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찬 과거 날조 주의.
흔히들 알려지길,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했다.
처음 주작후계자로 결정되었을 당시의 주은찬이 겪었던 감정은 다른 후계자들이 느꼈을 감정과는 이질적으로 다른 막연한 불안감이었다. 은찬은 아직도 눈을 감으면 당시의 일을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주작후계자라는 호칭 다음으로 자신의 이름이 불려 지던 순간, 좌중을 뒤덮던 쌔한 정적. 기쁨도, 슬픔도, 분노도 담겨져 있지 않던 침묵은 무(無)에 비유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앉아 침묵에 둘러싸인 은찬은 다른 이들의 반응을 살펴보기 이전에 본인 스스로가 지금 자신의 이름이 불려 진 것이 어떤 의미인지 일찍이 간파해내고는 스스로 알아서 고개를 푹 숙였다. 주작 후계자는 대대로 여성이었으며 주작 가문은 전통적으로 여성이 본래의 실력을 드러낼 수 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집안에서는 여성이 좀 더 우대되었으며 모두들 그 전까지만 하더라도 은찬이 아닌 다른 여자애들 중 한 명이 후계자가 될 것이라 짐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은찬도 마찬가지였다.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여성 중시 가문인 주작 가문에서 자라와 가문 내에서 여성의 중요성과 주작 후계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왔다. 여성이 주작 후계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 필수인 것은 아니며 단지 사신후계자의 증표만을 가지고 태어난다면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었지만 주작 가문 내에서는 어느 샌가 여성이 후계자가 되는 것이 당연했으며 필수였다. 그래서 은찬이 주작 후계자의 증표인 붉은 털을 가지고 태어난 것에 다들 한 생명이 태어났다는 기쁨보다도 어째서 사내아이가 주작 후계자의 증표를 가지고 있냐는 당혹감이 앞섰다. 그래도 다들 여성이 주작 후계자가 될 것이라는 믿음을 잃지 않았으며 은찬도 분명 자신 이외에 다른 증표를 가진 여자아이가 나타나 후계자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결국 은찬 이외에 주작 후계자의 증표를 가진 여자아이는 나타나지 않았으며, 그렇게 유일하게 주작 후계자의 증표를 가진 주은찬이 후계자로 공식적으로 발표되었다. 무언가가 잘못되었다. 어린 은찬이 그 사실을 듣고 처음으로 떠올린 생각이었다. 눈치가 빠르고 집안의 풍습 정도는 어린 나이에 익히 알고 있던 은찬이었기에 당사자로서 느낄 수밖에 없는 어긋남이 크게 다가오고 있었다. 단순히 자신이 후계자가 되었다는 것 하나만으로 집안의 오랜 전통을 깨뜨렸으며 많은 어르신들을 실망시키는 일이었다. 벌써부터 들려올지 모를 비난과 폭력이 귀에 웅웅 울리고 몸을 저릿하게 만드는 것 같아 은찬은 무릎 위에 얹은 두 주먹을 말아 쥐었다. 이제 자신에게 어떤 시련이 닥쳐올 것인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시련을 체념하듯이 받아들이려고 하는 가여운 아이에게 가장 먼저 다가온 손길은 뜻밖에도 은찬의 붉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는 익숙하고 따스한 것이었다. 은찬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올렸다. 자신의 앞에는 어느 틈엔가 은찬의 앞에 마주 앉아서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있는 어머니가 있었다. 축하한다, 은찬아. 오늘부터 네가 주작 후계자야. 그리고 뒤따라오는 축하 인사에 은찬은 예상과 너무나도 달라 상황파악이 안되어 눈만 끔뻑거리며 어머니의 얼굴만을 볼 뿐이었다. 그리고 뒤이어 하나 둘 씩 은찬에게 축하 인사를 전하는 어른들의 말에 은찬은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비록 형식적인 인사말에 불구했지만 그 말들 중에서는 비난은 없었으며 질책하는 날카로운 손찌검 대신 격려의 의도로 어깨를 두어번 두드리는 묵직한 손길만이 은찬에게 다가올 뿐이었다.
