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애니 24화 기반 망상.
* 카라→오소→쵸로
“카라마츠 형!”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가 절로 돌아갔다. 길의 끝에서 한 손을 머리 위로 흔들며 종종걸음으로 자신에게 급히 달려오는 인영에 카라마츠는 눈을 가늘게 떠서 상대가 누군지 확인했다. 아, 토도마츠구나. 거리가 어느 정도 좁혀지자 귀여운 인상의 낯익은 얼굴이 선명해졌다. 거리를 뒀다 해도 20년 넘도록 질리게 마주했던 얼굴을 왜 금방 알아보지 못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다가, 토도마츠가 적당한 거리를 사이에 두고 자리에 멈추자 의문이 금방 해소됐다. 처음 보는 낯선 옷차림이 토도마츠의 얼굴에 그려진 친숙함을 흐릿하게 만든 것이다. 여전히 세련된 옷차림이지만, 낯섦 탓에 위화감이 먼저 들어 잘 어울린다는 말이 나오지 못했다. 카라마츠는 분홍색을 기조로 한 예전 외출복을 떠올렸다. 자기 취향에 조금 벗어난 거지만 가게 점원의 추천으로 세트 구입했다는 말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카라마츠는 토도마츠 몰래 눈대중으로 옷차림을 위아래로 살폈다. 분홍색은 없었다.
반사적으로 시선을 자신의 몸 쪽으로 바짝 붙여 내렸다. 검은 정장에 잿빛 넥타이만이 흑백 영화처럼 삭막하게 비쳐 보였다.
“오랜만이군, 토도마츠.”
“응. 오랜만이야, 카라마츠 형. 설마 길거리에서 볼 줄은 몰라서 나도 모르게 뛰어왔다니까. 하마터면 못 알아보고 지나칠 뻔 했어.”
손부채질하면서 푸념하는 토도마츠의 말에 카라마츠는 쓰게 웃었다. 자신이 만일 토도마츠와 같은 입장에, 그를 길거리에서 먼저 발견했다면 분명 금방 못 알아봤을 거라는 확신 아닌 뭔가가 가슴 언저리에 불편하게 자리 잡은 탓에 나온 미소였다. 그리고 몇 번을 마주해도 적응되지 않는 우리들의 현주소와, 흘러간 시간과, 변해버린 풍경에.
“어떻게 지내고 있어? 여전히 아르바이트 중인가?”
“뭐, 그렇지. 그래도 이번 건 일당이 좋아서 오래 하고 있어. 아, 그래도 시간 날 때마다 여기 저기 찔러보고 있어. 나보다는 카라마츠 형이 더 낫지. 안정적인 직장을 가지고 있잖아.”
“그래봤자 일개 회사원인걸.”
“참, 쵸로마츠 형 얼마 전에 승진한 이야기 들었어?”
“아… 그런가. 아니. 지금 처음 듣는군.”
카라마츠는 주먹을 쥐었다 펴고서 토도마츠 몰래 바지에 손을 닦았다. 기분 나쁘게 끈적거리는 땀이 자꾸만 손바닥을 적셨다.
“라이징 딸딸마츠 형이라고 그렇게 놀려댔지만, 우리 중에서 한 발 먼저 앞서 가는 게 대단하구나 싶었어.”
“쵸로마츠는 성실하니까.”
“하지만 내 입장에서 제일 놀라운 건 사실 카라마츠 형이야.”
운을 땐 토도마츠가 바로 말을 잇지 않고 잠시 시선을 내 주변으로 둘러뒀다. 내가 아닌 다른 뭔가를 보는 것처럼, 아니 거의 지워져버린 풍경의 흔적을 더듬어 살피는 것처럼. 그 시선에 카라마츠는 어째선지, 자신이 정말로 자신의 막내 동생과 재회해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실감이 뒤늦게야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살펴도 엿보려는 것은 없었는지 소리 없이 시선을 카라마츠에게서 힘없이 떼어내고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어투로 말을 덧붙였다.
