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하나 병 소재 주의. 약간 각색한 부분이 있습니다.
트라팔가 로우가 처음으로 ‘증세’를 발견하게 된 건 처음으로 돈키호테 패밀리에 들어오고 얼마 안 되어서의 일이었다.
어느 날 평소와 다름없이 잠에서 깨어나 거울을 확인해보니 머리에 꽃이 돋아나있었다. 황당하고 믿기지 않는 일이었지만 로우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비현실적인 사실이었다. 정수리에서 조금 오른쪽으로 치우쳐진 부분에 작게 돋아나 있는 것은 아무리 살펴봐도 혹이나 종양 같은 것이 아니라 분홍빛의 자그마한 꽃봉오리였다. 처음에 로우는 그것을 보고는 꽃이 머리에 묻었나 싶어서 떼어내려고 했으나 조금이라도 잡아당기면 마치 뇌수까지 뿌리 채 뽑혀나갈 것 같은 극심한 두통으로 인해 그러지 못하였다. 마치 뇌수가 꽃의 뿌리가 된 것처럼 예고도 없이 자신의 몸에 깊게 자리 잡은 정체불명의 꽃에 로우는 혹시 자신이 모르는 병이 아닐까 싶어 가장 먼저 코라손에게로 달려갔다. 의학에 있어서 박식한 그라면 자신에게 일어난 이상을 해명해 줄 수 있을 것 같은 불안 속의 기대를 안고 코라손을 찾아가니 과연 그는 로우의 기대대로 꽃의 정체를 가르쳐주었다. 잠시 로우의 머리와 꽃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코라손은 어린 로우가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주었다.
“이건 하나하나 병이구나.”
“하나하나 병이요? 그런 병은 처음 들어보는 데요.”
“아직 세간에 그렇게 알려지지 않은 병이니까. 아주 희귀한 불치병으로 말 그대로 몸에서 꽃이 돋아나는 병이란다. 꽃은 사람에 따라서 종류가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꽃들은 머리에서 돋아나 뇌수에 뿌리를 박고 자라난단다. 함부로 제거했다가는 뇌에 큰 손상이 올 수 있기에 현재로서는 마땅한 치료법도, 예방법도 없는 상황이란다.”
“꽃이 나는 것 이외에 다른 건 없고요?”
“그래. 하지만 앞서 말했다시피 이 병은 불치병이라 100%의 치사율을 가지고 있단다. 단순히 몸에서 꽃이 피어나는 병이라고 볼 수 없는 무시무시한 병이지.”
“꽃이 피어나는 것만으로도 죽을 수 있다는 건가요?”
“병이 악화되면 그럴 수 있다는 거란다. 지금은 꽃봉오리 상태라 괜찮지만 나중에 꽃이 피어나고, 병이 악화되면 점점 병은 너의 몸을 지배해서 나중에는 식물인간이 되어서 영원히 잠들게 되고, 그리고 결국에는 육신이 꽃의 양분이 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지겠지. 한 번 병이 악화되면 막을 수 없는 거라 지금 그 상태를 최대한 유지하는 수밖에 없단다.”
“어떻게 유지할 수 있는데요? 어떻게 하면 병이 악화되지 않을 수 있게 하는데요?”
하루아침 사이에 불치병 환자가 되어 언제 자신을 집어 삼킬지 모르는 꽃과 함께 지내야 한다는 생각에 덜컥 겁이 난 로우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코라손의 옷소매를 꼭 잡고 매달리듯이 예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간청했다. 이대로 죽을 수 없다는 절박함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어린 로우를 지배하고 있었다. 코라손은 그런 로우의 얼굴과, 그의 머리에 난 자그마한 꽃봉오리를 번갈아 보다가 쓸쓸하고 안타까운 표정으로 로우의 얼굴을 한 손으로 가만히 쓸어주며 천천히 예방법을 로우에게 똑똑히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나머지 한 손도 로우의 얼굴에 가져다 대어 이제는 코라손의 커다란 두 손이 로우의 얼굴을 따뜻하게 감싸 안아주게 되었다. 그의 눈빛에는 로우를 향한 가엾음이 깃들어 있었다.
“내 말 명심하렴, 로우. 살고 싶으면, 병을 악화시키고 싶지 않으면 절대로 꽃을 피워서는 안 된다. 한 번 꽃을 피우면 두 번 다시 되돌릴 수 없으니까.”