그것에 은찬은 깨달았다. 자신도 은연중에 주작 후계자가 되기를 바랐으며, 될 수 없다고 생각했기에 그 바람을 일찍이 눈치 채지 못하고 그대로 묻어버렸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지금 그 바람이 이제 막 싹을 틔우고 밖으로 나왔다. 또래들보다 눈치가 빠르고 상황 파악을 잘한다고 해도 아직은 어린 아이였던 주은찬은 기쁜 나머지 자신에게 전해져오는 격려와 축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주작 후계자가 되고자 하는 꿈을 본격적으로 품기 시작했다.
그 후로 은찬은 주작 후계자로서의 수련을 시작하였다. 따로 훈련장이 없었기에 산 속 깊숙한 곳에 들어가 시작한 수련은 생각보다 뜻대로 되지 않았으며 심신이 버거운 것이었다. 예상대로 은찬은 남자인 탓인지 재능이 극히 부족하여 주술을 익히는데 난항을 겪었다. 주작 후계자가 된 기념으로 어머니가 선물해준 귀걸이를 이용한 금찬이라는 주술을 익히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주술 하나만을 익히는 것에 만족할 수는 없었다. 턱없이 부족한 재능 덕분에 은찬은 간간히 무술에 대한 수련도 쌓아갔다. 날마다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고 홀로 누구보다도 열심히 했지만 은찬의 기대와 바람만큼 주술 실력은 전혀 진전이 없었다. 그래도 수련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부모님이 고생했다면서 맛있는 것을 먹여주고, 우리 아들 힘들었다면서 다리 마사지를 해주는 등 지극정성으로 은찬의 수련을 도와주어 은찬은 그 때까지만 하더라도 전혀 힘들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주작후계자로 결정된 이후로 은찬은 한 번도 본가에 가지 못했다. 본가가 그리 먼 곳에 있는 것은 아니었고, 주작후계자이니 만큼 이제는 본가에 들어가서 지내는 것이 마땅했으나 어째서인지 부모님은 자꾸만 본가로 들어가는 날을 미루었으며, 은찬을 데리고 본가에 가거나 은찬을 혼자서 본가에 보내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그 전까지만 해도 부모님과 함께 자주 본가로 놀러가며, 때때로 은찬 혼자서 본가에 찾아간 날이 많았기에 은찬은 그 변화를 의아하게 느꼈다. 은찬은 본가에 놀러가는 것을 좋아했었다. 밝고 싹싹하며 예의바른 성격의 은찬은 어른들의 사랑을 받기 충분했으며 은찬이 본가에 왔다고 하면 늙은 어르신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앞 다투어 은찬을 제 무릎에 앉히고자 난리를 피웠다. 맛있는 간식을 주고, 부모님 몰래 용돈을 쥐어주는 친절하고 다정한 어른들이 좋아 은찬은 본가로 놀러가는 것을 그렇게나 좋아했다. 그래서 은찬은 한동안 본가로 가지 못한 것이 섭섭하여 부모님에게 본가로 가자고 졸라보기도 했지만 두 분 다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은찬의 부탁을 거절했다. 외아들이기에 은찬의 부탁이라면 왠만해서는 전부 들어주는 부모님의 거절에 은찬은 더 의문스러워질 뿐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은찬이 8살이 되는 해에 은찬네 식구들이 본가로 들어가게 되었다. 계속해서 거절하는 것도 한계였기에 결국 은찬의 부모님들도 본가 어른들의 집요함에 지고 만 것이었다. 은찬은 그저 본가로 들어가면 자신을 귀여워해준 어른들과 함께 지낼 생각에 신날 따름이었다. 그리고 은찬이 본가로 들어가자 아이의 예상대로 어른들은 은찬을 예전처럼 잘해주며 주작후계자로서의 정당한 대우를 해주었다.