“왜, 옛날의 카라마츠 형이라면 상상할 수 없었거든. 항상 이따이한 말만 하고, 취업에 대해서는 노 플랜이라 쓸 때 없이 당당하게 말하고. …그래서 나는 카라마츠 형이,”
우우웅, 우우웅.
주머니 속 휴대폰의 진동 소리가 토도마츠의 말허리를 뚝하고 잘랐다. 토도마츠는 당황한 시선으로 카라마츠를 봤고, 카라마츠는 괜찮다는 의미로 조금 뻣뻣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토도마츠는 몸을 돌려 휴대폰을 받았다. 아르바이트하는 곳의 상사인지 저자세가 되었다. 허리를 숙여가며 전화를 받는 동생의 모습은 썩 보기 좋은 모양새는 되지 못한지라 카라마츠는 기특함과 안쓰러움이 뒤섞여든 시선으로 토도마츠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오랜만에 형이라는 자리에 서서 잠시 본 풍경이지만 어색함은 없었다.
통화를 끝낸 토도마츠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카라마츠에게 고개를 돌렸다.
“미안. 점장님께서 조금 일찍 와달라고 연락이 와서 이만 가봐야겠어.”
“그래,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수고해라.”
그 순간, 자연스럽게 나온 형으로서의 말에 토도마츠도, 카라마츠도 잠시 흠칫했다. 고작 이런 흔하고 당연한 말에 언제 우리는 반사적으로 놀라게 되었을까. 갑자기 잊고 있던 끝없는 회한이 휘몰아쳤다. 딱히 멀어졌다고, 서먹해졌다고 할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되었을까. 어쩌면 너무 오랜만에 만나 거리감을 가늠할 수 없었던 건지도 모른다. 본가에 나온 후로 카라마츠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집과 형제들을 피해 다녔다. 그러다보니 어느 새 형제들 사이에서 카라마츠는 이렇게 길거리에서 우연에 의지에 마주치지 않으면 얼굴을 보는 게 무척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어색한 침묵이 흐르자 토도마츠가 살짝 미소를 지으면서 먼저 분위기를 풀었다.
“왠지 그 말을 들으니까 정말 형을 만난 것 같네. 오랜만에 만나서 그런 걸까, 변했다고 생각해서 사실은 좀 어색했거든.”
아, 정말 가봐야겠다. 그럼 나중에 또 봐, 카라마츠 형!
그 말을 마지막으로 정말로 토도마츠는 조금 전 카라마츠에게로 달려왔던 길을 다시 되짚어 달려갔다. 조금 급하게 달려가는 토도마츠의 뒷모습을 카라마츠는 잠시 지켜봤다. 쉬지 않고 열심히 달려가는 모습이 멀어질수록 더욱 선명해져갔다. 많이 컸구나. 언제나 돌봐줘야 할 것 같은 막내가 저 혼자 씩씩하게 달려가는 모습을 보니 기특함이 물씬 들었다. 쵸로마츠의 뒤를 이어 두 번째로 빨리 앞서 달려간 아이니 예견된 모습이기도 했다.
토도마츠는 성장했다. 성장하면서 변했고, 그를 둘러싼 풍경도 수없이 달라졌다. 그리고 그런 토도마츠가 카라마츠에게 변했다고 말했다. 아니, 변했다고 말한 게 아니라 단지 그런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변한 것인지, 변하지 않은 것인지. 어느 쪽도 애매한 토도마츠의 말이 카라마츠는 마음에 걸렸다. 토도마츠의 말에 실망한 것인지, 안도한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휴대폰이 울리기 전, 토도마츠는 카라마츠에게 뭔가를 말하려 했다. 그래서 나는 카라마츠 형이. 미처 이어지지 못한 말. 아마도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을 미완성의 말이 카라마츠의 주변을 맴돌아 풍경의 일부분이 되었다.
풍경. 토도마츠가 더듬어 찾고자 한 것. 미완성으로 남겼어야 했을 말.
