팥님 소재로 홍적. 홍적홍으로 보이지만 일단 홍적이라고 우겨봅니다(?) 치인트 2부 18화 패러디.
“차 들어가기도 좁고, 형광등도 없고, 인적도 드물고. 몇 번을 와도 여긴 치안 상태가 별로네요.”
“뭐, 그렇지.”
골목길을 꼼꼼하게 살펴보며 치안상태를 걱정하는 아카시의 말에 니지무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카시의 말에 긍정을 표했다. 그 후로도 서로가 오늘 하루 있었던 사소한 일상들을 주고 받으며 하루동안 일어난 일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니지무라는 문득 자신의 옆에 나란히 걸어가고 있는 후배를 내려다보았다. 자신보다 키가 작은 남자 후배는 붉은 머리에 특이하게도 한쪽 눈이 금색인 오드아이를 가지고 있었다. 상당히 눈에 띄는 머리색과 눈동자색이지만 그보다 더 눈에 띄는 것은 수려한 외모와 학과 톱을 달리는 천재적인 두뇌였다. 정말로 있지, 신의 축복을 받고 태어난 녀석. 니지무라 슈조는 아카시 세이쥬로를 볼 때마다 신의 불공평함을 절실히 느꼈다.
입학하자마자 명석한 두뇌와 뛰어난 외모로 학과 전체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된 아카시 세이쥬로와 알고 지낸지도 2년 차가 되었다. 처음 니지무라는 딱히 학과 내 가십거리에 관심 있어 하는 성격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남자 후배에 관심과 성의를 가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여 무관심으로 대했다. 자신은 그저 평화로운 대학 생활을 즐기면서 무사히 졸업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러나 그런 소박한 바람은 줄곧 신경도 쓰지 않았던 화제의 신입생으로 인해 무너지고 말았다. 사소한 충돌을 계기로 시작된 대립은 니지무라의 정신을 한계로 몰아붙이기 충분했다. 동기의 괴롭힘, 수상한 스토커, 무언의 압박. 니지무라는 자신보다 몇 살이나 어린 새파란 후배에게 이런 굴욕과 피해를 입는다는 것에 지독한 수치심과 분노, 미움을 느꼈지만 1학년 임에도 불구하고 학과의 중심으로 단단히 자리 잡은 아카시를 무너뜨리기는 쉽지 않았으며 어설프게 덤볐다가는 도리어 자신이 학과에서 그대로 밀려나 최악의 대학생활을 맞이하게 될 상황이었다. 결국 니지무라는 1년여 간의 대립 끝에 정신적인 피로로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항복의 의미로서 휴학을 신청하기로 했다. 그런데 아카시는 끝까지 니지무라를 괴롭힐 심산인지, 아니면 운명의 장난인지 아카시의 레포트가 실종되면서 자연스레 학과 톱과 전액 장학금을 얻어낸 니지무라는 울며 겨자 먹기로 휴학을 포기하고 학교에 계속 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후, 새 학기가 시작되고 나서 아카시 세이쥬로는 니지무라 슈조에 대한 적개심과 대립을 버리고 호의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처음 니지무라는 갑자기 180도로 돌변한 태도에 계속해서 경계를 늦추지 않았지만 차츰 아카시와 가까워지면서 점차 아카시의 또 다른 일면을 깨닫기 시작했다. 자신이 이전까지 봤던 완벽한 아카시도 서툴고 아이스러움이 남아있는 지극히 그 나이대의 모습이 있다는 것에 니지무라는 새로움과 친근함을 느꼈고, 그것에 니지무라는 아카시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면서 지금은 이렇게 밤늦게 나란히 서로의 집에 바래다 줄 정도로 가까워지게 되었다.
정말인지. 예전이라면 생각도 못할 일이었지. 니지무라는 시선을 아래로 내리면 바로 보이는 아카시의 정수리를 곁눈질로 살펴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지금 아카시와의 관계는 크게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전보다 훨씬 좋은 편이었다. 니지무라는 현재의 아카시와의 관계에 긍정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 긍정적으로 생각하자고.”
“네?”
“아, 아냐. 그냥 이쪽 이야기.”
“그런가요. 아, 이쯤에서 돌지 않나요?”
“그래. 왼쪽으로 돌면 돼. 그나저나 너도 그만 집으로 가라. 내가 무슨 여자도 아니고 이렇게 바래다 줄 필요는 없잖아.”
“그래도 걱정되어서요. 다음에는 선배가 저희 집에 바래다주시면 되잖아요?”
“말 하나는 지지 않으려고 한다니까….”