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면 은찬은 그저 들뜬 마음에 후게자로서 이분들의 기대에 부응해주고 싶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하루, 이틀 지나고 들뜬 마음에 진정되면서 은찬은 서서히 그동안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본연의 모습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주작후계자가 되었을 당시에 보지 못했던 것, 부모님이 가끔씩 은찬을 보다가 몰래 고개를 돌리면서 지었던 것, 부자연스럽게 은찬의 주변을 안개처럼 둘러싸던 그것. 은찬은 본가에 들어가고 시간이 지나서야 어른들이 자신을 보는 눈빛을 발견할 수 있었다. 평소에는 후계자로서, 귀여운 아이로서 바라봐주던 눈빛은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다시 보면 침묵과 함께 눈빛 한 점 없는 텅 빈 눈동자로 은찬을 주시하였다. 분노도, 안타까움도, 힐난도 없는 텅 빈 침묵의 눈빛은 은찬에게 아무런 감정을 표하지도 않았다. 당연한 것이었다. 그 눈빛 자체에는 은찬의 존재를 바라보지도 않았으며 주작후계자인 은찬의 존재를 인정하지도 않은 눈빛이었다. 처음 그 눈빛의 의미를 깨달은 은찬은 온 몸에 소름이 돋으면서 토기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그 눈빛은 특정 인물 한 명만이 가지지 않고 본가의 모든 일원들이 은찬을 같은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은찬은 그제야 부모님이 어째서 자신을 본가에 가지 못하게 막은 것인지, 본가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왜 그렇게 필사적으로 굴었는지 이해가 되었다. 그들은 이미 자신의 아들이 그런 시선을 받을 것이라 예상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어른들은 주은찬을 주작후계자로 인정하지 않았고, 그 현실을 외면하고자 주은찬이라는 존재 자체를 지워내고자 했다. 그 눈빛에서 얻어낸 어른들의 본심을 통해 은찬은 비참함과 지금까지 자신이 순진하게 기뻐한 것에 대한 수치심을 동시에 느꼈다. 차라리 대놓고 비난을 퍼붓거나, 폭력을 행했더라면 일찌감치 후계자가 되겠다는 꿈도, 기대도, 노력도 하지 않고 체념하며 살아갔을 것이다. 헛된 기쁨 따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스스로에게 기대조차 품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은찬은 진심으로 본인이 주작후계자로서 정당하게 주작이 되기를 강하게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현실은 비정하게 은찬을 몰아붙였다. 적어도 주술을 능숙하게 잘해서 어른들의 시선을 바꿔놓고자 했지만 진전이 없는 은찬의 실력은 남자는 안 된다는 어른들의 굳은 생각을 확고하게 덧씌울 뿐이었다. 겉으로는 그래도 네가 주작후계자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격려하는 어른들이었지만 그것은 단순한 허례의식 뿐이었고, 은찬을 바라보는 눈빛만큼은 여전히 달라지지 않았다. 은찬은 그 눈빛들에 둘러싸이기 싫어서, 침묵의 본가에 들어가기 싫어서 밤늦게까지 수련장에서 필사적으로 주술 수련과 무술 수련을 했다. 처음에는 즐거웠던 수련들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지독하게 힘든 것이 되었고, 주술에 실패할 때마다 괜찮다며 자신을 다지던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스스로에 대한 한심함과 질책, 자괴감이 따라붙었다. 그러다보니 이제는 집안 어른들이 아닌 다른 이들의 눈동자만 봐도 자연스레 그들의 눈빛이 연상되면서 목구멍이 콱 막혀오는 답답함과 조여드는 죄악감에 은찬은 누군가와 눈을 마주하는 것을 남모르게 피하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자연스럽게 웃으면서 근심 없이 지내는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부식되어가는 어린 마음을 누구도 알아채주지 못했다.
그럴 즈음에, 주은찬은 백건과 만나게 되었다.
