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써봤다. 상, 하 구성인데 내용을 보면 장편 프롤로그 느낌(...)
오랜만에 적어보는 글자수는 공백 제외 5817자. 하편은 이것보다 더 길어질 듯.
신고를 받고 찾아간 가정집에서의 상황은 이미 모든 것이 끝나있었다고 한다.
이전부터 낌새가 이상했다면서 신고를 했다는 이웃의 신고에 후배이자 직속 부하인 타시기가 신속히 찾아가게 되었지만 여간 눈치가 빠른 것인지, 아니면 사전에 정보가 새어나간 것인지 가해자는 도망치고 없었으며 현장에 남아있는 것은 한 여인의 참혹한 시체와 그 옆에서 피투성이가 된 채 주저앉아있는 어린 남자아이 뿐이었다고 한다. 아이의 몸에 묻은 것은 자신의 피가 아니었다. 새하얀 옷과 모자를 덮어버린 붉은 피는 조용히 번져나갔다. 아이의 옆에 죽어버린 여자는 조사 결과 아이의 친모였다. 남편 없이 홀로 아이를 키워온 여자는 밤낮으로 열심히 일하며 나름대로 둘이서 지내왔지만 어려운 생활고에 견디지 못하고 사채에까지 손을 댄 것이 화근이었다. 어떻게든 돈을 갚겠다며, 제발 인내심을 가지며 믿고 기다려 달라고 애원하던 모친이었지만 애석하게도 사채업자는 모친의 기대만큼이나 인내심이 깊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지속적으로 모자가 사는 집으로 쳐들어 가 세간들을 부수거나 가져가는 것도 모자라 여자와 아이를 폭행하는 일도 서슴지 않아했다. 일상과도 같이 이어지던 폭력은 결국 한계를 모르고 폭주하게 되어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저지르고 말았다. 타시기의 조사에 따르면 여인은 아이를 지키기 위해 뛰어들다가 자식을 대신해서 희생된 것이라고 말했다. 아이는 하나뿐인 가족인 모친의 목숨과 맞바꿔 살아남게 된 것이었다. 여인의 죽음에 패닉에 빠진 사채업자는 패닉에 그대로 도망치게 되었고, 남겨진 것은 아이와 차갑게 식어가던 시신뿐이었다. 모친이 바로 눈앞에서 지켜준 덕분에 아이는 어머니의 피를 뒤집어쓰게 되었다. 조금 전까지 몸 안에서 심장을 중심으로 돌던 뜨거운 피가 돌연 자신을 덮쳤고, 그것을 그대로 받아낼 수밖에 없었던 아이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아마 온 몸이 타들어가는 고통을 느끼지 않았을까. 아이는 타시기의 인도로 인근 병원에 후송되었으며 사채업자는 공개수배에 들어가게 되었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한 타시기는 돌연 난색을 보이며 말꼬리를 흐렸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공개수배를 위해서는 수배지에 그려질 몽타쥬가 필요한데 현재 유일한 목격자인 아이에게 몇 가지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었다. 수사에 비협조적이냐는 나의 질문에 타시기는 조용히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것보다, 조금 더 복잡한 이유라고. 내가 수사에 얼마나 도움을 줄지는 모르겠지만ㅡ아이에 대한 심문은 나로서는 적합하지 않기에 주로 타시기에게 맡겼다. 아이들은 그녀에게 더 쉽게 마음을 열었다.ㅡ일단 함께 가주지 않겠냐는 타시기의 부탁에 나는 모처럼 중요한 일이 들어오지 않아 한가하던 차라 그녀의 부탁을 승낙하고 아이가 입원해 있다는 병원으로 찾아갔다. 그 후 더 지체할 것이 뭐가 있겠나 싶어 지금 가자는 내 제안에 타시기는 오히려 잘됐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차를 타고 아이가 입원한 병원에 도착하여 망설임 없이 안으로 들어간 타시기가 오랫동안 드나든 것처럼 익숙한 발걸음으로 도착한 곳은 405호실이라고 적힌 병실들 중 하나였다. 여기에요, 라는 말과 함께 타시기는 두 번 노크를 했지만 안에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러나 타시기는 반응을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았다는 듯이 문을 조심스레 열어 안으로 한 발짝 들어갔다. 나도 그녀를 따라 뒤따라 안으로 들어왔다. 알싸한 소독약 냄새가 풍기는 것이 회진을 다녀온 것이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다. 안녕. 그동안 잘 있었니? 라는 상투적인 안부인사로 타시기가 먼저 말을 걸었다. 나는 타시기에게서 병실의 주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하얀 시트를 덮고 하얀 베개에 몸을 기댄 아이는 10살 내외의 초등학생으로 보였으며 시트와 동일한 백색의 붕대를 머리와 팔에 감고 깡마른 몸 위에 헐렁한 환자복을 입고 있었다. 환자복도 마치 짜고 맞춘 것처럼 티 한 점 없이 깨끗한 흰색이었다. 모든 것을 흰색을 덮은 덕분에 아이의 검은 머리카락과 눈동자가 특히나 눈에 선명히 들어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이의 눈동자에는 빛 한 점 찾아볼 수 없는, 심연과도 같은 어둠만이 있어서 그것이 불편했다. 