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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되이 나는 너의 얼굴을 보려 수많은 생을 헤매었다
거듭 태어나 너를 사랑하는 일은 괴로웠다
-조용미, 「헛되이 나는」 中
커다란 플라타너스 나무에서 매미 우는 소리가 났다. 맴, 맴, 맴. 박자에 맞춰 반복해서 우는 울음소리는 고막을 찢어버릴 기세로 시끄럽게 울어댔지만, 계속 귀를 기울이다보면 흔히 들을 수 있는 울음소리에 처절함이 뒤섞여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7년 동안 땅속에서 살다가 겨우 밖으로 나왔으나 몇 달을 살지 못하고, 그 남은 생마저 짝짓기를 위해 전부 투자해야하니 한이 생기지 않을 수가 있을까. 그나마 짝짓기에 성공해서 자신의 흔적을 남길 수 있으면 다행이지, 그렇지 못하고 버림받은 매미는 헛되이 태어나 아무 의미 없이 죽어버리고 만다. 고작 하찮은 매미의 삶에 무슨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는가 싶지만, 몇 백 년씩이나 살다보면 이런 하릴없는 상념에 자주 빠져들고 만다. 어쩌면 조금은 매미의 삶이 부러운지도 모른다. 태어난 의미를 달성하지 못하고 허망하게 죽어버린 매미의 삶과 죽지 못해 외로이 살아가는 불로장생의 삶 중에서 어느 쪽이 더 나은 삶인가.
승자는, 에어컨이 빵빵하게 틀어진 도서관에서 책을 읽으며 매미 울음소리에 불평하는 이 녀석임이 확실하다.
“또 울어대네. 이 주변에는 나무가 많아서 매미들이 몰려온단 말이야.”
“흐음. 그럼 얼른 나가면 되잖아. 심심하다고.”
“그러게 여기까지 왜 쫓아온 거야. 나 참.”
녀석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어버리고는 다시 손을 움직였다. 눈대중으로 살펴본 진도를 보면 아무래도 두 시간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다. 체엣. 투정어린 혀를 차면서 책상에 엎드려 고개만 빠끔 들었다. 사각사각. 맴맴. 사각사각. 종이 위에 노니는 샤프심 소리와 매미 소리가 제법 하모니를 이루어냈다. 아, 좋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 조용한 도서관의 분위기, 밖에서 실컷 목청을 뽑고 있는 매미 소리와 사각거리는 펜 소리, 마르지만 탄탄한 손가락, 꾹 다문 입, 성실함이 깃든 눈동자. 그리고 공부에 집중하다가도 이따금 슬쩍 나를 훔쳐보는 너. 좋다. 전부 다 좋았다.
창문 너머를 봤다. 오늘도 화창한 날씨였다. 청명한 하늘, 작열하는 태양, 푹푹 찌는 더위. 한여름이었다.
방학인데도 학교 도서관을 드나들 수 있는 건 전적으로 이 녀석이 평소 교사들에게서 얻어낸 신임 덕택이었다. 학생회 소속으로 교칙을 지켜 성실히 다니면서도 크게 눈에 띄는 행동을 취하지 않았기에 오히려 그런 점이 건실하다는 어필을 준 모양이다. 입시 준비라는 이유에서 녀석은 도서관 사서 교사에게 방학 때도 도서관을 사용하게 해달라는 부탁을 했고, 사서 교사는 도서관 일을 도와주는 조건으로 녀석의 손바닥 위에 도서관 열쇠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나는 녀석과의 친분을 이용해 도서관 문턱을 밟고 있다. 도서관만큼이나 시원한 장소도 드물기 때문이었다.
“고작 고등학교 도서관에 뭔 책이 이렇게 많은 거야. 게다가 죄다 낡아 빠진 것들뿐이니.”
“고문 선생님이 고서들을 좋아하시잖아. 요즘 책들을 읽기 전에 옛날 책부터 먼저 읽어야 한다고 수업 시간마다 맨날 말씀 하시는 거 못 들었냐?”
“야, 그 쌤 목소리가 워낙에 자장가 같아서야 말이지. 지금껏 들은 목소리 중에서 그만큼 잠이 잘 오는 목소리는 처음 듣는다고.”
“그 수업 때마다 맨날 잔 게 자랑이냐. 이거 좀 저쪽으로 옮겨줘.”