각오처럼, 맹세처럼 로우에게 당부하는 코라손의 얼굴에는 죄책감이 어지러이 뒤섞여 있었다. 이 아이를 치료해 줄 수 없어서, 어떻게든 살리고 싶어서 결국에는 이런 말 밖에 해줄 수 없는 자신에 대한 무력함도 함께 있었다. 그런 코라손의 상냥함을 알았기에 로우는 아무런 원망도 하지 않고 한 발짝 앞으로 발을 옮겨 코라손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의 목에 자신의 두 팔을 둘러 꽉 끌어안아줄 뿐이었다. 생각보다 간단한 일이었다. 아주 간단한 일이니 걱정하지 말라는 위로의 의미로 그를 끌어안아준 로우였으나 여전히 로우를 보는 코라손의 표정은 변함없었다.
두 사람 사이에서 돋아난 짙은 분홍빛 꽃봉오리는 생기를 머금으며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키드로우]Digitalis
W. 아르카디
불치병을 선고받은 뒤, 많은 시간이 흘렀다.
의사가 되고, 어른이 되어 바다로 나가 한 해적단의 선장이 된 후로도 로우의 머리에는 여전히 짙은 분홍빛의 꽃봉오리가 자리 잡고 있었다. 병은 여전히 완치되지 못한 채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으나 머리에 꽃봉오리가 있다는 것 이외에는 지금까지 로우가 살면서 몸에 특별히 신체적 이상 같은 것은 나타나지 않았다. 억지로 꽃을 잡아당기는 짓만 하지 않으면 아픈 곳도, 불편한 곳도 없었으며 코라손의 당부를 지금까지 잘 지킨 덕분에 꽃은 봉오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처음 머리에서 돋아난 이후 그대로 시간이 멈춘 듯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이렇게 아무런 문제없이 살아왔구나 하는 것을 떠올릴 때마다 로우는 가끔씩 과연 자신이 걸린 병이 치사율 100%의 불치병이 맞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불쑥 들었다. 평소에는 털모자로 머리와 꽃을 가린 덕분에 로우가 하나하나 병에 걸린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딱히 들켜도 문제시 될 것은 아니지만 머리에 꽃을 달고 다니는 해적이라는 소리는 듣기 싫어 로우는 나름대로 필사적으로 모자를 이용해 증세를 숨기고 다녔다. 그래서 로우의 병을 아는 사람은 기껏해야 같은 배에서 동고동락하고 있는 하트해적단의 선원들뿐이었다. 하지만 선원들도 로우의 병에 대해 자세히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머리에 꽃이 나는 특이한 병이 있구나 하는 식이었지, 얼마나 위험한 병인지 까지는 로우가 알려주지 않았기에 그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였다. 선장이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병에 걸렸다는 것은 선원들의 사기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기에 로우는 중요한 부분에서 입을 다무는 것을 선택했다.
식물, 특히 꽃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는 로우였지만ㅡ병에 걸린 후에는 오히려 꽃을 싫어하게 되었다ㅡ가끔씩 병을 연구하자는 명목으로 자신의 머리에 나 있는 꽃을 관찰하기도 했다. 꽃봉오리는 모두 다해서 5개였으며 색은 조금씩 차이가 나지만 모두 진분홍색을 띄고 있었다. 크기는 처음 발견했을 당시만 해도 작은 방울만한 크기였으나 지금은 엄지손가락 정도의 길이와 크기로 성장하였다. 덕분에 이제는 모자로 꽃을 가리는 것이 조금 힘들어지고 말았기에 로우로서는 꽃의 성장은 어느 쪽으로든 좋은 것이 아니었다. 꽃봉오리는 이제 방울이 아니라 종을 연상시키려는 듯이 길게 늘이면 귀에까지 닿을 정도로 아래로 늘어뜨려 자라나고 있었다. 로우는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검푸른 머리 위에 아래로 매달리듯이 종처럼 달려있는 진분홍빛의 꽃봉오리들을 달고 있는 자신이 바로 보였다. 아무리 봐도 적응이 안 되고 어색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라 로우는 거울을 볼 때마다 복잡한 심정이었다. 솔직히 다 큰 사내가 꽃을 달고 다니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 모습인가. 나중에 이런 모습을 들켜서 비웃음을 당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그 전에 로우라면 비웃음을 당하기도 전에 상대의 목을 베어버리겠지만 말이다.