이 아이가 저런 눈을 가지게 된 것이 우리들의 잘못과도 같았다. 조금만 더, 빨리 구해주지 못한 우리들의 죄. 아이는 타시기의 인사에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무기력한 표정과 텅 빈 눈동자로 허공을 보는 듯 했다. 일부러 무시하는 것치고는 어딘가 이상해서 다가가려고 하던 나를 타시기가 내 손목을 살며시 잡아 막았다. 섣불리 다가가지 말라는 암묵적인 의사였다. 나는 아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나보다도 타시기의 의견이 더 정확하다고 판단하여 자세한 이유를 듣기 위해 아이를 다시 그 넓은 병실에 홀로 두고 그녀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아이는 우리가 나갈 때까지도 아무 말 없이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함묵증이라네요. 한숨을 쉬듯이 안타까이 말하는 타시기의 목소리에는 지친 기색과 더불어 아이에 대한 동정과 슬픔이 어려 있었다. 보호자를 대신해서 아이의 상태를 들은 타시기의 설명에 따르면 사채업자가 벌인 폭력과 눈앞에서 자신을 지키다 죽은 친모의 죽음이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줘서 일종의 PTSD 증세 비슷하게 아이가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말문을 닫아버린 것이라고 했다. 그럴 때는 실어증이라고 하지 않나, 라는 바보 같은 나의 질문에 타시기는 실어증은 뇌에 손상이 생겼을 때 발생하는 육체적인 후유증이라고 하며 함묵증은 정신적인 차원에서 오는 후유증이라고 참을성 있게 차이점을 설명해주었다. 어쨌든 이것으로 왜 몽타쥬를 그리는 것에 차질이 생겼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추가로, 아이는 사채업자와 모친과 관련된 이야기만 나오면 발작을 보이며 더욱 폐쇄적으로 나온다고 한다. 결국 범인은 우리들이 찾아볼 수 있는 선까지 노력해서 찾아보는 수밖에 없었다. 지리멸렬한 장기전으로 갈 예정인 수사가 대충은 정리되었을 때, 타시기는 아차하는 소리와 함께 다시금 아이에 대한 화제로 돌아가게 만들었다. 아이에게는 모친 외의 친인척은 없으며 현재 아이를 맡아줄 보호자도 아직 나타나지 않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어쩌면 좋냐는 타시기의 모습에 사실, 그냥 보호시설에 맡기거나 신경을 끄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괜히 세모로 난 눈빛을 받으며 몰인정하다는 소리를 듣기 싫어 그 말은 꺼내지 않는 대신 속으로 중얼거렸다. 오지랖이 넓어 피해자의 사적인 상황까지 신경 쓰는 것은 정이 많은 타시기의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특히 아동 관련 사건에서 타시기는 당연하다 싶을 정도로 아이의 안전과 후일을 제 일처럼 걱정했다. 나는 타시기의 말에서 다시금 병실에서 만난 아이의 모습을 떠올려보았다. 공허한 눈동자, 아무렇게나 자라나 있는 먹빛의 머리카락, 제대로 먹지 못해 다른 또래 아이들보다도 마른 몸과 그 위를 무겁게 짓누르는 것과 같은 붕대와 환자복. 폭력으로 정신이 망가진 아이들 정도는, 냉정히 말해서 자신과 같은 직종에 있다 보면 드물지 않게 마주칠 수 있는데도 유독 그 아이의 눈동자와 존재가 신경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말을 하지 못해 바짝 마른 입술을 꾹 다물면서도 그 표정에는 슬픔도, 분노도, 어느 것 하나 드러나 있지 않아 더욱 아파보였다. 이대로 혼자 두기에는 너무 외롭고, 많은 것이 망가져버린 아이였다. 시가의 내음과 함께 입 안을 텁텁하게 만드는 갈등 끝에, 나는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타시기에게 내가 맡겠다고 말했다. 내 제안에 타시기는 뜻밖이라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정말인가요? 라고 다시 반문을 했다. 하긴, 그녀로서는 공과 사를 확실하게 구분하는 나의 철칙을 잘 알기에 지금과 같은 기대 밖의 사태가 놀라울 것이다. 더 이야기를 나눴다가는 내가 무슨 성인군자가 된 것 같아 미리 민망한 기분을 가지기 전에 도망치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렇게 알아둬라, 라고 말하고는 다시 아이가 있는 병실에 들어갔다. 아이는 조금 전과 같은 모습 그대로였다. 병실 안에 감돌던 소독약 냄새가 조금 옅어진 것을 제외하면. 보폭이 큰 발걸음으로 아이의 침대 옆에 바로 선 나는 근처에 배치된 의자에 앉았다. 아이는 내 기척을 분명 느꼈을 것인데도 무감각이었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하나 싶었지만 아이의 모습을 보니 그저 이 말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나와 같이 가지 않겠냐?”
