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쓴 [사보로우]고서점을 새롭게 써봤습니다.
사실 새롭게 떠오른 스토리가 있어서 그 전에 이전에 쓴 글들을 손보고 있었는데 쓰다보니 아예 처음부터 뜯어 고치게 되어서(...) 그러니 이전 글은 잊어주시고 새롭게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참고로 (1)을 붙였다고 해서 연재는 아닙니다;; 연작 비슷하게 진행될 예정이라 생각 날때 불쑥 추가할지도 모르겠네요;;;(무책임)
일직선으로 내리 쬐여져 오는 여름의 땡볕과 미묘하게 달라진 공기의 맛. 오랜 시간을 걸쳐 전철을 타고 한적한 시골에 도착한 사보는 도시에서와는 다른 햇빛과 공기만을 체감했음에도 자신이 낯설고 새로운 곳에 도착한 사실을 쉽게 실감해냈다. 아직은 어색하고 익숙지 않으나 사보는 자신이 이제껏 지내온 곳과 다르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햇살은 따갑지만 눈부셨고, 공기는 맑고 시원했다. 도시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좋은 점이다. 사보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짓고 기지개를 켠 뒤에 잠시 바닥에 내려놓은 짐들을 챙겨들어 서둘러 역 밖으로 나갔다.
사보는 제 또래들이 쉽게 가질 수 있는 경솔한 자만심은 없으나,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누구냐고 물어보면 요즘 한창 잘 나가는 베스트셀러를 내밀며 이걸 쓴 사람이라고 친절히 대답할 정도의 자신감은 당당히 가지고 있는 유명한 소설가였다. 그는 22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문학계의 중진들과 대중 모두에게 실력을 크게 인정받으며 승승장구하고 있으며, 그가 내놓는 소설들은 하나씩 나올 때마다 여론들이 앞 다투어 살면서 꼭 한번은 읽어봐야 한다는 베스트셀러라는 격찬의 미사여구를 아낌없이 쏟아내고 있었다. 데뷔작부터 최신작까지 단 한 번의 실패도 없이 성공의 가도만 일직선으로 내달리는 그의 행보를 지켜보면 가히 문학계의 신성, 천재라는 칭호를 붙여도 전혀 아깝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사보는 세간에서 목이 빠져라 고대하고 있는 신작 구상을 앞두고 짧은 문학가 인생을 통틀어 처음으로 벽을 마주보고 있는 중이다. 벽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손쉽게 넘어갈 수 있는 담벼락에서부터 시작된 벽은 사보의 앞길에 장애물조차 되지 않았다. 그러나 갈수록 높아지는 대중들의 안목과 동종업계에 있는 관계자들과 중진들의 과한 기대감은 하나씩 벽을 쌓아올려 지금에 이르러서는 넘을 엄두가 나지 않는 벽이 되었고, 그의 두 어깨에 중압감이라는 무게까지 실어주고 말았다. 사보가 이 사태를 전혀 예측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인기가 높아질수록 언젠가 찾아올 시련이라고 짐작했다. 하지만 짐작은 막연했고, 그래서 방심했다. 사보의 어깨에 올려 진 무게와 가로막은 벽의 높이는 지금껏 사보가 작가로서 가진 관념마저 다르게 보여줬다. 이제 자신이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 이제 젊은 소설가는 자신이 아닌 수많은 얼굴 없는 대중과 평론들을 위해 글을 써야한다. 그것을 받아들이기에는, 역시나 사보는 아직 너무 젊었다. 그렇다면 자신은 이제 앞으로 어떤 글을 써야하는가. 컴퓨터를 켜서 워드 프로그램을 띄워놓고 그 앞에 앉을 때마다 매번 가지게 되는 생각은 사보의 손을 쉽게 키보드 위에 올려놓지 않았다. 좌절감이 생겨들거나, 창작 의욕이 완전히 없어진다는 종류의 슬럼프까지는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글을 쓰는 자신의 직업을 사랑했고, 대중들의 관심과 기대를 감사히 여겼다. 문제는 소재였다. 사보가 작업할 때마다 가지게 되는 사념은 그가 신작 소재를 쉽게 고르는 것을 매번 방해한 것이다. 앞으로 어떤 글을 써야하는가. 그 문제는 앞으로 자신의 작가 인생을 결정지을 중요한 분기점이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여겨지면 사보는 난감함으로 한숨을 쉬며 끝내 아무것도 쓰지 못한 채로 빈 워드 프로그램을 끄고 노트북을 닫아야 했다.