자신과 같은 나이의 백호 후계자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은찬은 막연히 혼자서 여정을 떠나 어린 아이가 혼자 갔다고 말하기는 턱없이 먼 대전까지 도착하였다. 딱히 이유 같은 것은 없었다. 은찬은 그저 자신과 같은 후계자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순전히 호기심이 들어 찾아갔을 뿐이었다. 어쩌면 또 다른 후계자가 자신과 같은지, 아니면 다른지를 확인하고 싶어서 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나 은찬은 무엇이 다른지, 왜 확인을 하고 싶어 하는지 까지는 스스로에게 물어도 확실한 해답을 알지 못했다. 그저 만나고 싶다는 마음 하나를 붙들고 도망치듯이 대전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만나게 된 백건은 은찬에게 마치 하나의 빛처럼 다가왔다. 특이하게도 백건은 남들과는 다른 황금빛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은찬은 그것이 들어만 봤던 백호 후계자의 증표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은찬에게 있어서 백건의 눈빛은 벼락과 같이 강렬하게 내려왔다. 생기 있고 호기롭게 빛나는 백건의 눈동자는 올곧게 주은찬이라는 인물을 쏘아보았다. 거짓 한 점 없이 오롯이 자신의 존재를 당연하게 받아들여 넣는 백건의 눈동자에 은찬은 지금껏 꽉 막혀있던 무언가가 뻥 뚫리면서 목구멍 너머로 무언가가 넘어올 것 같은 감각을 느꼈다. 기뻤다. 얼마 만에 누군가와 눈을 마주하고서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일까. 누군가와 눈을 마주하면서 무섭다고 생각하지 않은 적이 이제는 까마득하게 느껴졌었는데. 지금까지 자신을 보던 본가의 눈동자와는 정반대의 눈동자에 담긴 은찬은 겉으로는 애써 드러내지 않으려고 했으나 그의 눈동자에는 벅찬 감정으로 차오르고 있었다.
반면 백건은 은찬과는 다른 방향에서 그의 존재를 놀라워하고 있었다. 이전부터 백건은 자신의 눈동자 색을 싫어했다. 백호 후계자의 증표이니 어쩔 수 없다고는 해도 자신의 눈동자가 마치 짐승의 눈빛과도 같이 살벌하다면서 마주보는 것조차 꺼려하는 사람들의 태도 때문이었다. 가족들이야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함께 해온 덕분에 이제는 익숙해졌다고는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딱히 악의 없이 그저 바라만 볼 뿐인데도 다들 겁을 내거나 기분 나빠하는 반응이 전부였기에 백건은 그런 사람들의 반응에 익숙해지면서 동시에 그런 사람들에게 반감을 가진 덕분을 통해서 자신의 눈빛을 정말로 날카롭게 만들어가고 있었다. 어쩌면 백건은 세간의 시선에 지쳐 자포자기로 받아들이고 그들의 시선에 맞춰서 억지로 변할 수밖에 없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 눈동자 색이 백호 후계자의 증표지? 실제로 보니까 정말로 예쁘다.”
“예쁘다고? 그거 진심이냐?”
“응! 반짝반짝 빛나는 게 내 머리카락에 비하면 되게 예쁜데?”
그렇게 자라온 백건에게 은찬의 악의 없는 순수한 호의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자신의 눈빛을 피하거나 꺼려하기는커녕 똑바로 바라보며 벅차오르는 감정을 한껏 끌어안고 자신의 눈동자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는 은찬의 반응에 백건은 그저 너무 놀란 나머지 어리둥절할 따름이었다. 은찬이 백건의 눈동자를 어떤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는지는 당시의 백건으로서는 알지 못했지만, 그래도 난생 처음으로 타인에게서 들어보는 눈동자에 관한 칭찬과 그것을 바라보는 순한 눈빛은 백건이 지금까지 불합리하게 받아낸 눈동자에 대한 비난과 기피에 대한 보상으로 충분했다. 백건의 눈에서 은찬의 머리카락은 마치 따스한 불꽃처럼 다가와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온기를 선사했다. 그렇게 서로는 서로에게 첫인상부터 호감을 가지게 되었으며, 그 호감은 두 사람 사이를 절친으로 만들어 놓을 정도로 길게 이어져 왔다.
