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하님께 드리는 달성표 리퀘 소설입니다.
원작과 약간 다른 전개가 있으니 주의.
어찌하여 이런 빌어먹을 상황에 도달하게 되었는가.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의 근원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먼저, 현재에서부터 출발해 기억의 흐름을 자그마치 2년이나 거슬러 올라가야했다.
2년 전, 당시의 유스타스 ‘캡틴’ 키드는 현상금 4억 7천만 베리의 거금을 목에 걸고 있어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루키’들 가운데서도 가장 잔악하며 흉포한 악명으로 알려져 있었으며 그의 목에 걸린 루키들 중에서도 단연 독보적인 최고액의 현상금은 그를 둘러싼 질 나쁜 소문들의 근거가 되어주었다. 좋은 말로 하면 차세대의 유망주, 나쁜 말로 하면 바다의 평화를 어지럽힐 화근의 새싹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는 누구에게도 견주어 뒤지지 않을 자존심과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 누군가의 밑에 고개를 숙이는 것을 자신의 목이 잘려져 바닥에 추하게 나뒹구는 것보다도 싫어했으며, 자신의 꿈을 비웃는 자들을 가만히 두지 않고 감히 자신을 모욕한 대가를 톡톡히 치러줬다. 그에게는 자신의 앞길을 막고 있는 자도, 자신의 머리 위에 올라서려는 자도, 자신보다 강한 자도 없어야 했다. 해적왕이 남긴 비보를 손에 넣기 위해서는 그만한 자격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고, 그것을 이뤄내고자 탐욕스럽고도 난폭하게 앞만 전진하며 나갔다. 한 번 손에 넣고자 결심한 것은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손에 넣는다. 유스타스 키드의 신조는 단순하지만 그 의지만큼은 확고했다. 그렇게 바다를 가르며 나가기를 수 일, 그는 마침내 바다를 양분하는 레드라인의 근방에 위치해 있는 샤본디 제도에까지 도달했다. 신세계로 가는 입구이자 분기점이 되는 비눗방울의 섬에 발을 내딛자 키드는 이제 자신이 세계의 절반만을 누비고 다녔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직 자신이 모르는 세계는 많았다. 야망을 이루기 위해 해야 할 일은 차고 넘치도록 많았으며 지금보다도 더 강해져야만 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더 지체할 시간은 없다. 다른 녀석들보다도 앞서서 신세계로 들어가 기반을 다져야만 했다. 키드는 항해사에게 최대한 빠른 시일 안에 코팅을 마무리 하라 지시한 뒤 섬을 유랑하며 손에 넣을 수 있는 정보들을 탐색하고자 킬러를 포함한 몇몇 동료들과 함께 성에 들어섰다. 그리고 한참을 제도 내를 돌아다니며 정보를 수집하던 중 키드는 킬러가 얻어낸 정보를 하나 듣게 되었다. 킬러가 말하길 1번 글로브에 돈키호테 패밀리의 선장이자 칠무해 중 하나이며 현재 뒷세계에 암약하며 세력을 확장시켜나가고 있어 장차 세계가 위험시할 인물이 될 돈키호테 도플라밍고가 이끄는 돈키호테 패밀리의 산하에서 운영되고 있는 휴먼샵이 있다고 한다. 그 정보를 들은 키드는 구미가 당겼다. 도플라밍고에 대한 여러 소문들은 익히 들은 바 있었다. 직접적으로 부딪치거나 만난 적은 없으나 현상금 포스터 너머로 전해져오는 흉흉한 기운은 사진이라고 해도 숨길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강하고, 세계를 손에 넣을 만큼의 드높은 야망을 가졌으며, 수단방법 가리지 않는 방식을 선호했다. 여러모로 자신과 닮았으나 키드는 그것을 인정하기보다도 부정하며 그의 존재에 강한 적개심과 혐오를 가졌다. 그도 어차피 자신의 앞길을 막아서는 걸림돌이자 제 위에 올라서있어 언젠가 쓰러뜨려야할 상대였다. 그것이 당시의 유스타스 키드가 가졌던 도플라밍고에 대한 인상의 전부였다. 키드는 잠시 생각한 끝에 킬러에게 휴먼샵에 가자고 제의했다. 단면이라도 좋으니 돈키호테 패밀리의 형태를 알아보는 것이 좋았으며 운이 좋으면 패밀리에 대한 유리한 정보를 얻어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키드는 기대감으로 휴먼샵이 이는 1번 글로브에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얼굴에는 누군가를 향한 패기 넘치는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도착한 휴먼샵은 과연 예상한 대로 인간의 탐욕과 부정으로 일그러진 세계에 대한 축소판이자 촌극 그 자체였다. 아직 ‘상품’들이 무대에 서지 않았는데도 가게 안은 꽤나 수런거렸다. 자신들은 평범한 자들과는 태생부터가 다르다는 것을 뽐내고 싶어 안달이 난 것처럼 너무 과한 나머지 역겹게 보일만큼 값비싼 옷과 장신구들로 화려하게 치장을 하고 오만함으로 꾸미는 것을 마무리 한 소위 말하는 ‘높으신 분들’은 각자의 손에 오늘 경매의 시세가 적힌 종이들을 들고 자신에게 어울리는 상품이 나오기만을 번뜩이는 눈으로 무대를 핥았다. 키드는 그들을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잠시 살펴보다가, 문득 제 눈에 들어오는 이질적인 존재가 있었다.