여전히 외로움을 타는 구나, 토도마츠. 그것과 동시에 자신에게서 그것을 찾으려고 했던 동생이 안쓰럽고 미안했다. 카라마츠는 눈을 감고 토도마츠의 대화를 되짚었다. 그리고 쵸로마츠의 이름이 나오는 부분에서 도로 눈을 떴다. 토도마츠에게는 무심코 거짓말을 해버렸던 것이 한발 늦게 죄책감으로 뜨끔했다. 승진 소식은 여전히 신세지고 있는 치비타를 통해 들었다. 이미 거나하게 취한 상태로 포장마차에 들른 쵸로마츠가 말해줬다 한다. 그리고 한동안 지방으로 파견되어 더 먼 곳으로 떠난다는 말도 치비타는 투덜거리면서도 친절히 카라마츠에게 알려줬다. 이젠 한 마을에도 있지 않을, 더 먼 곳으로 달려가는 바로 아랫동생의 얼굴이 신기루처럼 어른거렸다.
너는 어째서 그렇게 멀리 갈 수 있는 걸까. 이미 충분히 멀어지지 않았나. 많은 풍경이 바뀌지 않았나. 그런데도 뭐가 부족하다고 자꾸만 멀리 떠나고 많은 걸 바꾸려고 하는 걸까. 네가 떠난 자리에, 너의 뒤에 무엇이 남겨져 있는지 알고는 있는지.
하아아. 카라마츠는 긴 한숨을 쉬었다. 동생을 대상으로 이런 식의 생각까지 하고 싶지 않지만 유독 뭐가 그리 급한지 자꾸만 앞서 멀어지는 쵸로마츠를 떠올릴 때마다 그림자처럼 뒤따라 드는 얼굴로 인해 제어가 힘들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도 자격 없는 건 매한가지인데. 그런데도 카라마츠는 여전히 망설이며, 어중간한 곳에 서서 자꾸만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 두고 온 것들을, 자그마한 붉은 등을 미련으로 응시했다.
소리 없는 차가움이 카라마츠의 뺨에 내려앉았다. 고개를 든 카라마츠는 하늘마저 잿빛으로 뒤덮인 것을 발견했다. 뒤이어 눈송이가 하나 둘 쓸쓸히 내렸다. 올해의 첫눈이었다.
[카라오소]붉은 여왕의 모라토리엄
W. ENA.
「네 길을 잃다니 무슨 소린지 모르겠구나. 여기 있는 길은 모두 내 것인데.」
“이거 놔! 이거 놓으라고 말하잖아, 카라마츠!”
그저 걸었다. 걷고 또 걸었다. 이 녀석을 데리고 일단 가족들에게서, 집에서 멀어져야 한다는 생각 밖에 안 들었다. 뒤에서 바락바락 소리치는 형의 목소리는 가볍게 무시했다. 귓속이 웅웅 울렸다. 형의 멱살을 잡고 끌고 가는 손이 욱신거렸다. 어디로 가는 걸까. 어디로 가야하는 걸까. 오소마츠를 데리고 집에서부터, 가족들로부터 급하게 벗어난 카라마츠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와 함께 멀리 걸음을 재촉하는 것이 전부였다.
“카라마츠, 그만, 알았으니까 그만 멈춰…. 멈추라고 카라마츠!!!”
외침과 함께 카라마츠의 손목을 잡은 오소마츠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 작은 떨림이 고함소리에도 꿈적 않던 카라마츠를 멈추게 했다. 카라마츠는 뭔가가 떨어져 나간 것 같은 얼굴로 비로소 걸음을 멈추고 오소마츠의 멱살을 놔줬다. 간신히 그의 손에서 자유로워진 오소마츠가 목 주변을 쓸면서 기침을 연발했고, 거친 숨소리가 골목길을 가득 메웠다. 카라마츠는 주변을 둘러봤다. 분명 언젠가 봤고 몇 번을 지나쳤을 길일 텐데도 이상하게 낯설었다. 녹슨 가로등 두어 개만이 어둠을 물리고 있는 어느 길. 익숙하게 낯섦은 길 한복판에서 카라마츠와 오소마츠는 서로를 마주보고 섰다.