언제쯤이면 이 지긋지긋한 꽃을 떼어낼 수 있을까. 그렇게 꽃을 관찰하고 자신의 모습을 확인한 후에는 시한폭탄과도 같은 병이 언제쯤 나을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과 불안이 로우를 은밀하게 찾아온다. 로우 자신이 직접 의사가 되어서 10년도 넘게 병의 치료법을 찾아 다녔지만 전부 다 허사였으며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명의들을 찾아가 협박, 혹은 부탁을 해보았지만 모두들 마땅한 해결책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렇게 지리멸렬하게 시간을 허비하며 답이 보이지 않는 길을 헛되이 헤매다보니 로우는 이제 반쯤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병을 악화시키지 않을 방법만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위로하듯이, 걱정하듯이 꽃봉오리가 바람에 흔들리며 과거에 코라손이 자신에게 남겨준 말을 싣고 속삭여주었다.
괜찮아요, 코라 씨. 그리고 그 말에 로우는 다짐하듯이 그렇게 대답해준다. 이 꽃이 피어날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다시 한 번 말해준다.
최악의 때는 자신이 원치 않은 상황에서, 원치 않은 인물을 통해 이루어지게 된다.
피와 화약내가 모래구름과 뒤섞여 코를 찌르는 악취를 만드는 난전 속에서 트라팔가 로우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지금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도망칠 수 있을지에 대해 필사적으로 생각했으나 한 번 들통나버린 사실은 덮어버릴 수 없는 것이었다. 샤봉디 제도 이후 처음으로 만나 서로 약속한대로 맞부딪치게 된 상황에서 로우는 상대의 행동을 파악하는 것에 너무 신경이 쏠린 나머지 자신의 머리에 무엇이 있는지를 망각하고 마는 크나큰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그리고 그 실수의 결과는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한 대가로 바닥에 떨궈버린 모자와, 모자에 억눌려 있다가 해방하듯이 모자 밖으로 나와 상대에게 자신의 빛깔을 보여주듯이 생기 있게 빛나는 꽃봉오리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로우의 맞은편에서 똑똑히 목격하고 있는 유스타스 키드였다. 전장 속에서 전혀 어울리지 않는 꽃이, 그것도 죽음의 외과의 트라팔가 로우의 머리 위에 돋아나있는 상황이 펼쳐지니 들끓던 피도, 투쟁심으로 피어오르던 열기도 찬물을 끼얹듯이 단번에 식어버리게 된다. 난생 처음으로 다른 누군가에게, 그것도 가장 알려주고 싶지 않았던 상대들 중 한 명에게 자신의 비밀을 들키게 되니 로우의 사고회로는 거기서 정지하게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것은 키드도 마찬가지였으나, 예상 밖으로 로우보다도 먼저 정신을 차리고 사태를 이해하기 위해 여전히 놀라 벙 찐 얼굴이었지만 로우보다도 먼저 말문을 열었다.
“어, 어이 트라팔가. 너 머리에 그건….”
“베포, 철수다!! 다들 배에 올라타!!”
“엣, 선장!? 갑자기 왜 그러세요! 여기서 물러서면….”
“됐으니까 얼른!!”
“어이, 트라팔가!!!”
키드의 말이 마저 끝나기 전에 로우는 재빨리 바닥에 떨어진 모자를 주워 대충이나마 꽃을 모자 안으로 쑤셔 넣어 다시 쓰고는 베포를 불러 철수 명령을 내렸다. 선원들은 갑작스런 철수 명령을, 그것도 로우가 먼저 꺼낸 것을 보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으나 어찌되었든 선장의 명령이었으니 따르는 것이 절대적이었기에 일단 불만은 접어두고 로우의 말대로 모두 잠수함에 올라타기 시작했다. 뒤늦게야 키드는 로우가 지금 이 자리에서 도망치려는 속셈인 것을 간파하고는 그를 막아서려고 했지만 이미 잠수함은 로우를 포함한 선원들을 전부 태우고는 바다 속에 가라앉은 후였다. 멀어져가는 모습조차 보이지 않은 잠수함의 행방에서 키드는 로우에게 뻗은 손을 허공에 띄울 뿐이었다.
