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 Laura Fygi - Let There Be Love
보름달 님에게 드리는 리퀘 단문.
ㅡ쏴아아아
갑자기 들려오는 요란스런 장대비 소리에 가볍게 술잔을 기울이던 로우는 때 아닌 빗소리를 듣고 고개를 옆으로 돌려 창문 밖을 살펴봤다. 밖을 살펴보니 갑작스런 소나기에 미처 예상하지 못한 사람들이 당황하며 비를 피하기 위해 허둥지둥 건물 안으로 분주히 뛰어 들어가는 어수선한 모습이 보였다. 어이쿠, 또 비인가. 늙은 술집 주인이 때가 찌든 유리잔을 행주로 닦다말고 로우가 살피던 창문 가로 다가가 하늘을 슬쩍 올려다보고는 금방 제자리로 돌아가 하던 일을 마저 끝내기 위해 다시 유리잔과 낡은 행주 조각을 집어 들었다.
“종종 예고도 없이 이렇게 비가 내리는 경우가 있죠. 아무래도 금방 그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술집의 유일한 손님인 로우를 위한 주인장의 당부에 로우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주억거린 뒤, 바로 살짝 난처한 기색을 드러냈다. 가벼운 마음으로 시간을 때우기 위해 발걸음이 오가는 대로 들어간 작고 허름한 술집에서 때 아닌 비로 인해 갇혀버린 상황이 된 것이다.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 선원들이 알아서 돌아오지 않는 선장을 찾아오겠지만, 그 때까지 이런 낡아빠진 술집에서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야 할까. 벌써부터 지루한 기색을 역력히 드러내는 로우의 표정을 읽어냈는지, 술집 주인은 또 다시 컵을 닦는 일을 중단하고는 술집 안쪽으로 늘그막이 들어갔다가 조금 뒤에 다시 나왔다. 안쪽에서 다시 나오는 술집 주인의 구부정한 허리와 안짱다리의 걸음걸이를 뒤따라 잡음 섞인 재즈풍의 음악이 삐걱거리며 흘러나왔다. 무료함에 젖어 들어가는 로우를 달래주기 위한 주인장의 비책이었다. 작은 술집 안에는 어느새 빗소리와 재즈가 분위기 좋게 섞여 어울러져갔다. 음악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지만 빗소리와 함께 들으니 생각보다 좋은 느낌인지라 로우는 눈을 스르륵 감아 감미로운 노랫소리에 이끌려 서서히 감상에 빠져 들어갔다. 경쾌한 피아노 소리와 부드럽고 달콤한 음색을 지닌 이름 모를 여인의 노랫소리가 특히 인상적이라 생각될 때였다.
“트라팔가?”
이제 하이라이트에 접어들어 노래에 심취한 여인의 감정이 농염하게 젖은 목소리와는 반대로 굵고 낮으면서도 귀에는 어떤 목소리보다 익숙하고 안정되는 어느 남자의 목소리에 로우는 감았던 눈꺼풀을 파르르 떨며 시야를 밝힌 뒤 자신의 옆으로 고개를 돌려봤다. 목소리의 주인은 역시나 유스타스 키드였다. 로우가 노래에 정신이 팔린 사이 방금 전 비를 피해 술집 안으로 들어온 키드의 모습은 영락없는 물에 빠진 생쥐 신세였다. 로우는 그런 키드의 모습을 위아래로 천천히 훑어보다가 그 중에서도 물에 젖어 축 늘어진 붉은 머리카락이 인상적인지 아직도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그의 머리카락 끝에 조금 더 오래 시선을 머물렀다. 그 사이 키드는 로우가 권하기도 전에 알아서 그의 옆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고, 술집 주인이 키드를 위해 마른 수건을 준비해 그에게 내밀었다. 꾀죄죄한 수건이지만 키드로서는 물기를 닦을 수만 있으면 그만이었기에 고맙수, 하고 퉁명스런 감사 인사를 말하고 순순히 수건을 받아들어 제 몸의 물기를 쓱쓱 닦아냈다.
“네 녀석은 왜 여기에 있는 거냐?”
“잠깐 들어왔다가 비가 내려서 말이지.”
