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 알고 계셨던 겁니까?”
백건이 제 방으로 돌아가자마자 현우는 문을 닫고서 낮은 목소리로 은찬에게 사실을 물어보았다. 오늘은 밤이 늦었으니 가람을 설득할 대책은 내일 생각하자고 해서 잠자리를 준비하던 은찬은 현우의 질문에 행동을 멈추고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은찬의 얼굴에 드러난 감정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의미가 아닌, 알고는 있었지만 눈치를 챈 것에 대한 난감함이었기에 현우의 표정은 더욱 굳어지게 되었다. 현우는 조금 전 가람이 방문 앞에서 취했던 포즈를 연상시키려는 듯 팔짱을 끼고 고압적인 눈빛과 태도로 은찬의 대답을 기다렸다. 일말의 변명조차 듣지 않겠다는 단호한 태도에 은찬은 여기서 대답을 회피하지 못하겠구나 하고 일찍이 판단하고는 다시 잠자리를 준비하던 작업을 재개하며 말했다.
“음, 우리가 가람이를 데리러 갔을 때? 아, 그 때는 짐작만 했을 때구나. 확신은 네가 백건이랑 매화장에서 싸웠을 때 생겼어.”
아무리 재능이 부족하다고 해도 일단은 주술사라는 이름을 내걸고 있는 은찬이었다. 주술로서의 재능은 부족했지만 특유의 눈썰미와 어렸을 적부터 쌓아놓은 주술 지식 덕분에 은찬은 대충이나마 상대가 주술을 사용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파악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현우의 주술 능력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다. 현무후계자로서 중앙에 찾아온 자가 주술을 아예 못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였으며 자신의 능력에 대해 당당한 태도를 보여줬기에 의심의 여지조차 가지고 있지 않는 것도 있었다. 설마 하는 생각이 든 것은 중앙에 오는 것을 거부하던 청가람을 데리고 갔을 때였다. 무술가인 가람을 상대하기에는 주술을 사용하는 것이 유리하고 적합한데다가 자신이 주술을 쓰라고 말했는데도 현우는 은근슬쩍 자신의 제안을 피하며 가람을 무술로서 상대했다. 그 모습을 보고 은찬은 현우의 무술에 감탄하면서도, 주술가인 현우가 가람과 맞먹을 정도로 무술을 익혔다는 것에 석연치 않은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한 번 싹튼 의심은 점차 자라나게 되어 마침내 기억을 잃은 백건과의 싸움에서 은찬의 의심은 확신으로 완전히 자라나게 되었다.
은찬의 말에 현우는 놀란 표정과 함께 잠시나마 흔들리는 눈동자를 드러내었다. 청가람을 데리러 갔을 때는 아직 은찬과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며 서로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 때부터 은찬에게 자신의 비밀이 들통 났다는 점에서 현우는 자신이 얼마나 은찬에게 방심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 당혹감을 느꼈다. 지금껏 주변을 경계하며 누구도 믿지 않았는데, 어느 틈에 자신은 주은찬에게 빈틈을 보였던 것일까. 속으로 뱉어낸 자책의 질문은 현우의 안에서 금방 나올 수 있었다. 대답으로서 현우의 머릿속에서 떠올려진 것은 자신의 잘못을 덮어줄 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잘못이라고 거짓말을 하여 현우를 감싸주던 은찬의 모습이었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현우는 은찬이 눈치 채지 못할 만큼 고개를 작게 좌우로 흔들어 떠올린 은찬의 얼굴을 간신히 지워냈다.
“어째서, 말하지 않은 겁니까.”
“응?”
“어째서 아무에게도 사실을 말하지 않은 겁니까. 확신까지 하고 있었더라면 주인 할머님이나 다른 사신후계자들에게 말했어야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어째서 그 때, 저를 감싸신 겁니까.”