두 사람이 절친이 되고 시간이 흘러 중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백건은 처음으로 은찬의 본가에 방문하였다.
그 전까지만 해도 은찬이 먼저 알아서 백건의 집에 찾아가는 정도였고, 백건은 은찬이 자신을 찾아오는 것이 더 편했으며, 가족들도 은찬을 둘째 아들 내지 남동생으로 생각하며 가족처럼 잘 대해주었기에 은찬도 백건의 집에 찾아가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 백건은 은찬의 집에 한 번 가볼 생각을 하지 않았으며, 은찬도 한 번도 백건을 집에 초대하겠다는 여지의 말도 하지 않았다. 은찬의 본가가 가볍게 놀러 갈 수 있는 정도의 거리가 되지 못한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그러던 중 은찬이 갑자기 본가에 하루 정도 지내야 하는 일이 생겼다. 원래는 은찬 혼자서 조용히 다녀올 생각이었으나 은찬이 본가에 갔다 오겠다는 소리를 들은 백건이 갑자기 은찬의 본가에 대한 궁금증이 생겨들어 자신도 주작 가문에 가겠다고 일방적인 통보를 부쳤다. 갑작스런 백건의 부탁 아닌 강요에 당황한 은찬은 자신 혼자 다녀오겠다는 말을 어떻게든 전하려고 했지만 한 번 결정한 일은 독불장군마냥 몰아붙여서 결국에는 이뤄내는 백건의 성격을 은찬 혼자서 쉽게 꺾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결국 마지막에 이기는 것은 백건이었기에 은찬은 예정을 변경하여 백건과 단 둘이서 본가로 내려가게 된 것이었다.
전통 한옥으로 이루어진 주작 가문에 도착한 백건은 처음에는 평소에 볼 수 없었던 전통 가옥에 대한 구경으로, 그 다음에는 백호 후계자가 왔다는 사실에 부산스럽게 백건의 방문을 환영하며 맞이하는 주작 가문 사람들로 인해 백건은 이리저리 정신없이 주작 가문의 첫 방문을 경험하였다. 고풍스러운 분위기와 맛있는 음식, 다정다감한 사람들의 환대에 백건은 주작 가문에 대해 그리 나쁘지 않은 인상을 가졌다. 주은찬네 집다운 인상이다, 하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 사이 은찬은 집안 어르신들에게 인사하러 가야한다면서 자리를 비웠고, 백건은 혼자 은찬의 방에 남아 그가 돌아올 때까지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한바탕 사람들이 파도처럼 확 밀려 들어왔다가 쓸려나가니 그제야 산에 둘러싸인 고즈넉한 경치가 백건의 눈에 들어왔다. 이렇게 좋은 경치가 있는 집이라면 좀 더 일찍 초대해 줄 것이지. 하고 사용인이 준비해준 한과를 먹고 있을 때 백건이 있는 은찬의 방으로 한 여인이 들어왔다. 아직도 백호 후계자의 얼굴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인가 싶어 귀찮은 기색을 뿜으며 고개를 돌리니 여인은 자신이 은찬의 모친이라고 인사하며 아들과 닮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 말에 백건은 재빨리 표정을 풀어 보기 드물게 얌전한 기색으로 은찬의 모친을 맞이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친구의 부모는 역시 대하는 태도가 스스로도 모르게 달라지는 법이었다. 은찬의 모친은 백건에게서 많은 것을 물었다. 학교생활은 어떠한지, 은찬과 함께 있을 때 무엇을 하는지, 은찬의 평소 모습은 어떠한지. 백건은 그 질문에 최대한 성심성의껏 답해주었고, 은찬의 모친은 백건의 대답에 만족했는지 은은히 웃으며 대답을 들을 때마다 고개를 끄덕여줬다. 그리고 마지막에 백건의 손을 꼭 잡으며 앞으로도 은찬과 좋은 친구가 되어달라고 부탁했다. 달뜬 그녀의 손에 백건은 어쩐지 울렁이는 기묘한 기분을 느꼈다. 그 말이 단순히 아들의 친구에게 당부하는 어머니의 의례적인 인사처럼 들리지 않았다. 미세하게 떨리는 열기와 백건을 바라보는 은찬과 닮은 눈동자에는 어딘지 모를 절박함이 깃들어있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백건은 은찬의 모친이 나가고 그녀의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당장, 은찬의 얼굴이 보고 싶어졌다. 백건은 충동적으로 은찬의 방에서 나와 그의 행방을 찾아 헤맸다. 얼마나 찾아 헤매었을까. 백건은 저 멀리서 한 방에서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무리들을 발견했고, 그 무리 속에서 유일하게 붉은 빛으로 빛나는 은찬의 머리카락을 발견했다.