그래, 그렇다. 그 때가 바로 유스타스 키드가 그를 처음으로 만난 순간이다.
휴먼샵의 다른 이들과는 이채로운 분위기와 눈빛을 가진 그를 키드는 처음 보자마자 누군지 바로 알아봤다. 차후 신세계에서 적으로 만날 가능성이 높은 이들의 신상 정보는 사전에 당연히 익혀둬야 하는 상식이었으니까. 키드는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는 현상금 수배서들 중에서 그의 얼굴이 부착된 것을 찾아냈다. 트라팔가 로우. 현상금 2억 베리. 하트 해적단 선장. 죽음의 외과의. 얼굴과 이름을 떠올리자 당연히 따라붙는 수식어들은 하나 같이 범상치 않은 것들이었다. 자신과 같은 루키로 불리며 잔혹함으로 악명을 떨치고 있는 죽음의 외과의. 그 이명에 걸맞게 현상금도 만만치 않았다. 전대미문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정면으로 세계 정부와 대적하고 있어 유래 없는 속도로 3억 베리에 까지 도달한 상식을 벗어난 어느 문제아를 제외하면 그는 키드 다음으로 명성이 높았다. 생각지도 못한 수확이군. 키드는 흥미로운 눈빛으로 자신이 있는 곳에서 머지않은 거리에 배치되어 있는 휴먼샵 뒷자리에 앉아 느긋이 빈 무대를 관망하고 있는 로우를 살펴봤다. 하얀색 바탕에 검은 점박이 무늬가 그려진 털모자에 노란색과 검은색으로 칠해져 중앙에는 자기 해적단의 졸리 로져가 그려진 후드티, 그리고 척 봐도 약하고 말라빠진 다리(어디까지나 키드의 관점에서다.)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청바지와 굽 있는 구두. 그를 두르고 있는 복장들은 한 해적단의 선장이자 2억 베리의 현상금이 걸려있는 범죄자라고 하기는 전체적으로 꽤나 가벼운 차림이었다. 그냥 모르고 본다면 근처를 가볍게 둘러보는 의미로 산책하러 나온 이처럼 보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의 몸에 두르고 있는 강자의 패기는 결코 범인의 것이 아니었다. 키드는 제 몸에 저릿저릿 흐르는 가벼운 전율에 입 꼬리를 올렸다. 간만에 마주하게 된 호적수는 키드에게 부족함 따위 전혀 주지 않았다. 그리고 로우는, 드디어 키드의 인기척을 눈치 챈 것인지 고개를 뒤로 돌려 그와 눈을 마주쳤다. 두 명의 루키가 처음으로 시선을 교환하게 된 작은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그 때의 심정은 뭐라고 해야 할까… 지금 당장 눈에 선명히 떠올릴 수 있을 만큼 인상적이었는데, 그것을 말로 설명하려니 상당히 어려웠다. 이성이 아닌 본능으로 상대의 존재를 감지했기에 그런 것일까.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깊게 각인시켰나보다.
그 뒤의 상황은 폭풍처럼 정신없이 주변을 휩쓸며 지나갔다. 서로간의 경계심과 적의로 날이 잔뜩 세워진 분위기 아래 세워진 두 사람 사이의 첫 대면과 시작된 경매, 천재지변처럼 천장을 박살내며 휴먼샵에 난입한 것도 모자라 천룡인에게 주먹을 휘두른다는 상식을 아득히 초월한 대형 사고를 저지른 ‘문제아’의 활약(?), 그리고 사건을 수습하기 위해 휴먼샵에 있는 해적들을 전원 체포하기 위해 몰려든 해군들과 그들을 상대하는 세 명의 루키들. 키드조차도 벅찰 만큼 많은 사건들이 순식간에 지나갔고, 그가 정신을 차려 주변을 살펴보면 자신의 근처에서 같은 방향으로 달려 나가는 로우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해군들을 제압하고 해군 대장이 제도에 당도하기 전에 현장에서 벗어나고자 아무 방향이나 달려갔던 것이 공교롭게도 로우하고 같은 방향인 것이다. 설마 이런 식으로 다시 엮이게 될 줄은 몰랐지만 마냥 사이좋게 달리기도 뭣해서 키드는 저도 모르게 시비조로 그에게 말을 걸었다.
“어이, 트라팔가! 네 녀석 왜 따라오는 거냐!!”
“헛소리 집어치워라, 유스타스 여. 네 녀석이 날 쫓아오는 거다.”