은찬이 현우의 주술 능력을 의심하고, 확신한 것처럼 현우 또한 은찬이 자신의 비밀을 알아채고 있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아채고 있었다. 그러나 현우는 지금껏 그것을 무시하며 들춰내려고 하지 않았다. 정말로 은찬이 자신의 비밀을 알고 있으라는 확신이 그 전까지는 없었으며, 함부로 물었다가는 도리어 자신이 제 비밀을 털어놓는 셈이 되어서 확인조차 할 수 없었다. 누군가가 자신의 비밀을 알아서 중앙에서 쫓겨나는 일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했다. 이대로 자신이 중앙에서 쫓겨나 본가로 돌아가면 어떤 일을 당할지 충분히 알고 있었기에 현우 자신으로서는 나름 절박한 일이었다. 결국 불확실한 예측을 끌어안은 채 은찬을 주시할 수밖에 없었다. 그 기간 동안 은찬은 현우에게 그의 주술에 대해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으며, 누군가에게 현우의 주술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나니 서서히 현우는 자신이 착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오늘, 현우가 주인 할머니의 추궁에 잠시 아무 말도 못하고 가만히 있을 때, 은찬이 그의 앞에 나서서 평소의 얼빠진 웃음으로 현우를 대신하여 할머니에게 변명을 해주었다. 그런 은찬의 뒷모습을 보면서, 현우는 이전의 다기 사건을 떠올림과 동시에 확신하게 되었다. 이 남자는 자신의 비밀을 이미 알고 있다고.
알고 싶었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는지, 알고 있음에도 왜 아무에게도 이야기를 하지 않았는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왜 그렇게 감쌌는지. 일전의 다기 사건 때와는 차원이 다른 일인데도 불구하고 왜 그런 것일까. 알면 알수록 현우는 은찬의 의도를 전혀 알 수 없었다. 지금까지 만난 인간들과는 전혀 다른 유형을 보여주는 은찬의 모습은 현우에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끝없는 의문만을 남겼기에 결국 직접 당사자에게 물어보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현우의 질문에 은찬은 현우의 얼굴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이윽고 고개를 돌려 이제 준비가 다 된 잠자리를 손으로 쓸어보며 말했다.
“확실히 주술 계통인 현무 후계자가 주술을 아예 사용할 수 없다는 분명 심각한 문제고, 할머니에게도 말씀드려야 하는 사안이지만 그래도 말할 수 없었어. 말하기 싫었다고 해야 하나. 아마 네 일이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아서 그런 건가봐.”
“무슨 의미죠?”
“네가 중앙에 오기 전에 어떻게 지냈는지는 모르지만 주술사 가문에 태어나서 주술을 못하는 것만큼 힘든 일은 없거든.”
나도 그랬으니까. 은찬은 뒷말을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쓰게 삼켰지만 현우에게는 충분히 전달되었다.
달그락. 쇠 젓가락이 젖은 손에서 빠져나와 식기를 두드려 사나운 소리를 낸 후에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저녁식사 시간에 어울리지 않은 낯설고 이질적인 그 소리에 거실에 모여서 한창 식사에 열중하고 있던 세 명의 사신 후계자와 주인 할머니가 일제히 은찬을 주목하였다. 붉게 상기된 얼굴로 초점 잃은 눈동자를 하며 아직 절반 이상이나 남은 밥그릇을 멀거니 보고 있는 은찬은 척 봐도 제정신으로 보이지 않았다. 어딜 봐도 아픈 사람처럼 보이는 은찬의 모습에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건 백건이었다. 쯧 하고 혀를 차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바로 은찬의 옆으로 가 앉은 백건은 커다란 손을 은찬의 이마 위에 올려놓고 그의 안색을 살펴보더니 고개를 좌우로 설레설레 흔들었다.
“이거 아무래도 맛이 갔네. 야, 주은찬. 정신 차려라. 내 말 들리냐?”
“어…? 백건…?”
“내 잘생긴 얼굴을 알아보는 걸 보면 완전히 정줄 놓은 건 아니네.”