“야, 주은…!!”
백건은 은찬의 이름을 부르다 말고 그대로 입을 다물어 버리고 말았다. 늙은이들의 무리 속에서 은찬은 백건이 이제껏 보지 못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침묵 속에서 이질적으로 표류되어 있는 붉은 빛은 어디에도 섞이지 못하고, 타오르고 있으나 빛나지 못하는 불빛을 가지고 힘겹게 일렁이고 있었다. 백건은 지금에서야 은찬을 보는 시선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분명히 은찬을 향해있지만, 은찬의 존재를 보지 않고 외면하고 있는 텅 빈 눈동자는 아무런 감정을 담아내고 있지 않았으며, 그렇기에 비참함과 절망감을 내면에서 끌어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침묵에 휘감아들고 있는 시선은 은찬을 고립시켰고, 이윽고 그도 자신들과 같은 눈빛을 짓게 만들었다. 자신들이 주작 후계자를 인정하고 있지 않듯이, 너 자신도 스스로를 인정하지 않게 해주겠다는 듯이 그들은 은찬의 존재를 외면하듯이 바라보았다.
생각보다도, 몸이 우선적으로 먼저 나아가게 된 백건이 은찬의 손목을 예고도 없이 덥석 붙잡았다.
“!? 배, 백건? 너 방에서 기다리지 않고 왜 여기에… 야, 자, 잠깐! 백건!!”
방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예상했던 백건이 갑자기 나타나 자신의 팔을 붙잡고 어디론가 끌고 가자 은찬은 미처 제대로 된 반항도 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백건의 힘에 이끌려 밖으로 끌려 나가게 되었다. 한참을 이끌린 끝에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본가에서도 상당히 외진 곳에 있는 작은 정자였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으며 여기서 살고 있는 은찬도 모르는 곳을 오늘 처음 온 백건이 어떻게 찾았나 하는 궁금증이 들기도 전에 백건은 그제야 뿌리치듯이 거칠게 은찬의 손목을 놔주었다. 은찬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어찌나 꽉 쥐고 있었는지 은찬의 손목에는 백건의 손자국이 벌겋게 남아버리고 말았다. 은찬은 욱신거리는 손목을 다른 한 손으로 쓰다듬으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백건에게 항의했다.
“야, 갑자기 왜 그래? 어르신들도 계시는 곳에서 그러면 어떡해.”
“너야말로 왜 그러는데?”
“뭐?”
“너야말로 그런 늙은이들 사이에서 다 죽어가는 눈빛은 왜 짓고 있는데! 게다가 다른 녀석들도 널 병풍 이하로 취급하는 듯한 눈빛으로 보고 있고! 너답지 않게 그 녀석들이랑 같은 눈빛은 왜 하고 있는 거냐고.”
