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이 없는 거리> 패러디(애니메이션 기준). 원작 후반부 스포일러 주의.
안녕하세요. 병실 앞에서 우연히 마주친 사내가 나를 보곤 허리 숙여 인사한 뒤 그리 말했다. 아마 셋째였던가, 넷째였던가 싶을 거다. 쌍둥이라는 말이 허울이 아닌지라 그들의 얼굴은 육안으로 판별하기 쉬운 것이 못되었다. 각자의 개성적인 분위기라던가, 잘 비교해보면 서서히 드러나는 외형적 차이점이 있다고 하지만 불쑥 얼굴을 보게 되면 역시나 헷갈릴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런 여섯 쌍둥이 내에서도 유일하게 구분 되는 얼굴이 하나 있었는데, 스스로 생각해도 어째서 그 얼굴 하나는 헛갈리지 않고 딱 집어낼 수 있는지 그저 신기했다.
병실 앞에서의 간단한 인사를 마친 뒤(시간을 두고 좀 더 자세히 관찰하니 마주친 상대가 셋째임을 뒤늦게 알아봤다.)쌍둥이 중 셋째는 조금 있으면 동생이 올 테니 그 때까지 병실을 부탁한다면서 나를 지나친 뒤 병원 밖으로 나갔다. 급한 발걸음과 입고 있는 빛바랜 회색 정장으로 나는 그가 점심시간을 틈타 회사에서 살짝 빠져나왔음을 쉽게 유추해냈다. 자주 이런 식으로 자리를 비워 상사에게 찍힌 통에 여러모로 힘들 텐데도 그는 꿋꿋이 시간을 짬짬이 내어 병원에 부지런히 출석했다.
그래, 어렸을 적에 그 둘이 가장 많이 붙어 다녔지.
드르륵. 병실 문을 열었다. 병실 안은 제법 말끔했다. 남자 형제 다섯을 중심으로 돌아가면서 관리하는 것치고는 충분히 깔끔한 것이 맞았다. 나는 익숙하게 병실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고, 침대 옆에 배치되어 있는 의자를 끌어다가 앉았다. 일련의 행동들에서는 익숙함이 깊이 서려있었다. 나 또한 그들 다음으로 이 병실의 문지방을 닳도록 밟으며 드나든 사람이니 마땅했다. 그래서 벌써 한참 전부터 자신의 또 다른 안방마냥 편해지고 눈에 익은 공간이라, 변화는 금방 찾아냈다. 침대 옆쪽에 오색 종이가 매달린 기다란 대나무가 장식되어 있었다. 아, 그래. 조금 있으면 칠석이로군. 그저께 쌍둥이 막내가 왠 종이 쪼가리를 주며 나에게도 칠석 소원을 쓰라며 권유한 적이 있었다. 몇 년 째 의식불명인 환자의 병실에 놔둬도 당사자는 못 보는 것을 굳이 여기에 장식할 필요가 있을까 싶은 한심함에 혀를 차면서도, 끌끌거리는 소리에 기껏 동생들이 신경 써서 준비한 것을 보지 못하는 녀석에 대한 핀잔도 섞여들고 말았다. 이런 행사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며 좋아할 당사자가 못 보면 쓰나. 자리에서 일어나 대나무에 매달린 쪽지를 살폈다. 쪽지에 세로로 적힌 글씨체는 제각각이나 칠석에 빈 소원의 내용은 모두가 유치하게 같았다.
[오소마츠 군. 빨리 눈을 뜨길 바란단다. -토고 아저씨가.]
그리고 나도 그 유치한 쪽지 중 하나였다.
[토고오소]기다림의 유예
W. ENA.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TV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각양각색의 이유를 붙여 비극성이나 정당성을 부여하려고 하지만, 진짜 살인자인 내 시각에서 봤을 때는 쓸 때 없이 구질구질한 참견 밖에 되지 않았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은 단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것이 내 나름의 지론이었다. 굳이 이유를 붙이자면, 일단 나 같은 경우에는 필요성을 댈 수 있다. 강도짓을 천직으로 삼고 있다 보니 일을 하다보면 사람을 죽일 필요가 생기고, 그 필요에 따라 사람을 죽이게 된다. 지극히 이기적이고 무정한 이유였다. 허나 동시에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타당한 것이라 나 나름대로는 그것에 만족했다. 쾌락 살인 같은 것도 영 내키지 않아했다. 자고로 강도라는 것은 흔적을 남기지 않고 원하는 것만 털어가야 하는 프로페셔널한 일이다. 살인은 내 정체가 탄로 날 위험 요소를 제거하기 위해 쓰는 극단적 수단이었다. 오히려 살인을 하면 세간의 이목이 주목되니 별로 선호하지 않는 방식이다. 살인에 대한 양심적 거부감이 아닌, 자신의 안위가 침범될지도 모른다는 신중함이 살인의 적정선이 되어줬다. 최대한 선량하게 보이도록, 상대방이 자신을 믿도록, 그렇게 해서 자신에게 대해 바보같이 방심하도록. 가식의 가면을 쓸 때마다 좌우명처럼 되뇌던 말이다. 그래서 나 자신을 숨기는 일에 대해서는 가장 자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녔다.
