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색다른 분위기의 이사쿠가 보고 싶어서 이것저것 망상하다가 나온 결과물
“어떻게 하면 이사쿠 군을 화나게 할 수 있을까?”
“…그런 걸 보통 당사자 앞에서 직접 물어보는 건가요.”
고개를 살짝 왼쪽으로 기울이는 몸짓은 가벼웠으나 밖으로 나온 말투와 목소리는 진중했기에 그 상반된 조합에서 이사쿠는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사이를 두다 애매한 미소로 맞받아냈다. 잠시의 사이를 둔 이유는 아마 자신과 관련된 이야기라 어찌 받아내야 할지 망설인 탓에 남겨진 시간적 잉여일 것이다. 이사쿠와 인연을 맺은 것을 계기로 보건실의 문지방을 닳도록 드나들 때마다 잣토는 평소에는 발설하지 않는 실없거나 의미를 종잡을 수 없는 폭탄선언 비슷한 것을 남기고 간다. 그 말에는 일정한 주제가 없다. 사적이고 흔한 고민거리부터 심도 깊고 비수가 되는 숨은 비수와 유사한 발언까지. 그에게 있어 보건실은 유일하게 허심탄회를 말할 수 있도록 허락받은 고해성사의 공간이었고, 이사쿠는 그 안에서 그의 말을 들어주는 것을 허락받은 존재였다. 정확히 말하면 이사쿠가 있기에, 자신의 모든 이야기를 사심으로 걸러듣지 않고 진지하게 경청해주는 어린 신부가 있기에 잣토는 오늘도 짬을 내어 인술학원의 한 칸을 차지하는 약초 냄새가 물씬 풍기는 방에 발을 들이게 된다.
오늘의 그가 호기심을 드러낸 것은 젠포우지 이사쿠에 대해서였다. 잣토가 여기서 가장 많이 언급하는 주제이기도 했다. 이사쿠는 흘러내리는 잔머리들을 귀 뒤로 쓸어 넘겼다. 사라락 흔들리는 얇고도 검고 굽이진 선들 너머로 귀와 목선이 훔쳐보였다. 정갈한 동작 사이로 잠깐나마 드러나는 것은 일상에서는 쉽사리 드러나지 않는 은밀한 곡선이라 눈길을 동하게 만드는 매료가 있었다. 잣토는 스쳐간 곡선을 짧은 시간 내에 시선으로 타고 오르내렸고, 그 육욕의 시선을 이사쿠는 알면서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그도 마냥 쉬운 상대가 아니라는 것이 자각된다. 화제를 다시 원점으로 돌려, 잣토는 턱을 괸 자세를 유지해 말했다.
“이사쿠 군이 화나는 모습은 별로 보지 못해서 말이지. 불운에 휘말려도 대개 웃고 넘기는 모습만 봐서 말이야.”
“하하. 어렸을 적에는 종종 속상해서 화낸 적도 있었는걸요. 지금은 뭐랄까, 이미 그 부분에 대해서는 포기해서 말이죠.”
그리 말한 뒤에 드러낸 이사쿠의 표정은 웃기면서도 서글픈 체념 그 자체였다. 실제로 함정에서 기어 올라온 뒤거나 기껏 말려놓은 약초들이 후배들의 신수로 못 쓰게 되었을 때의 이사쿠는 지금의 체념으로 만들어진 허탈한 미소를 짓고 만다. 15년을 시달려 왔으니 그 부분에 대해서는 해탈의 경지에 올랐어도 충분했다.
“그리고 저도 화를 낼 때는 내요.”
이사쿠 스스로가 말하듯 사람 좋은 성격으로 6학년 최고 선배들 가운데서는 유일하게 무섭지 않으면서도 다른 식으로 비꼬아 말하면 선배로서의 위엄이 거의 보이지 않는 허술한 선배인 그도 마냥 곱게 넘어가는 선배가 아니었다. 희노애락의 경계가 분명하고 그것을 불운이 키워낸 인내심과 도량으로 유순히 넘길 수 있게 되어서이지, 결국 그도 15살의 소년이기에 종종 후배와 동기들을 상대로 짜증내거나 잔소리를 퍼붓는 경우가 있었다. 대표적으로 항상 싸우는 견원지간인 동기 둘이 이사쿠의 잔소리의 대표 단골들이다.
하지만 잣토가 지적한 ‘화’는 그것이 아니다.
“내가 말하는 화는 그런 게 아니라네, 이사쿠 군. 그보다 좀 더 본질적인 것을 물어보는 거라네.”