미쳤군. 정말로 무슨 짓을 한 거냐, 트라팔가 로우. 잠수함에 타자마자 선원들을 뿌리치고 당장에 방 안으로 들어와 모자를 벗어 화풀이 식으로 침대 위에 세차게 집어던진 후 로우는 드물게 자신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혼란감에 흔들려 방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지금 생각해도 눈앞에 키드가 자신을 보던 얼굴이 떠올라 로우는 당장이라도 모든 일의 원흉인 꽃을 뽑아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랬다가는 자신마저 죽는다는 사실을 간신히 떠올려서 충동을 간신히 억눌렸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니 폭풍과도 같은 혼란은 진정이 되고 머릿속도 잔잔한 바다와 같이 평온을 되찾자 로우는 평소의 냉정함과 침착함을 되찾고 침대에 걸터앉아 앞으로의 상황을 정리하였다. 로우로서는 멍청한 유스타스가 오늘 있었던 일들을 말끔히 잊어줬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묘한 부분에서 끈질긴 구석이 있는 그의 성질로 봐서는 반드시 꽃에 대한 것을 물고 늘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다른 녀석들에게도 일파만파 퍼뜨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 생각까지 다다르게 된 로우는 미간을 잔뜩 구기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유스타스 키드의 입이 가벼운지 무거운지는 몰라도 이 일이 더 이상 누군가에게 알려지는 것은 피해야 한다. 하나하나 병이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병이라고 해도 깊게 조사를 하면 알아낼 수 있는 병이다. 만약 누군가가 로우의 병을 조사하고 진실들을 알아낸다면 분명 그것은 로우에게 있어서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 있었다. 그것만큼은 안 된다. 사실이 꽃가루마냥 멀리 퍼져나가기 전에 사전에 꽃의 입을 막아야만 했다. 잠시 곰곰이 생각하던 로우는 이윽고 자신의 책상 위에 놓여 진 전보벌레로 다가가 수화기를 들고는 번호를 누르고 연결되기만을 기다렸다. 달칵. 잠시 후, 연결된 소리가 들리자 로우는 상대가 입을 떼기도 전에 먼저 속사포로 말을 꺼냈다.
“오늘 밤 우리가 전투를 벌였던 섬으로 혼자 와.”
그 말만을 꺼낸 직후 로우는 망설임 없이 수화기를 다시 원래의 자리에 내려놓았다. 꽃봉오리가 한번, 울리듯이 흔들렸다.
로우와 키드가 다시 만난 곳은 낮에 두 해적단이 교전을 벌였던 무인도였다. 아직 그 잔상이 남아있어서 섬 바닷가 근처에는 피가 묻은 잔해들이 널려있었으며 지금은 거의 씻겨 나갔다고는 하지만 미약하게나마 피 냄새가 남아있었다. 밤의 백사장에 먼저 찾아온 인물은 트라팔가 로우였다. 약속대로 혼자서 섬을 찾은 로우는 평소와 다름없이 늘 몸에 지니고 다니는 귀곡을 제외한 다른 어떤 무장을 하지 않은 채 가벼운 몸으로 무모하게 이곳을 찾아왔다. 선원들에게 말도 안한 채 격전지였던 곳에 다시 땅을 밟고 몇 분 정도 천천히 걸었을까. 로우의 맞은편으로 익숙한 실루엣이 흔들거리며 다가왔다. 요란한 옷차림과 어둠 속에서도 위로 높게 타오르는 불꽃을 연상시키는 붉은 머리가 눈에 바로 들어왔다. 유스타스 키드 또한 연락을 받고 약속대로 단신으로 로우를 만나러 이곳에 찾아왔다. 서로 대화가 나눌 정도로 적당한 거리를 두게 되자 두 사람은 동시에 발걸음을 멈추고 서로를 마주보았다.
“약속대로 혼자 왔군, 유스타스 여.”
“다시 붙을 생각이면 1:1로 방해 없이 싸우는 편이 더 좋아서 말이야. 그리고 이번에는 다른 이유에서 날 찾은 거 아닌가?”
낮의 얼빠진 표정과는 반대로 이번에는 여유로운 미소를 띠며 로우를 떠보듯이 말하는 키드의 언동에 로우는 단번에 미간을 팍 구기고 불쾌하다는 뜻을 숨김없이 담아 노려보았다. 로우가 무슨 일로 자신을 부른 것인지 간파한 것이 분명한 키드의 얼굴이었기에 로우는 그냥 돌아갈까 하는 생각도 들었으나 감정에 휩쓸려 충동적으로 행동할 정도로 트라팔가 로우는 허술하고 미숙한 인간이 아니었다. 잠시의 정적 후, 로우는 천천히 손을 위로 들어 올려 쓰고 있던 모자를 잡아 그대로 벗겨내었다. 그러자 키드의 앞에 다시 한 번, 기묘한 꽃봉오리가 빛을 내며 모습을 드러냈다. 어둠 속에서도 은은히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진분홍빛의 꽃봉오리는 트라팔가 로우의 머리 위에서 공생하며 자라나고 있었다. 단순한 장식물이나, 화관처럼 꺾은 꽃을 머리 위에 얹은 것이 아니었다. 저 생기는 조화나 꺾여 진 꽃이 결코 가질 수 없는 것이었기에 키드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저 꽃은, 로우의 머리 위에서 분명히 살아있다. 사람의 머리 위에서 자라나는 꽃이라니, 전혀 듣도 보도 못한 것이라 다시 한 번 보고도 낮에서처럼 놀라는 키드에게 로우는 한숨을 한 번 쉬고는 꽃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숨기고 단순히 머리에 꽃이 피어나는 병이라는 간략한 사실만을 알려주자 키드는 믿기지 않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설명을 끝낸 로우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도 위대한 항로의 절반을 거쳐서 온 해적이었다. 이 바다에서 상식이 통하지 않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난다는 것 정도는 진저리 치도록 알고 있었기에 로우에게 일어난 비상식적인 일도 쉽게 납득은 할 수 없었으나 사실 자체는 인정한 것이었다. 생각보다 쉽게 받아들여준 덕분에 수고를 던 로우는 조금 긴장을 풀었지만 경고의 눈빛은 그대로 유지하며 쏘아붙였다.