“너야말로 웃기는 소리 하지 마! 네 녀석이랑 같이 있으면 해군 녀석들 눈에 띄기 쉬우니 근처에서 얼쩡거리지 말고 좋은 말로 할 때 그냥 가는 게 좋을 걸?”
“나한테 명령하지 말라고 분명히 말했을 텐데, 유스타스 여. 해군이 아닌 내 손에 죽고 싶어서 그러는 거냐.”
“아앙? 네 녀석이야 말로 건방지게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말라고!!”
여기서 감정에 휩쓸려 로우와 싸웠다가는 해군들의 추격에 따라잡히기 십상이었고, 다음에 제대로 된 곳에서 붙어보고 싶었기에 이번만 말로 곱게(키드의 입장에서 상대적으로 바라봤을 때의 비유이다.)보내주려고 했으나 로우는 무슨 일이 있어도 키드의 말대로 행동하지 않기로 굳게 결심한 사람처럼 매섭게 키드를 노려보며 그의 말에 단 한 마디도 물러서지 않는 오기를 보여줬다. 재수 없는 녀석. 언젠가 신세계에서 맞닥뜨리게 되면 절대로 그냥 두지 않을 것이라 이를 갈며 다짐한 뒤 무시하자는 방책으로 선회한 키드는 더 이상 로우에게 어떤 신경도 쓰지 않았다. 하지만 로우는 끝까지 키드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을 것인지 짧은 대화가 끊긴지 얼마 되지도 않아 이번에는 로우 쪽에서 키드에게 말을 걸어왔다.
“네 녀석은 정말로 ‘원피스’를 노리고 있는 건가?”
“뭐야, 네 녀석도 날 비웃을 생각이냐?”
키드는 뛰어가던 발걸음을 바로 멈추고 로우의 앞을 막아서 험악하게 일그러진 인상으로 로우를 노려봤다. 여태껏 이곳에 오면서 제 꿈을 모욕하거나 무시하며 비웃는 자들을 가차 없이 짓밟아오며 항해를 이어나가던 키드였다. 상대가 자신과 맞먹을 실력을 가진 강자라고 해도 제 방침을 바꿀 이유는 전혀 없었다. 대답 여하에 따라 당장 해군 대장이고 뭐고 간에 로우부터 쓰러뜨리겠다는 기세로 능력을 발동시킬 준비를 하는 키드의 태도와 살기에 로우는 바로 검을 들지 않은 한쪽 손을 들어 올려 그와 여기서 이런 이유로 싸울 의사가 없다는 것을 표했다.
“진정하라고. 네 녀석들의 목표를 비웃을 생각은 없으니까. 다만, 조금 신기할 뿐이지. 불확실한 것에 대해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쫓는다는 건, 나하고는 어울리지도, 생각해보지도 않은 일이라서 말이야.”
“…네 녀석은 ‘원피스’를 손에 넣을 생각이 없는 거냐?”
“흥미는 있어. 가능하다면 손에 넣고 싶다. 다만 너희들과는 다르게 우선순위는 아니라서 말이지.”
“그렇다면 네 녀석이 원하는 건 뭐지?”
“글쎄.”
그리 말한 뒤 로우는 웃었다. 입은 분명 선명한 호선을 그리고 있지만 눈은 전혀 웃지 않았다. 그 눈동자는 정말로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의 대답을 찾지 못한 것처럼 보여 한없이 불완전해 보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로우의 얼굴에 그려진 것은 부정할 수 없는 미소였다. 그의 알쏭달쏭한 미소는 지나가는 자들에게 수수께끼를 던지는 고대적 마물의 고풍스런 미소와 닮아 그 속내를 읽어낼 수 없는 오묘한 미와 매력이 은근히 풍겨 나왔다. 키드는 그 미소를 보자, 눈앞의 사내가 요물일지도 모른다는 허풍스러운 망상을 하면서 그의 미소에 제 이성이 속절없이 끌려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키드는 로우의 안에 있는 흥미라는 이름의 상자 안에 지금 막 자신도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아마도 그 때가 녀석을 그런 식으로 생각하게 된 시작점이 아닌가 싶었다.
멀리서 뒤쳐졌던 동료들이 달려오는 소리와 해군들이 날리는 포탄 소리가 울려 퍼졌다. 각자의 동료들이 해군들의 발목을 묶어둔 것도 한계에 다다라 턱밑까지 쫓아온 것이다. 키드는 그제야 현실로 돌아와 상황을 파악했고, 로우는 동요 한 점 없이 점차 다가오는 제 동료들의 모습만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시 키드에게 말했다. 이번에는 로우도 웃지 않았다.
“그럼 네 말대로 신세계에서 만나길 기대하고 있지. 유스타스 여.”
