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우 생일 기념 소설. 최신 스포일러 주의!!
우리 아들, 생일 축하한다. 생일 축하해, 로우. 생일 축하해, 오빠!
엄하지만 인자한 미소를 잃지 않는 좋은 스승이며 동시에 언제든지 의지할 수 있는 듬직한 아버지, 그와 어울리는 자애로운 미소로 자신을 격려해주는 어머니, 햇살을 닮은 화사한 미소로 자신의 손을 꼭 잡으며 잘 따라주는 여동생. 모두가 형태는 다르지만 무엇보다도 소중하고 빛나는 행복을 가득 담은 미소로 식탁에 앉아 자신의 생일을 축하해주고 있다. 먹음직스러운 음식들, 황금빛으로 타오르고 있는 촛불, 생크림과 딸기로 만들어진 커다란 케이크, 이 모든 것들이 놓여 진 테이블에 자리 잡고 앉아 손뼉을 치고 있는 가족들. 그림책에서만 볼 수 있는 이상적이고 따스한 가족상이었다. 너무나도 환상적이고, 이상적이며, 낭만적이라 이것이 현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충분히 자각할 수 있지만 도저히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꿈인데도 깨어나고 싶지 않았다. 꿈에서만, 느낄 수 있는 행복이니까.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그런 억지에 가까운 납득으로 나는 여전히 자리에 앉아 가족들의 축복을 받고 있었다.
자, 이제 촛불을 끄고 소원을 빌어야지.
가족들의 말에 나는 테이블 정중앙에 놓여 진 생일 케이크를 내려다보았다. 어머니가 만든 수제 케이크에는 열 개의 초가 꽂혀져 작은 불빛을 태우고 있었고, 그 중심에는 초콜릿으로 만들어져 있는 작은 팻말이 있었다. [10TH HAPPY BIRTHDAY LAW]. 열 개의 초, 열 번째 생일을 축하하는 팻말. 내 생일은 여기서 멈춰져 있었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생일은 오로지 이 날을 포함해 열 번의 생일들뿐이었다. 열 번째의 케이크 앞에서 어른이 된 나는 웃었다. 환하게, 어렸을 적에 자주 지어주었던 열 살의 어린아이에 어울리는 미소를. 그러나 아무리 노력을 해도 스물여섯의 나는 16년 전과 같은 미소를 흉내조차 낼 수 없었다. 그래도 웃었다. 억지로. 아직 깨어나고 싶지 않으니까. 가족들과 함께, 그들과 같은 미소를 짓고 싶었으니까.
이러다간 촛불 다 타겠다. 얼른 끄고 케이크 먹어야지. 그래, 오빠! 나 얼른 케이크 먹고 싶어!
가족들의 성화에 나는 순순히 몸을 숙여 케이크에 다가갔다. 이 촛불을 끄면 어찌되는지 알면서도, 다가갔다. 훅. 미약한 입김에 힘없이 꺼져버린 촛불과 동시에 가족들의 모습도 바람 앞에 흩날려버린 촛불들처럼 허무하게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가족들의 웃음도, 따스한 온기도, 행복했던 기분도 다 흐트러져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홀로 남아버린 스물여섯의 나에게 열 살의 어린 내가 뒤늦게 찾아왔다. 본래 이 꿈의 주인이었던, 이 생일의 진정한 주인공인 열 살의 나.
자, 이제 돌아가.
돌아가야 한다. 더 이상 이러한 행복을 느낄 수 없는 메마르고 차가운 현실로. 아무리 찾아 헤매고 발버둥을 쳐도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가족들의 미소가 존재하지 않는 비참함 속으로 돌아가야 한다.
“… 최악이군.”