“뭐야, 주은찬. 감기인거야?”
“하지만 그전까지는 멀쩡했는데요?”
“설명은 나중에 해줄게. 일단 이 녀석 방에 눕히고 올 테니까 기다려.”
그 말과 동시에 백건은 바로 은찬을 거뜬히 들어 올려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에서 나와 방으로 직행하였다. 은찬을 안고 방으로 가버린 백건으로 인해 남아버린 세 사람은 단순한 감기가 아닌가 하는 의문이 가득 찬 표정으로 두 사람의 뒷모습을 잠시 쫓았다.
잠시 후, 거실로 돌아온 백건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주은찬의 사정을 설명해주었다. 예부터 주작은 불을 상징하는 신수이며, 불은 양의 기운 그 자체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강력한 양의 기운을 인간의 몸으로 함부로 받아내려고 했다가는 그 기운에 육신과 영혼이 전부 불태워져서 사라져버릴 수 있다는 말도 전해질 정도로 불의 화신이라 할 수 있는 주작의 힘은 대단한 것이었다. 주작 가문에서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여자 후계자에 집착한 이유 중 하나가 이것이었다. 음을 상징하는 여인의 몸으로 양의 기운을 받아들이면 태극이 완성되어 힘을 균형 있게 유지할 수 있고, 그럼으로써 주작 가문의 주술과 사신 강림을 원활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대의 주작 후계자는 알다시피 남자인 주은찬이었고, 태극에서 양을 상징하는 남자의 몸으로 같은 양의 기운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야말로 불난 데에 또 불을 끼얹는 꼴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가끔씩 넘쳐나는 양의 기운이 부작용을 일으켜 강한 열병을 돌발적으로 일으키게 되는 것이었고, 그것이 지금 방에 힘없이 누워있는 주은찬이 현재 걸려있는 병이었다.
“그런데 넌 그런 걸 용케도 잘 알고 있네.”
“어렸을 적에 저 녀석이 우리 집에 놀러왔을 때 그 열병으로 쓰러진 적이 있었거든. 수련 도중에 갑자기 열이 펄펄 나면서 쓰러지는 바람에 집에서는 난리도 아니었지.”
“그래서 어떻게 하면 나을 수 있는 겁니까?”
“낫는 방법은 나도 몰라. 주은찬도 모르고. 그냥 저렇게 내버려 두다가 기운이 잠잠해질 때까지 내버려두는 수밖에 없어. 심하지 않으면 사나흘 후에 괜찮아질 거다. 그러니까 오늘은 내가 옆에서 지켜볼 테니 현무 너는 청룡이랑 같이 자라.”
설명을 마친 것으로 볼일을 끝낸 백건은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거실에서 은찬이 누워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방으로 들어가니 잠깐 자리를 비웠음에도 불구하고 방 안에는 주작의 열기로 꽉 차서 후덥지근해져 있었다. 들어서기만 해도 숨이 턱 막힐 듯한 기운이었지만 백건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방문을 닫고 은찬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미 몇 번이고 같은 현상을 옆에서 봐왔고, 그것을 피부로 체감했기에 이제는 익숙해진 주작의 기운이었다. 그러나 상기된 표정으로 땀을 뻘뻘 흘리며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은찬의 모습은 몇 번을 봐도 익숙해지지 않았으며, 익숙해지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다. 백건은 거실로 가기 전에 은찬의 머리 위에 올려놓은 물수건을 걷어서 다시 찬물에 적신 후 그의 머리 위에 올려주었다. 아무리 차가운 수건을 올려놓아도 얼마 안 가 다시 식어버리기에 소용없는 짓이었지만 이렇게 해서라도 그의 안에 있는 열기를 조금이라도 잠재우고 싶었다. 지금도 은찬은 의식을 거의 잃은 와중에도 꺼질 기미가 보이지 않은 화염을 잠재우기 위해 애쓰고 있는 중이니까. 백건은 이불 밖으로 살짝 빠져나온 은찬의 손을 잡아주었다. 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뜨거운 손이었지만 그래도 백건은 은찬의 손을 놓지 않았다.