“그러니 그 입을 가볍게 하지 않은 것이 좋을 거다, 유스타스 여. 만약 조금이라도 그 입을 함부로 떠벌였다가는 네 녀석의 목이 몸통에 온전히 붙어있는 날은 그날로 끝이니까 말이다.”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내가 그런 시시한 일을 떠벌리고 다닐 것 같냐? 들어보니 별 거 아닌 시시한 일이었고.”
“… 알았으면 이만 가도록 하지. 다음번에 만나면 이번처럼 운 좋지는 못할 거다.”
“어이, 잠깐만.”
다시 모자를 쓰고 발걸음을 돌려 잠수함으로 돌아가려던 로우를 키드가 갑자기 붙잡자 로우는 모자를 쓰려던 손길과 뒤로 돌리려던 발걸음을 중간에 멈추고 아직 남은 용무가 있냐는 듯 귀찮다는 눈빛으로 키드에게 시선을 돌리자 키드는 잠시 꽃봉오리들을 살피더니 턱짓으로 그것들을 가리키며 던지듯 말했다.
“나하고 이렇게 만날 때는 모자 쓰고 오지 마라. 쓰더라도 숨기지 말고.”
“뭐?”
“모처럼 알게 된 건데 구경 정도는 해도 되잖아, 안 그래?”
“함부로 구경거리 취급하지 마라, 유스타스 여. 지금 여기서 널 죽이는 것으로 입막음이 훨씬 더 쉬워질 수 있는데 말이다.”
“뭐 상관없잖아. 입막음 해주는 대가로 이 정도는 해달라고.”
대수롭지 않은 것을 부탁하니 별 상관없지 않냐는 식으로 어깨를 한 번 으쓱거리는 키드의 모습이 너무나도 태평하고 무게감이 없어서 로우는 화를 내려다가도 피곤한 기분이 들어 화가 식어버리고 말았다. 하긴, 자세한 사정을 이야기 하지 않았으니 자신의 병이 단순히 머리에서 꽃을 피는 것 정도로만 이해하고 있을 키드였기에 당연한 반응일지도 몰랐다. 여기서 자신의 병이 죽을 수 있는 불치병이라는 사실을 알면 과연 어떤 표정으로 어떤 반응을 보일지 살짝 궁금해진 로우였으나 끝내 입을 여는 것은 그만두었다.
“마음대로 해.”
깊은 진실을 밝혀서 어설픈 동정을 받는 것보다는 단순한 구경거리 취급당하는 편이 더 낫겠지 하는 심정으로 로우는 키드의 부탁에 대답했다.
그 후로 키드와 로우는 시간을 내어서 단 둘이 만나는 시간을 가졌고, 그럴 때마다 두 사람은 자잘한 이야기를 나누거나, 서로의 힘을 겨루거나, 꽃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등 별 의미 없이 시간을 보냈다. 처음에는 서로 같은 목표를 노리는 적끼리 무슨 밀회를 가지나 하는 식으로 부정적으로 생각했던 로우도 차츰 키드와의 만남에 익숙해지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키드의 앞에서는 숨김없이 모습을 드러낸다는 점이 좋았다. 잠수함 내 외에서는 모자를 함부로 벗을 수 없었던 로우였기에 그 점에 있어서는 편하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꽃의 감각이 신경하고 어느 정도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표현을 안 할 뿐이었지, 사실은 꽃이 모자에 덮어져 있는 동안에는 꽤나 답답해했기 때문이었다. 키드를 만날 때마다 로우는 무언가에서 해방된 듯한 시원한 느낌과, 편안한 감정을 동시에 가지게 되었다. 언제 자신의 목을 노릴지 모르는 적과 단 둘이 만나는데 이런 감정이 든다는 것 자체가 이상했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아도 생각했기에 로우는 이 밀회를 먼저 그만둘 수 없었다. 기분 탓인지 모르겠으나, 키드와 함께 있을 때면 머리의 꽃봉오리도 조금 더 생기 있고 빛나는 것 같았다.
