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도령 과거 설정 주의.
설정만 확인하고 쓴 글이라 원작하고 다른 부분이 있을지도 모릅니다ㅠㅠ
1951년 7월 28일.
어디까지나 주관적이었지만 자신의 시선에서 본 그 날의 풍경은 다른 날들보다도 더 음울하고 혼란스러우며 비참한 날이었다. 어제부터 쏟아지는 비는 오늘도 계속 이어져 내려오고 있었고, 비가 내리기 전부터 빗발치던 탄환들은 그칠 새도 없이 오늘도 비와 함께 섞여져 날아오고 있었다. 고막을 망가뜨릴 정도로 크게 터지는 수류탄의 폭발 소리와 탱크의 포가 발사되는 소리가 거칠게 공기를 찢어 갈랐고, 그 아수라장 속에서 적과 아군 모두가 분별없이 죽어가고 있었다. 폭발에 휘말려 갈기갈기 찢겨진 채 죽어버린 자들과 살아남았다고 해도 팔 혹은 다리가 떨어져나가 생전 처음 느껴보는 고통에 비명을 지르고 눈물을 흘리며 기어가는 자들이 어지러이 뒤섞여져 버렸다. 만약 저 세상에 지옥이라는 곳이 있다고 해도 이곳보다는 잔혹하지 않을 것이다. 같은 동포를 죽이고 잃은 이곳에 비교하면 지옥은 분명 평화로운 곳 일거라 생각된다.
고개를 옆으로 돌려 조금 전까지 자신에게 살아남으라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동료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벌써 싸늘한 시체가 되어 저 멀리 나뒹굴고 있었다. 수류탄에 직격으로 맞아 얼굴의 절반 이상이 날아가 버린 그는 조금 전의 그 동료가 맞는지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아니, 얼굴이 거의 날아간 덕분에 그 동료가 맞는지조차 의심될 정도였다. 기억 속의 그의 얼굴은 어느샌가 잊혀진지 오래였다. 그렇게 본다면 나는 운이 좋은 편에 속했다. 그래, 얼굴이 날려서 죽는 것보다는 얌전히 급소에 총에 맞아 죽어가는 것이 더 곱게 죽는 편이었다. 전장에서는 총에 맞아 죽는 것이 살아남는 것 다음으로 가장 큰 행운이었다. 커헉! 복부에 입은 총상을 중심으로 흘러나오던 피가 이제는 위로 올라가 입으로도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렇게 쓰러져 죽어가는 와중에도 귀에는 여전히 비명소리와 포탄이 날아가는 소리가 들려왔으며 여기저기서 다급하게 작전을 주고받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든 것들이 급하게 돌아가는 와중에 나 혼자만이 너무나도 평온했다. 아무도 나를 구하러 오지 않았다. 구하러 올 수 없었다. 현재 전쟁 상황은 우리 군이 밀리는 상황이었으며 적군들을 막아내느라 급급했기에 구하러 가고 싶어도 함부로 자리에 이탈할 수 없었다. 나는 그들을 이해했다. 나도 구할 수 있는 전우들을 몇 번 발견했는데도 괴롭게 외면해버린 적이 있었다. 구해달라고 미약한 목소리로 애원을 하는데도 무시했다. 구하러 갈 수 없다는 것은 핑계였다. 죽어가는 전우를 가까이서 보는 것이 무서웠고, 괜히 이탈했다가 혹여나 운 없이 죽을까봐 무서웠다. 죽어가는 전우를 볼 때마다 슬퍼했던 감정은 자신도 알지 못한 사이에 살고 싶다는 감정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그러니 지금의 내 모습은 당연한 것이었다. 어쩌면 전우를 외면한 것에 대한 천벌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천벌이면, 체념하며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을까.
다시 한 번 갈라지는 기침과 함께 피를 토해내며 서서히 흐려지는 시야에 버티지 못하고 눈을 감으려고 할 때였다.
“ㅡㅡㅡ!!”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부르며 달려왔다.
