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트위터에 올린 단문들 정리.
ㅡ탁
나무를 꿰뚫은 맑은 소리가 깔끔하게 공기를 울렸다. 조용한 사방을 불시에 가르는 소리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고즈넉하고 잔잔한 공기의 흐름과 적절하게 어울려 방해가 아니라 고풍스러움을 한층 더 해주었다. 사극 드라마에서 흔히들 나오는 대나무 물통이 돌을 두드리는 소리와 같은 맥락이라 볼 수 있다. 뒤이어 소리 없이 활을 내리는 모습은 유려하고 매끄러워 의식을 치루는 동작의 일부분과 같았다. 키드는 상대의 눈길을 따라 가봤다. 방금 전 소리가 꽂혀진 곳에는 곧은 화살이 과녁의 정중앙에서 위로 조금 어긋난 곳에 박혀있었다. 박힌 지 얼마 되지 않아 화살은 아직도 꽂힌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해 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다시 상대에게로 시선을 돌리니 그는 마뜩치 않은 눈으로 과녁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정중앙을 맞추지 못한 것이 조금 분해보이는 것인가 싶어 키드는 내심 그의 분해하는 모습이 살짝 흥미롭게 느껴졌다. 궁도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지만 그 정도의 실력이면 완벽하지 못하더라도 만족할 수준이 아닌 가 싶지만 상대는 키드만큼 안일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지 않은지 다음 화살을 꺼내들었다. 이번에야말로 과녁의 정중앙을 꿰뚫을 생각으로 보였다. 화살을 활에 걸고, 활시위를 당겨 과녁의 조준을 맞춘다. 말로 설명하면 단순한 동작들로만 느껴지지만 실제로 보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 섬세하게 이어지는 일련의 행동들은 고고하다 못해 신성하기까지 느껴지는 일종의 예식이었다. 진지한 표정으로 과녁에 집중하는 옆모습은 흑백의 궁도복과 활과 화살에 예상 밖으로 잘 어울렸다. 흐트러짐 없는 표정과 숨소리마저 느껴지지 않은 적막 속에서 키드는 저도 함께 숨을 삼켰다. 모든 것을 조용히 압도하는 궁사(弓師)의 모습이었다. 공기의 흐름마저 정지한 몇 초의 시간 후, 드디어 상대는 고정된 활시위와 활을 손에서 완전히 놓았다.
ㅡ탁
다시 한 번 나무에 박히는 청아한 소리. 이번에는 명중이었다.
후우. 그제야 사내는 참았던 긴장의 숨을 풀어 내쉬었다. 강박적인 집중에서 해방되어 일시적으로 느슨해진 그의 얼굴은 이제 키드와 같은 앳된 고등학생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식은땀을 서너 방울 흘리던 그가 고개를 옆으로 들어 그동안 자신을 지켜보던 낯선 참관객의 존재를 발견했다.
“여긴 무슨 볼일이지?”
대답을 듣기도 전에 소년은 한 손에는 활을, 다른 한 손에는 화살통을 챙겨들고 뒤쪽에 내려두었던 자신의 가방으로 걸어갔다. 키드는 그 틈에 재빨리 화살통에 단정히 새겨진 그의 이름을 발견했다.
[트라팔가 로우]
그 이름을 보고서야 키드는 루피에게서 들은 ‘궁도부의 실력 좋고 재미있는 녀석’이 그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늘도 허탕인가.”
차에 내리자마자 들리는 중저음의 목소리에 코라손은 피곤한 눈빛으로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봤다. 코라손이 있는 곳에서 머지않은 곳에 자신의 차를 세워놓고 그곳에 기대어 팔짱을 낀 채 서 있는 로우의 모습이 바로 코라손의 눈에 들어왔다. 비딱한 태도로 비웃는 것인지 위로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애매한 표정으로 말을 건네는 로우의 질문에 코라손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형사의 자존심으로서 인정하기는 싫지만 로우의 질문에 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는 자신도 로우와는 다른 자세지만 마찬가지로 자신의 애차에 몸을 기대 얼굴을 파묻는 것으로 피로에 젖다 못해 축 늘어지는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죽겠어. 이틀 내내 잠도 못자고 철야로 잠복했는데도 용의자가 나타나지도 않아서 말이야.”
“빨리 성과를 보여주지 않으면 여론이 들들 볶을 텐데 말이야.”