키드만이 들을 수 있는 그 말이 끝나자마자 로우의 동료들이 그에게 모여들었고, 뒤이어 킬러를 포함한 키드의 동료들도 그에게로 다가왔다. 키드는 동료들에게 현황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눈길을 몰래 옆으로 돌려 적당한 거리에 떨어져 있는 로우를 봤다. 그도 동료들에게 상황 설명을 들으면서 적절한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로우는 다시 동료들을 이끌고 다른 방향으로 달려 나갔다.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키드는 킬러가 이 상황에서 어딜 한눈파느냐고 야단칠 때까지 계속 바라봤다.
되짚어 생각하면 샤본디 제도는 키드에게 있어 ‘분기점’인 곳이었다. 분기점이라는 한 단어로 정의했지만 그 의미는 다양했다. 한 시대를 양분하는 시발점이 된 분기점이었고, 해적으로서 새롭게 결의를 다짐한 분기점이며, 트라팔가 로우라는 남자와의 기연(奇緣)이 시작되는 곳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수많은 갈림길에 섰고, 그 때마다 망설임 없이 길을 선택하여 앞으로 나갈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그 수많은 이정표들 중에서는 당연히 트라팔가 로우도 있었다. 그와의 인연을 이어나갈 것인가, 이어나가지 않을 것인가. 지금 시점에서 이야기 하면 그 질문은 앞으로 가까운 미래에 트라팔가 로우를 좋아할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암시였다. 그리고 당시의 키드는, 전자를 택했고 그 선택대로 키드는 신세계에서 로우를 만나 인연의 끈을 늘려가며 깊이 또한 더했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키드는 처음으로 자신이 한 선택을 되짚게 되었다.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던 그가 처음으로 과거의 선택을 뒤돌아 본 때가 바로 지금이었다. 만일, 자신이 후자를 선택했더라면. 트라팔가 로우가 누구든 간에 신경 쓰지 않고 호적수 이상의 인연을 만들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되었더라면 분명 많은 것이 바뀌었을 것이고 알아서 좋을 것 없는 불필요한 진실들까지 목도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가령, 지금처럼 한 때나마 몸과 마음을 나누었다고 여긴 연인에게 배신의 칼을 맞은 순간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지.
키드는 핏덩이를 후회와 섞어 한 덩어리째로 토해냈다. 그리고 그의 눈에 비쳐진 모든 것이 붉게 보였다. 자신의 피도, 피에 젖은 자신의 몸도, 제 몸을 찌른 로우의 칼마저도. 유일하게 로우의 등에 걸쳐진 검붉은 코트만이 붉은 빛을 지녔으나 그 색을 달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색도 결국에는 말라붙은 핏빛의 색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와 다르지 않았다.
그 코트, 너한테 되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냐?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키드는 조소를 섞은 비아냥거림을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하고 제가 쏟아낸 핏빛 위로 스러졌다.
* * *
트라팔가 로우라는 남자와 그의 인생을 살펴보기 위해 사전에 반드시 알아두어야 하는 또 다른 남자가 있었다. 돈키호테 도플라밍고. 트라팔가 로우의 인생 전반에 있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 큰 영향을 끼친 자이자 그의 존재의 근원에 당연하다는 듯 자리를 잡고 있는 그를 로우가 어찌 생각하고 있는지는 오로지 로우 당사자만이 알 수 있는 사안이었다. 허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와 로우 사이의 인연은 무척이나 복잡하고 심도 깊어 제 3자가 감히 정의를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나마 현존하는 단어들 중에서 본연의 의미에 가장 가까운 것을 꼽아든다면 ‘애증’이라는 사실이었다. 어린 시절의 로우는 남들이 마땅히 누렸던 권리이자 그 과정에서 자연스레 깨달아야 했던 타인이 자신에게 주는 순수한 애정에 증오를 더해 한층 비틀어지고 타락된 형태로 익혀야만 했다. 따라서 ‘트라팔가 로우의 인생에 있어 진정한 사랑이 존재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과언을 해도 완전히 틀린 이야기가 되지 못했다. 그것은 분명 애석하고 안타까운 일인데도, 로우는 그 사실에 순응했다. 이제 와서 진정한 사랑을 깨닫는다고 해서 이미 제 전신에 얽혀져 있는 실들이 끊어지는 것이 아니며, 하물며 생애 전반에 진한 영향력을 남긴 그의 흔적이 그것을 계기로 깨끗이 사라지는 것도 더욱이 아니었다. 