그래, 아무도 나라는 존재를 알아채지 못했다.
그런 자만심으로 충족되어 있던 내 앞에 네가 나타났다.
열 살의 너는 말 그대로 작고 어렸다. 당시의 나는 일개 하숙인이었고, 너는 하숙집 주인의 첫째 아이이자 여섯 쌍둥이들의 중심이 되는 장남이었다. 붉은색이 무척이나 잘 어울렸던 너는 자신과 똑같은 얼굴의 동생들을 대동하고 이곳저곳을 쏘다니며 말썽을 부리고 다녔다. 정말 열 살이라는 나이가 이렇게나 잘 어울리는 아이도 의외로 흔치 않을 것이다. 너는 똑같은 얼굴의 여섯 쌍둥이들 중에서도 유난히 눈에 띄었고, 누구보다 환하게 빛나는 존재였다. 그 집안에서 알게 모르게 너는 중심이 되었다. 그런 너는 그야말로 태양 같았고, 나는 불시에 태양계를 침범한 유성, 아니 운석이었다.
나는 상대가 누구든 간에, 아이든 어른이든 가리지 않고 모두를 속였다는 자신을 가졌다. 그러나 그런 자신은 네 앞에 설 때면 제 기세를 추스르지 못했다. 어째서일까. 처음에는 그것이 막연한 것으로 다가왔기에 나는 착각으로 터부시했다. 그 때, 나는 마츠노 가를 타깃으로 삼으면서도 동시에 은신처이자 임시 거점지로 삼아 간간히 다른 곳에서 강도짓을 일삼으려 했다. 그러나 내 계획은 얼마 안 가 수포로 돌아갔다. 먹잇감과 날짜를 정해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찾아가면 그곳에는 사람들이 바글바글 들끓어 허탕을 치기 일쑤였다. 수확도 없이 헛걸음만 했다는 것에 화를 이기지 못하고 인적 드문 곳에서 길고양이나 쓰레기통에게 발길질을 하며 애먼 화풀이만 했다. 이번 작업은 어지간히 운이 없구나 싶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몇 번씩 그런 비슷한 일을 몇 번 반복하고 나니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타깃으로 지정해놓은 장소에는, 언제나 네가 있었다.
인파의 틈바구니에 끼어 언뜻 보이는 얼굴은, 분명 너의 얼굴이었다. 다른 다섯의 똑같은 얼굴이 있음에도 너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네 얼굴만큼은 어디에 있어도 확실히 구분해냈으니까.
그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무척이나 오랜만에 등줄기로 식은땀이 흐르면서 소름이 돋는 섬뜩한 감각을 겪었다.
자,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물증은 없으나 심증은 확실했다. 내가 유일하게 신뢰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내 본능적 감각이었다. 내 본능은 너를 위험 요소로 판정 지었다. 내가 너를 죽일 이유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어느 겨울, 나는 너에게 미끼를 던졌고 너는 내 기대에 부응하여 그 미끼를 물었다. 그것으로 물증도 확실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너는 내가 범죄자라는 것을 상정하고 내 행동 경로를 막아내려 애썼다. 그러나 역시 어린애는 어린애인지, 머리로는 내가 범죄자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가슴으로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걸 거부했다. 어린애는 이런 점에서 순진하고 허술했다. 나는 렌터카 조수석에 너를 앉혀놓고, 사실을 고백했다. 처음으로 진짜 내 모습을 내 의지로 기꺼이 상대에게 드러낸 것이다. 그것은 의외로 짜릿했다. 내가 살인강도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밖에 없게 되자, 충격과 혼란으로 크게 일그러진 너의 얼굴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나는 그 얼굴에서 처음으로 쾌감을 체험했다. 흔들리는 눈동자와 파르르 떨리는 입술, 스쳐가는 가로등빛으로 언뜻 보이는 새하얗게 질린 안색까지, 모든 게 완벽했다. 아아. 나는 그 얼굴을 보자 그간 네가 나에게 둔 모든 훼방을 용서해주기로 했다. 그 대가로 너의 망가진 얼굴을 보게 되었다면 충분히 값싼 대가가 아니었나. 그리고 그 때의 나는 필요로 의한 이유에 다른 작은 이유를 하나 더 더하면서, 쾌락살인마들에게 공감했다.
인적이 드문 강변에 차를 세우자, 눈이 내렸다. 이제 남은 건 너를 태운 차를 강에 빠뜨리는 일이었다. 나는 처음으로 승패를 인정하며 자동차 페달을 조작해 차가 저절로 강으로 빠져들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나는 강 밖에서 너의 마지막이 될 모습을 잠시 지켜봐줬다. 토고! 너의 목소리가 수면에 울렸고, 그 위에 눈이 쌓여갔다. 그 뒤에도 너는 나에게 무언가를 더 말했지만 강물이 거침없이 말들을 잡아 삼켰다. 너의 목소리가, 네가 물에 잠겨갔다.