작업을 위해 한적한 곳으로 가서 글을 쓰고 싶다. 지금껏 출판사에게 특별한 요구를 구하지 않았던 사보가 처음으로 내건 제의였다. 그의 담당자인 코알라는 흔쾌히 사보의 부탁을 승낙했다. 그녀도 사보가 겪고 있는 문제점을 알아차린 것인지 출판사 사장인 가프에게 직접 청원해서 아예 출판사 차원으로 전폭적인 지원을 해줬다. 작품이 완성될 때까지는 사보가 먼저 연락하지 않는 한 이쪽에서는 일체의 연락도 하지 않을 것이며, 여론 쪽도 철저히 관리해서 팬들과 기자들이 사보의 위치를 알지 못하도록 막아주기까지 했다. 게다가 가프는 지인을 통해 사보에게 적합한 작업 장소를 찾아내 한동안 머물 수 있도록 주선해줬다. 덕분에 사보는 할 일이 거의 없게 되어 출판사에 신세를 지는 것에 미안히 여겼으나, 이럴 때일수록 확실히 뜯어 먹어야 한다는 말과 함께 등짝을 퍽퍽 때리면서 괜찮다고 다독여주는 코알라와 가프의 호쾌한 웃음에 어쩔 수 없이 사보도 덩달아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리하여 사보는 얼마 뒤에 짐을 챙겨들고 코알라가 알려준 주소에 도착하게 되었다.
역에서 나오니 때마침 연락을 받고 마중 나온 사람이 있어서 사보는 그를 만나 함께 차를 타고 앞으로 머물게 될 거처에 도착했다. 사보가 마주하게 된 집은 소박하고 전원적인 분위기의 2층 집이었다. 지붕만 초록색이면 <빨간머리 앤>에 나오는 집이랑 닮을지도. 사보가 그런 실없는 소감을 속으로만 중얼거렸을 때, 집주인인 노부인이 나와 사보를 반겼다. 노부인은 자신의 이름을 츠루라고 소개하며 가프와는 오랜 친구 사이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츠루의 안내를 받아 2층에 위치한 방을 배정받고 짐을 푼 사보는 대충 정리가 되자 창문을 통해 마을의 전경을 내려다봤다. 척 봐도 시골이라는 이미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마을은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도심에서 살아 온 사보에게 있어서는 너무하다 싶을 만큼 대조적으로 조용하고 호젓한 장소였다. 시끄럽게 맴맴 우는 매미 소리를 듣고, 작열하는 여름의 태양을 올려다보며 사보는 자신이 앞으로 이곳에서 무엇을 쓰게 될 지는 전혀 예측할 수 없지만, 이곳이라면 적어도 이제까지와는 다른 글이 나올 거라는 기분 좋은 확신만은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기대를 현실로 만들기에는 여간 쉽지 않았다. 마을에 도착한 이후로 사보는 방에만 틀어박혀 노트북을 마주해 작업에 몰두했으나 이런 수고까지 들였음에도 소재는 야속하게도 떠오르지 않았고, 노트북에 띄워진 워드 프로그램은 여기에 오기 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백지 상태였다. 글을 쓰는 것은 시간과 인내심의 싸움이라고 한다. 사보도 소설가인 이상 자신이 여기에 왔다고 해서 소재가 금방 튀어나올 거라는 기대는 처음부터 가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무언가 바뀔 것이라는 희망이 은근히 생겼던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제자리걸음만 반복하니 희망은 실망으로 변질되어가고, 기분이 가라앉을 때면 자신의 노력에 대한 회의감이 불쑥 생겨들기도 했다. 하아. 팔짱을 낀 자세로 모니터만 노려보던 사보는 답답함에 한숨을 쉬었다. 깐깐한 노인과 느긋한 중년 소설가들이라면 연륜으로 생긴 참을성으로 소재가 나올 때까지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겠지만, 아직 새파랗다는 표현을 쓸 만큼 젊은 사보는 아직 그만한 참을성과 여유를 키워내지 못했다.