되돌리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사실을 로우는 어느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로우는 뒤를 돌아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돌아봤자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무의미한 행위 밖에 더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로우는 돌아보게 되었다. 그의 26년 인생에 있어 최초로 지금까지 걸어와 남겨온 발자취를 더듬어보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로우의 기억의 시작에는 항상 도플라밍고가 존재했다. 당연했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그의 인생의 시발점이자 존재의 근원에는 그가 있는 것이 첫 번째 법칙이었으니까. 어린 시절을 되짚어 생각하면 오래되고 유쾌하지 못한 기억들뿐이라 세월이 흐르고 다른 기억들이 쌓여 마모되고 퇴색되는 과정을 거쳐 멀쩡히 남아있는 것이 별로 없었으나 그 중에서 중요한 사실을 골라본다면,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로우를 도플라밍고가 거둬들였다는 것과, 그의 밑에서 가업으로 시작했던 의학 공부를 계속 이어나가며 여러 전투 기술들까지 병행해 익혀간 것과, 세월이 흘러 앳된 티를 벗고 이제 막 어른이 되었을 때 도플라밍고가 성인이 된 선물이라며 사소한 반대와(주로 베르고가 반대주자들의 선두에 섰다.) 로우의 원치 않은 의사를 뿌리쳐내는 것에 성공하여 그에게 자신의 오른팔이자 돈키호테 패밀리의 최고 간부진 자리들 중 하나인 ‘하트’의 자리를 넘겨주었다는 것 정도였다. 그리고 현재도 로우는 도플라밍고의 충실한 오른팔이자, 돈키호테 패밀리의 최고 간부 중 하나인 ‘하트’이자, 은밀히 떠도는 소문을 근거로 한 도플라밍고의 정인(情人)이었다. 그러나 그 세 가지 사실들은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것들이었다. 세간에 알려진 트라팔가 로우라는 남자는 신시대를 열 루키들 중 하나이자 그 중에서도 세 번째로 현상금이 높은 2억 베리를 목숨 값으로 기꺼이 내걸어 죽음의 외과의라는 악명을 떨치고 다니는 하트 해적단의 선장이다. 사람들은 로우가 대해적 시대를 변혁시킬지도 모르는 햇병아리 유망주로만 알고 있을 뿐, 이면에는 칠무해 중 가장 위험한 남자로 단연 손꼽히는 돈키호테 도플라밍고의 최측근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은 전혀 알지 못했다. 어째서 로우는 이런 두 가지 면모를 가지게 되었는가. ‘죽음의 외과의, 하트 해적단 선장’이라는 칭호와 자격은 로우가 도플라밍고에게 몇 안 되게 부탁하여 얻어낸 한정적 자유였다. 로우가 20살이 되던 해, 그에게 반강제로 하트의 자리를 떠넘기려는 도플라밍고에게 로우는 처음으로 ‘부탁’이자 ‘거래’를 했다.
그렇게도 나에게 그 자리를 넘겨주고 싶으면,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줬으면 좋겠군. 도피.
그래, 그것이 바로 모든 일의 시발점이었다. 차라리 그런 부탁을 하지 않고 전면으로 제 진짜 직위와 명성이 떠벌여지도록 놔뒀더라면, 애당초 일이 꼬여질 계기조차 일어나지 않았을 테지.
로우는 자유를 갈망했다. 비록 자신이 도플라밍고의 밑에 있고, 그의 곁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해도 그의 천성은 자유를 갈구하며 남들보다 강한 의지를 가진 남자였다. 애초에 트라팔가 로우가 누군가의 밑에 들어가 고개를 숙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단지 그 상대가 ‘도플라밍고’였기에 기적에 가까운 일이 일어난 것일 뿐이었다. 아무튼 하트를 대가로 독자적 세력과 한정적인 자유를 얻어낸 로우는 지금껏 억눌려 온 것에 대한 보상 심리가 깨어난 것인지 간부진 자리에 올랐음에도 패밀리 내에서 아주 중요한 중책 회의가 있을 때만을 제외하면(그마저도 그냥 아무 말도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기만 했다.)제가 스스로의 힘으로 손에 넣은 잠수함과 동료들을 이끌고 바다로 나갔다. 바다에 잠수함을 띄워 물살을 세차게 가르는 소리와 짭짜름한 소금기를 맡으면 로우는 제 영혼이 해방되는 가벼운 쾌감을 느꼈다. 그러나 로우가 만끽해야 하는 자유의 범위는 그 정도가 전부였다. 로우는 단 한 번도 도플라밍고가 말한 ‘적정선’을 넘지 않았다. 그에 대한 오랜 반항심과 적개심, 애증 아래 흉측하게 얽혀진 인연은 반역을 부추겼으나 본능에 깊숙이 각인된 복종 심리는 참으로 끈질겨 섬뜩할 지경이었다. 그 오싹함에 등골을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려가는 것을 깨달을 때마다 로우는 어렸을 적에 도플라밍고의 손을 망설임 없이 잡은 어린 시절의 제 자신을 애꿎게 원망했다. 어찌되었든 간에 하트 해적단의 항해는 사소한 문제들을 제하면 성공적으로 비밀을 지켜나갔고, 그렇게 로우는 몇 년을 하트 해적단의 선장으로서 바다를 누볐다.