숨소리가 진정되자 오소마츠가 허리를 곧게 피고 섰다. 조금 수그러진 고개에서 언뜻 가로등불 빛에 비춰지는 달아오른 뺨이 보였다. 카라마츠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오랜만에 형에게 주먹을 휘둘렀구나 싶었다. 쌍둥이지만 상하 관계가 확실하게 구분 지어진 형제 속에서 오소마츠와 카라마츠는 유일하게 대등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것은 어렸을 적, 아직 서로를 형과 동생으로 구분 짓지 않고 어울려 뛰놀던 평등한 시절과도 달랐다. 그들의 대등함은 형제를 기반으로 하여 장남과 차남이라는 관계로 형성된 동등이었다. 첫째와 둘째. 여섯 쌍둥이 중에서 가장 앞선 위치에 있는 둘은 본질적으로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카라마츠가 유일하게 고민을 상담하고 의지할 수 있는 인물이 오소마츠인 것처럼, 격정에 이성을 잃어버린 오소마츠를 말리는 역할은 오직 카라마츠만이 해낼 수 있었다.
학창 시절, 철없을 적에도 종종 서로의 얼굴에 주먹을 꽂는 일이 있었다. 오소마츠가 도를 넘어서려 하면 카라마츠는 하나 뿐인 형의 면상에 주먹을 꽂는 한이 있어도 말렸다. 다른 동생들이라면 절대 엄두도 못 냈을 일을 카라마츠는 아무 망설임 없이 행했고, 오소마츠는 그런 카라마츠의 제지를 납득했다. 카라마츠만이 자신에게 그럴 자격이 있다는 것을 인증하는 것처럼, 오소마츠는 카라마츠의 주먹을 맞을 때면 금방 제 잘못을 인정하고 물러섰다. 가끔은 화가 덜 식어서 반격할 때도 있지만 그 때도 마지막에는 서로 만신창이인데도 뭐가 그리 좋은지 웃으면서 훈훈하게 마무리 되었다.
그러면 지금은? 지금도 그렇게 이류 청춘 드라마처럼 마무리 지을 수 있는 일일까.
오래된 가로등이 불규칙적으로 깜빡였다. 탁한 빛을 등지고 오소마츠는 여전히 답지 않게 침묵을 지켜나갔다.
“…나중에 쥬시마츠한테 사과해. 아무리 그래도 형님이 한 행동은 도가 지나쳤어.”
“…그래.”
다시 둘 사이의 대화가 단절됐다. 그 다음으로 할 말이 있었던 것 같던데, 부모님과 형제들 앞에서 주먹질까지 하다가 집 밖으로 끌고 나올 때까지만 하더라도 따질 말들이 산더미 같은 줄 알았는데. 막막함이 카라마츠의 목구멍을 틀어막았다.
카라마츠는 오늘 하루 지켜본 오소마츠의 모습들을 회상했다. 아침 일찍 우편으로 온 합격 통지서를 가족들에게 당당히 보여주고서도 믿기지 않아 몇 번을 확인해 읽고 난 뒤 그간의 고생이 담긴 눈물을 흘리는 쵸로마츠와 그런 쵸로마츠를 둘러싼 가족들, 그리고 그런 그들에게서 순식간에 소외된 오소마츠의 망연자실한 모습을 카라마츠만이 지켜봐줬다. 그 날 하루 오소마츠는 평소와 비교했을 때 무척이나 말수가 줄어들었다. 그의 주변에 둘러싼 공기가 차갑게 식어 앉았다. 하루아침에 일변한 풍경 속에서 오소마츠는 적응하지 못했다.
