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님에게 드리는 사보로우.
사보가 약과 인연을 맺게 된 계기는 어렸을 적에 겪은 원인불명의 화재사건이었다. 모두가 잠든 한밤중에 예고 없이 일어난 화재는 사보에게 집과 재산, 그리고 양친을 앗아가는 대신 남들과 조금 다른 신체를 그에게 안겨주었다. 꽤나 불길이 거센 화재였음에도 불구하고 기적적으로 살아난 사보였지만 왼쪽 눈은 화상을 입어 흉하고 제법 큰 흉터가 자리 잡게 되었으며 화재현장에 갇혔을 당시 무심코 연기를 마셔버린 바람에 천식까지 얻게 되었다. 화상흉터와 천식이라면 그곳에서 살아남은 값치고는 싼 값이었기에 사보는 딱히 자신의 몸 상태에 대해 절망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순식간에 집과 부모를 잃은 고아가 되어 친척집을 오가며 눈칫밥을 먹어야 하는 피곤한 삶을 살아야 했지만 인내심이 강한 사보는 그저 친척들이 자신을 받아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히 여기며 꾹 참아왔다. 그에게 있어서 정말로 참을 수 없는 것은 발작적으로 찾아오는 천식과 눈을 찌르듯이 아파오는 왼쪽 눈의 통증이었다. 기도를 틀어막는 기침을 할 때마다 불타는 집안에 갇혀 뜨거운 열기와 매캐한 연기로 제대로 숨을 쉴 수 없을 때가 떠올랐고, 왼쪽 눈의 통증이 찾아올 때마다 살이 타들어가는 감각을 꿈을 통해서 다시 체험하게 되었다. 결국 사보는 조금이라도 고통을 덜어내기 위해 병원에 통원치료를 받으며 천식과 왼쪽 눈의 통증에 대한 약을 처방받아왔다. 병원비로 인해 친척들에게 부담을 주는 것이 싫어서 병원비만큼은 자신의 손으로 벌자고 생각하여 사보는 그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고등학교 1학년 봄, 사보는 평소와 같이 병원의 치료를 받은 후 진단서를 들고 그 전까지 다니던 약국을 찾아왔지만 갑자기 그 약국이 통보도 없이 돌연 문을 닫아버리는 낭패를 겪고 말았다. 어쩔 수 없이 사보는 다른 약국을 찾아 헤맸고, 얼마 후에 사보는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새로운 약국을 발견하게 되었다. 전에는 셔터가 내려가 있고 임대하겠다는 종이쪽지만 붙어있던 텅 빈 상점이었는데 사보가 알지 못한 사이에 깨끗하고 세련된 이미지로 개점한 약국이 들어서게 되었다. 사보는 새로운 곳이라는 호기심과 호감, 그리고 자신이 다니는 학교와 병원에 적당한 거리에 위치한 곳이었기에 저곳이면 괜찮겠다, 싶어 실험적인 의도로 새로운 약국을 선택하여 들어가게 되었다. 딸랑. 유리문에 걸린 방울소리가 울려 손님이 들어왔다는 것을 알려주었고, 사보는 안으로 들어와 이제 막 새롭게 꾸며진 깔끔한 인테리어와 관련 상품들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 사이에 누군가가 카운터 안쪽에서 걸어 나와 칸막이를 열어젖히고 뒤늦게 사보를 맞이하였다.
“어서 오세요. 무슨 일로 오셨죠?”
“아, 안녕하세요. 오늘 여기 처음 왔는데, 약을 처방 받으려고….”