“그 얘기는 그만하자…. 매스컴이라면 진절머리가 난다.”
“그 말은 나도 포함되는 것처럼 들리는데 말이야.”
그리 말하는 로우의 목소리에는 퉁명스러움 안에서 섭섭함이 은밀히 느껴져 코라손은 그제야 아차하고 고개를 들어올렸다. 가끔씩 이렇게 잠복근무로 피곤해지거나 며칠 동안 자신들을 마음대로 쥐고 흔드는 매스컴의 행태에 질리다보면 동거인이 사회부 소속 취재기자라는 사실을 잊고 기자들에 대한 불평불만들을 늘어놓게 된다. 자신의 동거인은 다른 기자들처럼 편파적인 기사가 아니라 중립적인 입장에서 때때로 자신들을 옹호해주는 기사를 써줘서 형사들 사이에서도 몇 안 되게 호의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기자인데도. 코라손은 혹여나 로우가 자신의 말로 감정이 상했을까봐 재빨리 차체에서 몸을 떼어내 제대로 서서는 두 손을 허공에 휘휘 저으며 다급히 말했다.
“로우, 그 말은 너한테 하는 말은 아니잖아! 내가 무슨 악감정이 있다고 널 나쁘게 말해!”
“농담이야, 알고 있어. 기분 안 상했으니까 걱정 마.”
“그, 그래. 이해해줘서 고마워.”
“그렇다고 해도 이번 주 안으로 결판 짓도록 해. 안 그러면 정말로 온 곳에서 욕 들어먹어야 할 걸. 이만 올라가자. 나도 며칠 동안 취재 때문에 이리저리 돌아다니느라 피곤해 죽겠어.”
“아, 그래. 그나저나 너도 이제 들어온 거니? 아직 저녁 안 먹었으면 일단 밥부터….”
코라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로우의 행동이 우선적으로 빨랐다. 대화를 하면서 찬찬히 코라손에게로 걸어오던 로우는 자신의 행동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제 할 말을 하느라 바쁜 코라손과의 거리를 순식간에 좁혔다가 한창 저녁 식사 이야기로 횡설수설 떠드는 그의 입에다가 빠르게 버드키스를 날렸다. 쪽 하는 작은 소리임에도 침침한 지하 주차장 안에서 선명히 울리자 코라손은 입술에 느껴진 부드러운 감촉과 함께 그것을 들으며 로우가 자신에게 무엇을 했는지 뒤늦게 깨닫고는 벙 찐 얼굴을 지어 방금 전까지 하던 대화를 머릿속에서 싹 날려버렸다. 그런 그의 모습에 재밌으면서도 부끄러운 듯 로우는 양 볼을 살짝 붉히고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서로 이번 사건에 시달리느라 제대로 못 만나고 있는데 얼른 마무리 하고 제대로 하자고.”
그 말을 남기고 몸을 돌려 이제 자신들이 사는 오피스텔로 들어가기 위해 지하주차장에서 나가기 위한 발걸음을 재촉하는 로우의 뒷모습을 보며 코라손은 아직도 머릿속이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이번 주 내로 반드시 사건을 마무리 짓자는 굳은 다짐만큼은 빼먹지 않고 가슴 깊이 남겼다.
이따금 로우는 해군 제복에 관심을 가진다.
드러내놓고 관심을 표현하거나 말하지도 않고, 자주 그런 낌새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로우는 내가 그 사실을 잊을만할 쯤이 되어 다시 나에게 상기시켜주려는 듯이 관심을 슬그머니 드러낸다. 그래봤자 칠무해의 일로 해군 본부에 방문할 때 스쳐지나가는 해군들의 옷차림을 흘긋 살펴본다거나, 나와 만날 때 내 제복에 조금 더 오래 시선을 머무는 정도 밖에 안 되는, 다른 이들이라면 쉽게 간파해내지 못할 사소한 변화였으나 어째서인지 나는 그 변화를 놓치지 않고 발견하게 된다. 칠무해라는 직위를 가졌다고 해도 해군이라는 본분은 쉽게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해군 본부에 있을 때는 바다 위에서 만나는 것보다 더 감정표현을 극도로 절제하는 녀석이었기에 도리어 쉽게 알아채는 것이 아닐까 생각도 해봤다.