(중략)
“커헉!! 쿨럭, 쿨럭! 웁, 억!”
피. 어느 무엇보다도 붉고 맑은 피가 은찬의 입 밖으로 나와 새하얀 이불에 꽃을 피우듯 떨어졌다. 초점 잃은 눈빛으로 가슴을 부여잡으며 목에서 쥐어짜듯이 피를 토해내는 은찬의 모습은 처참하다는 말 이외에는 설명이 되지 않았다. 훅훅한 열기와 함께 비릿하게 풍겨져오는 피 냄새에 백건은 아찔한 기분으로 과거의 일을 주마등처럼 떠올렸다. 처음 은찬이 자신의 눈앞에서 쓰러졌을 때, 아무것도 의지할 데가 없어 작고 연약한 스스로의 몸을 붙잡고 괴롭게 피를 토하던 은찬의 모습은 백건의 뇌리에서 절대로 지워지지 않은 광경이었다. 주은찬. 어린 시절의 백건은 그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처음으로 목도한 피의 색깔이 가져다 준 혼란에 빠져있었다. 그 후 어른들이 달려와 은찬을 진정시키고, 백건에게도 사정을 설명하며 너무 놀라지 말라고 달래었지만 백건은 처음 겪은 공포에 핏기가 싹 사라진 새하얀 얼굴로 은찬의 옆에 딱 달라붙어 그가 깨어나기를 기다렸다. 은찬의 붉은 피가 백건에게 가르쳐준 것은 주은찬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였다.
그런 공포를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
“주은찬, 정신 차려! 주은찬!”
꺽꺽 숨이 넘어가는 소리를 내면서도 동시에 헛구역질과 함께 다시 피를 토하려고 하는 은찬에 백건은 간신히 과거의 상념에서 벗어나 그의 어깨를 잡고 제 품안으로 끌어넣었다. 어렸을 적이나 지금이나 백건이 은찬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저 이렇게 그를 안아주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이래서는 어렸을 적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백건은 분한 마음에 뿌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이를 갈았다. 그러다가 잠시 진정이 된 은찬이 정신을 아직까지 차리지 못한 가운데 손을 공중에 허우적거렸다. 마치 무언가 매달릴 것을 갈구하는 절박한 손짓에 백건은 은찬의 손을 가로채어 그의 손을 으스러질 정도로 꽉 잡아주었다.
“멍청아. 내가 있는데 뭘 찾아대는 거야.”
예나 지금이나 너는 나에게 기대지 않는구나. 아무리 힘들고 아파도, 정말로 누군가에게 기대야 할 순간이 찾아와도 은찬은 정작 그런 결정적인 순간에는 아무에게도 기대지 않고 속으로 삭히며 혼자 견뎌내었다. 바로 눈앞에 있는 8년 지기 친구가 있어도, 마찬가지였다.
“현우는 의외로 손이 차갑구나.”
현우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은찬은 감탄조로 말했지만 그 말 자체에는 큰 의미가 없기에 흘러가듯이 말하였다. 현우는 은찬의 말이 낯설게 들리지 않았다. 어렸을 적부터 남들보다 체온이 많이 낮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왔다. 현오의 말에 따르면 예부터 현무는 강한 음의 기운을 가지고 있기에 그 후계자인 현우도 체질적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 가 이야기했지만, 자신이 후계자인지 아닌지 확실치도 않으면서 현무의 기운으로 자신의 체질에 영향이 왔다고 하기는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었다. 그에 비해 지금 자신의 손을 만져대며 이번에는 손의 크기에 대해 이야기하는 은찬의 손이 자신과는 정 반대로 따뜻했다. 주작은 현무와는 정 반대로 양의 기운을 품고 있었다. 만일 현오의 말이 사실이라면 주작 후계자인 은찬의 체온은 주작의 기운을 받아 남들보다 체온이 높은 것이 아닐까.