몇 번의 만남에서, 키드는 로우의 꽃봉오리 중 하나를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이리저리 돌려보며 만지작거리는 식으로 유심히 관찰하고 있을 때 책을 읽고 있는 로우에게 물어보았다.
“근데 이 꽃 이름이 뭐냐?”
“몰라. 조사해 본 적 없으니까.”
“뭐야, 조사도 안 해봤냐. 무슨 꽃인지 궁금하지는 않아?”
“꽃의 종류를 알아봤자 병을 치료하는데 도움이 될 리가 없잖아. 딱히 알고 싶지도 않고.”
“흐음. 그러고 보니 볼 때마다 이건 봉오리 그대로네. 이거 꽃은 안 피냐?”
“… 안 펴. 지금까지 한 번도 핀 적이 없었고.”
그리고 앞으로도 피어나서는 안 되었다. 로우는 간신히 이어질 뒷말을 쓰게 삼키었다. 로우가 무엇을 삼키었는지 알지 못한 채 키드는 여전히 꽃을 구경하는데 신경을 썼다. 늘 자신을 볼 때마다 꽃봉오리들을 신중히 관찰하는 모습이 어울리지 않으면서도 신기해서 로우는 분명 자신의 병이 구경거리 취급당하고 있는데도 말리지 않고 그대로 놔두었다. 이따금 키드의 손길이 말려진 꽃잎을 통해 신경으로 전해질 때마다 간지러운 기분에 움찔거리지만 로우에게는 다행히도 아직까지 그 반응을 키드에게 들키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자신의 꽃을 구경하고 싶어 하고, 그것에 흥미를 가진 사람은 처음이었다. 하트 해적단의 선원들도 처음 꽃의 존재를 알았을 때는 신기하다는 듯이 마구 몰려들며 반응했지만 그런 반응에 로우의 심기가 불편해 할까봐 어느 순간에는 최대한 신경을 두려고 하지 않았기에 로우에게 있어서 키드의 반응은 오랜만이었으며, 또 처음 겪어보는 것이었다. 어째서 이 남자는 자신의 꽃에 그렇게 눈을 떼지 못하는 것일까. 한 번 피어난 궁금증은 좀처럼 지지 않고 로우에게 해답을 갈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갈구함에 따라, 로우는 책에서 키드에게로 시선을 돌려 물어보았다.
“그런데 유스타스 여. 어째서 내 병에 그렇게 관심이 많은 거냐.”
“어?”
“보석도 아니고 단순한 꽃봉오리인데 네가 그리 신경을 둘 가치는 없지 않은가. 무슨 다른 속셈이라도 있는 거냐?”
“어, 그게….”
예상지도 못한 로우의 질문에 키드는 봉오리를 만지던 손길을 거두고 대답을 찾아내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골몰하는 표정을 지었다. 로우는 문득 시선을 아래로 내려 방금 전까지 자신의 꽃봉오리를 만지던 키드의 손을 바라보았다. 손끝에 묻어난 황금빛 가루가 눈에 보였다. 분명 꽃봉오리에서 나온 꽃가루일 것이다. 그러자 로우의 머릿속으로 순식간에 지나간 생각이 있었다.
지금까지, 이 꽃봉오리에서 꽃가루가 나오던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한 번 보고 싶으니까.”
“…뭐?”
“꽃이 피는 걸 한 번 보고 싶으니까.”
너의 몸에서 피어난 꽃은 분명히 아름다울 것이니까.
툭, 하고 로우의 손에 들려있던 책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마침표처럼 들렸다.