「여기서는 같은 곳에 있으려면 쉬지 않고 힘껏 달려야 해. 어딘가 다른 데로 가고 싶으면 적어도 그보다
두 곱은 빨리 달려야 하고.」
어렸을 적 읽은 동화가 떠올랐다. 낯선 세계로 들어선 소녀는 어느 여왕을 만나게 되었고, 여왕은 소녀를 데리고 빠르게 달려 나갔다. 그러나 아무리 달려도 주위의 풍경은 달라지지 않았고, 그것을 의아하게 여긴 소녀에게 여왕은 말했다. 같은 곳에 머물기 위해서는 그만큼 쉬지 않고 열심히 달려 풍경을 유지해야 한다. 만일 다른 풍경을 보고 싶으면 그보다 더 빨리 내달려 지금의 풍경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들의 풍경은 변하지 않았다. 오소마츠를 중심으로 유지되는 풍경은 전부 그의 노력으로 이뤄낸 성과였다. 우리들은 오소마츠를 장남이라는 자리에 앉혔고, 오소마츠는 그 자리에 걸맞게 지금의 일상을 유지하고자 했다. 동정이고 니트인 쓰레기라고 해도 우리들은 세계는 굳건했다. 그 굳건함은 전부 그 풍경을 유지시키고자 한 오소마츠의 노력의 결실이었다. 오소마츠는 우리 여섯 쌍둥이들이 함께 있는 풍경과 세계를 사랑했다. 비록 갑작스레 앉혀진 장남이라는 막중한 자리에 얼떨떨해하기도 했고, 부담스러워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납득했다. 결과적으로 그도 원했던 일이었으니까. 그렇게 우리는 이상한 나라를 만들어 현실을 외면하고 그 안에 안주했다.
그러나 풍경에 균열이 갔다. 균형이 무너졌다. 이상한 나라의 형제들 중 한 명이 현실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했다. 그토록 노력해서 유지시킨 풍경은 쵸로마츠의 이탈로 변하게 되었다. 그는 다른 풍경을 보기 위해 오소마츠를 두고 앞질러 달려 나갔다. 카라마츠는 그런 쵸로마츠가 가장 먼저 오소마츠를 ‘오소마츠 형’이라 부른 것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쵸로마츠의 취직 소식을 들었을 때, 카라마츠가 가장 먼저 떠올린 장면이 그것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가 그러면 안 되는 거였다. 그러나 동시에 쵸로마츠였기에 이런 일은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카라마츠는 웃는 낯으로 쵸로마츠의 취직을 진심으로 축하해줬다. 그러나 부끄럽게도 그것은 형으로서의 인내와 의젓함에서 비롯된 축복이 아녔다.
“카라마츠.”
자신의 이름을 허공에 부서져 내렸다. 오소마츠의 붉은 입술에서 새하얀 입김이 피어올랐다. 그런가. 아직 겨울인가. 일기예보에서는 곧 봄이 올 것이라는 호들갑스런 목소리가 며칠 동안 계속 나왔지만 봄은 여전히 아직 저 먼 곳에 있었다. 깜빡, 깜빡. 노곤한 늙은 빛이 잠을 이루지 못해 자꾸만 뒤척였다.
“쵸로마츠 녀석, 어째서 그렇게 취직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걸까.”
대답은 없었다. 카라마츠가 그 말에 대답할 수 있는 건 무엇도 없었다. 형님은, 여기까지 와서도. 뻐끔거리는 입술을 끝내 깨물었다. 그래, 다른 형제들이었더라면 그도 어떻게든 납득했을 것이다. 하지만 쵸로마츠였다. 마츠노 가의 삼남, 마츠노 쵸로마츠여서 그런 것이다.
“솔직히 쵸로마츠 녀석이 먼저 잘못했다고. 그런 건 형님한테 미리 언질이라도 줘야 하잖아, 안 그래?”
이 와중에도 그의 말투에는 그만의 장난기가 어려 있었다. 그것이 오소마츠만의 허세였다. 동등한 입장에 있기에 속내를 보이는 것을 허락한 동생 앞에서도 그는 끝내 무너지는 것을 완전히 드러내지 않았다. 그 이유가 쵸로마츠이고, 눈앞의 상대가 카라마츠여서 그랬다.
나도 형님 곁에 줄곧 있었어. 쵸로마츠보다도 먼저.
