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하님께서 신청하신 리퀘 단문입니다.
“매번 볼 때마다 불만에 가득 찬 낯짝이로군.”
“시비 걸러 온 거면 꺼져.”
자신을 찾아오자마자 바로 자신의 면상에 대놓고 빈정거림을 서슴없이 내뱉은 로우의 말에 키드도 질세라 로우의 말을 받아쳤다. 살기까지 더한 경고성의 말이라 범인이었다면 지레 겁을 먹고 도망쳤을 테지만, 로우는 그런 것에 전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태연한 얼굴로 키드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몇 년의 짧고도 긴 세월 동안 서로 바다 위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며 살기를 주고받는 일이 일상이 되었기에 이제는 이런 살벌한 대화 자체가 두 사람 사이에서 이뤄지는 커뮤니케이션의 일반적인 형식이 되었다. 주변의 다른 이들이 보았다면 역시 사황들의 대화는 다르다며 감탄을 터트렸겠지만, 아쉽게도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도 겁을 먹지 않고 감탄을 말할 수 있는 담력 높은 자는 이 자리에 없었다.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것은 키드의 다리가 비딱하게 얹어져있는 테이블뿐이었다.
원피스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고, 새로운 해적왕이 탄생하고, 세대가 교체되면서 바다 위의 형세도 많이 달라졌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최악의 세대 중 한 명으로 불리며 루키 취급 받던 트라팔가 로우와 유스타스 키드가 이제는 바다에 군림하는 사황 중 한 명이 되어 더 이상 아무도 그들을 무시하지 않게 되었다. 이제 막 신세계에 들어설 때만 해도 자신이 과연 이 자리에 오를 수 있을지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과 언제 올지 모르는 미래에 불신을 가졌지만, 이제 불안감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현실이 들어서게 되어 미래는 현재로서 완성되었다. 어찌 보면 해적으로서 달성할 수 있는 최적의 종착지들 중 하나였고, 트라팔가 로우는 자신의 현 위치에 대해 크게 불만은 없었다. 애초에 자신은 사황이 되고자 바다에 배를 띄운 것이 아니었고, 자신의 숙원은 이미 몇 년 전, 드레스로자에서 달성했지만 무슨 인연인지 자신은 계속 바다에 남아 사황의 자리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처음부터 사황의 자리를 목표로 항해에 나선 자들이 이런 로우의 뒷사정을 알았으면 분통이 터지는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로우도 순순히 자리를 내줄 생각이 없었다. 과정이야 어떻든 간에, 로우는 지금의 결과에 나름 만족했다.
만족하지 못한 쪽은 유스타스 키드였다. 그가 원하는 자리는 사황 같이 좁은 것이 아니다. 그보다 더 높은 곳, 이 바다에서 유일무이한 비보를 전리품으로 얻은 한 남자만이 거머쥘 수 있는 절대적인 왕좌. 해적왕.
그러나 왕좌에 앉은 이는 키드가 아닌 다른 자였다.
“네 녀석은 아직도 밀짚모자 녀석하고 동맹을 유지하고 있는 거냐?”
“뭐, 그렇지.”
로우는 키드의 날 선 질문에 선선히 답했다.
당초 동맹은 단기적으로는 드레스 로자까지, 장기적으로는 카이도 토벌까지 이어지는 일시적인 교류였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면 동맹은 지금도 이어져 이제는 단순한 루키 사이에서 맺어진 동맹이 아니라 사황과 해적왕 사이에서 맺어지고 있는, 무게감이 확연히 다른 관계가 되었다. 그 사이 각자 다른 조직과 맺은 동맹도 있었지만 그것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서로의 이득을 얻어서 자연히 해체되거나, 아니면 배신을 해서 어느 한쪽이 쓰러지는 험악한 결말만이 있었다. 사실 로우도 이정도로 길게 이어질 줄은 몰라서 몇 번이고 동맹을 파기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상대 쪽에서 막무가내로 때를 쓰며 동맹이 아니면 차라리 동료로 들어오라는 터무니없는 제안을 하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더욱이 상대에게 쌓인 빚도 있는데다가, 무엇보다도 자신의 숙원을 이루게 해준 일종의 은인이라는 생각까지 겹치니 로우도 무정히 끊어내기 어려웠다. 그리고 그런 로우의 미적지근한 태도와 동맹이라는 이유로 매번 로우를 찾아와 귀찮게 구는 철없는 해적왕을 보며 복장이 뒤집어 지는 쪽은 다름 아닌 유스타스 키드였다. 그리고 그런 키드의 불만을 로우도 물론 잘 알고 있었다. 겉으로는 세력 견제를 이유로 동맹 파기를 강요하고 있으나 그의 또 다른 속내를 로우가 간파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랜드 라인의 바다 속보다도 더 알기 쉬운 것이 연인의 질투어린 속내였다.
…솔직하지 못한 녀석 같으니.
“그렇게도 나랑 밀짚모자 여와의 동맹이 불만인거냐?”
“사황과 해적왕의 동맹인데 당연히 거슬리는 게 당연하잖아. 너도 여기까지 동맹을 끌고 갈 생각이 없으면서 계속 미적지근하게 나오니까 밀짚모자 녀석이 만만히 보고 그러는 거 아니겠냐고!”
“뭐, 그렇기는 하지만 동맹을 계속 이어가서 나쁠 건 없지. 여러 메리트도 있고, 세력 견제도 되고,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녀석과 동맹을 이어가는 것에 대해 나쁘지 않게 생각하고 있으니까.”
“무, 뭐!? 너 그게 무슨 소리야!!”
슬쩍 끼얹어진 로우의 사심어린 마지막 이유에 키드는 당황한 표정으로 의도에 대해 캐물었으나 로우는 시치미 땐 얼굴로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가 동맹을 유지하는 이유 중 하나가 가끔씩 연인의 질투하는 모습을 보면서 은근한 기쁨을 느끼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오직 트라팔가 로우 한 명 뿐이었다. 로우는 무표정 아래로 장난끼 어린 미소를 숨기며 키드의 당황 섞인 추궁을 무시하는 척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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