한창 구경을 하던 사보는 뒤늦게야 약국 주인이 안에서 나와 자신에게 말을 걸었다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돌려 정면을 마주하였고, 동시에 시선이 얽히게 되었다. 순백의 가운을 두르고 그 아래에 마르고 큰 체구를 숨기고 있는 청년은 사보와 나이차가 그리 크지 않아 보였으며 실내에다가 봄인데도 하얀 바탕에 검은 얼룩무늬가 그려진 털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있었으며 그 아래에 그늘진 얼굴은 눈 밑에 드리워진 검은 다크서클과 피곤에 젖은 인상으로 인해 약국을 운영하는 약사라기보다는 도리어 환자에 어울리는 안색이었다. 걷어진 소매로 드러난 특이한 문신과 더불어 귀에 박힌 두 개의 피어스는 남자의 인상과 더불어 본업인 약사라는 엘리트적 이미지와 신뢰감을 전혀 전달하지 못했다. 세간의 시선으로 볼 때 충분히 부정적으로 보이는 행색이었지만 사보는 도리어 약사의 모습에 기이하면서 퇴폐적인 매력에서 호감을 느꼈다. 강렬하지는 않지만 고요하면서 자연스럽게 상대의 시선을 사로잡는 독특한 분위기가 남자를 휘감아들고 있었으며 사보는 그 분위기에 저도 모르게 휩쓸리고 말았다.
“손님.”
그러는 한편, 이곳에 찾아온 이유를 말하다 말고 멍한 표정으로 자신의 얼굴을 뚫어져라 살펴보는 첫 손님에 약사는 왠지 자신이 관찰당하는 시선으로 느껴져 불유쾌하고 부담스러운 기분이 들어 더 이상의 과도한 시선은 느끼고 싶지 않아 자신이 먼저 말문을 열어 사보를 불렀다. 약사의 중저음 목소리에 그제야 사보는 퍼뜩 정신을 차려 그제야 자신이 넋을 놓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얼굴을 화들짝 붉히고는 허둥지둥 사과부터 했다.
“죄,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그만….”
“…처방 받으러 오셨다고 했죠. 병원에서 받으신 진단서를 저에게 주시고 저쪽에 앉아서 기다려주시면 제조해드리겠습니다.”
“아, 네!”
약사의 말대로 사보는 황급히 진단서를 꺼내 카운터 위에 올려놓았고, 약사는 그것을 받아들어 잠시 진단서에 적힌 진단명과 제조해야 할 약의 목록들을 체크하였다. 그 사이 사보는 약사 몰래 가운의 가슴께 부근 주머니에 달려있는 명찰을 확인하였다. 깔끔하게 코팅되어 있는 명찰에는 남자의 얼굴이 정갈하게 찍힌 사진과 더불어 그 아래에 인쇄체로 남자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약사 트라팔가 로우(23)]
사보는 앞으로 그 이름을 절대로 잊지 않기 위해 명찰에 그려진 얼굴과 더불어 확실하게 머릿속에 기억해두었다. 그렇게 사보가 약국의 단골손님이 된 순간과 더불어 그가 처음으로 로우를 만나 첫 눈에 반해버린 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사보로우]짝사랑
W. 아르카디
그 후로 사보는 약을 조제받기 위함과 더불어 짝사랑하는 상대를 만나고자 일주일에 서너 번은 약국에 찾아왔다. 일주일의 절반 이상은 찾아오는 것도 모자라서 한 번 찾아오면 몇 시간은 기본으로 눌러 붙어 있기까지 하는 바람에 로우와 함께 약국을 운영하고 있는 펭귄과 샤치가 아예 약국에 눌러 살 생각이냐며, 그만 찾아오라고 반쯤 장난치듯이 말할 정도로 사보는 볼일이 없을 때에도 약국을 찾아왔고, 그럴 때마다 로우는 영업에 방해되니 그만 찾아오라고 마뜩찮은 반응을 보여도 아예 쫓아내거나 싫은 기색은 보여주지는 않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사보는 약국의 수익에 한 몫을 챙겨주는 단골손님이었으며(약국에서도 단골손님의 존재는 상당히 귀중했다.) 찾아올 때마다 자잘한 약국 일을 도와주거나 바쁠 시간에는 기다리는 손님들의 말동무가 되어주는 등 여러모로 도움을 많이 주었다. 오죽하면 샤치가 농담 삼아 차라리 정식으로 고용해서 알바로 써먹는 게 어떠냐는 말까지 했을 정도였으니 사보의 도움이 결코 적지만은 않았다. 그렇게 1년 사이에 사보는 약국의 약사들과 정을 쌓아가며 동시에 로우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서서히 키워나가고 있었다. 사보에게 있어서 약국을 찾아가 로우를 만나는 때는 일상의 한 조각이었으며 삶의 낙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계절은 한 바퀴를 돌아 두 사람이 처음으로 만난 봄이 다시 찾아왔을 때, 사보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로우 씨가 약국을 그만둘 수도 있다고요!?”