아카시의 대꾸에 니지무라를 입을 살짝 내밀어 투덜거리고는 아카시를 돌려보내는 것을 포기하려고 할 때, 그의 시선 한쪽 끝에서 무언가가 걸려있었다. 니지무라는 그 무언가에 고개를 돌려 옆을 보았다. 니지무라의 옆에는 다른 골목으로 들어가는 길의 입구가 보였다. 쓰레기들이 입구를 막아 일반인들은 들어가기는커녕 피해 지나갈 것 같은 장소를 니지무라는 미간을 좁히며 그것을 뚫어져라 살펴보았다. 하지만 자신의 시선에 아슬아슬하게 닿았던 그것은 보이지 않았다. 걸음을 멈춘 니지무라에 몇 발자국 앞에서 걷던 아카시는 니지무라가 옆에서 걷지 않자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뒤로 돌려 그를 재촉했다.
“선배? 무슨 일인가요?”
“아니, 아무것도. 내가 그냥 잘못 본거 같….”
아카시의 부름으로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려다가 미련이 남아 다시금 뒤를 돌아본 니지무라의 시선에 들어온 것은, 분명 아무도 없던 골목길에서 전조 없이 등장한 검은 손이었다. 갑자기 튀어나온 낯선 손에 평소 담력이 센 니지무라도 놀랄 수밖에 없던 것인지 어울리지 않는 비명소리를 내지르며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우아아아아악!!!!!”
“!! 서, 선배! 왜 그러세요?!”
“저, 저기… 저기에 뭔가가 있었어….”
“네?”
약간 겁먹은 표정을 지으며 손가락으로 골목길 안쪽을 가리키는 니지무라의 말에 아카시가 재빨리 니지무라가 가리킨 장소로 가서 살펴보았다. 잠시 후, 골목길을 전부 조사하고 온 것인지 아카시가 다시 니지무라가 있는 곳으로 돌아와 고개를 옆으로 누이며 말했다.
“아무도 없었는데요?”
“뭐!? 그, 그럴 리가! 분명히 누가 있는 걸 봤다고!!”
“살펴봤는데 누가 있었던 흔적 같은 건 없었습니다. 혹시 잘못 보신 건 아닌가요?”
“그, 그런 가…? 아아, 젠장. 요즘 아르바이트다 뭐다 해서 피곤한 탓인가….”
“아, 서류 줍는 거 도와드릴게요.”
“아, 그래. 고맙다….”
아카시의 말에 니지무라는 거칠게 자신의 머리카락을 휘젓더니 결국 피곤함에 헛것을 본 것이라 결론을 내리고 넘어진 탓에 흩어진 서류들을 주워들기 시작했다. 아카시도 당연스럽게 니지무라의 일을 도와주었고, 니지무라도 그런 아카시의 호의를 응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니지무라는 불현 듯 떠올렸다. 그동안 아카시와의 좁혀진 관계로, 그 당시의 수치심으로 잊고 있던 작년의 기억 중 하나를 말이다. 실수를 자주 하시는 편이신가 봐요. 바닥에 엎드려 있던 자신과, 그런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아카시.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해 아카시의 얼굴은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발치에 있는 서류를 발로 하찮다는 듯이 툭 건드리며 자신을 무시하는 말투는 지금도 결코 잊을 수 없었다. 그것으로 상처받은 자존심과 온 몸을 벌게 물들이는 수치심, 분노, 열등감을 어찌 쉽게 잊을 수 있다는 것일까.
니지무라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아카시를 보았다. 그 때와는 다르게 자신과 같은 위치에 앉아있는 아카시 세이쥬로. 자신의 후배가 눈앞에 있었다. 아카시도 자신을 응시하는 니지무라를 보았다. 미세하게 흔들리는 눈동자와 과거의 일을 상기시키는 눈빛을 아카시는 읽어낼 수 있었다. 그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과거의 감정들까지. 찌르르르. 도심 속에서도 들리는 쓰르라미의 소리만이 두 사람 사이를 채워나갔다. 잠시간의 침묵 후, 니지무라가 간신히 입을 열어 아카시에게 말했다. 최대한 태연스럽게 말하려고 애를 썼지만 입에서 나온 말은 과거의 연장선이었다.
“아카시… 미안하지만 거기 서류 좀 주워줄래?”
“…네.”
니지무라의 부탁에 아카시는 낮게 대답했다. 아카시의 발치에 나뒹굴어진 서류가 그의 손에 거둬진다. 작년과는 달리, 서류는 아카시의 손에 쥐어졌다. 조용히 아카시는 조금 전까지 니지무라와 나란히 서면서 보여줬던 부드러운 인상과는 달리 차갑게 식은 시선으로 니지무라에게 서류를 내밀었다. 아아, 그래. 저 시선. 같지는 않지만 비슷하다. 그 시선으로 저 오만방자한 후배는 자신을 내려다 봤었다. 니지무라는 조용히 손을 뻗어 아카시가 내민 서류를 받아들었다.