그리고 마침내, 로우도 다른 동 세대의 루키들과 마찬가지로 샤본디 제도에 당도했다. 이미 오래 전에 신세계에 도입한 실력 있는 베테랑이지만 일단 자신은 겉으로 봤을 때는 머리에 피도 안 마른 햇병아리 루키였기에 그들의 시선에 따라 행동해줘야 할 필요가 있었으며, 억의 현상금을 가지고 있는 열 명 이상의 루키들이 한꺼번에 제도에 모여든다는 소식은 구미가 당겼다.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로우가 제도에 온 이유는 하나였다. 도플라밍과 ‘하트’ 트라팔가 로우에게 단독적으로 비밀리에 내린 지령이 있었다. 샤본디 제도에 있는 휴먼샵의 처분. 로우는 쯧 하고 혀를 찼다. 그런 사소한 일 정도는 중견급 녀석들에게 부탁하면 될 것을 자신이 제도 근처에 있다는 것을 핑계 삼아 떠넘겨버린 도플라밍고의 옹졸함이 맘에 들지 않았다. 가끔씩 도플라밍고는 이런 사소한 일들을 로우에게 떠넘김으로서 그가 패밀리에, 정확히는 도플라밍고의 앞에 자주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작은 항의와 경고를 보내곤 했다. 어차피 조만간 신세계에 들어가야 했지만 진입 하자마자 드레스 로자에 가야할 생각을 하니 심기가 여간 불쾌했다. 마음 같아서는 잠수함에 처박혀 의학책을 읽으면서 기분 전환이라도 하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어 로우는 결국 실력 좋은 동료들 몇 명과 함께 휴먼샵으로 향했다.
그리고 로우는 그곳에서 그를 만났다. 자신과 같은 루키이자 그들 중 최고액 현상금을 갱신한 키드 해적단의 선장. 유스타스 키드.
붉은색. 처음 그를 마주했을 때 그에게서 연상되었던 이미지색은 그 이외에 없었다. 절대로 꺼지지 않을 강렬한 열기를 그윽이 품은 불꽃의 빛깔은 모든 것들을 빼앗겨 황량했던 내 안에 멋대로 정염(情炎)의 불씨를 던져 남겼다. 되짚어 떠올려 다시 생각해보니 더없이 그 녀석 다운 방식이라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로우는 그에게서 진정한 자유와 꿈을 향한 열망, 그리고 야성을 엿봤다. 그는 로우가 손에 넣고 싶으나 절대로 손 안에 쥘 수 없는 것들을 당연히 제 것이라는 양 가지고 있었다. 당당히 제 꿈을 밝히고, 그것에 반하는 자들을 가차 없이 쓰러뜨리며 두려움 하나 없이 자유로운 몸으로 바다를 활보하는 무법자의 모습을 로우는 질시와 선망과, 제 가슴 안에 조금씩 타오르기 시작한 불길을 동시에 품었다. 눈치가 빠른 로우는 불행인지 아닌지 생애 처음으로 느낀 감정의 정체를 쉽게 알아차렸다. 처음 느껴보는 것이기에 오히려 그 낯선 것의 존재를 일찍 감지한 것인지도 몰랐다. 그리고 키드와 도주 길에 나눴던 짧은 대화는 로우의 가슴에 확신을 남겼다. 로우는 잠수함으로 돌아와 도플라밍고에게 보고를 한 뒤에도 계속해서 제 안에서 기세를 더해 타올라 종국에는 제 육신마저 불사르려 하는 불길의 숨 막히는 열기를 체감했다.
이것은, 이 감정을 사람들은 ‘사랑’이라고 말한다.
그 후로 로우는 키드와 만남을 지속해 나갔고 그들은 호적수에서 자신이 몇 안 되게 인정하는 남자로, 믿을 수 있는 동류로, 그리고 마지막에는 감히 연인이라고 칭할 인연의 문턱까지 왔다. 그러나 로우는 그 시간들에 심취한 나머지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말았다. 로우는 잊어서는 안 되었다. 도플라밍고가 갓 성인이 된 자신에게 단단히 일러뒀던 ‘적정선’의 존재를 말이다. 그것은 변명의 여지도 없는 로우의 실수였다. 그리고 실수의 대가는 참혹하게도 컸다.
“정말인지 몇 번을 봐도 단순하고 어리석은 녀석이야. 그 자리에서 도망쳤으면, 나도 차라리 쫓지 않았을 텐데.”
로우는 키드의 머리맡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키드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로우가 항상 한 몸처럼 들고 다니는 검은 바로 옆에서 땅바닥에 꽂인 채 거꾸로 서있었다. 감히 주인의 정인이 될 자를 벤 것에 대한 반성적 차원에서 내려진 처벌일지도 모를 모습이었다. 하지만 로우는 검에게 신경 하나 내주지 않고 계속 키드만을 내려다봤다. 상처가 크고 출혈이 컸지만 그가 의식을 잃자마자 바로 처치를 했기에 다행히 고비는 넘겼다. 아니, 다행이 아니지. 로우는 망연한 표정으로 키드만을 내려다봤다.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한 대처를 강구해야 한다는 사실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지만 지금 당장은 키드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에만 만족하고 집중했다.