그 목소리에 나는 감기기 직전이었던 눈꺼풀을 간신히 다시 들어 올려 고개를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돌려 눕혔다. 그와 동시에 허겁지겁 내 옆에 주저앉은 녀석은 갈기갈기 헤져진 먼지투성이의 군복을 입고 방금 전까지 사용하여 아직도 뜨거운 총을 맨 나와 같은 나이대의 학도병이었다. 아, 이 녀석은. 죽어가는 나를 찾아온 녀석은 나와 같은 시기에 군에 입대한 동기였다. 사교성이 없던 나에게 유일하게 친근하게 다가와 단짝이 되어준 녀석은 마지막에도 먼저 나에게로 달려와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내 이름을 몇 번이나 불렀다.
바보냐, 여기에 오면 어떡하냐. 여기서 나만 죽은 것도 아니고 내가 이러니까 달려와 우는 건 다른 녀석들한테 실례라고.
그런 녀석의 울고 있는 얼굴이 너무 바보같이 보여 나는 평소와 같이 타박이라도 하고 싶었으나 고여 버린 피로 막혀버린 목소리에는 쇳소리만이 울릴 뿐이었다. 녀석은 이제 나를 부르는 것만으로는 성이 안차는지 내 상반신을 들어 올려 제 품에 안아주었다. 식어가는 내 체온과는 달리 녀석의 체온은 아직 따뜻했다. 비에 젖어가고 있음에도 강하게 뛰는 뜨거운 심장 덕분에 차갑지 않았다. 바로 귀에서 들려오는 고동소리는 전쟁터에서의 폭발음보다도 더 강하고, 크게 내 귀에 울렸다. 살아남겠다고 발버둥치는 생명의 소리가, 온기가 너무나도 뜨겁다. 자신 또한 같은 열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열기를 가질 수 없게 된다. 이제 곧, 자신은 죽게 된다.
그렇게 생각하자 끝내 참지 못하고 내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여전히 내 몸에서 빠져나오는 피보다도 뜨겁게 끓어 넘치는 눈물이었다. 눈물은 미련을 상징한다. 괴롭고 슬픈 생이었지만 떠나고 싶지 않다는 미련이 진득하게도 자신을 붙잡는다. 분명 살아남으면 더 좋은 삶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조금만 더 살아남으면 이 모든 시련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텐데. 그런데도 내 생은 처음부터 끝까지 괴로움만을 채워가며 끝내야 하는 것일까. 한 번 흘러내리기 시작한 미련은 그것을 시작으로 멈추지 않아 계속해서 흘러내려갔다. 그 모습을 본 동기도 내 심정을 알아차린 것인지 나를 더 세게 끌어안으며 함께 울어주었다. 이대로 너를 보내줄 수 없다는 동기의 미련이 내 미련과 함께 섞여 땅으로 떨어져 스며들었다. 그러나 운명에서 벗어나려고 하기 에는 나도, 이 녀석도 턱없이 나약한 존재였다. 내 죽음은 누구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다시 한 번, 마지막으로 핏덩어리를 크게 토해내었다. 덕분에 줄곧 막혀있던 목구멍이 트이게 되어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나를 위해 달려와 주고 울어주는 녀석에게 해야 할 말이 있었다. 덜덜 떨리는 손을 힘겹게 위로 들어 올려 전우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너는… 여기서… 살아… 남아라. …고맙다….”
아아, 나는 정말인지 운이 좋은 녀석이었다. 곱게 죽을 수 있었고 외롭지 않게 죽을 수 있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운이 좋은 것이다.
그 말을 끝으로 나는 힘없이 손을 바닥에 떨구었다.
“감찰관님. 감찰관님을 찾으시는 분이 계십니다.”
“나를?”
“네. 환생을 앞둔 영혼이 있사온데 감찰관님의 이야기를 들으시더니 꼭 만나 뵙고 싶다고 말씀하셔서 염라님의 특별 허가 하에 면담을 신청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흠. 염라님의 말씀도 있으니 가보도록 하지. 앞장서도록.”