“뭐, 약국 문을 닫겠다는 소리는 아니니까 너무 걱정하지는 마.”
오늘도 병원에서 진료를 받고 약국을 찾아와 약을 받은 사보는 평소처럼 금방 자리를 뜨지 않고 펭귄이 마련해준 녹차를 받은 후 자잘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을 때 우연찮게 그의 입에서 로우가 가까운 시일 내에 약국을 그만둘 수 있다는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놀란 나머지 사보는 당장에 로우에게 사실 확인을 하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화제의 주인공인 로우는 잠시 볼일이 있다면서 외출 중이었기에 사보는 그를 통해 사실 확인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굳이 사실 확인을 하지 않아도 로우와 함께 약국을 운영하는 동업자이자 대학 선후배 관계라는 펭귄과 샤치가 하는 말이었기에 충분히 신뢰할 수 있는 정보였다. 펭귄으로서는 사보가 이 소식을 듣고 놀랐을 것이라는 건 짐작했지만 갑자기 펄쩍 뛰며 큰소리를 칠 줄은 몰랐기에 자신까지 덩달아 놀라 하마터면 들고 있던 종이컵을 떨어뜨릴 뻔 했지만 간신히 균형을 잡아 참사를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보는 그런 펭귄의 사정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으며 그저 자세한 정황을 아는 것에 급급했다.
“가, 갑자기 왜요?”
“갑자기는 아니지. 처음 약국을 운영할 때부터 어느 정도 그렇게 정해져 있었으니까. 원래 약국은 나하고 샤치 둘만 차리기로 했고ㅡ실제로 약국 명의도 우리 둘 공동명의로 되어있어ㅡ선배는 우리 일을 임시로 도와주기로 했거든.”
“선배는 따로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그 일을 하기 전까지 여러 사정이 있어서 우리 일을 1년 정도로만 도와주기로 했거든. 그리고 1년이 지났으니 이제 슬슬 정리하려는 거지.”
“언제 나가시는지는 모르고요?”
“글쎄. 정확히는 모르지만 올해 안은 확실하지, 안 그래?”
“그렇지, 뭐. 솔직히 맘 같아서는 그냥 선배랑 쭉 하고 싶은데… 아직 마음의 준비가….”
“우는 소리 좀 하지 마. 섭섭하지만 처음부터 그렇게 결정된 거잖아.”
카운터에 엎드려 울상인 표정으로 로우가 떠나는 것에 아쉬움을 대놓고 드러내는 샤치에게 펭귄이 어른스러운 태도로 위로하듯이 달래는 사이 사보는 마치 뒤통수를 전혀 예상치 못한 무언가로 거하게 맞은 사람 같은 표정으로 멍하니 앉아있기만 했다. 지금껏 로우가 어디로 떠난다는 기색을 한 번도 내비치지 않았고, 그런 생각 자체를 안 해봤기에 사보는 막연히 로우가 이곳에서 몇 년이고 계속 약국 일을 하고 있을 것이라 믿었고, 그렇게 지속적으로 만날 수 있기에 사보는 고백을 하고 싶어도 시간은 충분히 있다는 핑계로 자신의 심정을 고백하는 것을 미루고 또 미루었다. 사보는 뒤늦게야 자신이 얼마나 안일한 생각을 했는지를 깨달으면서 동시에 로우와 이대로 제 마음도 전하지 못한 채 헤어질 수 있다는 두려움이 덜컥 생겨났다. 콜록, 콜록! 그런 두려움 때문이었는지 지병인 천식이 조금 도져버린 탓에 기침이 나와 버렸고, 사보는 일단 이곳을 떠나 혼자서 혼란스러운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사보의 모습을 발견한 펭귄과 샤치는 사보의 병명이 무엇인지 알기에 그의 기침소리를 듣고는 바로 걱정스레 사보에게 다가가 상태를 살펴보았다.
