디론가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마력을 가지고 있어서 나도 모르게 노래에 집중하게 되었다. 문득, 이 노래를 들으니 처음 턴테이블을 통해서 들었던 비틀즈의 또 다른 곡이 떠올랐다. 옐로우 서브마린. 노란 잠수함. 어째서인지 그 곡이 유난히 기억에 남았다. 노란 잠수함에서 살아간 한 남자를 따라 항해를 하는 이야기. 그 잠수함 안에는 누가 있었던 것일까. 그 잠수함에는 누가 타고 있었던 것일까.
깊고 어두운 심해 속에서 헤엄치는 작은 잠수함. 그 안에는 한 남자가 있었다. 나와 같은 바다에서, 같은 꿈을 꾸며 살아가던 남자. 나는 노란 잠수함에 올라타 그 남자를 만났다. 긴 칼을 어깨에 짊어지고 하얀 모자를 쓰고 상반신의 절반을 뒤덮는 문신을 한 남자. 우리는 심해 속에서 서로 뒤엉키며 살아가고 있었다. 따뜻한 어머니의 품 안에서 남자는 나의 이름을 불렀다.
[ㅡ유스타스 여.]
쨍그랑!
명곡이 흘러나오는 잔잔한 방 안의 분위기와 함께 새하얀 찻잔이 깨져 나갔다. 잔 안에 담긴 홍차가 제법 비싸 보이는 카펫 위로 번져나가며 얼룩을 만들어내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거친 숨을 몰아쉬며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갑작스런 나의 돌발행동에 상담의는 크게 놀란 표정을 지었고, 턴테이블은 그런 소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비틀즈의 노래를 흘려보내고 있었다. 노래는 점차 클라이맥스로 향하고 있었다. 상담의는 잠시 놀란 탓에 아무런 행동도 보이지 않고 있다가 이윽고 그제야 한 박자 늦게 나에게 달려와 내 상태를 살펴보았다. 젖어가는 카펫과 깨져버린 찻잔보다도 내 상태를 먼저 살피는 것에서 환자를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의사로서의 직업정신을 엿볼 수 있었다.
“괜찮으세요?”
“아, 네…. 죄, 죄송합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찻잔이라면 다시 새로 사면되고, 카펫도 빨면 되니까요.”
나의 사과에 상담의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몸을 숙이고 조각들을 주워나가기 시작했다. 사금파리들이 달그락거리며 상담의의 손바닥 아래에 모이게 되었다.
“오늘 상담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죠. 환자분도 많이 피곤하신 것 같으니 말입니다.”
“아, 네.”
자연스레 상담은 여기서 종료되었다. 나는 미안한 마음에 먼저 자리를 뜨지 못하고 뒷머리를 긁적이며 상담의의 정리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내 시선은 턴테이블 밑에 꽂혀있는 LP판에게로 돌아갔다. 귓가에 스며들어오는 노랫소리. 다시 한 번 떠오르는 인영. 그를 떠올리며 나는 깨닫게 되었다. 지금까지의 모든 환각들은 그를 만나기 위한 기나긴 여정과도 같은 것이었다고. 환상 끝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내가 지금껏 바라왔던 것이라고. 그리고 그것을 깨닫게 해주고 이끌어준 것은 그 노래였다. 나는 목구멍 너머로 침을 삼키며 쓰레기통에 찻잔 조각들을 버리는 상담의에게 말했다.
“저, 저기.”
“네?”
“방금 이런 실례를 저지르고 이런 말하기 그렇지만…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그렇게 말하고 나는 다시금 시선을 턴테이블로 옮겼다. 귓가에는 이제 파도소리 대신 노랫소리가 흘러들어왔다.
* * * * *
집으로 돌아온 나는 가장 먼저 골동품 가게에서 구입한 턴테이블을 집 안 한쪽에 설치했다. 상담의의 턴테이블만큼이나 근사하지는 않았으며 골동품인 탓에 오래 되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쓸모 있어 보이는 모양새와 성능을 가지고 있었다. 설치를 마친 나는 곧이어 상담의에게서 빌려온 LP판을 꺼내들었다. 리볼버. 처음 상담실에서 듣게 된 비틀즈의 앨범이었다. 조심스레 두 손으로 LP판을 들고는 턴테이블 위에 올려놓고는 그 다음에는 골동품점 주인에게서 들은 설명대로 바늘을 위에 올려놓고 작동시켰다. 그러자 정말로 바늘을 따라 음악이 흘러나왔다. 비록 턴테이블의 성능이 상담의의 것만큼 좋지 않아 지직 거리기는 했지만 그럭저럭 듣는 것에 지장은 없었다. 나는 근처 의자에 앉아 음악들을 듣기 시작했다. 하나 둘씩 차례대로 나오던 비틀즈의 노래들이 지나가고 드디어 6번째 곡이 흘러나왔다. Yellow submarine. 기다리던 곡이 나오자 나도 모르게 곡을 따라 콧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주머니 안에서 작은 패치를 꺼내들었다. 여기 오기 전에 미리 사놓은 니코틴 패치를 팔에 붙이고 다시 자리에 앉은 나는 상담의의 경고를 오래 전에 잊은 채 패치에서 전해지는 니코틴의 감각과 노래에 몸을 맡기고 주정뱅이의 콧노래처럼 비뚤어지게 흥얼거렸다.
We all live in a yellow submarine
우리 모두는 노란 잠수함 속에서 살아요.
Yellow submarine, yellow submarine
노란 잠수함 노란 잠수함
너는 그 잠수함 안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바다 안에서 고요히 헤엄치던 너는 나와 같은 해적이자 의사였다. 나는 항상 네가 사는 노란 잠수함에 찾아갔었다. 그리고 너는 그런 나를 미소로 반겨주었다. 매혹적인 미소와 중저음의 목소리에 나는 그대로 심취되어 너와 거리낌 없이 몸을 섞어나갔다. 바다에 떠도는 전설에 나오는 뱃사람들을 홀리는 요녀와 같이 너는 나를 심해 속으로 끌어들여 쾌락으로 이성을 가둬 빠져나올 수 없게 만들었다. 미쳤어. 멀리서 또 다른 자신이 그렇게 외치는 것 같았다. 아아, 그래. 나는 너에게 미쳐있었다. 처음 날 이렇게 만들어 놓은 마약과도 같이 너는 한 번 빠져들면 벗어날 수 없는 존재였다.
환상이 만들어내는 쾌락에 젖어가며 나는 점차 선명해지는 상대의 얼굴에서 나는 그 얼굴이 상담의의 얼굴을 그려가고 있다는 사실을 아직까지 눈치 채지 못한 채 몽롱한 눈빛으로 환상이 그려내는 노란 잠수함의 사내의 이름을 불렀다.
“…트라팔가.”
환각 속의 나는 한 남자를 사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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