더는 참지 못하고 그의 품안에 와르르 무너져 덩어리를 울컥 토해낸 날이 있었다. 그에게 어울리는 붉은색으로 뒤덮인 노을 진 텅 빈 교실에서, 카라마츠는 오소마츠를 붙잡고 매달렸다. 눈물까지 섧게 흘렸던 것 같았다. 태어난 것도 형님의 다음으로, 그것도 쵸로마츠보다 먼저 태어나 형님의 곁에 있었는데도 정해진 방정식처럼 쵸로마츠가 그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오소마츠의 풍경 속에는 반드시 쵸로마츠가 있었다. 아무리 형제들 사이서 자신이 오소마츠와 대등하고 특별한 관계를 구축한다고 한들 카라마츠는 쵸로마츠의 자리까지 차지할 수 없었다. 형님. 쵸로마츠는 아무것도 몰라. 그러니까 내가, …미안. 그 날 카라마츠는 오소마츠를 안았다. 온통 붉은 색으로 칠해진 풍경에 카라마츠도 제 푸른빛을 전부 버리고 그곳에 녹아들면서 하나가 되었다. 그럼에도 손에 넣을 수 없는, 완전히 품에 들어오지 않는 붉은색이 야속했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쵸로마츠는 오소마츠의 풍경 속에서 사라진다. 무너져 내리는 세계를 버려두고, 쵸로마츠는 끝끝내 아무것도 알아채지 못하고 멀리 가버린다. 그것을 시작으로 남겨진 동생들도 하나 둘씩 떠날 것이다. 더는 오소마츠 혼자의 힘으로 지속될 수 없었다.
“카라마츠.”
오소마츠는 또 한 번 카라마츠의 이름을 불렀다. 평소처럼 부른 것인데도 카라마츠는 그 목소리를 뿌리치고 싶었다.
“너는 여기에 있을 거지?”
「너는 변하지 않아도 괜찮아, 카라마츠. 주변의 감각들이 미쳐 돌아가면 그만이거든.」
그러나 현실은 매순간 바뀌었다. 모든 것이 숨 가쁘게 변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오소마츠의 마음과 카라마츠의 마음뿐이다. 그 변치 않음에 갑작스런 피로감이 몰려들었다. 카라마츠는 오소마츠가 끝까지 쵸로마츠를 좋아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쵸로마츠가 취직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젠 괜찮지 않을까 하는 혹함이 들었지만, 결국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소마츠는 앞으로도 계속 바뀌지 않을 것이다. 형제들이 다 떠나고 혼자가 된다고 해도 말이다. 그런데도 자신을 붙잡는 이유는 뭘까. 있잖아, 오소마츠. 내가 변하지 않는 것에, 여기에 있는 것에 대체 무슨 이유가 있는 거야. 오소마츠를 안으며 어떤 이유에서든 그의 곁에 머물 수만 있다면 그걸로 만족하자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그러나 그 설득도 유효 기간을 넘어섰다. 유예는 이제 끝나버렸다.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은 달리고 있었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 괴롭게 헐떡이고, 땀이 비 오듯 쏟아져 온 몸을 적셔가도 멈추지 않고 뜀박질을 재촉했다. 그러는 동안 풍경은 변했다. 정신없이 흘러가는 풍경. 매일 질리도록 봐온 풍경들이 빠르게 스쳐가고 조금씩 낯선 풍경들이 눈에 들어왔다. 새로운 풍경을 보기 위해서는 그보다 배로 뛰어야 한다. 새로운 풍경에는 뭐가 있을까. 다만 붉은빛은 없겠지 하는 확신만이 있을 뿐이다.
간신히 발을 세운 곳은 새까만 바다였다. 아무 빛도 없이 철썩이는 파도가 카라마츠를 냉랭히 맞이했다. 철썩이는 파도 소리와 헐떡이는 숨소리만이 카라마츠의 청각을 어지러이 흩트렸다. 소금기로 눈이 따가웠다. 땀과 눈물로 얼룩진 눈으로 카라마츠는 오소마츠가 없는 낯선 풍경을 마주했다. 유예를 마치고 드디어 돌아온 현실은 온기 없이 그저 차가웠다.