“뭐야, 사보. 갑자기 왜 그래? 천식?”
“아뇨, 그냥 가벼운 기침이에요. 오늘은 이만 가 볼게요. 안녕히 계세요.”
“아, 그래. 잘 가라.”
자신의 안색을 살펴보는 두 사람을 정중히 뿌리치고는 약국에 나선 사보는 얼마 정도 걸어서 약국에서 멀어지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바로 제자리에서 주저앉아 머리를 푹 숙이며 혼란스러움에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로우와 언젠가 가까운 시일 내에 헤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외로움, 왜 진즉에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과 후회, 그리고 지금이라도 고백을 해야 하나 싶은 갈등이 마구 휘저어져 머리가 띵할 지경이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지만 막상 고백을 준비하자니 혹여나 상대에게 거절당할지도 모르는 부담감이 엄습해왔다. 그러나 여기서 고백을 하지 않고 어영부영하는 사이 로우를 떠나보내면 분명 자신은 죽을 때까지 스스로를 멍청한 놈이라고 자책하면서 지낼 것이다. 하아아. 사보는 땅이 꺼질 듯이 깊은 한숨을 푹 쉬고는 고개를 무릎 사이에 파묻어 상념에 빠지었다.
그저 함께 있는 것으로 편안하고 행복했다. 로우와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눌 때면 불길에 갇혀있는 자신이 느껴지지 않을 수 있었다. 로우가 있으면 기침으로 숨을 쉬지 못하는 것에서 찾아오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눈을 생생하게 찌르며 타들어가는 끔찍한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고, 그가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 불길 속에서 자신을 구원해주는 기분마저 들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사랑하는 것만으로도 사보는 지금껏 받은 수많은 고통들을 잊을 수 있었다. 그만큼 사보는 로우를 사랑했으며 앞으로도 그 마음을 줄곧 간직할 것이라 확신하였다. 그래서 안일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로우가 자신의 곁에 있다는 것을 가볍게 생각하고 언제든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사실은 마음만 먹으면 자신의 곁 정도는 언제든지 떠날 사람인데, 로우가 자신을 사랑하지도 않으며 애초에 그 마음조차 확실하게 알지 못하는데 언제까지 자신의 곁에 남아있을 리는 없었다. 하. 마른 웃음이 사보의 목구멍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새어나왔다. 자신은 천하의 바보였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 확신할 것도 하나 없으면서 자신의 바람을 사실로 착각하고 있었던 바보였다.
얼마 동안이나 길바닥에 앉아 웅크리고 있었을까. 사보가 다니는 학교의 교복을 입고 있는 여고생 한 명이 사보에게 다가와 어깨를 툭툭 건드리며 말을 걸어왔다.
“사보 군? 혹시 사보 군이야?”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사보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자신의 바로 앞에 있는 상대를 보았다. 상대는 다름 아닌 사보와 같은 반의 여학생인 코알라였다. 코알라의 등장에 사보는 그제야 천천히 저린 자리를 펴서 자리에서 일어났고, 코알라는 길바닥에 앉아 몸을 웅크리고 있는 사보가 혹시나 몸이 안 좋은가 싶어서 그의 안색을 요리조리 살펴보았다.
“길에는 왜 웅크려 앉아 있던 거야? 혹시 어디 아픈 거야?”
“아니, 괜찮아. 잠시 생각할게 있어서 그만….”
코알라에게 자신의 방황하는 모습을 들킨 것이 무안해진 사보가 시선을 피하며 머리카락 끝만 만지작거리며 대답을 얼버무리자 코알라는 오히려 사보에게 무슨 일이 있음을 직감하고는 사보를 관찰하는 시선을 거두지 않고 그의 표정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렇게 얼마 정도 두 사람 사이에 대화도 없이 어색한 기류가 흐를 쯤에, 코알라가 사보에게 한 가지 제안을 던졌다.
“여기서는 좀 그러니까 카페에 갈까? 무슨 일인지 이야기 정도는 들어줄 수 있어.”