“그러는 주작 공자야 말로 체온이 꽤 높으신 편이군요.”
“응? 뭐 그렇지.”
무심결에 나온 현우의 말이었기에 속으로는 내심 놀란 현우와는 정 반대로 은찬은 조금 전 손이 차갑다는 감상처럼 그의 말에 대한 대답 또한 물에 흘려보내듯이 답해주었다. 말투를 보아하니 은찬도 현우처럼 체온과 관련된 말을 많이 들어본 모양새였다.
“덕분에 겨울 때마다 백건 녀석한테 난로 취급 받고 있어.”
갑자기 뒤에서 불쑥 나타나서는 확 끌어안는데 얼마나 놀란다고. 투덜대고 있었지만 악의는 전혀 없는 은찬의 말에 도리어 현우가 화를 내듯이 미간을 살짝 좁혔다. 저절로 그려지는 소꿉친구 둘의 일상에 현우는 이따금 두 사람과 자신과의 거리차를 실감하게 된다. 서로 친구가 되었다고 해도 결정적인 세월의 벽 앞에서 은찬은 현우를 놔두고 벽 맞은편에 있는 백건에게로 가버리게 된다. 무너뜨릴 수도 없는 벽 앞에서 현우는 은찬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것에 통감하고 만다. 그래서 현우는 그 씁쓸함이 싫어 자신도 모르게 어린애 같은 고집을 내새워서 은찬을 자신이 있는 곳으로 데려오게 된다.
“그렇다면 저도 안아주시죠.”
“에? 하지만 이제 곧 봄인데다가 지금은 별로 안 추운데….”
“저는 체온이 낮아서 추위를 잘 타는 편입니다. 이제 봄이라고 해도 추위가 완전히 물러간 것도 아니고요. 주작 공자는 체온이 높아서 잘 모르겠지만 저는 지금 무척 춥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안아주기에는….”
“백호 공자는 되고 저는 안 된다는 법은 없잖습니까.”
순 억지나 다름없는 말에 은찬은 지금껏 현우와 나눈 대화를 통해 다른 핑계를 대며 거절한다고 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때때로 알 수 없는 그의 고집을 부리는 현우의 심중은 알 수 없었고, 그 고집들은 전부 은찬을 향해 있었으며, 대부분이 들어주기 귀찮고 난감한 것들이었지만 은찬은 그것들을 전부 내치지 않았다. 그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쉬다가 이내 평소와 같은 웃음을 띠며 그의 부탁을 수락해준다. 그것은 백건과 가람과는 다른 형태의 미소였다.
“어쩔 수 없네.”
현우는 그 말을 잘 알고 있다. 지고 들어가는 은찬의 특성 상 늘 들을 수 있는 말이었지만 현우는 그 안에서 은찬 특유의 온기와 배려를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을 느끼고 싶어서 자신은 이렇게 무리한 부탁들을 꺼내드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 생각을 마치자마자 은찬을 무릎걸음으로 현우에게 다가가 바로 앞에서 그를 끌어안아주었다. 주작의 커다란 날개가 자신을 감싸 안아주는 것 같은 온기가 훅 하고 현우의 안으로 스며들어왔다. 봄볕의 온기보다도 뜨거운 새빨간 불꽃 본연의 열기가 얼음물 같이 차디찬 기운을 녹아내려주고 있었다. 따뜻하다. 현우는 그 열기에 취해 손을 올려 은찬의 등을 쓰다듬었다. 현우의 손길에 은찬은 잠깐 놀랐지만 바로 평정심을 되찾고 제 온기를 그에게 나눠주는 것에 열중했다.
겨울이 가고 봄이 찾아왔다. 현우는 이미 오래 전에 찾아온 자연의 법칙을 지금에서야 실감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