녀석에게서 받은 책들을 받으니 준비는 했어도 다리가 잠깐 휘청거렸다. 우와, 이걸 아무렇지도 않게 들었단 말이야? 마른 체격에 비해 은근히 근육이 있는 건지 녀석은 성인들도 쉽게 들지 못하는 물건들을 무리 없이 드는 모습을 종종 보여줄 때가 있었다. 받은 책들을 적당한 곳에 내려두고 잠시 숨을 후우 내쉬었다. 이거 오늘 안에 끝낼 수 있을까. 방학을 이용해 책 정리를 하는 건 좋지만 너무 학생들만 부려먹는 감이 있다. 그걸 조건으로 도서관을 사용하고 있지만 기왕 할 거면 사서 교사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하지만 그녀는 한창 출산 휴가 중이었고, 다른 교사들도 휴가철이라 여행을 떠난지라 결국 고생해야 하는 건 남학생 둘 밖에 없었다. 너무하는구먼. 으그그. 가벼운 신음소리를 내어 허리를 펴고는 슬쩍 녀석을 살폈다. 잔뜩 찌푸린 얼굴이 척 봐도 심기가 불편하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었다. 저 녀석, 결벽증이 있으니까. 청소는 좋지만 먼지 쌓인 책들을 상대하는 건 좀 거북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고 보니, 그 녀석도 결벽증이 있었구나.
뭐, 그 당시에는 결벽증이라는 단어 자체가 없었으니 그것에 대해 마땅히 부를만한 이름이 없었지만.
요즘 나오는 책들은 코팅이 되어있어서 그런지 냄새가 잘 나지 않았다. 기껏해야 인쇄용 잉크 냄새가 전부일까. 그것도 먹물 냄새에 비하면 한참 뒤떨어진 것이었다. 게다가 시대가 발달하면서 종이책보다는 전자책을 더 선호하는 성향이 생겨 책은 점점 찬밥 신세가 되어갔다. 그렇다고 종이책이 아예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까슬까슬한 감촉과 깊은 먹물 냄새를 맡지 못한다는 건 좀 아쉬운 일이었다. 도서관에도 요즘 나오는 책들이 대다수였다. 처음 도서관을 찾았을 때, 조금은 책 냄새를 맡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들어서면서 가장 먼저 들이마신 건 방향제 냄새였다. 나는 아직도 그것을 기억하고 있는데, 이제는 시대가 변해 사라져가고 있다는 걸 발견할 때마다 휑한 기분이 든다. 사람만이 아닌 사물도 변해간다. 그것이 좋은 일인지 아닌지는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만이 알 수 있다. 나는, 아직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아, 빙수 먹고 싶다. 요전번에 새로운 가게가 생긴 걸 봤는데. 어차피 오늘은 공부가 아닌 책 정리만 할 예정이라 지루하게 기다리면서 시간을 낭비하지 않아도 되었다.(어차피 남은 게 시간이지만, 그래도 기껏 쓸 수 있는 걸 쓰지 않고 버리는 건 아깝지 않은가. 도서관 책상에 엎어져 쿨쿨 자는 것보다 빙수를 먹는 게 더 유익했다.) 얼른 끝내버리자. 그렇게 생각하고 몸을 틀었을 때, 뜻밖에 발견한 것은 일은 안하고 책만 읽고 있는 마른 등이었다.
뭐야, 설마 땡땡이?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정신없이 책에 빠져있는 모습을 보니 뒤에서 몰래 다가가 깜짝 놀라게 해주고 싶다는 장난끼가 돋아났다. 슬금슬금. 발꿈치를 들어 기척을 최대한 죽이고 걸어가 거리를 좁혔다. 순조롭게 녀석의 바로 뒤에 도착했다. 좋아, 이제 놀라게 해줄까?
아쉽게도, 내가 세운 원대한 계획은 그의 어깨 너머로 드러난 어느 그림으로 인해 무산되고 말았다.
상반신은 사나운 인상의 여인, 하반신은 물고기의 꼬리.
인어의 삽화였다.
“우왓! 뭐, 뭐야!? 왜 말도 없이 뒤에 서있던 거야?”
“어? …아니~ 당연히 깜짝 놀라게 해주려고 그랬지. 헤헤.”
“장난치지 말고 하던 일이나 마저 해.”