본질적인 화(火), 역정. 노기. 분노. 잣토 콘나몬에게 있어서 화는 인간의 이성에 가려진 본질을 가장 선명히 드러내주는 수단이었다. 이성이 배제되기에 위험하면서도 그 인간의 가장 솔직한 심정과 가치관을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하는 극단적이고 위험한 감정이기도 했다. 동시에 분노를 일으키게 만드는 주체는 분노의 대상자에게 있어서 중요시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잣토는 항상 분노를 경계했다. 무언가로 인해 화를 낸다는 것은 자신의 이성적 통제를 날려버리는 위험한 행위이자 약점을 알려주는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 닌자에게 있어서 3가지 금지하고 경계해야 하는 3가지가 있다고 하지만 잣토에게는 그것들보다도 더 주의해야 할 것은 이성을 잃게 하는 분노였다. 그런 잣토의 궁금증을 자극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이사쿠의 분노였다.
눈앞의 소년이 무엇에 분노하는지, 그 무언가가 소년에게 있어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소년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 많은 잣토에게는 당연할 수 있는 의문이었다.
그 말을 듣고서야 잣토의 질문의 의미를 완전히 해석한 건지 이사쿠는 하던 일을 조심히 멈추고 흐음 하는 골몰하는 신음소리를 냈다.
“본질적이라면 어떤 것이요?”
“예를 들어, 내가 무슨 짓을 하면 자네를 화나게 만들 수 있을까.”
능글거리는 말투와는 반대로 그의 목소리에는 밑바닥을 가늠할 수 없는 위압감이 깃들였다. 그의 말을 듣게 되면 어떤 말이든 간에 반드시 대답을 해야 할 것만 같은 강박감이 생겨난다. 그 강박에서 누군가는 공포를, 누군가를 경외를 가지게 된다. 잣토 콘나몬과 마주하고 그를 대하는 사람들은 그의 말로 두 개의 분류로 나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젠포우지 이사쿠는, 확실히 여러모로 예외에 속한 흥미로운 존재였다.
이사쿠는 새파란 약초물이 묻은 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놓고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려 머릿속에서 잣토의 질문에 대한 적당한 답을 찾아보다가 아 하는 소리를 낸 뒤에 맑게 웃는 얼굴로 답했다.
“잣토 씨가 함부로 사람을 죽이면, 그 때는 화내지 않을까요.”
그 대답에 잣토는 잠시 눈을 크게 떴다. 서로가 닌자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 입장에서 볼 때 상당히 말이 안 되는 답변이었다. 다행히 이사쿠는 잣토의 반응을 보고 바로 부연설명을 붙여줬다.
“물론 닌자가 사람을 죽여야 하는 일이라는 건 잘 알고 있어요. 저도 그 일에 대해서 부정할 생각은 없고요. 보건 위원으로서 사람의 생명을 중히 여기고 있고, 그들을 살리는 것에 의무감을 가지고 있지만,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 자체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있지는 않아요. 지금 같은 혼란스러운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있고, 저와 잣토 씨도 닌자의 길을 걷고 있는 이상 사람을 죽이는 건 직업적 숙명이니까요.
실제로 이런 저도, 사람을 죽인 적이 있어요. 옛날에는 그런 제가 의료 활동을 펼치는 게 위선이 아닐까 하고 고민해봤지만, 그것도 옛날이야기네요. 제가 사람을 살리는 건 어디까지나 그 사람이 살아남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에요. 그 가능성을 눈앞에 두고도 지나칠 수가 없어서, 치료해주는 것뿐이에요. 물론 사람이 죽는 건 역시 싫으니까 하는 도덕적 양심도 있지만요.”
이사쿠는 말을 잠시 쉬면서 자신이 처음으로 사람을 죽인 때를 떠올렸다. 실습을 나가서 처음으로 사람을 죽였을 당시에 느꼈던 감정은 죽여 버린 상대에게 미안하게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이런 식이 아닌 다른 식으로, 가령 자신이 살릴 수 있는 대상으로 만났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은 기억에 남겨졌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괴롭고, 슬픈 일이지만 그것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런 시대였고, 그 시대 안에서 사람을 죽이는 인륜 배반적인 행위를 업으로 삼는 직업을 삼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기에 부정할 수 없다. 부정한다면, 이 시대 속에 죽어간 사람들의 목숨과 그들을 발판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의 생사의 가치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언젠가 이런 시대가 끝나고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행위가 일반화되지 않는 평화의 시대가 도래 할 것을 이사쿠는 굳게 믿고 있지만, 이사쿠가 직시할 것은 미래가 아닌 현재였다. 피와 살과 뼈와 죽음이 끓어 넘치는 수라의 장이었다.
“사람의 목숨에는 가치가 있고, 무게가 있어요. 제가 보건위원이 된 것도 그것을 믿고 있으니까요. 사람의 죽음도, 그 죽음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의 목숨마저도 전부 그만한 나름의 가치가 있기에 벌어지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이유도 없이 사람이 죽는 것도, 죽이는 것도 싫어요. 좀 더 살아가도 되는 목숨인데, 살인을 저지르지 않아도 되는 상황인데 그런 가능성과 가치를 무시하고 살인을 저지른다는 것은 분명 잘못된 거니까요.