“네. 그럼 이쪽으로.”
의자에 걸쳐놓은 붉은 재킷을 걸쳐 입고 수행원을 따라 긴 복도를 걸어가게 되었다. 굽 높은 부츠가 바닥을 울리는 소리가 제법 경쾌하게 울렸다. 혹시나 싶어 소울폰도 챙겼지만, 자신을 만나고자 하는 상대가 누구일까. 면담 장소로 향하는 동안 갖가지 예측을 하면서 대상에 대해 추리를 해보려고 했지만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다. 결국 생각 끝에 직접 만나는 수밖에 없을까 싶어 추리를 포기하고 조용히 따라가게 되었다.
이윽고 수행원이 안내한 장소는 뜻밖에도 서천꽃밭 내에서도 가장 아름답기로 손꼽은 정자였다. 이런 곳을 약속 장소로 잡다니. 염라님이 결정하신 건지, 아니면 면담 상대가 정한 것인지 몰라도 감히 내 허락도 없이 내 구역에서 가장 아끼는 곳을 약속 장소로 잡았구나 싶어 퍽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누군지 몰라도 배짱이 대단한 녀석이군.
“저기 정자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알았다. 여기서부터는 내가 알아서 가도록 하지.”
내 말에 수행원은 순순히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떠났다. 서천 꽃밭의 꽃들이 자신들을 아끼고 보살펴주는 주인이 찾아왔다는 사실을 알자 몸을 이리저리 흔들며 나를 반기었다. 저승의 낙원이라고 불려도 좋을만한 서천꽃밭의 절경을 잠시 심취하는 것도 좋았지만 지금은 찾아온 불청객부터가 먼저였다. 정자로 이어진 오솔길을 걸으니 목적지가 점점 선명해지면서 정자 안에서 기다리고 있는 상대의 윤곽 또한 분명하게 보였다. 몸집이 자그마한 것을 볼 때 아무래도 노인으로 추정되어 보였다. 노인이라면 천수는 전부 누리고 죽은 것인가. 호상이군. 덤덤히 상대에 대한 감상을 이리저리 하는 사이에 어느새 오솔길은 끝나게 되었고 정자가 바로 앞에 서있게 되었다. 정자로 올라가는 계단을 차곡차곡 밟으며 위로 올라가자 드디어 상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상대는 내가 오는 것도 눈치 채지 못한 채 서천꽃밭의 풍경을 넋이 빠져라 보고 있었다. 뭐, 이 꽃밭에 오게 되면 다들 이 아름다운 절경을 감상하느라 정신이 없고, 그것에 스스로가 자랑스럽게 생각하고는 있지만 그래도 사람이 왔는데 딴 곳을 보고 있는 것은 실례이다.
“어이, 이 몸께서 오셨는데 어딜 한눈팔고 있는 거야!”
“음? 아, 허허. 미안하네. 이렇게나 멋지고 아름다운 곳은 생전에도 본 적이 없어서 말일세.”
“하! 그야 당연하잖아! 이 서천꽃밭은 저승에서 가장 아름다운 명소이며 내 자존심이나 다름없는 곳이라고. 현세와 비교할 게 아니란….”
“정말인지, 꽃을 좋아하는 건 여전하구만. 그중에서도 특히 무궁화가 아주 아름다워.”
노인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마주보았다.
나는, 그 얼굴을 잊지 않았다. 잊을 수가 있을까. 내 생전 마지막에 본 얼굴을 어찌 잊을 수가 있을까. 아무리 세월이 흘러 변모했다고 해도 그 형태만은 남아 알아볼 수 있었다.
“많이 변했구만. 자네도, 나도. 그래도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
“…여전히, 바보 같은 얼굴이구만.”
우는 듯 웃는 녀석의 바보 같은 얼굴을 보자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
물기를 머금은 내 목소리를 들은 꽃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하나 둘씩 치켜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