탁. 책을 덮는 소리가 났다. 척 봐도 낡은 티가 확 드러나는 그것은 고문 선생이 학생들을 위해 도서관에 반입한 책들 중 하나임이 분명했다. 책은 다시 다른 책들과 뒤섞여졌다. 낡기는 했지만 고문 선생이 직접 구입해서 넣은 것인지라 따로 처분에 대한 허가가 필요했다. 오랜만에 봤다. 삽화를 본 감상은 그랬다. 인어를 묘사한 삽화의 대부분은 인어에 대해 알려진 소수의 정보들에 그린 이의 상상력이 가미되어 그려진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제대로 된 인어를 그린 그림은 하나도 없었다. 본인도 인어를 본 적이 하도 오래되어서 구체적으로 떠오르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지금 본 삽화와 자신의 기억 속 인어와의 공통점은 거의 없었다. 인어의 그림이야 인간들이 그리는 것이니 제각각인 게 당연했다. 어떤 이는 미지의 존재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으로, 어떤 이는 신비의 존재에 대한 동경으로 최대한 원본과 가깝게 묘사하고자 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성에 차는 그림은 없었다. 인어에 대한 악감정은 이미 마모되고 퇴색되어 훨씬 전에 사라진지 오래여서 아무 생각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런 그림들을 볼 때마다 석연찮은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면, 자신이 먹은 인어는 어떤 생김새였을까 하는 철없는 호기심이었다.
“인어의 고기를 먹은 자는 불로장생의 삶을 얻게 된다.”
맴, 맴, 맴.
매미가 울었다. 귀를 쨍하니 울리는 소리인데도, 그 말은 참 귀에 잘 들어왔다. 잠깐, 현기증이 일었다. 아, 이런 기분 되게 오랜만인데. 그래도 내색하기 싫어 두 눈을 질끈 감고 다시 뜨니 다행히도 멀쩡해졌다. 녀석은 군더더기 없는 몸짓으로 책꽂이에 책들을 순번대로 꽂아 넣고 있었다. 자, 너도 도와. 일을 하다말고 녀석이 들고 있던 책 더미를 나에게 넘겼다. 제대로 꽂아서 넣어. 어. 나는 녀석이 하던 일을 마저 이어서 책들을 책꽂이에 집어넣었고, 녀석은 새로운 책 더미를 챙겨서 바로 옆 책꽂이를 채워나갔다.
“의외네. 그런 걸 믿는 타입?”
“믿긴 뭘 믿어. 그런 미신 따위. 그냥, 생각나서 말해본거야.”
“그럼 아까 전에 그건 뭔데?”
어느 틈엔가 서로의 책꽂이가 채워져 갔다. 깔끔하게 채워진 책꽂이는 보는 것만으로도 뿌듯했다.
“그냥, 나도 모르게 손이 갔어.”
아, 이거. 이 기분은,
내가 먹은 인어는 과연 어떻게 생겼을까 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에서 생기는 기분, 이지 않을까. 내가 먹은 인어는 어떻게 생겼을까. 너는 왜 그 책에 손이 갔을까. 봐, 비슷하지 않아?
그런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해가 기울어지면서 햇빛이 도서관 창문을 통해 슬그머니 발을 들였다. 햇볕 내음이 마치 언젠가 맡은 적 있던 책 냄새와 흡사했다.
결국 그 날 빙수 가게에 가지 못했다.
녀석과 알고 지낸지 햇수로 딱 3년째에 접어들었다. 1학년 때 같은 반이 된 인연으로 3학년까지 이렇게 지내고 있으니 당연한 이어짐이었다. 1학년 이후로 같은 반이 된 적은 없지만 그 후로도 수시로 서로의 반에 드나들면서 어울려 다녔기에 다른 녀석들도 우리가 절친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너무 붙어 다녀서 징그럽게 보인다는 말까지 들었으니 다한 거지 뭐. 3년이라는 유효기간을 두고서 우리는 티격태격 하면서도 서로의 옆 자리를 지켜나갔고, 친구라는 관계를 잘 지켜나가고 있었다.
“어렸을 적에 할머니가 인어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셨어.”
꼼꼼히 책을 훑어나가는 손가락이 날카롭다. 막히는 부분이 생겨 참고서가 필요해졌다. 이미 보고 있는 참고서도 있지만 거기에는 찾고자 하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지 않아 다른 참고서가 필요했다. 어차피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있는데 이럴 때 톡톡히 덕을 봐야지 않은가. 녀석은 적당한 것을 한 권 빼어들어 파르륵 펼쳐서 읽어 내려갔다.
“그래서 알고 있는 것뿐이야. 믿지는 않았어. 세상에 인어 같은 게 어디 있다고.”
“인어의 고기를 먹은 사람도?”
