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왕자 루피와 비행사 로우. 키드로우 기반. 각 문단은 이야기가 이어지지 않습니다.
01.
“젠장!”
욕설과 함께 쾅! 하며 구둣발이 거대한 금속판을 차내어 둔중하게 울리는 소리가 났다. 제법 크게 난 소리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들어줄 이는 소음을 일으킨 장본인뿐이었다. 로우는 답답함을 견디지 못하고 머리에 쓰고 있던 조종사용 헬멧을 벗어 땅바닥에 패대기쳤다. 헬멧은 바닥에 세게 부딪쳤지만 모래로 인해 멀리 튕겨나가지는 못하고 그대로 파묻혔다. 헬멧이 모래로 파고들면서 난 퍼석한 소리에 로우는 다시금 울컥 치솟으려는 짜증을 간신히 억누르고 허망한 눈빛으로 사방을 둘러봤다. 로우의 사방은 감탄이 나올 만큼의 모래로 가득 찼다. 생명의 흔적은 좀체 느껴지지도, 보이지도 않는 삭막한 모래사장.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으면 정말로 이 세상에 오직 구름 한 점 없는 메마른 하늘과 그와 닮은 사막만이 가득한 것과 같은 착각에 휩싸일 것 같아 로우는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시선을 돌려 이번에는 헬멧과 같은 신세로 모래에 처박혀 있는 자신의 비행기를 쳐다봤다. 아직도 검은 연기가 군데군데 새어나오는 비행기는 척 봐도 멀쩡해 보이지는 않았다. 방금 전까지 자신이 저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횡단하고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으로 파손된 비행기는 다시 고치기에 상당한 난관이 필요해 보이는 상태였다. 그러나 로우는 어디까지나 비행사이지 엔지니어는 아니었다. 기본적인 비행기 지식은 알고 있어도 그것을 고칠 만큼의 전문적인 지식은 빈약했다. 자신의 비행기를 고쳐줄 상대는 지금까지 항상 정해져있기 때문에ㅡ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로우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휘휘 저었다. 조난당했다는 사실에 짜증과 절망을 가질 틈도, 이제 와서 녀석을 떠올려도, 아무것도 해결될 것은 없다는 사실정도는 로우도 잘 알고 있다. 지금 당장에 직면해야 될 문제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되냐는 것이다. 로우는 상황을 짚어가며 최대한 긍정적인 방향으로 사태를 관망해보고자 했다. 추락 직전에 아슬아슬하게 구조 신호를 보냈으니 얼마 안 있어 사람이 올 것이며 그 때까지 추락 지점에서 대기하며 자신이 할 수 있는 부분까지 비행기를 수리해보면 되는 것이다. 운 좋게 수리가 성공되면 마을이 있는 곳까지 비행기를 몰고 가면 된다. 생각을 그렇게 정리하자 마음에 급하게 만들어진 평정이 찾아오고 부글부글 끓던 화가 식혀 들어갔다. 자신을 다스리는 것만으로도 좋은 수확이기에 로우는 한숨을 푹 쉬고는 조금 전에 화풀이로 던졌던 죄 없는 헬멧을 다시 주워들었다. 그 사이에 헬멧 안에는 모래가 잔뜩 들어가 들어보면 고운 모래알들이 쏴르르 쏟아져 내렸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다. 먼저 비축된 식량과 가지고 있는 물품의 상태를 체크해봐야 한다.
“있잖아, 형.”
그 때, 자신 이외에 아무도 없음이 분명한 이 사막 한가운데에서 자신 이외의 낯선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환청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나도 생동감 넘치는 앳된 소년의 목소리에 로우는 화들짝 놀라 몸을 뒤로 틀어 상대를 마주봤다. 목소리로 예상한대로 로우의 뒤에 있는 인물은 1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한 소년이었다. 칠흑을 닮은 새까만 머리카락에 밀짚모자를 쓰고 빨간 민소매 조끼와 파란 바지를 입은 소년은 예고도 없이 로우의 앞에 나타나 말갛게 웃었다. 로우는 소년의 등장에 너무 놀란 나머지 소년이 어디에서 왔는지, 정체가 무엇인지에 대한 중요한 질문을 묻는 타이밍을 놓쳐버렸고, 그 틈을 타 소년은 싱글싱글 웃으며 로우에게 손을 내밀어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 양 한 마리만 그려줘!”
02.
“그럼 트랑이라고 부르면 되지?”
“어째서 그렇게 되는 거냐. 트라팔가 로우라고 확실히 이름을 가르쳐줬잖아.”
“그렇지만 형 이름은 너무 어려운걸. 그러니까 트랑이라고 부를래.”
“그러면 너는 뭐라고 부르면 되지?”
그 말에 소년은 그저 웃기만 했다. 평소와는 다른 묘한 공허함이 느껴진 것이라 로우는 그 이후로 소년의 이름을 묻지 않았다.
03.
“돌아가면 장미와 화해하고 싶어.”