오히려 적반하장이나 다름없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자신을 나무라는 백건의 말에 은찬은 무언가에 충격을 받았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백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문득 백건의 머릿속으로 어머니가 일전에 지나가듯이 한 말을 떠올렸다. 주작 가문은 대대로 여자인 후계자가 나왔으며, 사신의 특성상 여자 쪽이 훨씬 재능이 좋아서 남자의 몸으로 후계자의 자리를 물려받은 은찬이 참 많이 힘들겠구나 하는 요지의 말이었다. 당시의 백건은 어머니의 말을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넘어갔다. 가문의 비난과 핍박을 받고 자랐다고 보기에는 은찬은 지나치게 밝았으며 수련에 대한 힘든 기색은 보여도 가문으로 인해 힘든 기색은 전혀 보여주지 않았다. 언제나 속없이 웃고, 자신보다도 타인을 우선시하는 배려심 많은 성격을 지닌 은찬이었기에 그리 힘들게 보내지는 않았구나, 하고 백건은 막연히 생각하고 스스로 알아서 결정을 내렸다. 사실은 그런 건 제멋대로 지은 판단에 불과하고, 본래는 어떠한지 전혀 알지도 못하면서. 그래서 백건은 처음으로 보게 된 가문 내에서의 은찬의 취급에 순간적으로 화를 낸 것이었다. 잘 지내고 있다고 믿었기에, 분명 그러할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자신의 눈동자를 보고 예쁘다고 해주며 친구로서 곁에 있어준, 겉으로는 절대로 표현하지 않지만 백건에게 있어서 소중하다고 할 수 있는 주은찬의 존재를 당연하다는 듯이 부정하는 시선들은 백건의 화를 충분히 불러일으킬 법 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그들과 같은 눈빛으로 체념하듯이 지내는 은찬도 마찬가지였다.
백건의 말을 듣고 잠시 멍하니 있던 은찬은 이윽고 무언가 앓은 소리를 하고는 그 자리에 쭈그려 앉아 마른세수를 하며 그대로 두 손에 얼굴을 묻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가 이윽고 고개를 들어올렸다. 백건의 말을 듣고 상당히 충격 받은 듯 복잡한 표정으로 은찬은 백건의 시선을 피하며 피곤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
잘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도, 은찬의 집에서는 당연하다는 듯이 튀어나온 사과의 말에 백건은 다시 한 번 화를 낼까 했지만 자신의 아래서 앉아있는 은찬의 모습이 오늘따라 너무나도 작아보여서 더 이상 화를 내는 것은 그만두었다.
그 후 두 사람은 정자로 자리를 옮겼고, 은찬은 백건의 옆에 앉아 자신에게 있었던 일들에 대해 말해주었다. 덤덤히 이야기하면서 집안사람들에 대한 원망은 전혀 내비치지 않는 은찬의 말이었지만 백건은 은찬의 변호에도 불구하고 이미 주작 가문 사람들에 대한 적의심이 생긴 지 오래였다. 이야기를 다 끝내자 백건은 잘생긴 얼굴이 빛을 못 볼 정도로 미간을 험하게 좁히며 낮게 으르렁거리는 짐승의 울음소리와 닮은 노기를 누르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 이런 짜증나는 집에서 여태까지 잘도 지냈다. 나 참, 누가 보면 호구인 줄 알겠네.”
“하하. 그래도 겉으로나마 다들 잘해주시니까. 비난을 들어본 적도 없고, 얻어맞아본 적도 없고, 그래도 형식적이기는 하지만 다들 후계자로서 대접은 해주시니까 딱히 불평할 수가 없지.”
“차라리 돌 맞는 게 속 시원하겠다. 음침하게 그게 뭐냐? 그리고 너 이제까지 집에 잘 안 들어가는 걸 보면 마냥 좋은 것도 아니잖아.”
“뭐, 그렇지.”
은찬은 백건의 말에 묘한 긍정을 덤덤히 표하더니 이윽고 먼 곳을 바라보며 살짝 일그러진 표정을 지었다. 꼭 울 것 같은 표정이었지만, 은찬의 눈동자에는 눈물도, 슬픔도 드러나 있지 않았다. 마치 안쪽으로 굳게 잠긴 창문과 같은 이미지의 눈빛으로 은찬은 탄식 섞인 말을 했다.
“그래도 내가 그런 눈빛을 하고 있는 줄은 몰랐네. 하긴, 본인이 어떤 눈빛을 지을 지는 본인 스스로 알기 힘들겠지만 말이야.”