상냥하게 웃으면서 편안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제안을 하는 코알라의 말에 사보는 잠시 갈등하듯 곰곰이 생각하다가 이윽고 천천히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잠시 후, 사보와 함께 근처의 가까운 카페로 자리를 옮긴 코알라는 주문한 커피를 마시며 사보의 고민을 들어주고 있었다. 상대가 누군지 전혀 알려주지 않아 코알라로서는 정황의 절반 정도만 이해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사보가 무엇을 고민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결론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 이야기를 전부 들은 코알라는 잔에 남아있던 커피를 마저 다 마시고는 진지한 목소리로 처음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결론을 내린 해답을 사보에게 말해주었다.
“그야 당연히 고백해야지. 계속 이대로 있을 생각은 아니잖아, 안 그래?”
“그렇기는 한데, 너무 갑작스러워서 어떻게 해야 할지….”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 그냥 솔직하게 네 심정을 말해주면 되는 거야. 혹시 차이는 게 무서워서 그러는 거야?”
“뭐, 그런 것도 있지만… 그것보다도 상대가 날 피해 다닐까봐 무서운 거지.”
머그컵을 만지작거리며 사보는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약간 숙였다. 사귄다는 바람도, 차인다는 두려움보다도 더 망설여지는 것은 로우가 자신을 피해 다니고 자신과 만나 평소처럼 이야기를 나누지 않을까봐 하는 두려움이 먼저 앞서게 되었다. 언제나 함께 있어주던 상대가 어느 날 자신을 외면하고, 만나지 못하게 되는 심정을 사보는 잘 알고 있었다. 어렸을 적 부모를 잃게 된 후, 사보는 타인을 잃는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이며 외로움이라는 불길 속에서 빠져나오게 하지 못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사보는 무엇보다도 로우가 이전과는 다른 시선으로 자신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 무엇보다도 싫었다. 지금의 관계가 너무 소중했고, 깨뜨리고 싶지 않았다. 사랑을 성취하고 싶다는 갈망과 지금의 일상을 지켜내고 싶다는 바람. 어느 쪽이든 사보에게 있어서는 똑같이 중요한 것이다. 코알라는 그런 사보의 표정에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이윽고 갈등하는 사보를 위해 자신이 조금 전에 꺼낸 제안에서 한 발 짝 물러난 차선책을 제시하였다.
“그럼 당장에 고백하는 것보다는 차근차근 다가가서 자신의 감정을 어필하는 것부터 하자. 돌다리도 두들겨 건너라고, 내일 당장 헤어질 것도 아닌데 서두를 필요는 없잖아. 그러는 동안 사보 너도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고 말이야. 어때?”
코알라의 제안에 사보가 고개를 들면서 조금은 밝은 빛으로 그녀의 제안을 긍정적으로 생각하였다. 확실히 당장에 고백부터 하는 것보다는 서로에게 있어서 마음의 준비를 하면서 어필을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었다. 조금 뒤로 늦춰지게 되었지만 나쁘지 않다는 결론을 내린 사보는 살짝이나마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여 긍정의 표시를 나타내었다. 그런 사보의 반응에 코알라는 다행이라는 듯이 안도의 한숨을 쉬며 사보를 따라 방긋 웃어보였다. 하지만 문제는 아직 남아있었다.
“네 말대로 한다면 어떻게 어필한다는 거야?”
“음, 예를 들어 무언가를 주는 것부터 시작해보자. 예를 들어 꽃이라던가.”
“꽃? 글쎄, 그런 걸 좋아할 것 같아 보이지는 않은데 말이야.”
“무슨 소리! 이 세상에 꽃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고! 선물하면서 지나가다가 우연히 당신 생각이 나서 사왔다고 하는 식으로 말하면 충분히 어필할 수 있잖아.”
“음….”
자신의 일처럼 열심히 조언을 던지는 코알라의 말에 사보는 반쯤 그 기세에 떠밀리듯이 코알라의 말을 곰곰이 검토해보았다.