유스타스 키드가 돈키호테 도플라밍고의 눈엣가시가 되는 것은 굳이 트라팔가 로우라는 요소를 첨가하지 않아도 일어났을 필연적 결과였다. 세력 간의 충돌은 그런 것이었다. 사황 중 하나인 빅 맘의 배를 성공적으로 습격한 것을 계기로 현상금이 더 뛰어오른 키드는 그것으로 더 큰 자만을 얻은 것인지 이번에는 도플라밍고의 세력을 상대하고자 했고, 도플라밍고는 차후 자신의 세력에 있어서 큰 장해물이자 위험요소가 될 최악의 세대 중 한 명의 목숨을 굳이 살려둘 필요는 없었다. 그래, 여기까지 생각하면 충분히 합리적인 처사지. 하지만 로우는 도플라밍고가 어떤 남자인 줄 알고 있었고, 도플라밍고도 로우가 어떤 남자인지 충분히 파악하고 있었다. 서로가 가까웠기에 비밀 한 조각 없이 낱낱이 알고 있는 것이다. 겉으로는 위협 세력의 싹을 잘라낸다는 그럴듯한 이유를 대고 있지만, 사실 도플라밍고는 로우와 키드 사이에 흐르는 심상치 않은 기류와 로우의 변심을 알아챈 것이다. ‘적정선’을 넘어버린 로우를 도플라밍고는 그냥 두지 않았다. 그것을 묵인할 만큼 그는 관대한 남자가 아니었다. 그래서 도플라밍고는 키드를 처단하는 지령을 많고 많은 제 수하들 중에서 로우를 고른 것이다. 그의 손으로 직접 연정을 나눠가지려 했던 남자를 없애라는 것이었다. ‘적정선’을 넘은 대가는 참혹했다. 그러나 이것을 과연 도플라밍고 한 남자의 문제로만 단정 지을 수는 없었다. 로우는 좀 더 본질적인 문제를 알고 있었다. 로우는 처음 자신이 하트 해적단의 선장이 아닌 돈키호테 패밀리의 ‘하트’로서 키드의 눈앞에 나타난 순간, 그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전부 읽어냈다. 충격, 분노, 배신, 실망, 고통, 슬픔, 부정. 강렬한 감정 뒤에 숨겨진 여린 살들을 보게 되자 로우는 비로소 자신이 키드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알게 되었다. 로우는 키드를 기만했다. 그가 자신을 미워하고 실망하지 않았으면 하는 이기심과 이 관계를 계속 이어나가고 싶다는 욕심에서 비롯된 기만은 서로에게 상처로 고스란히 되돌려졌다. 로우의 겉모습은 평정을 유지했으나 내면은 비명을 질렀다. 후회에 몸부림쳤다. 죄책감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다. 그러나 로우의 육신은 여전히 도플라밍고라는 남자의 실 아래에 놓여 졌고, 로우는 키드를 제 손으로 베어 쓰러뜨리는 순간까지 제 몸을 움직이는 그의 실을 끊어내지 못했다. 로우는 이제껏 유래 없을 만큼 그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게 만드는 제 안의 뿌리 깊은 세뇌와 그것에 저항하지 못하는 나약함을 원망했다.
이제 앞으로 키드와 이전과 같은 관계를 이어나갈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의 인연은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됐다. 현상금 4억 7천만 베리가 걸려있는 키드 해적단의 선장 유스타스 키드와, 돈키호테 패밀리의 ‘하트’이자 조커의 오른팔 트라팔가 로우라는 입장에서부터 다시 나아가는 인연은 잘라낸 실 가닥을 억지로 이어붙인 것과 같은 모양새로 엉성하고 당장에 끊어져도 이상할 것 하나 없어 무척이나 불안정했다. 그래도 로우는 잘려나간 실 가닥을 그대로 두지 않고 다시 하나의 실로 이어 붙였다. 이렇게 파탄이 난 관계 속에서도 로우는 가엾은 어리석음으로 인해 기만을 만들어낸 제 이기심을 버리지 못했다.
로우의 안에는 여전히 정염의 불길이 사그라지지 않았다. 로우는 여전히 키드에 대한 연정을 품었다. 부서져 망가진 제 몸에 저주를 하나 더 얹는 심정으로 로우는 키드의 얼굴을 손으로 쓸었다.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라. 그 때는 지금처럼 너를 치료하지 않을 거다. 나는 네 심장에 칼을 꽂아 넣을 거다.”
로우는 키드에게 이별을 고했다. 이 인연이 앞으로도 어떤 식으로든 나아가기 위해서는 아이러니하게도 그에게 이별을 통보해야 됐다. 로우는 미소를 지었다. 언젠가 자신도 모르게 키드의 마음을 흔들었던 샤본디 제도에서의 그 미소였다.