소년의 풀죽은 목소리에 로우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소년이 말한 장미와 같은 붉은 머리칼을 가진 이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 또한 소년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살고 있는 머나먼 곳에 남겨온 이가 있었다. 무작정 비행기를 이끌고 이 먼 사막까지 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는 로우의 비행기를 정비하는 엔지니어이다. 물론 그가 로우의 비행기 하나만을 다루는 것은 아니지만 로우의 비행기를 만질 수 있는 유일한 엔지니어는 그 뿐이었다. 엔지니어와 비행사라는 직업상 필연적으로 자주 만남을 가지게 된 두 사람은 순식간에 가까워졌고, 남들이 말하는 ‘연인’사이가 되기까지도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를 신뢰했고, 애정을 가졌다. 그러나 어느 날을 기점으로 두 삶의 관계는 어긋나기 시작했다. 사소한 일에 서로의 언성을 조금씩 높이게 되었고, 만남이 드물었으며, 서로가 서로에게 가진 감정이 식어져갔다. 그렇게 좋던 상대방의 장점이 어느 사이엔가 단점이나 짜증으로 받아들여졌다. 서로가 마음에 들지 않게 된 그 흔한 계기조차 그들에게는 없었다. 차라리 계기라도 있으면 서로 화해할 수 있고, 변화할 수 있는 전환점을 만들 수 있는데 그것마저도 할 수 없어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써야할지 서로가 알 수 없어 갈팡질팡했다. 그리고 그것에 답답함을 느껴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여 갈등의 골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깊어졌다. 이제는 이렇게 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지쳐가던 어느 날, 로우는 그와 또 다시 사소한 일로 싸움을 벌였다. 평소보다도 더 격해지는 감정에 로우는 그에게 폭언을 쏟아 부었고, 그는 폭언에 감당하지 못한 나머지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고 폭력을 행사해버렸다. 관계의 파탄을 알리는 마침표였다.
로우는 그 길로 바로 짐을 싸들고 그와 동거하던 자취방에서 나와 아직 정비 중인 자신의 파트너에게로 달려가 무작정 비행기를 몰고 하늘로 도망쳤다. 로우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떠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결국에는 이렇게 끝낼 수밖에 없는 관계에서부터, 산산이 부서져버린 연정에서부터, 벌겋게 물들여져 가는 뺨의 고통으로부터, 자신의 뺨을 후려친 직후 후회로 복잡하게 물들여져 버린 그의 얼굴과, 그렇게 만들어버린 자신으로부터. 로우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은 로우를 기다렸다는 듯이 텅 빈 공간을 기꺼이 내어주었다. 로우는 조종석을 부여잡고 오열을 터트렸다. 로우의 오열을 들어줄 이는 오로지 하늘에 고요히 떠있는 은색 별들뿐이었다. 그리고 사흘 뒤, 로우는 사막에 불시착했다.
로우는 모닥불에 비춰진 소년의 발그스름한 얼굴을 바라봤다. 만약에 소년이 정말로 별에서 온 자라면 그 날의 하늘에 떠 있는 수많은 별들 중 하나가 소년의 별일까. 그렇다면 소년도 자신의 비탄과 눈물을 듣고 봤을까. 그래서 여기에 있는 것일까.
로우는 다시 모닥불로 시선을 옮겼다. 모닥불은 자신의 별에 두고 온 장미를 닮았다.
장미의 이름은 유스타스 키드였다.
04.
“이 세상에 내가 아는 장미와 같은 장미가 수없이 많아도 내 장미는 하나 뿐이야.”
장미도 그렇듯 사랑하는 사람도 같을 수 있을까. 로우는 소년의 대답이 궁금했지만 그것을 입 밖으로 내는 대신 “그렇구나.”라고 대답해줬다.
05.
“트랑아, 나 목말라.”
소년의 말을 시작으로 로우는 소년과 함께 물통 하나를 들고 무작정 사막을 걷기 시작했다. 머지않은 곳에 우물이 있다는 소년의 말은 상식적으로 믿기 힘들었지만 함께 지내다보니 소년의 허무맹랑한 말에 슬슬 적응이 되어 이제는 소년이 무슨 말을 해도 체념으로서 그것을 사실 그 자체로만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리고 사막에 있다보니 무료하기도 해서 몸을 움직이는 편이 더 좋았다. 이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의심 하나 없이 상대의 말을 믿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그리 불안하지도, 나쁜 것도 아니었다. 사막의 모래는 바람에 닳고 닳아 하도 고와져서 입자라고 해도 좋을 만큼 알맹이가 작아 마치 비단을 밟고 거닐고 있는 것 같았다. 푹푹 꺼지는 바닥에 발을 내딛는 것이 힘들었지만 로우는 소년의 앞에서 힘든 기색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 애써 개의치 않다는 표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신발 안으로 모래가 스며들어왔지만 로우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걸어 나갔다. 반면 소년은 지친 기색 없이 웃는 낯으로 로우의 몇 발자국 앞에서 걸어갔다.
“트랑이도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
로우는 소년의 말에 이끌리듯 키드의 얼굴을 떠올려 봤다. 그렇게 헤어지고 난 뒤에도 자신을 기다려줄까.
“모르겠어.”
자신 없는 목소리로 로우는 대답했다.