스물여섯 번째 생일날, 악몽에서 깨어난 로우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케이크
W. 아르카디
고약한 냄새들을 풍기는 시체들의 틈바구니에 끼어서 가까스로 도망친 후로, 로우는 단 한 번도 고향에 찾아가지 않았다. 이미 황폐화된 도시에 찾아가봤자 의미 없다는 생각에서부터, 더욱 독한 마음을 먹기 위해 억지로 찾아가지 않은 각오까지. 이유는 다양했지만 그 모든 것들과 일맥상통하는 근원적인 이유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자기 혼자 지옥에서 살아남은 것에 대한 죄책감. 그 죄책감을 이겨내지도, 견뎌내지도 못했기에 로우는 두려움 속에서 계속 과거를 외면하고 앞만 보며 달려왔다. 그렇게 16년을 살아왔다. 로우의 시간은 고장 난 시계처럼 16년의 그 날로 멈춰져 있었다. 몸은 커지고, 머리에는 수많은 지식들이 담겨지며, 많은 곳들을 누비는 경험을 쌓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고장 난 시계는 고칠 수 없었다. 그래서 로우는 가끔씩 꿈을 꾼다. 가족들과의 행복한 시간들. 아무런 근심 없이 가족들의 품에 안겨, 친구들과 실없이 떠들며, 모두의 미소에 둘러싸여 안식을 취할 수 있던 짧은 나날들. 멈춰버린 시계는 그런 덧없는 순간들만을 보여줬다. 자리에서 일어난 로우는 시계를 보았다. 이제 막 자정을 넘긴 시간. 날짜는 이제 10월 6일이 되었다. 자신은 또 이렇게 무의미하게 나이수를 늘이는 구나하는 생각이 막을 새도 없이 스쳐들었다. 로우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어느새 자신의 손은 작고 부드러운 여린 살이 아닌 크고 굳은살들이 군데군데 박힌 어른의 손이 되었다. 아버지와 같은 손이 되었을까. 손을 들어 유심히 살펴보았지만 아버지와 닮은 느낌은 받을 수 없었다. 어린 시절의 자신도, 한 때의 아버지와도 닮지 않은 손이 되어버렸다. 엄습해보는 괴리감은 로우에게서 현실을 들이밀어 더욱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만을 각인시켜 주었다. 이대로 가면 나는 가족들마저 잊게 되는 걸까. 이제 로우는 자신의 가족들의 얼굴이 점차 희미하게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어떤 눈매를 가졌는지, 어떤 콧대를 가졌는지, 입매는 어떤 모양인지,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모아 어떤 미소를 지었는지. 로우는 소리 없는 한숨을 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과거에서 필사적으로 도망친 대가였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을 가만히 보냈을까. 로우는 예고도 없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나갈 채비를 서둘렀다. 그 와중에도 선원들에게 저녁때 돌아오겠다는 쪽지를 남기는 것은 잊지 않았다. 서두르면 다녀올 수 있을 거다. 모든 것이 충동적으로 벌이는 것들이었지만 그래도 여기서 멈추고 싶지 않았다. 로우는 마지막으로 귀곡을 챙겨들고 방을 나섰다.
로우는 자신의 마을을 사랑했다. 새하얀 도시는 더러움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이 순백의 빛으로 빛나 깨끗함에서 오는 아름다움을 선사했고, 마을에서 함께 자라온 아이들은 그 순백에 물들어져 아이 특유의 순수함을 간직하였다. 로우도 그 아이들 중 하나였다. 무뚝뚝하고 붙임성이 없는 다소 특이한 아이였지만 비뚤어지거나 나쁜 행동을 보여주지 않았다. 다친 아이가 있으면 자신의 의료 지식을 활용하여 고쳐주고, 부모님 말씀 잘 들으며, 철없는 여동생의 투정을 오빠로서 불만 하나 없이 전부 받아들여주는 ‘착한 아이’였다. 그래서 로우는 이 모든 것들이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는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 행복이, 깨끗함이 영원할 것이라는 어리석고도 어쩔 수 없는 믿음이었다. 그러나 깨끗한 것이기에 쉽게 더럽혀질 수 있었다. 마을은 탐욕과 이기심으로 빚어진 폭력에 더럽혀지고 말았으며, 로우의 믿음 또한 산산이 부서져 흙탕물 속에 가라앉고 말았다. 이제 다시는 건질 수 없는 오물의 밑바닥에 가라앉은 믿음이 다시 빛을 찾게 될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한 번 더럽혀진 이상 다시는 원래의 순백을 찾지 못하게 되었다.
