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쵸로마츠 시점
※ 짝사랑 소재.
※ 언제나처럼 의식의 흐름으로 쓴 단문.
오소마츠 형이 자주 보는 책은 크게 두 종류 있다. 하나는 만화책, 또 하나는 여행 관련 서적.
만화책이야 뭐 어렸을 적부터 지금껏 재미와 흥미 위주로 줄기차게 읽고 다니니 그냥 넘어갈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역시 후자였다. 언제부터인지 명확한 시작점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내 기억을 기준으로 볼 때 오소마츠 형이 여행 관련 서적을 뒤적거리기 시작한 시기는 고등학교 3학년, 졸업을 앞두고 있을 때였다. 졸업을 코앞에 둔 아이들은 졸업 후의 계획을 서로 공유하며 앞으로 펼쳐질 도금된 미래를 기대했다. 겉으로는 번쩍이나, 조금만 벗겨보면 흉하게 녹슬어버린 속내가 드러나는 미래. 아니, 모든 미래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정말로 순금처럼 눈부신 미래도 있겠지. 다만 우리들의 미래가 도금조차 못한 것이기에 그들 또한 겉보기에는 달라도 실상은 별반 다를 게 없노라 믿고 싶은 것뿐이다.
아무튼, 우리들은 대학 진학을 옛 저녁에 포기했고 취직에 대한 계획도 전무했다. 졸업식을 치르면 부모님에게 얹혀서 살아야 하는 쓰레기 인생이 준비되어 있는 예비 니트들이었다. 그 당시의 나는 졸업식 전에야 간신히 길고도 긴 방황을 체념으로 어쩔 수 없이 갈무리 지었다. 뒤늦게 정신 차리고 학업에 매진하여 내신에 신경 썼지만 너무 늦어버려 그간의 모든 노력이 물거품만도 못한 부질없는 것이라는 현실을 인정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참으로 많았다. 그 때의 일은 솔직히 지금도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래도 어찌해서 마음을 정리했지만, 미련이라는 것은 참으로 끈질긴 것이라 계속 나에게 들러붙어 의욕을 빼앗아갔다. 무기력하고 무의미한 나날이었다.
“쵸로마츠, 이것 봐! 여기 진짜 끝내주지 않냐?”
사실 여행에 대한 관심은 오소마츠 형으로만 국한된 것이 아녔다. 반 친구들 중 몇몇도 졸업여행이라는 타이틀로 입시 스트레스를 날릴 차원에서 여행 행선지와 일정을 짜느라 분주했다. 겉으로만 보면 오소마츠 형도 그들 중 하나로만 보였다.
“관심 없어.”
“야~ 너무 쩨쩨하게 그러지 말고 제대로 보라고? 여기 온천 진짜 기분 좋을 것 같은데 말이야.”
“여행지를 골라도 꼭 아저씨 아줌마들이 갈 것 같은 곳으로 고르냐.”
“놀러가는 데 나이가 무슨 상관이야. 뭐든 재밌으면 장땡이지. 게다가 무엇보다 여탕이 있잖아!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갈 이유가 된다고!”
“미친놈아, 무슨 꿍꿍이로 가려는지 속이 훤히 다 보이거든!!”
어느 날부터 오소마츠 형은 종종 나에게 여행 팜플렛을 챙겨들고 유명 관광 명소들을 보여줬다. 산, 바다, 도시, 온천, 유적지…. 정말 어디든 즐거우면 그만인지 오소마츠 형은 장소 가리지 않고 조금이라도 괜찮다 싶으면 코앞에 홍보용 사진들을 들이밀며 적극 추천해줬다. 처음에는 오소마츠 형이 정말로 여행을 가고 싶어서 이런 유난을 떠는 구나 싶었다. 그래서 조금씩 형의 말에 설득된 나는 동생들과 카라마츠를 모아놓고 따로 여행 일정을 맞춘 뒤, 모두의 취향을 고려해서 마땅한 장소를 선정했다.
그러나 막상 여행 장소와 일정을 대략적으로 설명해주니, 오소마츠 형은 어쩐지 난색을 표하며 손사래를 쳤다.
“아니, 됐어. 너희들끼리 놀다 와라.”
나는 형의 그런 태도를 이해하지 못했다. 우리들 중에서 가장 여행, 여행이라 노래를 불렀으면서 정작 자리를 마련해주니 싫다고 거절하는 모순적 태도를 드러내니, 황당함과 동시에 형을 위한 내 노력이 당사자로부터 무시당한 것 같아 화가 났다. 그 날은 졸업식 다음날이었고, 나는 아직도 실패의 열등감과 무기력함에서 미처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나와 형의 싸움을 말려준 사람은 카라마츠였다. 카라마츠는 나와 오소마츠 형을 억지로 분리시킨 뒤 형을 데리고 자리를 피했고, 나는 동생들에게 둘러싸여 형에게 맞은 상처들을 치료받았다. 부끄럽지만, 그 때는 속이 상해서 조금 울어버렸던 기억도 난다.
그 사건들을 통해 한 가지 알아낸 것이 있다면, 오소마츠 형은 누군가와 낯선 곳으로 떠나는 것을 기피한다는 사실이었다. 여행 가고 싶다 푸념하면서 사진들을 보여주는 것도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혹은 관심 받기 위한 일종의 퍼포먼스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시절의 행동들은, 우울했던 내 기운을 살려주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른다. 확실한 사실 관계가 밝혀지지 않은, 어디까지나 추측의 영역에 속한 바람이지만.