그 후로 자신이 어떻게 배로 돌아왔는지 로우는 전혀 기억할 수 없었다. 그저 키드의 말을 들은 직후 무작정 그 자리애서 달아났구나 하는 사실만을 추측하여 끊어진 기억에 맞춰볼 뿐이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그 녀석에게서 도망치다니, 한심하다. 멍하니 자신의 한심함을 탓하는 로우였으나 정말로 자신을 탓하고 싶은 부분은, 무어라 말하고 싶은 부분은 따로 있었다. 방 안에 들려오는 것은 오로지 시계 바늘이 움직이는 태엽 소리뿐이었다. 그조차도 침묵 속으로 서서히 가라앉게 되어 이제 로우의 귀에 들려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돌아오고 나서 계속해서 침대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이며 있던 로우는 어느 순간 고개를 천천히 들어 방에 걸어놓은 거울을 확인하였다. 거울 안에는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 지 알 수 없는 로우 자신과 머리 위에서 그를 조롱하듯이 매달려 있는 봉오리들이 로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생기를 잃고 방황하는 로우의 표정과는 정 반대로 꽃봉오리는 오늘따라 더욱 화사한 분홍빛을 내며 반짝반짝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그렇게 계속 거울을 바라보고 있으니 로우는 어렸을 적, 처음 병에 걸려 아무것도 모른 채 매달리듯이 코라손을 찾아갔던 때를 떠올렸다. 불안함에 가득한 얼굴을 한 어린 로우를 감싸 안으며 코라손은 절박함과 미안함을 담으며 말했다.
[내 말 명심하렴, 로우. 살고 싶으면, 병을 악화시키고 싶지 않으면 절대로 꽃을 피워서는 안 된다. 한 번 꽃을 피우면 두 번 다시 되돌릴 수 없으니까.]
[꽃이 피는 걸 한 번 보고 싶으니까.]
그리고 뒤이어 키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 개의 목소리가 연이어 들려오게 되자 로우는 봉오리들을 향해 손을 뻗어 그것들을 한꺼번에 한 손에 전부 그러쥐고는 힘을 주어 봉오리들을 서서히 뭉개었다. 손아귀에서 일그러질수록 점점 두개골을 생으로 가르는 듯한 엄청난 고통이 벼락처럼 찾아왔지만 로우는 그 고통 속에서도 끝까지 손을 놓지 않았다. 그러나 두통을 촉매재로 삼아 두 사람의 목소리는 점점 더 크게 들려 머릿속을 어지럽혔고, 그럴수록 꽃망울들도 일그러져갔다. 이대로 가면 뇌에 무리한 영향이 가서 안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로우는 한 구석에서 혼란을 담아 생각했다. 어째서 자신은 유스타스의 말에 이토록 동요하고 있는 것일까.
벌레레레ㅡ 벌레레레ㅡ
현실로 돌아오라고 일깨우는 전보벌레의 소리에 그제야 로우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꽃을 쥐고 있던 손을 풀었다. 그러자 순식간에 로우의 머릿속을 고통스럽게 지배하려고 든 두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으며, 그 대신 고통의 후유증으로 식은땀과 가쁜 숨이 남게 되었다. 숨을 몰아쉬며 땀을 닦아낸 로우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전보벌레의 수화기를 들었다. 전화를 한 상대는 키드였다.
“잠깐 좀 만나자.”
스륵, 하고 무언가가 풀어지듯이 열리려는 소리가 환청처럼 로우의 귓가에 미약하게 들려왔다.
두 사람이 다시 만난 곳은 처음 로우가 키드에게 병에 대한 설명을 해주던 곳과 닮은 백사장이었다. 그 때와 다른 점이라면 이번에는 노을 진 바다라는 차이였다. 붉은 바다와 백사장에서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서로를 마주보고 있는 두 사람 중 먼저 입을 연 쪽은 그 때와 마찬가지로 로우였다. 최대한 덤덤하게, 목소리 저 깊은 곳에 떨림을 숨긴 채 로우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무슨 일이지, 유스타스 여.”
“아까 전에, 왜 도망친 거냐.”
“그거야, 네 녀석이 이상한 소리를 하니까… 애초에 네 녀석 답지 않게 그런 쓸 때 없는 소리를 해서,”
“쓸 때 없는 소리가 아니다, 트라팔가.”
키드의 눈길을 피하며 어떻게든 화제를 마무리 지으려고 했던 로우의 노력은 중간에 멋대로 끼어들며 로우의 말을 막아선 키드로 인해 무산되었다. 로우의 말을 부정하는 키드의 말에 로우는 그제야 키드에게로 시선을 돌려 그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로우의 앞에 서 있는 키드는 드물게도 진지하게 굳은 표정으로 올곧게 로우를 응시하고 있었다. 날카롭고 뜨겁게 쏘아져오는 키드의 눈빛에 로우는 놀란 나머지 하마터면 뒷걸음질로 물러설 뻔 했었다. 그러나 키드는 그런 로우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멋대로 튀어나온 말이지만, 네 녀석이 그렇게 가버리고 많이 생각해보았다. 아니, 그 이전부터 줄곧 생각해봤던 일이다.”
그만, 그만해.