“고맙다.”
“… 선배는 아직도 제가 불편하신가 보네요.”
낮게 속삭이는 아카시의 말은 실망과 안타까움이 묻어나는 것 같아 니지무라는 그 말을 못 들은 척 흘려 넘길 수 없었다. 울컥하고 끓어오르는 감정들에 손에 힘이 들어가 서류의 한 귀퉁이가 구겨지고 말았다. 왜 네가 그런 감정을 안고 말하는 거지. 모든 것은 네가 먼저 시작한 거잖아. 그런데 이제 와서 실망스럽다는 그 태도는 뭐냐고. 너는 도대체 나에게 뭘 바라기에 계속 내 주변에서 맴돌며 간섭하는 거야. 대체, 왜.
니지무라는 혼란스러운 눈빛을 싹 지우고 아카시만큼이나 차가운 눈빛으로 그의 말을 맞섰다. 니지무라의 그런 눈빛은 처음인 것인지 아카시는 놀란 듯 몸을 움츠리는 움직임을 보였다. 지금까지는 그냥 넘어가고 휘둘렸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럴 생각은 없었다. 언제까지 선배로서 후배에게 당하며 살 수 없는 것이었다. 니지무라는 곧바로 비어있는 다른 손을 뻗어 아카시의 팔목을 잡고는 그대로 자신 쪽으로 잡아 당겨 아카시와의 간격을 순식간에 좁혔다. 어느새 아카시는 니지무라의 손길을 뿌리치기도 전에 아카시의 바로 눈앞에 있게 되었다. 예상 밖의 행동에 아카시가 당황을 숨기지 못하고 눈에 그대로 드러내고 말았다.
“서, 선배?”
“불편해? 그걸 몰라서 묻는 거냐? 네 녀석이 작년에 날 무시하고 해코지한 일들, 내가 아무것도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내가 진짜 호구로 보이냐 이 자식아! 나는 선배이고, 너는 후배이고, 올해는 네가 정신 좀 차렸는지 괜찮게 나와서 나도 괜히 이런 일 들춰서 서로 불편해질 바에야 좋게 풀어나가자고 해서 가만히 있던 건데, 뭐냐고 그 반응은!”
“저도 선배랑 마찬가지로 올해는 좋게 지내고 싶어서였는데, 먼저 반응을 보인 건 선배잖아요.”
“뭐야!?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어쨌든, 서로 올해만큼은 좋게 지내는 건 서로 같은 생각이네요. 그런데, 제가 어째서 선배와 좋게 지내고 싶어 하는지 아세요?”
“하아?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 자꾸 그런 식으로 말 돌리지 말고 내 말에나….”
“니지무라 선배. 저는 과거의 일보다도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고 싶어요.”
감히 니지무라의 말을 자르고 자신의 말을 먼저 한 아카시는 올곧은 눈으로 니지무라를 바라보았다. 니지무라는 차갑던 아카시의 눈빛이 달라지자 당황하여 잠시 말문이 막혔다. 지금의 아카시의 눈동자에서는 어떤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교묘하게 숨겨놓은 것처럼 호수의 표면과도 같이 잔잔한 두 눈동자에는 오롯이 니지무라만이 그려져 있을 뿐이었다. 적색와 금색이 선명하게 물들어진 두 눈동자가 자신만을 바라보는 것은 참으로 기묘하면서도 알 수 없는 이끌림을 느끼게 했다. 생각해보면 처음 이 눈동자를 마주했을 때 불쾌하다라는 생각보다도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었다. 니지무라가 잠시 아카시의 눈동자에 취해 멍하니 있는 틈을 타서 아카시는 페이스를 자신에게로 고정시키고 말을 이어갔다.
“작년에 선배와 안 좋은 일들이 있었던 건 부정하지 않을게요. 하지만 저나 선배나 서로 오해하는 것이 있었고, 이제는 서로 과거에 안 좋았던 일들은 묻어두고 새롭게 선배와 관계를 이어가고 싶어요.”
“아, 아니 잠깐만. 그게 덮어서 될 일은….”
“니지무라 선배.”
아카시의 말에 무어라 반박하고 싶었던 니지무라는 간신히 입을 열어 주도권을 되찾으려고 했지만 이미 아카시는 니지무라에게 그 어느 때보다도 부드럽고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와 사귀어 주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