“당연하지. 인어도 없는데 그걸 먹은 사람이 있다는 게 말이 되냐.”
흐음. 녀석의 말을 듣고도 딱히 감정 상하는 건 없었다. 시대가 변하면서 점점 인어의 존재에 대해 믿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갔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인어의 존재가 없다는 것이 이미 기정사실화 되고 말았다. 그리고 인어의 고기를 먹고 불로장생을 손에 넣은 자의 존재 또한, 한낱 전설 중 하나로 치부된 지 오래였다. 옛날에는 말하면 믿어주는 사람이 많았지만, 요즘에 그런 소리를 떠벌리고 다니면 미친 놈 소리 듣기 딱 좋다. 내 입장에서는 그 편이 훨씬 편했다. 괜히 인어의 존재를 믿는 사람한테 의심 받아 추궁 당하는 것보다 낫지 않은가.
그래도 이 녀석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아쉬운 감이 없잖게 있다.
“아, 찾았다. 이걸 보면 되겠어.”
“있잖아.”
“또 뭔데.”
“그래도 만약에 인어가 있고, 인어의 고기가 정말로 불로장생의 묘약이라면, 넌 먹을 거야?”
그래서 나도 모르게 아쉬움에 기대어 그런 말을 꺼냈나보다.
너는 참고서에 신경 쓰던 눈길을 돌려 옆에 쭈그려 앉아있던 나에게 맞췄다. 각진 안경의 렌즈 너머로 보이는 너의 눈빛은 참 서늘했다. 여름인데도 너의 눈은 저 플라타너스의 녹음을 연상시켰고, 조금 물 빠진 쑥빛 기모노 빛깔을 떠올리게 했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했던가, 그래서인지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시간이 지나 기억 속 인상이 차차 흐려져 가도 그 사람의 눈빛만큼은 기억에 남고 만다. 마지막으로 본 눈빛이 특히나 선명히 남아 곤란할 지경이었다. 물기가 어른거리는 늙은 눈동자로 나를 붙잡던 것이 떠오른다. 인어의 고기를 먹고 싶다고 매달리는 애절함이 기억의 안개 속에서 여전히 배회하고 있다. 간혹, 나는 그가 인어의 고기를 먹는 것이 두려워서가 아닌 그가 죽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도망친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너는 몇 분 동안이나 나를 그렇게 내려다보다가 펼쳤던 참고서를 덮고는 담담히 말했다.
“별로. 먹고 싶지 않아. 늙지도 죽지도 않고 살아가야 한다니. 왠지 기분 나빠.”
“…그렇네. 그렇지.”
그래. 그렇지. 너는 다르구나. 나는 그대로고, 너는 다르구나.
인어의 고기를 먹고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자각한 순간에 가장 먼저 깨달은 사실 중 하나가 오늘은 조금 색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여전히, 오늘도 플라타너스의 매미는 울고 있었다. 처절하게, 처연히.
폐관 시간까지 죽치고 있다 보니 벌서 밖은 시뻘건 색으로 물들어져 있었다. 너는 붉은 색이 잘 어울려. 그래서 노을 속에 있는 네가 좋아. 누군가에게 애정 섞인 칭찬을 들었던 게 새삼 떠올랐다. 그 말에 뭐라 답했더라. 기억이 나지 않았다. 너무 많은 기억들이 쌓여버린 탓에 찾고자 하는 기억을 떠올리는 데에는 한참의 시간이 필요했다.
앞서가는 너는 포켓북으로 만들어진 단어집을 정독하고 있었다. 3학년이 되어 본격적인 입시 준비를 앞두고서 너는 벌써부터 공부에 매진했다. 솔직히 이 좋은 시기에 왜 답답하게 공부만 하고 있어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현대에 들어서면서 가장 이해되지 않은 것들 중 하나였다. 참고로 다른 하나는 스마트폰 사용 방법이었다.)녀석은 청춘을 입시에 기꺼이 투자하고 있었다. 도쿄에 있는 대학에 간다고 했지. 명문대인데다 경쟁률도 높아서 어중간하게 공부해서는 절대로 들어갈 수 없는 곳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방학 전에 한 입시 관련 상담에서 녀석은 담임으로부터 지금 성적으로는 턱걸이로 들어갈 수 있는지조차도 장담하기 어렵다는 판정을 받았다. 그래서 녀석은 더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 그 외에 녀석이 할 수 있는 다른 수단도 없었다.
“그렇게 공부해서 정말로 도쿄에 갈 수 있는 거야?”