“흐음. 아, 젠장. 그나저나 무슨 놈의 비가 이렇게 갑자기 많이 내리는 거야!”
예상치 못한 물벼락이 여간 억울한 것인지 키드는 수건으로 몸과 머리를 벅벅 문질러 물기를 닦아내면서 로우에게 불평을 호소하였고, 덕분에 로우는 아까까지 잘 듣고 있던 노래가 키드의 목소리가 파묻혀 잘 들리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노래를 듣는 것보다도 키드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더 좋았기에 로우는 자신의 감상을 감히 망친 키드를 관대하게 넘어가줬다. 그렇게 몇 분 정도 투덜대던 끝에 키드는 자신의 불평을 다 쏟아낸 것인지 어느 순간부터 입을 다물어 조용해졌고, 가만히 들어주면서 가끔씩 맞장구쳐주던 로우도 따라 조용해져서 다시 술집 안에는 여인의 노래가 가득 퍼져나갔다. 노래가 하나 밖에 없는 것인지 로우가 처음 들었던 멜로디가 반복해서 흘러나왔고, 키드는 이제야 그 노래를 제대로 듣게 되었다. 때마침 고혹적인 여인의 노래는 다시 한 번 절정에 도달했다.
let there be cuckoos
뻐꾸기와 종달새
a lark and a dove
그리고 비둘기가 있어야 하지만
But first of all, please, let there be love
무엇보다도 사랑이 있어야 해요
그 구절에서 로우는 문득 고개를 옆으로 돌려 키드를 살폈다. 뜻밖에도 그는 아무 말 않고 얌전히 앉아 조금 전의 로우와 같이 노래를 감상하고 있었다. 재즈가 취향인 것인지, 음색이나 여인의 목소리가 마음에 든 것인지, 아니면 그저 멍하니 앉아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으나 로우는 어쩐지 침묵을 지키며 음악에 둘러싸여 있는 키드의 옆모습이 무척이나 신경 쓰였다. 드물게 차분히 내려앉아 있는 눈빛과 오뚝한 콧날, 굳게 다문 커다란 입, 얼굴과 턱 선을 타고 흐르는 물방울과 물기가 남아있는 머리카락. Let there be love. 노래 속의 여인은 계속해서 그 구절을 반복적으로 강조했다. 그리고 그 노래에 깃들어있는 마성에 홀려버린 것인지, 아니면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키드에게 본능적으로 이끌린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둘 다인 것인지. 어느 쪽이든 로우의 오른손은 이성의 통제에서 벗어난 지 오래였다. 그의 긴 손가락이 앞으로 뻗어나가 키드의 물기 젖은 붉은 머리카락 한 가닥을 잡아냈다. 갑자기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져대는 손길에 키드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로우를 바라봤다. 굳은 무표정에서는 아무런 징조도 나타나지 않았으나, 일렁이는 눈빛만이 로우의 흔들린 이성을 대변해 키드의 모습을 매달리듯이 바라봤다. 그리고 그 눈빛을 마주한 순간, 키드의 이성도 일순 크게 술렁거렸다. 서로의 숨소리마저 들릴 정도의 지근거리에서 로우는 손가락으로 시원한 비 내음이 물씬 흘러나오는 키드의 머리카락을 한참동안 만지작거리다가 천천히 손가락을 아래로 내려 키드의 턱을 타고 내려가면서 손끝으로 그의 턱 선을 따라 그렸다. 너무도 노골적인 그 손길에 강렬한 자극을 받아 본능의 한계점이 쉽게도 돌파당한 키드는 망설이지 않고 바로 로우의 손을 잡아 끌어당겨 격렬하게 입을 맞췄다.
노래는 어느 때인가 멈춰졌고, 밖에 쏟아지던 비도 이제 그쳐져 날이 말끔히 개어졌다. 그럼에도 두 사람의 키스는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다. 키스를 나누고 있는 와중에 이성의 한 가닥으로 비가 그쳤다는 것을 눈치 챈 로우는 여기에 오는 동안 눈으로 봐둔 여관의 위치가 어디쯤인지 머릿속으로 대충 그려낸 뒤 한층 더 깊게 행위에 파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