사흘 후, 결국에는 코알라의 제안을 받아들인 사보는 방과 후에 그녀가 추천해준 꽃집에 가서 적당한 크기의 꽃 화분을 사서 약국 앞에 도착하였다. 몰래 약국 안을 살펴보니 다행히 약국 안에는 손님들은 물론이고 펭귄과 샤치 또한 밖으로 나갔는지 자리에 보이지 않아 현재 약국 안에는 로우 혼자서 카운터를 지키며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선물을 전달하려면 아무도 없는 지금이 기회이기에 망설임 없이 들어가야만 했지만 사보는 약국 앞에 도착하고서도 20분 동안이나 주변을 우왕좌왕거리며 망설였다. 이렇게까지 약국 안에 들어가기가 망설여지고 두려워지기는 17년 동안 살아오면서 처음이었다. 분명 어제 집에서 하루 종일 시나리오까지 머릿속으로 짜면서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을 터인데도 막상 실행에 옮기자고 하니 긴장되어서 죽을 것 같았다. 진정하자. 마음을 편히 가지는 거야. 스스로를 달래고 위로하면서 사보는 드디어 결심을 굳게 다지고 마음을 다 붙잡으며 문손잡이를 잡고 안쪽으로 밀며 들어갔다. 딸랑. 경쾌한 종소리가 약국 안을 울리자 로우는 사보가 들어오기 전까지 읽고 있던 책을 덮고 독서용 안경을 벗어 내려놓은 후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 쪽으로 다가가 사보를 맞이하였다.
“무슨 일이냐? 지난번에 받은 약이 벌써 떨어진 거냐?”
“아, 아뇨. 실은 로우 씨에게 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
“나한테?”
갑자기 자신에게 줄 선물이 있다는 사보의 말에 로우는 전혀 예상치도 못했다는 반응으로 고개를 갸웃거렸고, 사보는 재빨리 카운터 위에 준비해 둔 선물을 올려놓고는 봉투를 풀어 내용물을 꺼내었다. 사보가 로우에게 보여준 것은 동그랗고 새하얀 화분 안에 아기자기하게 피어있는 연보라색의 라벤더 꽃이었다. 라벤더의 강렬한 향기가 약국에 깊게 베여있는 약냄새에 지지 않을 정도로 풍겨져 어느 샌가 사보와 로우 주변을 감싸 돌았다. 방금 사온 덕분에 아직 물기가 그대로 있고 생기가 넘치는 라벤더 꽃에 로우는 생각지도 못한 뜻밖의 선물을 받은 덕분인지 다소 놀란 표정을 지으며 라벤더 꽃을 보다가 이것을 자신에게 준 사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라벤더 아니야? 갑자기 이걸 왜 나한테 주는 거지?”
“네!? 저, 그게….”
로우의 질문에 사보는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이리저리 시선을 둘 데를 못 찾고 방황하다가 이윽고 양 손의 주먹을 피가 안 통할 정도로 꽉 쥐고 새빨개진 얼굴로 차마 로우에게 시선을 맞추지 못한 채 고개를 푹 숙이며 기어갈 것 같은 목소리로 로우의 질문에 대한 준비된 답을 해주었다.
“그동안 신세진 것도 있어서 답례를 해드리고 싶었고, 그리고… 그걸 보니 로우 씨가 생각이 나서, 사왔습니다.”
작게 기어간 목소리였지만 확실하게 로우에게 전해진 말이었다. 사보가 자신에게 꽃을 선물해 주었다는 사실 이상으로 더 놀라운 대답에 로우는 저도 모르게 벙 찐 표정으로 멍하니 사보를 볼 뿐이었고, 사보는 부끄러움에 도망치고 싶어도 발이 떨어지지 않아 마치 사형선고를 받을 죄수가 된 심정으로 뭐라도 좋으니까 로우가 무슨 반응이라도 해주기만을 기다렸다. 놀란 나머지 멍하니 있던 로우는 천천히 시선을 다시 카운터 위에 놓여 진 라벤더를 보았다. 촉촉한 물기를 머금으며 피어있는 라벤더를 보니 로우는 무언가를 깨달은 것인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잠시 사보를 보다가 이윽고 손을 뻗어 사보의 머리에 다가가려다가 직전에 멈추고는 잠시 가만히 있다가 이윽고 눈을 감으며 처음부터 손이 뻗지 않았던 것처럼 사보가 눈치 채지 못하게 조용히 거둬들였다. 그리고는 다시금 눈을 뜨며 또렷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고맙다.”