난생 처음으로 귓가에 웅웅 울릴 정도로 크게 뛰는 심장소리에 로우는 조금이라도 진정시키기 위해 주먹을 꽉 쥐어보았으나 소용없는 짓이었다. 지금이라도 당장 키드의 입을 틀어막거나, 이 자리에서 다시 한 번 도망치고 싶었으나 어째서인지 발은 뿌리가 되어 백사장에 박힌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어쩌지. 어쩌면 좋지. 무슨 이야기인지는 아직 모르지만 지금 여기서 이 이야기를 들으면 안 될 것 같은 직감이 로우에게 경고음처럼 울렸다. 이렇게 난감할 때가 되면 코라 씨가 해결해주었다. 병에 대해 가르쳐준 사람도, 병을 진정시키는 방법을 알려준 사람도, 자신이 여기까지 살아올 수 있게 해준 사람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 불안을 잠재워준 사람도 모두 코라 씨였다. 그러나 지금은 코라 씨가 없다. 이곳에는 오로지 로우와 키드, 단 둘만이 있을 뿐이었다.
“처음 샤봉디 제도에서 봤을 때부터 줄곧 눈에 거슬렸다.”
[로우. 지금부터 내가 하는 잘 잘 들으렴. 그리고 잘 기억해야 한단다.]
키드의 말이 하나씩 로우에게 전해질 때, 로우의 안에서는 과거에 코라손이 로우를 위해 남겨준 병에 대한 당부가 함께 끄집어지게 되었다. 로우의 어깨를 가만히 감싸 쥐고 앞으로 불치병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불쌍한 아이가 비록 외로운 한이 있더라도 살아남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코라손은 상냥함을 잃지 않고 로우에게 조용히 말해주었다.
“아마 그 때부터가 시작이었겠지. 그리고 나는 내가 모르는 사이에 너에 대한 소식이 닿는 곳이면 찾아가서 네 모습을 찾아 헤매었다.”
[하나하나 병의 꽃은 아주 특별한 것을 양분으로 삼는단다. 아주 조금이라도 그 양분을 얻게 되면 꽃은 단숨에 만개하게 되어 그 다음에는 너의 육신을 양분으로 삼아 나중에는 너를 완전히 먹어치울 거야.]
“그리고 너를 만나고, 네 머리에 있는 것에 대해 알았을 때 명확한 이유도 모른 채 그것을 빌미로 너와 같이 있으려고 했었지.”
[그 양분은 음식이라던가, 피라던가, 물이라던가 그런 게 아니란다. 좀 더, 특별한 것이지.]
“그리고 오늘, 너한테 그런 말을 하니까 번뜩 정신이 들더라. 트라팔가, 나는ㅡ”
줄곧 마음에 담아둔, 언제 생겨났는지 모르는 것이지만 그렇기에 소중한 감정을 전하기 위해 그 때까지 줄곧 푹 숙였던 고개를 들어 석양이 아닌 다른 무언가로 붉어진 얼굴로 로우를 마주보던 키드는 뒤이어 말하지 못하고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모든 것을 빼앗기고 말았다.
붉은 노을 안에서 로우의 머리 위에 빛나고 있는 것은 다섯 개의 꽃. 노을빛보다도 더 짙고 화사한 자줏빛의 꽃은 노을의 열기를 머금은 채 화려하게 빛나며 만개하고 있었다. 안쪽의 새하얀 부분에는 검은 점들이 기이하게 찍혀있는 것이 오히려 어딘지 모를 섬뜩한 아름다움을 주어 로우와 더욱 잘 어울리고 있었다. 바닷바람에 흔들리며 묘한 향기를 내는 꽃은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이슬을 꽃잎 끝에 매달고 있었다. 아름답지만, 슬픈 광경에 키드는 자신이 무엇을 말하려는 지를 잊어버리고 그 광경에 압도되고 있었다. 그런 키드의 모습을 로우는 체념하듯이 바라보며 씁쓸하게 웃어버리고 말았다. 어느 샌가 로우도 키드와 마찬가지로 품어서는 안 되는 씨앗을 싹 띄우게 한 것이었다.
[하나하나 병의 꽃은 사랑을 양분으로 삼는단다. 한 번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누군가의 사랑을 받게 되면 꽃은 피어나게 될 거야.]
꽃을 피우게 하지 않기 위해서는, 사랑을 해서는 안 된다.
어렸을 적에는 그렇게 쉽게 생각했던 일이 이제는 왜 이렇게 어렵게 느껴지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꽃말 : 열애, 나는 애정을 숨길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