여기까지 와서도 쵸로마츠를 포기하지 못하는 형과 그런 형을 지켜보면서 마찬가지로 포기하지 않는 내가 있는 풍경을 계속 유지시키는 것도, 이젠 한계였다. 이룰 수 없는 사랑을 포기할 수도, 끌어안을 자신도 없기에 차라리 도망치는 것을 택했다.
* * *
카라마츠는 거리를 배회했다. 그 날과 다르게 뜀박질이 아닌 오래된 피로로 젖은 발걸음을 터덜터덜 땅에 내딛으면서. 눈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많이 내려와 카라마츠의 어깨와 머리에 쌓여져갔다. 그래도 카라마츠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천천히 스쳐가는 풍경들을 두고 카라마츠는 방황했다.
오소마츠의 곁을 떠나 현실로 온 카라마츠는 간신히 번듯한 직장까지 가졌음에도 여전히 방황을 이어갔다. 차가운 현실 속에서 카라마츠는 이리저리 흔들렸다. 자신을 곁에 붙들어줄 존재의 상실이 그를 위태롭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 위태로움은 본인이 자처한 것이다. 카라마츠는 그것을 오소마츠를 떠난 대가로 받아들였다. 카라마츠의 앞에는 저 멀리 떠나 다시 돌아오지 않을 쵸로마츠가 있었고, 뒤에는 여전히 집에서 붉은 파카를 입고 있을 오소마츠가 있었다. 카라마츠는 그런 둘 사이에서 오도가도 못 한 존재가 되었다. 어느 쪽으로도 가지 못한 채 어중간하게 방황하는 카라마츠는 또 다른 유예기간은 선고 받은 상태였다. 기약 없을 유예였다.
만일 오소마츠의 곁에 계속 남았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아니면 반대로 그 날 밤처럼 오소마츠를 억지로라도 끌고 나왔더라면 조금은 나은 결말로 다다르지 않았을까. 끈질긴 미련이 자꾸만 카라마츠를 실험해들었다. 언젠가 오소마츠가 자신을 받아주지 않았을까. 쵸로마츠를 포기하고, 그 자리에 자신을 받아들여줬을까. 답은 오래 전부터 정해져있었다. 오소마츠는 끝까지 그 모습 그대로를 유지할 것이다. 무너진 세계의 폐허에 홀로 남아서, 자신만이라도 변하지 않고자 부질없는 노력을 할 것이다. 그리고 억지로 그 세계에서 데리고 나와도 매한가지였다. 그럼에도 그 모습이 사랑스럽게 여겨지는 건, 여전히 제 안에 그를 향한 감정이 후회로 변질되어 남아있다는 증거였다.
「걸을 때에는 발끝을 밖으로 내밀고, 네가 누군지 잊어서는 안 된다.」
오소마츠는 기다리고 있을까. 기다린다면 누구를 기다리고 있을까. 쵸로마츠일까, 아니면 자신일까.
누구를 기다린들 그의 곁으로 돌아올 이는 아무도 없었다. 자신도, 쵸로마츠도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알고 보면 외로움에 가장 약한 오소마츠를 저리 만든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카라마츠 자신이었다.
끝내 카라마츠는 걸음을 멈추고 자리에 쭈그려 앉아 몸을 웅크려 고개를 파묻었다. 더는 걷기 힘들었다. 적응할 틈도 없이 변해하는 풍경과, 더 이상 오소마츠는 없는데도 자꾸만 그 흔적을 찾아내려는 자신이 지긋지긋했다. 그런데도 돌아갈 수 없어 결국 카라마츠는 달리는 것도, 걷는 것도 포기한 채로 주저앉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제대로 좋아한다고 말해 줄걸. 쵸로마츠도, 오소마츠도, 자신조차도 신경 쓰지 말고 마음껏 사랑한다고 외쳐줄 걸 그랬다.
후회로 점철된 그의 등 위로 위로처럼 눈이 소복이 쌓여갔지만, 돌아갈 곳도, 가야할 곳도 잃은 이는 오도 가도 못한 채로 그 자리에 못 박혀 주저앉을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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