“잠깐 나가서 바람 좀 쐬고 올까.”
모처럼의 시골인데 너무 틀어박혀 있었다. 바깥바람이라도 쐬면서 기분 전환을 하면 조금은 나아지지 않을까. 그 생각이 들자마자 사보는 바로 휴대용 패드를 챙겨서 가방 안에 넣고 바로 방 밖으로 나가는 행동력을 선보였다. 그렇게 그는 처음으로 시골에서의 바깥나들이를 나섰다.
점심나절의 시골은 무척이나 한적했다. 시골이라고 해도 다들 낮에는 각자의 할 일을 하느라 바쁘기에 사람이 돌아다니는 모습은 드물 수밖에 없었다. 이 시간만 되면 어디에서 튀어나오는지 모를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도시와는 판이하게 다른 풍경이었다. 사람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풍경을 더 많이 보게 된 것부터가 생소했다. 짙은 녹음으로 색을 칠한 나무들과 담벼락 위에서 늘어지게 하품을 하는 고양이,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남자, 막대기를 휘두르며 골목대장 놀이에 열중 중인 아이들. 보기만 해도 느긋하고 평화로운 일상들이라 사보도 저절로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게 되었다. 역시 오길 잘했어. 사보는 그렇게 생각했다.
한참을 걸었을까, 아무 생각 없이 풍경만 감상하며 무턱대고 걷다보니 어느새 마을의 외진 곳까지 오게 되었다. 바로 몇 걸음만 더 걸으면 뒷산으로 들어가는 곳에서 사보는 호기심 넘치는 눈빛으로 골목길을 이리저리 둘러봤다. 사보는 이곳은 미처 철거하지 못한 낡은 집들이 밀집되어 있는 곳으로 그리 위험한 장소는 아니지만 드나드는 사람이 극히 드물고 골목길은 미로와도 같은지라 자칫 방심하면 미아가 될 수 있으니 헤이하게 돌아다니지 말라고 충고한 이야기를 츠루에게서 지나가는 식으로 얼핏 들었던 것을 떠올렸다. 과연 살펴보니 크고 작은 골목길들이 여기저기 나있고, 집들도 하나같이 엇비슷한지라 제대로 구조들을 익혀놓지 않으면 어수룩한 사람은 방심한 사이에 길을 잃어버리기 십상인 곳이다. 그러나 복잡한 것 외에는 특별한 것이 없어 사보는 복잡하다는 것 이상의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별 수확도 없으니 이쯤하고 돌아갈까 하는 옅은 실망감으로 발걸음을 돌릴 때, 지나치려던 사보의 시선에 어느 한 곳이 눈에 들어왔다. 사보가 발견한 것은 좁은 골목길 끝에 위치한 작은 가게였다. 다른 곳들보다 더 낡으면서도 관리가 잘 되어 무너질 것처럼은 보이지는 않는 고즈넉한 분위기의 조각만한 전통가옥은 어째선지 사람의 시선을 이끌어 모으는 힘이 은밀히 느껴졌다.
“무슨 가게지?”