그냥, 이 말 한 마디면 충분할 것 같았다.
아이는 내 말에 드디어 처음으로 반응을 보였다. 고개를 옆으로 돌려 나와 마주본 아이는 잠시 나의 무언가를 재보듯이 지그시 보더니 이윽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이것이 비극이 일어난 후에 아이가 타인에게 처음으로 보여준 반응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왠지 뿌듯하고 만족스러운 기분에 오른손을 들어 아이의 머리 위에 올려 쓱쓱 쓰다듬어주었다. 아이의 머리카락은 생각보다 부드러웠다.
“좋아.”
그 말을 들은 직후, 아이의 눈동자에 조금은 생기가 돌아오는 듯 했다.
아이의 이름은 트라팔가 로우라고 했다. 물론 아이에게서 직접 들은 것이 아니라 타시기가 전해준 신상정보에 적힌 이름이었다. 아이와 어울리는 멀끔한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로우가 병원에서 퇴원하고ㅡ로우에게는 그 전까지 쌓여있던 폭력의 자상 외의 특별한 상해의 흔적은 없었다고 한다. 아마 이것도 모친의 희생 덕분일 것이다.ㅡ내 집에 함께 살면서 나는 이 동거가 생각만큼이나 쉽게 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애초에 지금껏 혼자 살다가 즉흥적으로 아이를 들이게 되었으니 어색하고 낯선 것이 한 둘이 아니었으며 무엇보다 불편한 것은 의사소통이었다. 로우와 나 사이의 대화는 화이트보드와 유성 펜이 필수였다. 로우는 필요하거나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먼저 화이트보드에 정갈한 글씨체로 할 말을 적은 후에 내 소맷자락을 잡아 당겨 내 주의를 자신에게로 돌린 후에 화이트보드를 보여주는 식이었다. 꽤나 번거로운 방법이었지만 로우는 필요한 말 외의 것은 말하지 않는 성격인지 자신 혹은 우리들 사이에 필요한 말만 적어서 보여주는 식이라 이것에 대한 불만은 없었다. 문제는 거리였다. 조금이라도 멀리 있으면 로우 혹은 내가 상대에게 직접 가야하며 급한 상황에서는 화이트보드로 전달하는 방식이 너무 느렸다. 로우 개인의 태도도 문제였다. 상처가 쉬이 나을 것이라 기대하지 않았으나 원래부터 사람에게 마음을 여는 것이 서툰 아이였다. 가끔은 해야 할 말을 하지 않아서 답답하거나 당황할 때가 한 둘이 아니었다. 말이란 건 이래서 중요하구나 하는 생각을 로우와의 동거를 통해 본의 아니게 깨닫게 되는 순간들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로우의 상태가 궁금하다면서 수시로 드나들던 타시기가 로우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수화를 배워보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함묵증 치료는 지금처럼 진행하면서 따로 수화를 배워보지 않겠냐는 의견이었다. 수화로 대화하면 화이트보드에 말을 적는 수고를 덜 수 있지 않아서 좋지 않겠냐는 타시기의 말에 나는 로우에게 배워보고 싶냐고 물어보았다. 로우는 잠시 곰곰이 생각해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도 어지간히 불편했던 모양이다. 그 날 후로 로우는 타시기의 주선을 받아 전문적으로 수화를 가르치는 학원에 다니면서 수화를 익혔고, 나는 이전과 다름없는 일상을 보냈다. 타시기는 나에게도 수화를 배워보는 것이 낫지 않겠냐고 말했지만 사건에 이리저리 치이는 내 입장에서는 수화를 익힐 시간이 나지 않아 일단 보류로 미뤄두었다. 그런 내 태도의 한편으로는 머지않아 자신보다도 더 좋은 보호자나 가족을 찾아서 떠날지도 모르는 로우에 대한 미련을 조금이라도 줄여보겠다는 의지인지도 몰랐다. 나는 아직도 로우를 완전히 가족으로 받아들지 못했다. 멀든 가깝든 로우가 언젠가 내 곁을 떠날 것이라는 확신 아닌 확신이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로우는 수화를 배워나갔으며, 워낙 머리가 좋은 덕분에 단기간에 수많은 회화들을 배울 수 있었다. 이렇게 단기간에 수화를 많이 익힌 아이는 로우밖에 없다며 제가 더 기뻐하는 타시기의 모습이 소란스러웠다. 로우도 기쁜 것인지 처음에는 서툴렀지만 이제는 익숙해진 손놀림으로 타시기에게 수화로 무어라 의사를 전했고, 타시기는 거기에 기뻐하는 반응을 보여줬다. 