키드는 눈을 떴다. 초점이 하나 없어 죽어버린 눈동자의 시야에는 의식이 깃들어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의 두 눈동자는 로우를 향했고, 거울과 같이 로우의 인영이 눈동자 안에 그려졌다. 로우는 울지 않았다. 키드도 울지 않았다. 눈물은 그들이 오랜 과거의 어딘가에서 옛적에 버린 낡은 유물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의 시선을 이어주고 있는 것은 보이지 않을 그들의 눈물이었다. 로우는 자신이 걸친 검붉은 코트에 키드의 피가 계속해서 스며들기를 바랐다. 그의 피로 물들인 코트라면 기꺼이 어깨에 십자가 대신으로 걸칠 자신이 있었다.
로우는 고개를 숙여 키드와 입을 맞췄다. 짧은 입맞춤은 여운을 남길 여지도 주지 않고 금방 끝을 맺었다.
“잘 있어라, 유스타스 여.
…사랑했다.”
망설이듯 전한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애정 섞인 고백을 끝으로 로우는 피에 젖은 코트를 걸친 모습으로 등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 * *
“…떠나려고 하면 곱게 갈 것이지, 답지 않은 모습이나 보이고 말이야.”
미련만 저에게 일방적으로 떠넘기면 남겨진 자신은 어쩌라는 말인가.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서야 제대로 의식을 차린 키드가 처음으로 피가 고인 입을 힘겹게 움직이며 내뱉은 첫 말이자 생각이었다. 기절하기 전까지 가졌던 의식과 보았던 경치는 거의 기억으로 남지 않았으나 떠나기 직전에 로우가 남긴 표정과 얼굴은 그가 남긴 미련이 되어 잔상으로 어른거렸다. 키드는 한 손을 들어 올려 붕대로 꼼꼼히 감겨진 자신의 복부를 쓸어내렸다. 바보 같은 녀석. 키드의 입 밖으로 욕지거리가 절로 튀어나갔다. 그에게 빚을 남겨서 분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을 이리 살려놓음으로서 그가 나중에 치룰 대가의 규모에 대해 걱정을 하고 있는지 분간하기 어려웠으나 결국 애타는 마음은 같았다. 키드는 상당량의 피를 흘린 탓에 둔해진 머리로 어떻게든 상황을 정리해 제대로 파악해보려 했으나, 그래봤자 나오는 것은 자신이 처음 알게 된 진실과 다를 바 없었다. 본래대로 말하면 키드도 짐작을 안 한 것이 아니었다. 트라팔가 로우라는 남자는 일견 자유로워 보여도 항상 그의 행동 어딘가에는 족쇄가 채워져 있었다. 그 족쇄를 누가 채운 것인지 몰라도 키드는 그것이 눈에 거슬렸고, 족쇄의 존재를 알고 있음에도 모르쇠로 일관하며 자신의 처지 내에서 만끽하는 자유에 만족할 수밖에 없는 로우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언젠가 때가 되면 족쇄의 정체를 밝혀내 그것을 끊어내 보려고 했었는데, 설마하니 이런 식으로 알게 될 줄이야. 키드는 헛웃음을 지었다.
이것으로 키드와 로우 사이의 관계는 끝나게 되었다. 키드는 로우가 자신을 살려준 이유에 대해 짐작해본다면 여럿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 경우의 수 중에서는 다시는 자신의 앞에 나타나지 말라는, 또 다시 제 앞에 나타나면 그 때야말로 심장을 뽑아내 직접 죽이겠다는 살벌한 경고도 포함되었다. 키드의 회생한 목숨 자체가 로우의 경고였다.
그러나 그것이 어쨌다는 말인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유스타스 키드는 단 한 번도 트라팔가 로우의 뜻대로 움직인 적이 없는 남자였다. 로우가 키드의 명령조에 대해 매번 불만을 표하며 반항했던 것처럼, 키드도 로우의 의도대로 움직인 적이 전무했다. 그리고 그 관계는 서로의 진실이 까발려진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오히려 지금이 되어서야 아무런 부담 없이 제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는 것이다.
“유감이지만 트라팔가, 네 말대로 행동할 생각은 전혀 없다고.”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자신의 꿈을 이루기 전에 손에 넣어야 할 중대한 것이 생겼다. 무릇 해적이란 남이 가진 탐나는 것을 빼앗아야 하는 것, 자신이 가장 손에 넣고 있는 것이 오래 전부터 타인의 낙인이 찍힌 것이라는 것이 이제와 밝혀져 봤자 유스타스 키드가 달리 받아들일 것은 없었다. 원하는 것은 손에 넣는다는 것이 그의 오랜 신조 중 하나였다. 달라진 것은 자신이 도플라밍고와 적대할 이유가 하나 더 늘어간 것뿐이었다. 거슬렀던 시간에서 다시 원래의 흐름을 타고 현재로 돌아온 키드의 눈동자에는 새로운 빛이 깃들었다. 그 빛은 로우의 가슴에 불씨가 되어 남겨진 것과 같은 어스름을 가졌다.
그러니 이번에야말로 손에 쥘 것이다. 트라팔가 로우라는 남자와 그와 새로이 이어가야할 인연까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