사람의 발길이 거의 끊긴 이곳에 가게가 있다는 것부터가 신기하여 사보는 골목길을 비집고 들어가 가게가 있는 곳까지 다가봤다. 한 사람 겨우 드나들 수 있는 골목길을 지나 밖으로 나오니 가게의 전경이 확연히 눈에 들어왔다. 숲을 배경으로 가만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가게에는 아무런 간판도 내걸어 있지 않았지만 그 대신이라도 하듯 가게 안에서부터 밖에까지 수백 권의 책들이 차곡차곡 높다랗게 쌓여있었다. 가히 책의 산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압도적인 책의 양에 사보는 입이 떡 벌어졌다. 대형 서점에 있는 모든 책들과 맞먹는 숫자가 아닐까 하는 짐작을 해보며 사보는 가게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봤다. 인기척 하나 느껴지지 않는 가게 앞에서 사보는 일단 들어가지는 않고 고개만을 안으로 빼꼼히 들이밀어 고개를 좌우로 돌리면서 자세히 살펴봤다. 조명하나 없는 안에는 한 사람이 간신히 지나갈 수 있는 통로를 제외하고는 수많은 책들이 빽빽하게 빈 공간을 채우며 아무렇게나 쌓여있었고, 그 덕분인지 가게 안에는 낡은 책 특유의 퀴퀴한 냄새가 물씬 풍겨져왔다. 낡은 책의 냄새에 사보는 반사적으로 잠시 코를 찡그렸다. 빳빳한 새 책들만 만져오며 살아온 사보에게는 무척이나 낯설고 썩 좋게 느껴지지 않는 냄새였다. 사보가 여태껏 알고 있는 책의 냄새는 갓 인쇄소에서 나온 반들반들한 새 책의 잉크냄새와 종이냄새인 것이다.
“어… 실례합니다. 아무도 안 계세요?”
그래도 한 번 흥미가 생기니 그냥 지나치기가 아쉬웠다. 사보는 허락도 없이 마음대로 들어가는 것에 대해 잠시 망설이다가 과감하게 가게 안으로 발을 밀어 넣었다. 큰소리로 인사하며 사람이 있는지도 확인해봤으나 사보의 질문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정말로 아무도 없는 건가 싶어 사보는 의아함으로 고개를 옆으로 뉘였다. 결국 사람을 찾는 것은 일단 접기로 하고 화제를 전환하여 아까 전부터 신경 쓰인 쌓여있는 책들을 살펴봤다. 눈으로 대충 훑어봐도 하나같이 낡고 오래된 책들로만 가득한 고서들 중에서 눈에 띄는 대로 아무거나 한 권을 집어서 펼쳐봤다. 누렇게 변색되고 군데군데 찢어지거나 통째로 뜯겨진 책의 내용은 복잡한 한자들이 초서*로 가득히 써져 있었다. 한자만 해도 읽기 곤란한데 초서로 쓰여 있으니 원형조차 알 수 없어 사보는 의미 불명의 외계어라도 본 것 같은 난해한 표정을 지었다. 소설가라는 직업 덕택에 기본적인 문학 지식을 갖추고 있어서 한자에 약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고어(古語)를 해독할 정도의 전문가적인 지식이 있는 것은 아니며, 더욱이 사보는 소설가 이전에 고어보다도 현대어에 익숙한 20대 초반의 젊은이인 것이다.
“이, 이거 대체 어떻게 읽는 거지? 죄다 지렁이 기어가는 모양새의 글자들만 적혀있어서….”
“그건 초판본이라 읽기가 어려울 거다.”
가게의 안쪽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 때였다. 나긋이 울린 중저음의 목소리에 사람의 기척을 파악하지 못했던 사보는 갑작스런 상황에 너무 놀란 나머지 왁 소리를 내어 들고 있는 집어 던지다시피 떨어뜨렸다. 툭 소리를 내며 힘없이 바닥에 떨어진 책을 다시 주워든 것은 사보가 아니었다. 낯선 이는 사보의 존재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지나쳐 조금 전까지 들고 있던 책을 다시 주워들고는 망가진 곳은 없는지 꼼꼼히 살펴본 뒤에야 먼지를 털어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책시렁과 더미 사이에서 나타난 자는 얇은 후드 티 위에 먹색 기모노를 걸쳐 입은 특이한 차림새의 젊은 사내였다. 사보와는 크게 나이차가 나지 않아 보이는, 그래서 낡은 가게를 운영하는 주인으로 여기기에는 너무도 젊어 보이는 남자는 낯모를 침입자의 등장에도 태연하고 무덤덤한 낯빛으로 자신의 가게에 찾아온 사보를 말끄러미 응시했다. 자신의 얼굴을 아무 말 않고 뚫어져라 직시하는 남자의 등장에 사보는 잠시 당혹과 경계로 몸을 굳혔지만, 일단 허락도 없이 가게에 발을 들인 것은 자신이고, 가게의 소유로 보이는 책을 만져서 바닥에 떨어뜨려 자칫 파손될지도 모르는 과실까지 저질렀으니 여기서는 일단 자신이 먼저 굽히고 들어가는 것이 우선이라 판단해 사보는 뒷목을 만지면서 허리를 숙였다.