아무튼 직접 본인에게 물어서 확인해 본 것은 아니지만 로우가 제복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내 안에서 이미 기정사실화 되었다. 제복 중에서도 특히나 해군 간부들만이 입는다는 정의 코트에 흥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이상하게 생각되어지면서도 묘하게 신경 쓰여 로우가 저도 모르게 그쪽으로 시선을 돌릴 때마다 나 또한 하마터면 같이 시선을 같은 곳으로 놔둘 뻔 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해적으로서 해군이 싫은 건 당연한 거겠지. 네 녀석도 마찬가지고 말이다.”
한 번은 자꾸만 제복에 눈길을 돌리는 녀석의 모습을 그저 지켜보는 것이 답답해 넌지시 그리 말하니 로우는 살짝 놀란 듯 평소보다도 눈을 더 크게 떠 나를 올려다보더니 이내 다시 고개를 숙이고 모자챙을 아래로 잡아당겨 더 깊이 눌러쓰고는 작게 답했다.“…정부는 싫어하고 있어.”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말하면서 녀석이 모자 아래서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는 알아내지 못했다.
오랜만에 만나 몸을 섞은 뒤 정사를 마치고 피로감에 젖어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곯아떨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저절로 잠에서 깨어나게 됐다. 눈을 감은 채 녀석이 누워있을 옆자리를 손으로 쓸어봤으나 손에 잡히는 것은 그저 아직 온기가 채 식지 않고 남아있는 시트뿐이었다. 벌써 잠에서 깨어났나 싶어 조용히 눈을 뜨고 상체를 일으켜 녀석을 찾아보려 했을 때, 굳이 나서서 찾지 않아도 녀석의 행방은 쉽게 발견해냈다. 로우는 반나체로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 내 정의 코트를 두 손으로 꼭 쥐고는 한참을 내려다보더니 이윽고 내 코트를 끌어당겨 그곳에 얼굴을 파묻었다.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어 뭐하느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말과 행동이 먼저 나서기 전에 시선이 앞서 발견한 것이 있었다.
코트에 얼굴을 파묻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고, 우는 것인지 웃는 것인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지만, 코트를 쥐고 있는 두 손은 절박하리만큼 파르르 떨려 한 번에 표현할 수 없는 많은 감정들을 함축시켜 보여주고 있었다. 무언가에 매달리듯, 그러나 매달릴 것조차 없어 허공에 허우적거리다가 끝내 자신이 원하는 것과 가장 닮은 것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허상이라고 할 것도 없는 것을 붙들 수밖에 없는 것처럼 보였다. 로우는 내 코트를 잡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다른 것, 내가 알지 못하고 알 수도 없는 것을 잡으려고 하는 허무한 몸부림이었다.
“ㅡㅡㅡ.”
코트에 파묻힌 녀석의 입술은 누군가를 부르는 것 같았으나 코트에 파묻혀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 이름을 듣지 못한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적어도 내 이름만큼은 부르지 않았다는 것은 알 수 있어 그것이 분하고 씁쓸해 서로가 진정될 때까지 자는 척하고 누워있을 수밖에 없었다.
짧은 시간이 흐르고, 녀석은 진정이 되었는지 비로소 코트에서 얼굴을 떼어냈다. 슬그머니 확인한 녀석의 얼굴에는 울었다는 흔적이 보이지 않아 안도보다도 기묘함을 먼저 느껴버렸다. 더 이상은 자고 있는 척을 할 수 없어 나는 몸을 일으켜 녀석을 불렀다.
“남의 코트를 잡고 뭐하는 거냐.”
갑작스런 내 부름에 로우는 놀란 기색 없이 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어쩌면 내가 부르기 전부터 잠에서 깨어나 있었다는 사실을 눈치 챘을지도 몰랐다. 이런 부분에서 눈치가 빠른 녀석이니까.
“아아, 미안하게 되었군.”
덤덤한 사과 뒤에 로우는 미련 없이 나에게 코트를 넘겼다. 나에게 내밀어진 코트를 받아들었을 때, 로우는 작게 우물거렸다.
“시가 냄새가 많이 나더군.”
“…아아.”
고개를 숙여 얼굴은 제대로 볼 수 없었으나 그의 입 주변에서 들린 힘없이 새어나간 바람 빠진 소리로 짐작해볼 때 씁쓸히 웃지 않았나 싶다.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의미든 그 말에 대답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긍정인지 부정인지 알 수 없는 대답만 던져놓고는 코트를 받아냈다.
녀석의 말대로 코트에서는 시가 냄새가 짙게 풍겨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