자동차가 완전히 강에 잠기자 나는 발걸음을 돌렸다. 운이 좋아 구조되면 살 수도 있었고, 자신의 방식치고는 솔직히 좀 허술하다 싶었지만 그 당시의 나는 아무래도 좋다는 심정이었다. 네가 정말로 살아남으면, 그것도 좋지 않을까 했다. 그러면 너를 또 한 번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생기니까.
나는 혹시나 올지 모를 두 번째 기회를 내심 기대하며 검은 수면 위로 작별 인사를 전했다.
“잘 있으라고, 오소마츠 군.”
그리고 너는 살아남아, 10년이 넘도록 눈을 뜨지 못하고 있다.
후우. 답지 않게 옛날 일들을 많이 떠올렸다. 이것도 다 나이가 들었다는 증거겠지. 해가 지날수록 몸은 서서히 둔해졌지만 노련한 연륜만큼 굳건히 채워나갔다. 여전히 강도짓을 하고 다니지만, 수시로 온 곳을 들쑤시고 다녔던 치기 어린 젊은 시절과는 달리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으면 굳이 나서지 않게 되었다. 이것도 나이를 먹어 검소해졌다는 증거가 되겠지.
그리고 너는 나 이상으로 하루가 다르게 변해갔다. 열 살의 너는 이제 스무 살의 청년이 되었다. 최소한의 영양분을 링거액으로 섭취한 통에 네 몸은 뼈가 드러날 만큼 말랐고, 또 그러면서도 착실히 키를 키워나갔고, 외모 또한 젖살이 빠져나가고 선이 굵어지면서 성인 남성의 태가 확연히 드러났다. 하지만 여전히 잠들어서 그런지, 같은 얼굴의 형제들과 비교했을 때 너는 그들보다 조금 앳되어 보였다.
찬찬히 너의 얼굴을 살피던 중, 너의 턱 선에 다다랐을 때 듬성듬성 자라난 수염을 발견했다. 동생들이 정기적으로 면도를 해주고 있지만 이번에는 바빠서 제때 해주지 못한 것으로 보였다.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주머니를 뒤져 날붙이를 꺼냈다. 큼직한데다 정성스레 날이 잘 세워진 그것은 내가 ‘작업’할 때 애용하는 면도칼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손에 쥔 면도날을 너의 턱으로 향하게 했다. 병실 밖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당장에 알아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잠든 너의 얼굴을 지극히 평온해 보였다. 내 기억 속에 마지막으로 남은 너의 얼굴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일렁임 하나 없는 수면을 엿보는 것 같았다. 너는 내가 칼을 겨누는 이 순간까지도, 눈을 뜨지 않고 있다. 순간 충동이 꿈틀거렸다. 이렇게 기다리는 것도 이젠 질린다고, 눈을 떠서 자신을 범인으로 지목하기 전에 수를 쓰는 것이 좋지 않겠냐는 몸부림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모든 걸 끝낼 수 있었다. 기약 없는 나의 기다림도, 너의 죽음에 대한 유예도. 나는 칼끝으로 천천히 턱을 지나 목선을 따라 그렸다. 마른 너의 목선은 너무도 무방비하게 여렸다. 목선을 지나, 쇄골에 빠져, 왼쪽 가슴에 다다를 때까지도 너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 또한, 너를 죽이지 않고 있다.
어째서일까. 그 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너를 죽이지 못하고 있다. 네가 무엇이기에. 그 당시의 너는 한낱 사고뭉치 꼬맹이였고, 지금은 산송장이나 매한가지 아닌가. 어느 쪽의 너든 마음만 먹으면 힘쓰지 않고도 쉽게 죽일 수 있는데도, 어째서.
나는 한참 동안 망연히 서서 잠든 너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면도칼을 도로 주머니에 넣고는 너의 얼굴을 쓰다듬어봤다. 처음으로 잠든 너를 만져보는 거였다. 그 시절, 가식의 가면을 덮어쓰고 있을 때 나는 너의 머리가 얼굴을 쓰다듬어준 적이 있었고 너는 그 쓰다듬을 부끄러워하면서도 기쁘게 받아들여줬다. 어린 너는 그런 접촉에 익숙지 않아했다. 장남인 탓에 부모님의 사랑을 동생들에게 양보해버려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아도 누군가의 손길을 가장 그리워했다.
그래. 죽인다면 눈을 뜬 너를, 살아있는 너를 죽이는 편이 낫겠지. 죽이기 전에 너와 마지막으로 이야기 한 번 나누고 싶어지기도 했다. 그것이 너를 위해 베풀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일 자비니까 말이다.
나는 천천히 손을 거둔 뒤 또 한 번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이쯤에서 돌아가는 편이 나았다.
“내일 보자구나, 오소마츠 군.”
네가 눈을 뜨면 이 기다림의 정체도 알게 될 것이다.
나는 또 한 번의 유예 기간을 두고서 잠든 너와의 재회를 약속하고 병실에서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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