쉼 없이 달려온 덕분에 로우는 예상보다도 일찍 도착할 수 있었다. 바리케이트가 설치되어 있지만 그 정도는 쉽게 넘어갈 수 있었으며, 보초를 서고 있던 자들은 새벽녘이라 아직 단잠에 빠져있던 때였다. 싱거울 정도로 안으로 들어간 로우는 예상과 전혀 다르지 않은 마을의 전경에 잠시 발걸음을 멈춰야만 했다. 마을, 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건물은 대부분이 부서지고, 땅은 황폐화되며, 여전히 자욱한 연기와 검붉은 핏자국들이 낭자한 이곳을 한 때 풍족했던 마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이곳은 틀림없는 누군가의 짧은 행복이 있었던 곳이었다. 다시 발걸음을 재촉하여 나아가니 서서히 새카맣게 타버린 길들이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점점 과거의 풍경들과 겹쳐보면서 로우는 자기도 모르게 주변을 하나씩 짚어나갔다. 가족들과 함께 자주 식사하러 갔던 식당, 나와 여동생의 옷을 많이 샀던 단골 옷가게, 친구들과 함께 다녔던 학교, 아버지와 어머니가 일하시던 병원. 사소한 것들 하나하나가 일일이 로우의 발목을 잡아 붙들어 매어 발걸음을 옮기는 것을 힘겹게 만들었다. 그렇게 평소보다 느린 발걸음으로 로우가 도착한 곳은 텅 빈 커다란 터였다. 다 타버린 기둥들 몇 개만 있을 뿐인 휑한 터는 한 때 로우가 10년 동안 가족들과 함께 살아왔던 저택이 있었던 자리였다. 행복의 근원지였던 곳은 이제 로우가 무엇을 잃었는지 가장 비참하게 보여주는 장소가 되었다. 아무리 눈을 돌려도 이제는 볼 수 없는 저택의 공백을 말없이 보던 로우는 천천히 터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 여기에 오기 전에 다른 섬에 들러서 사온 것의 포장을 풀었다. 밝은 색의 포장지를 부스럭거리며 풀어내자 나온 것은 새하얀 생크림 케이크였다. 여동생이 가장 좋아하던 케이크. 자신의 생일이니 로우가 가장 좋아하는 케이크를 사주고 싶어도 같이 따라온 여동생은 생크림 케이크가 먹고 싶다면서 부모님께 떼를 썼다. 그러면 로우는 어차피 자신은 단 걸 싫어하니 여동생이 먹고 싶은 걸로 하자면서 부모님을 설득했고, 부모님은 정말로 괜찮으냐며 물었다. 응, 괜찮아요. 로우는 정말로 괜찮았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여동생은 밝은 미소를 지으며 깡충깡충 뛰었고, 부모님은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웃으며 생크림 케이크를 사주셨다.
열 번째 생일에도 생크림 케이크가 식탁 한가운데를 차지했었다.
로우는 검게 타버린 마을에서 유일하게 새하얗게 빛나는 케이크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자신을 위해 사온 케이크가 아니었다. 어차피 자신은 어렸을 적이나 지금이나 생크림 케이크를 좋아하지 않았다. 로우가 좋아했던 것은 그 생크림 케이크를 먹으면서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여동생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조차도 볼 수 없으니 더 이상 로우가 이 케이크를 좋아할 이유도, 사야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그러니 이 케이크를 마지막으로 하자.”
희미하게 지은 미소는 스물여섯의 해적이 아닌, 어린 여동생을 위로해주는 열 살 아이의 것이었다.
이제 곧 동이 터 올 시간이 되었다. 로우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발길을 돌렸다. 지금쯤 일찍 잠에서 깬 선원들이 자신을 찾고 있을지도 모른다. 매년 이날만 되면 중대사가 일어난 것처럼 요란을 떨어대는 선원들의 얼굴을 떠올리니, 로우는 어설프게나마 웃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과거에도, 지금에도 자신의 생일을 축하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과 함께라면 언젠가 멈춰버린 시계도 조금씩 고칠 수 있지 않을까.
로우가 떠난 자리에는 동그란 생크림 케이크와, 부모님과 여동생의 손을 잡고 저택 안으로 들어가는 소년이 남겨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