“초 치는 소리 좀 하지 마. 그러는 너야말로 정말 대학에 안 갈 생각이야?”
“글쎄. 아마 그러지 않을까.”
느긋한 내 대답에 녀석은 마음에 안 든다는 의미로 미간을 구겼다. 그치만 공부하는 것은 죽는 것보다 싫고(어차피 죽은 적이 없을뿐더러 죽어도 죽지 않지만.), 무엇보다 여기서 더 대학을 다녔다가는 분명 안 좋은 소리를 들을 게 확실하니까. 몇 번 시도를 했지만 역시 고등학생까지가 한계구나 싶었다. 걷다 보니 어느 새 우리 둘 다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강바람이 불어와 여름의 열기를 어느 정도 몰아내줬다. 그 사이에 섞인 한 가닥의 바람결이, 가을 냄새를 품고 있었다. 여름이 끝나가고 있었다. 이제 이곳에 있을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우리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흘러가는 강과 저무는 석양이 고즈넉하게 흐르고 있었다. 아, 그래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구나. 몇 번을 봐도 석양은 아름다웠고, 흘러가는 강은 유려했고, 매년 돌아오는 여름은 뜨겁고 황금빛 태양과 싱그러운 녹음으로 채워져 있다. 그것들이 너무 고마웠다. 변하는 것도, 변하지 않은 것도, 전부 다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있잖아.”
걸음을 멈춘 네가 말을 걸었다. 너는 나에게 등을 보인채로 서서 고개를 푹 수그린 채로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옷깃 사이로 목덜미가 보였다. 너에게도 책 냄새가 날까. 너를 만나고 그것이 가장 신경 쓰이고 궁금했다.
“너, 졸업 후에 딱히 세워둔 계획 같은 거 없잖아.”
어라, 이거랑 비슷한 일 분명 전에도 있지 않았었나.
“만약에, 내가 도쿄에 있는 대학에 붙으면… 그 때는, 나랑 같이 가지 않을래?”
인어의 고기를 먹을 거야.
변하지 않는 것이, 있었다.
현기증이 일었다. 석양빛이 너무 강렬해서 그런지, 더위를 먹어서 그런지, 얼굴과 귀는 물론이고 여기서도 훤히 보일만큼 시뻘개 진 목덜미 때문인지 몰라도, 직시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그런 와중에도, 고개를 푹 수그린 채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앳된 네가, 너무도, 눈부셔서.
너의 얼굴을 마주보고, 너의 목소리를 듣고, 너의 이름을 처음으로 들어, 그 이름으로 너를 처음 불렀을 때, 내가, 너를,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이제야 알아버려서.
그래서 나는 너에게 또 같은 잘못을 저지르는구나.
“쵸로마츠.”
깊이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천천히 마른세수를 하고서야, 나는 간신히 너의 이름을 부를 수 있었다.
널 부르는 내 목소리를 듣고서야 너는 뻣뻣하게 고개를 돌렸다. 청춘의 한가운데에 있는 너의 앳되고 덜 여문 모습이 얼마나 사랑스러웠는지 너는 과연 알고 있을까. 그런 너에게 내 남은 세월을 전부 바칠 만큼 함께 있고 싶다는 걸 너는 눈치채줬을까.
여름이 끝나간다. 이 여름이 끝나면 나는 또 다시 너와 이별할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아마 이번에도 너에게 같은 잘못을 저지르고 말 것이다.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목소리를 듣는 것이, 얼굴을 보는 것이, 전부 다 이제 와서 소중해서. 조금이라도 더 네 곁에 머물고 싶다는 욕심을 부리고 만다.
언젠가 끝날 꿈이라면, 너의 곁에 조금이라도 더 머물고 싶었다.
네 이름을 부르는 내 목소리에 너는 고개를 들어 조심스럽게 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붉어진 얼굴이 자꾸만 그리웠다. 나는 그런 너에게 웃어줬다.
“빙수, 같이 먹으러 가자.”
그래도 아직은 여름이었다. 너와 함께 하는, 마지막 여름이었다.
이 여름이 끝나는 날까지 만이라도 네 곁에 있고 싶다.
Ps 1. 하편은 상편에서 꽤 많은 시간이 흐른 뒤. 오소마츠는 주기적으로 간격을 두고 여러 지역을 옮기며 고등학생으로 위장하고 있다.
Ps 2. 하편의 쵸로마츠는 상편의 쵸로마츠의 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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