“아, 허락도 없이 들어와서 죄송합니다. 저, 책은 망가지지 않았나요? 제가 너무 놀란 나머지 떨어뜨려서 그만….”
“괜찮아. 크게 망가진 부분도 없으니. 다음부터는 조심하도록. 여기 있는 책들은 전부 섬세하게 다뤄야 하는 것들이니까.”
“네. 저, 실례지만 이 가게의 주인이신가요?”
“그렇다만. 이방인인가?”
“아, 네. 한 달 전에 이곳에 오게 되었습니다. 사정이 있어서 당분간 이 마을에서 지내기로 했거든요. 마을 분들에게는 전부 인사를 드렸는데 그쪽은 처음 뵙고, 이 가게의 존재도 오늘 우연히 산책하다가 처음 알게 되었어요.”
“그런가.”
“여긴 서점인가요?”
“정확히 설명하면 고서점이지.”
남자는 그 말 뒤에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옻칠을 해놓은 장죽과 보라색 쌈지였다. 남자는 쌈지 안에서 담뱃잎을 꺼내 연소통 안에 넣은 뒤 반대쪽 품에서 라이터를 꺼내 그 안에 불을 붙였다. 곧이어 담배가 태워지자 남자는 바로 능숙하게 연기를 빨아 마신 뒤 긴 날숨과 함께 뱉어냈다. 요즘 같은 시대에 장죽으로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처음 보는지라 사보는 마치 흥미로운 것을 발견한 아이 같은 눈빛으로 남자의 모습을 바라봤다. 기모노를 걸치고 장죽을 이용해 담배를 피우는 남자의 모습은 한 폭의 수묵화와 같이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후우우. 남자의 오므라진 입술 사이로 또 한 번 회색빛 연기가 피어나왔다. 세찬 입김에 실려 밖으로 나왔다가 천천히 자취를 감추는 연기의 흔적을 사보는 눈으로 좇았다. 담배를 피우지 않고, 담배 연기도 좋아하는 편이 아니지만 어째선지 남자가 담배를 피우는 모습은, 그 향취는, 연기의 잔상은, 싫어할 수가 없었다. 남자의 연기는 폐가 아닌 눈동자와 심장으로 스며들어와 기모노의 빛깔과 같은 색으로 물들여 중독 시켰다.
“사보. 소설가에요.”
이제 고서점 안의 낡은 책들에서 맡을 수 있는 고유의 책향(冊香)이 불쾌하지 않았다. 책에서 피어나오는 향취는 남자의 담배향과 더없이 잘 어울렸다. 두 사람을 에워싸는 책들의 관망과 그들의 몸을 옭아매는 연기의 속박에서 사보는 조금 긴장된 목소리로 자기소개를 남겼다.
“트라팔가 로우. 이 가게의 주인이다.”
그리고 남자는 사보의 소개에 그와 똑같은 형식의 자기소개로 답해줬다.
해가 저물면서 점점 약해져가는 매미 소리에 은근히 귀를 기울이며 사보는 자신의 여름이 지금부터라는 것을 직감했다.
*초서 : 서예에서 한자를 가장 흘려 쓴 서체를 말한다. 일종의 필기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