그녀도 로우와 함께 다니면서 수화를 어느 정도 익혔기에 로우의 수화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러지 마시고 스모커 씨도 배워보시라니까요, 라는 타시기의 제안을 나는 다시금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미뤄대었다. 나와 로우 사이의 거리는 처음 병실 문 앞에서 병원 침대까지의 거리와 같이 애매한 느낌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기나긴 장기 잠입 수사를 마치고 모처럼의 집으로 돌아온 나는 피곤함에 지쳐 소파에 아무렇게나 몸을 던져 누웠다. 수런거리는 소리에 내가 왔다는 것을 눈치 챈 로우가 방에서 나와 동그란 눈을 끔뻑거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눈을 가늘게 떠서 로우가 있는 곳을 보았다. 문손잡이에 매달려 나를 빤히 관찰하듯이 보는 로우의 눈에는 경계심이 설핏 들어있었다. 가끔씩 로우는 성인 남자에 대해 저렇게 경계심을 드러내는 눈동자를 취한다. 어머니를 살해한 자에 대한 트라우마가 완전히 낫지 않았다는 증거가 되었다. 나와 함께 지낸 시간이 어느 정도 되었음에도 로우는 그 눈빛을 완전히 지우지 못했다. 그것이 이해되면서도 씁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서야, 로우는 살짝 몸을 떨고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문손잡이에서 떨어져 방에서 완전히 나왔다. 뒤늦게 자신의 앞에 있는 남자가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아차린 것 같았다. 의미, 인가. 로우에게 나는 어떤 의미인가. 생명의 은인인가, 단순한 보호자인가, 언젠가 헤어질 타인인가. 너와 나 사이의 거리감은 어느 정도인가. 나는 어째서 그것을 굳이 확인하려고 드는 것일까. 로우는 종종걸음으로 거실까지 나와 이제는 내가 엎드려 있는 소파 앞까지 도착했다. 내 앞에 허리를 꼿꼿이 펴서 서 있는 로우를 보니 아이와 처음 만났을 때의 상황이 떠올랐다. 그 때는 로우가 침대에 누워 나를 올려다보았는데 말이다. 소설처럼 상황이 겹쳐지는 것이 신기했다. 피곤한 탓에 눈꺼풀이 차츰 감겨져갔다. 끔뻑거리는 눈꺼풀의 움직임을 잠시 지켜보던 로우는 멈칫멈칫 양 손을 들어올렸다. 뭘 하려는 것일까. 그것을 계속 지켜보고 싶어 나는 눈을 어떻게 해서는 뜨게 하려고 했지만 피로가 그 어느 때보다도 무거웠다. 로우는 조심스레 양 손에 주먹을 쥐고는 그 중 오른 주먹을 왼 팔등에 두 번 두드렸다. 뒤이어 로우는 손끝이 밖으로 향하게 펴서 모로 세운 오른손의 옆면에 손바닥이 아래로 향하게 편 왼 손등에 두 번 대었다. 이것으로 끝났나 싶었더니 이번에는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힘겹게 용기를 낸 것처럼 앞의 것보다는 둔하고 떨리는 손놀림으로 손바닥을 엄지 옆면에 대고 손등이 왼쪽으로 향하게 모로 세운 왼 주먹 위에 오른 손바닥을 대고 오른손만 오른쪽으로 돌렸다. 기묘한 행동을 마친 로우는 이내 부끄러운 것인지 쪼르르 도망치듯이 방 안으로 쏙 들어가 문을 닫아버렸다. 조금 전에 로우가 나에게 보여준 것은 분명한 수화였다. 그러나 나는 수화를 배우지 않았기에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복잡한 손놀림으로 보일 뿐이었다. 로우가 용기를 내서 전한 것처럼 보이던 의사표시들은 나에게 아무 의미 없는 것으로 전해져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 세 개의 수화가 로우가 나에게 정말로 하고 싶었던 깊은 속내일 것이다. 순간적으로 나는 수화를 알아보고 싶다고 생각했으나 곧바로 그만두었다. 그것을 알게 되어, 뜻이 전해지게 되었다면 나는 그 아이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지울 수 없게 된다. 일정한 거리가 나에게는 도피처와 같이 중요했다. 로우는 이런 나의 심경을 읽고 일부로 수화로 말한 것일까. 이제 더 이상 버티지 못하겠는지 눈꺼풀이 완전히 닫히게 되었다. 그리고 사라지는 의식의 끝에서 희미하게 로우와 수화로 대화를 나누는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표정은 보이지 않았으나, 아마 즐거울 것이다.
로우는 아직도 나와의 대화에서 화이트보드를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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