그들과 닮아가는 것에 탄식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들과 마찬가지로 자신 또한 은연중에 스스로를 포기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탄식하는 것일까. 어느 쪽이든 백건은 차라리 은찬이 여기서 찌질하게라도 좋으니까 눈물이라도 펑펑 터트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표정은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이 지으면서 눈빛만큼은 결코 슬픔을 담아내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워 보는 사람의 애를 태웠다. 이것이 동정인지 백건은 단언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은찬을 이대로 놔둘 수 없다는 마음이 더욱 앞섰기에 천천히 손을 들어 그에게로 뻗었으나, 그 전에 먼저 은찬의 입이 먼저 열렸다.
“그거 기억나? 처음 널 봤을 때 네 눈이 예쁘다고 했잖아. 지금 생각하면 좀 오글거리기는 하지만, 사실은 기뻤어. 너만큼은 여기와는 다른 눈빛으로 날 봐줬으니까.”
너만은 여기에 있는 나를 봐주었다. 지극히 당연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은찬은 그 사소한 것에 기뻐했으며, 고마움을 나타냈다. 백건은 생각지도 못한 고백에 더한 착잡함이 몰려들어 뻗으려던 손길은 그대로 공중에 띄워 멈추고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은찬을 바라보았다. 백건은 과거의 일을 머릿속으로 오랜만에 그려보았다. 자신의 눈을 피하지 않고 부담스러울 정도로 지그시 보고는 곱게 눈꼬리를 휘며 예쁘다고 말해준 은찬의 미소가 지금도 선명하게 떠올랐다. 은찬에게 있어서 백건의 눈동자는 빛이었고, 침묵 속에서 자신을 건져낸 구원이었다. 그 때 은찬이 어떤 심정으로 자신의 눈동자를 보고 감탄했을 지를 생각하니 조금만 더 일찍 알았더라면, 같은 후회가 가슴 한 구석을 묵직하게 눌렀다.
나도 기뻤어. 내 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바라봐주며 처음으로 내 눈동자가 좋다고 말해준 사람은 너였으니까. 두려움에 찬 눈빛이 아닌 호의를 담아 나를 바라봐 준 사람은 너뿐이었으니까. 그래서 널 친구로서, 그 이상으로서 좋아졌던 거야.
정말로 전하고 싶은 말을 간신히 이성으로 가슴 속에 묻어둔 채, 백건은 그 대신 멈추었던 손을 다시 뻗어 본래 닿고자 했던 은찬의 붉은 머리카락 위에 올려놓고는 제멋대로 헤집으며 말했다.
“앞으로도 계속 봐줄게.”
“응?”
“앞으로도 계속 봐줄 테니까 다시는 그런 동태 눈깔 같은 눈빛 하지 말라고.”
거칠지만 다정함이 느껴진 손길 아래서 은찬은 잠시 백건의 말을 이해하고, 그 안에 담긴 뜻을 이해하기 위해 잠시 말없이 백건의 금빛 눈동자를 물끄러미 보다가 이윽고 자신의 소꿉친구가 서툴게나마 전하고자 하는 위로의 의미를 알아채고는 조용히 웃어주었다. 어렸을 적 백건과 처음 만났을 때 환히 보여주었던 순수한 미소와 닮은 것이었기에 백건은 순간적으로 과거의 그 때로 돌아온 것 같은 기분에 젖어들었다.
“고마워.”
은찬은 낮게 속삭이며 백건에게 감사를 전했다. 편안하게 웃는 은찬의 맑은 눈빛 안에서 굳게 닫혀져 있던 창이 조금씩 열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ETC.'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방문 (1) | 2015.04.19 |
---|---|
트위터에 쓴 단문 모음 (0) | 2014.09.09 |
[스구시마]가식 (4) | 2014.08.07 |
[또봇]형제 (0) | 2014.07.22 |
[고스트메신저]19510728 (0) | 2014.06.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