“아마 지금쯤 내가 돌아오지 않아서 꼴좋다고 비웃고나 있지 않을까.”
그 말에 루피는 고개를 돌려 로우를 바라봤다. 뜻밖에도 웃음기 하나 없는 무표정이었다.
“그래서 트랑이는 돌아가고 싶지 않아?”
저 멀리 우물이 보였다. 소년의 말대로 정말 사막 한 가운데에 우물이 있던 것이다. 오아시스 대신 만들어놓은 것일까. 우물이 있다면 이 근처에 마을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로우는 그렇게 우물과 연관된 생각을 연이어 하며 소년의 질문을 회피했다.
아무튼 우물이 있다는 것은 로우 입장에서 봤을 때 무척이나 좋은 소식이었다. 내색은 안했으나 슬슬 비축된 물이 다하여 초조하던 참이었으니까. 로우는 소년을 지나쳐 뜀박질로 우물이 있는 곳까지 달려갔다. 이윽고 도착한 우물을 내려다보자 안에 있는 것은 물 대신 꽉 채워져 있는 어둠이었다. 얼마나 깊은지 물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확인이 어려워 마냥 기뻐하기에는 아직 일렀다. 로우는 여기까지 왔으니 시도는 해보자는 심정으로 우물 도르래에 걸려있는 낡은 두레박을 아래로 던져봤다. 두레박은 물에 빠지는 소리도, 바닥에 부딪치는 소리도 내지 않았다. 얼마나 깊은 거야, 이 우물. 로우는 투덜거림 대신 미간을 한껏 찡그렸다.
“한 번 끌어올려봐.”
그 사이에 도착한 소년이 우물에 걸터앉아 로우에게 그리 말했다. 아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는데 벌써 끌어올려도 되는 건가 싶었지만 로우는 순순히 소년의 말에 따라 도르래의 반대쪽 밧줄을 잡아 당겼다. 덜그럭거리며 올라오는 두레박에는 확실한 무게가 느껴졌다. 오랜만의 중노동이라 로우는 땀을 뻘뻘 흘리며 두레박을 끌어올렸다.
“트랑이가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분명 그 사람도 트랑이를 소중히 생각하고 기다리고 있을 거야.”
로우는 하마터면 두레박을 잡고 있는 끈을 놓쳐버릴 뻔 했다. 늘 그런 식으로 자신의 속내를 꿰뚫어보고 있는 소년은 불편하면서도 싫지 않았다. 자신이 듣고 싶은 말을 콕 집어서 말하기 때문일까. 단순히 어린 소년의 말에 불과함에도 로우는 그 말이 사실이길 바랬다. 소년이 이 사막 한가운데에 우물이 있다고 말해서 정말로 우물을 발견한 것처럼.
만약에 그렇다면, 정말로 유스타스가 아직까지도 자신을 생각하고 기다리고 있어준다면, 그렇다면 자신은 돌아가도 되는 것일까.
“돌아가야지.”
무심코 툭 튀어나온 말이 내뱉어지자마자 두레박이 마침내 우물 밖으로 나왔다. 두레박 안에는 맑고 시원한 물이 가득 차있었다.
06.
“트라팔가! 어이, 정신 차려!! 로우!!”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로우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로우의 어깨를 거칠게 흔들며 다급한 목소리로 반복해서 로우의 이름을 부르던 이는 장미와 같은 붉은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체격 좋은 남성이었다. 유스타스. 로우는 마른 입술을 달싹거리며 오랫동안 부르지 못했던 이의 이름을 힘겹게 불렀다. 유스타스의 뒤로는 구조대로 보이는 사람들이 서로 지시를 내리며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토록 기다리던 구조대가 드디어 이 사막에 발을 내딛은 것이다.
“이 멍청아! 아무리 싸웠다고 해도 무작정 정비도 덜 끝낸 비행기를 몰고 여기까지 오는 녀석이 어디 있어! 하여튼 간에 너란 녀석은… 트라팔가? 너 왜 그래?”
한참 잔소리를 늘어놓을 기세로 말을 쏘아붙이던 유스타스는 일순간에 기세를 누그러트리고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로우를 내려다보자 오히려 당황스러운 쪽은 로우였다. 유스타스야? 로우는 다시 한 번 유스타스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로우의 눈동자는 그를 보지 않았다. 로우의 눈동자가 아직까지도 바라보고 있는 것은 소년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황량한 사막과 별 하나만이 뜬 암청색의 하늘 아래서 뱀에게 물려 쓰러지기 직전이었던 덧없는 소년의 마지막 모습. 그것은 소년이 로우에게 주는 이별의 인사였다. 처음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소년은 갑자기 나타나 이별의 인사를 줄 틈도 없이 사라졌다.
소년은 사랑하는 장미가 기다리고 있을 작은 별로 돌아갔을 것이다. 로우는 그리 확신했다.
“왜 그래, 트라팔가?”
“보고 싶었어, 유스타스야.”
하고 싶은 말이 무척이나 많은데도, 로우의 입 밖으로 가장 먼저 나온 말은 그것이었다. 그 말을 가장 먼저, 전해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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