짧고 간단했지만 분명 많은 의미들이 함축되어 있는 말에 사보는 고개를 들어 로우를 보았다. 여전히 평소와 다름없는 무표정을 유지하며 사보를 보는 로우였지만 그의 두 손은 라벤더 화분을 소중히 감싸 쥐고 있었다. 가느다랗고 긴 손에 쉽게 들어가는 작은 라벤더 화분을 보니 마치 조금이나마 자신의 마음이 닿은 것 같은 기분이 들면서 어딘지 모르게 가슴 한구석이 뭉근해져서 울컥한 심정에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꾹 참아내고는 약간은 붉게 물들어진 눈꼬리를 휘어 쑥스럽게 웃어주었다. 그에 따라 라벤더 꽃이 향기를 흩트리며 가게 안으로 들어온 봄바람에 살짝 흔들렸다.
잠시 후, 사보가 돌아간 후에 볼일을 마치고 약국으로 돌아온 펭귄과 샤치는 카운터 한쪽에 자리 잡은 처음 보는 라벤더 화분을 발견하였다. 처음 가게에 들어오는 손님들이라면 바로 볼 수 있는 자리에 배치되어 있는 낯선 라벤더 화분에 펭귄과 샤치는 의아한 표정으로 때마침 조제실 안쪽에서 나오는 로우에게 라벤더의 출처에 관하여 물어보았다.
“선배, 이 라벤더 화분은 뭐에요?”
“아아, 조금 전에 선물 받은 거다.”
“선물이요? 손님한테서 받은 건가요?”
“뭐, 그렇지.”
“하지만 이런 걸 받아도 되겠어요? 관상용으로는 좋지만 선배 꽃가루 알레르기 있잖아요. 봐요, 지금도 벌써 꽃가루 때문에 눈이 새빨갛게 되었잖아요! 게다가 요즘 한창 봄철이라 꽃가루가 제일 심할 때인데.”
“맞아요! 나 참, 상대가 꽃가루 알레르기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선물한 건가? 선물 준 사람한테는 미안하지만 이건 밖에 놔두는 편이….”
“그냥 놔둬.”
“네?”
“그냥 놔두라고. 꽃가루 알레르기라면 약 먹으면 금방 가라앉으니까 일단 거기에 놔둬. 꽃가루 때문에 약국에 계속 놔둘 수는 없으니 저녁 때 집에 가져갈 테니까.”
“하지만 괜찮으시겠어요?”
“아아. 괜찮아. 그렇게 소란피우지 않아도… 어차피, 꽃은 때가 되면 시들게 될 테니까.”
로우는 꽃가루로 인해 시큰해진 눈을 비비고, 작게 터져 나오는 재채기를 참으면서 천천히 라벤더 화분이 놓여 진 곳으로 다가가 곱게 피어있는 라벤더 꽃을 손으로 톡톡 건드려 보았다. 로우의 손길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려지는 라벤더의 움직임을 로우는 한참동안이나 바라보았다. 이렇게 가만히 라벤더를 바라보고만 있으니 이것을 건네주었을 당시의 사보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새빨개진 얼굴로 그 나이 대 남자 고등학생답게 고작 꽃 선물을 하는 것에 부끄러워하면서도 이것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간접적이나마 전달해준 그 모습이 대견하면서도 사랑스러워보였고, 조금은 난감하고 미안했다. 로우는 다시 한 번 라벤더 꽃을 건드렸다. 그러면서 내일이면 사보가 다시 약국으로 올 터이니 적어도 내일까지는 이곳에 놔둬보기로 결정했다. 내일 약국에 왔을 때 카운터 위에 놓여 져서 자신을 제일 먼저 반겨줄 라벤더를 발견했을 때 화사한 금발을 가진 어른스러운 티가 물씬 풍기는 사내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호기심이 생긴 로우였다.
꽃은 언젠가 시들게 된다. 그러니 그 전까지 아름다운 모습을 한 순간이마나 지켜보며 사랑스럽다는 감상을 품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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