오소마츠 형은 언제까지고 그 자리에 머물러있을 것처럼 보이면서도, 동시에 아무도 모르게 훌쩍 머나먼 곳으로 떠날 사람 같았다. 오소마츠 형의 곁을 긴 시간 동안 떠났다가 다시 돌아와도 어서 와라, 하고 반겨줄 것 같아도, 조금만 눈을 떼고 방심하면 기척도 없이 휑하니 자리를 비울 바람 같았다. 여행에 대한 오소마츠 형의 모순된 태도는 그런 이미지를 가장 단적으로 드러낸 것이었다.
어느 쪽이 좋으냐고 물어보면, 역시나 전자겠지. 오소마츠 형이 나에게 말도 없이 자취를 감춘다는 건 살면서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오소마츠 형은 언제나 자신이 아는 마츠노 오소마츠여야만 하고, 자신의 허락도 없이 곁을 떠나서는 안 된다. 어디를 가더라도 자신과 단 둘 만이어야 했다. 나는 끝도 없는 편협한 이기심과 집착 속에서 오소마츠 형에 대한 감정을 발견했다.
그 후로도 오소마츠 형은 종종 끈질기게 여행안내 책자를 보여줬고, 나는 그것을 일관된 태도로 무시했다. 쵸로마츠가 차가워서 형아 얼어 죽어버려! 칭얼거리는 형의 불평도 무시하는 한편 귀엽다고 생각하는 여유까지 갖춰졌다.
그 여유가 어리석은 자만이라는 사실은, 책장 뒤편에서 낯선 책을 발견한 날에 깨닫고 말았다.
형제들 손에 망가질까봐 몰래 숨겨놓은 나쨩의 레어 사진집을 찾기 위해 집안 이곳저곳을 쑤시고 들다가 기어이 책장 뒤편에까지 손을 댔을 때, 그것을 찾아냈다. 조금 두툼한 책은 뜻밖에도 에로 사진집 같은 것이 아닌, 세계적으로 유명한 관광 명소와 비경들을 찍어놓은 사진들이 실린 책이었다. 이런 책이 우리 집에 있었다는 것이 신기해서 펼쳐보니, 화려한 자연 경관들이 페이지마다 아름답게 수를 놓고 있었다. 사진집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잠시 잊어버리고 나는 사진들에 감탄하며 휘릭 휘릭 넘기고 있을 때, 문득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그것은 특정 페이지마다 종이 귀퉁이를 작게 접어 표시해놓은 것이었다. 무슨 의미로 표시해 놓은 거지? 나는 다시 페이지를 넘겨 표시된 부분만 살펴보기 시작했다.
테이블 산, 밀포드 사운드, 바이칼 호, 나이아가라 폭포, 우유니 사막.
그 밖에 이름 모를 초원, 폭포, 호수, 계곡들. 모두가 하나 같이 사진만으로도 그 위용과 장관을 짐작할 수 있는 절경들이었다.
표시된 부분들을 전부 확인하고 나자, 나는 그 책의 주인이 누구인지 짐작해냈다.
그 날 밤, 꿈을 꿨다.
꿈에서 오소마츠 형이 나왔다. 책에서 본 비경들 중 하나인 우유니 사막 한 가운데에 오소마츠 형은 서있었다. 지평선을 기준으로 하늘과 땅이 서로를 비추고 있는 거울 같은 공간에서 오소마츠는 평소와 같은 미소로 나를 바라봐줬다.
아니, 바라보고 있는 상대는 내가 아녔다. 오소마츠가 보고 있는 것은 그를 뒤덮고 있는 사막의 얕은 물과 수면이 비추고 있는 맑은 하늘에 잘 어울리는, 푸른 후드 티를 입은 그였다. 두 사람은 서로 가까워졌고, 이윽고 손을 맞잡았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거장이 찍은 역작처럼 그들의 모습은 하나의 예술처럼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 하늘과 땅이 파란색으로 하나가 된 곳에서 두 사람은 나란히 손을 잡고 자신들이 선 풍경과 행복을 공유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이 분한데도, 아름다워서, 그를 마주보며 웃고 있는 오소마츠 형이 그래도 좋아서, 나는 그저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꿈에서 깨어난 뒤, 마른 눈물을 닦을 생각도 못하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오른편으로 고개를 돌리니 색색 숨소리를 내며 아무것도 모른 채 잠든 오소마츠 형이 어둠 속에서 보였다. 너무 눈부셔서 눈이 멀 것 같은 꿈보다도, 깊은 어둠 속에서 몰래 훔쳐보는 오소마츠 형의 얼굴이 더 안심이 되어 소리 없는 헛웃음이 나왔다.
알고 있었잖아, 쵸로마츠. 오소마츠 형은 여행을 떠나고 싶어 하지 않았던 게 아니라고, 다만 단 둘이서 함께 그곳으로 갈 상대가 이미 정해져 있기에 그런 것뿐이라고. 위로인지 조롱인지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그러면 이번에도 나는 체념으로 매듭짓고 포기하라는 건가. 이번에도 나는 그럴 수밖에 없는 걸까. 언젠가 두 사람은 여행을 떠날 것이다. 나는 오소마츠 형이 혼자서 말없이 훌쩍 내 곁을 떠나는 만약의 상황을 두려워해야 할지, 오소마츠 형이 카라마츠와 함께 둘만의 여행을 떠나는 다가올 미래에 두려워해야 할지 분간할 수 없었다.
시발. 어느 쪽이든 욕설이 터져 나오는 걸 참기 힘들 것 같다. 누구를 향한 원망인지는, 체념에 다다르기 전까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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