그러니까, 만일 잣토 씨가 무분별하고 무가치하게 사람을 죽인다면, 저는 화낼 것 같아요. 아주, 많이.”
이사쿠는 믿고 있다. 사람을 죽이는 이유와 죽을 수밖에 없는 이유, 그리고 생명의 가치는 금수와 인간을 구분하는 잣대이자 경계라고. 자신이 보건위원으로서 사람을 살리는 건 그 경계를 지키는 일이라고. 그것이 젠포우지 이사쿠의 신념이었다. 그리고 그 신념을 어기는 자를 마주했을 때, 스스로가 직접 분노할 것이라 경고했다. 고요히, 차분히, 그리고 선명히.
이것을, 뭐라고 비유하는 것이 좋을까. 올곧음과는 다르고, 선량함과는 이질적인,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살인을 인정하면서도 의미 없는 살인을 부정하는 모순에 존재하는 젠포우지 이사쿠의 가치관은 무엇으로 평가할 수 있을까. 잣토는 이사쿠의 눈동자를 직시했다. 흑단과 닮은 두 개의 눈동자는 어느 때보다 차분했다. 온화함의 본질을 잃지 않으면서도 그와 공존하는 비틀림은 닌자와 보건의의 사이에 서 있는 이사쿠를 그대로 대변해줬다. 잣토는 다시금 실감했다. 이 아이는 닌자에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어느 의미로 평가하면 닌자로서 가장 걸 맞는 적성을 가진 아이였다. 그리고 그것을 본인도 잘 인식하고 있었다. 아마 이 아이는 장차 닌자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자의든, 타의든 간에. 어째선지 잣토는 그것을 근거도 없이 단정 짓고 있었으나, 틀린 생각은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이사쿠는 웃었다. 호수의 표면과 같은 잔잔한 얼굴 다음으로 드러낸 미소는 평소와 여느 없었다.
“뭐, 잣토 씨가 그럴 분이 아니시라는 건 제가 잘 아니까요.”
잣토에 대한 신뢰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발언에 잣토는 한쪽만 드러난 눈으로 몇 번을 끔뻑거리다가 이윽고 김빠진 미소를 피식 지어보였다. 이거 한 방 먹었구만. 이런 묘미도 있기에 잣토는 이사쿠와의 대화를 즐길 수밖에 없었다. 쿵쾅쿵쾅. 멀리서 아이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오전 수업이 끝나고 점심을 먹기 위해 식당으로 달려가는 하급생들의 발자국 소리가 또렷이 두 사람 귀로 들려왔다. 벌써 이런 시간인가. 이사쿠는 서둘러 정리를 마무리했다. 오후에는 6학년 실습수업에 대한 공지가 있기에 이동해야 됐다.
“죄송하지만 오후에는 수업이 있어서 그만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음, 그런가. 나도 슬슬 가볼 참이었으니 괜찮네.”
“차만 대접해서 죄송해요. 그러고 보니 신베가 얼마 전에 옆 마을에 맛있는 당고 가게가 생겼다고 했는데 다음에 사서 대접해 드릴게요.”
“오, 그거 기대하겠네.”
자연스레 다음에 만날 때를 기약하는 두 사람은 평소처럼 불시에 만나 갑자기 사라지는 만남을 반복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잣토가 문지방을 막 밟으려고 할 때 그에게 등을 보여 약초들을 이름표가 적힌 서랍에 각각 분류해서 차곡차곡 넣어두고 있는 이사쿠가 슬며시 말을 던졌다.
“그리고 제가 진심으로 화를 낼 때는, 잣토 씨가 그런 식으로 죽을 때 일거에요.”
조금 전의 이야기의 연장선을 불시에 이어나간 이사쿠의 돌발적 발언에 잣토는 고개를 돌려 이사쿠를 다시 살폈지만, 이사쿠는 여전히 잣토의 눈에는 어린 등만을 보여주며 분주히 움직였다. 덕분에 잣토가 이사쿠의 얼굴 대신 볼 수 있었던 것은 높이 묶어 그의 움직임에 따라 굽이지고 하늘하늘 흔들리는 잔머리가 많은 검은 말총머리뿐이었다.
“잣토 씨는, 저를 화나게 만들지 않으실 거죠?”
그것은 일종의 믿음이고, 다짐이고, 기약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신념의 투영이었다. 젠포우지 이사쿠의 본질을 가장 깊게 건드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졌지만 동시에 그 가능성을 발휘할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잣토 콘나몬이었던 것이다. 정말로 아이러니했다. 아아, 자네는, 정말인지. 잣토는 평생에 걸쳐 이토록 사랑스럽고 희귀한 고백은 난생 처음으로 들었다. 그리고 그 고백을 오로지 자신만이 들을 수 있는, 다른 이들은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발언이라고 생각하니 더욱 이 아이가 자신의 것이라는 사실이 실감났다. 잣토는 잠시 문지방을 밟고 서 있다가 떠나려던 발걸음을 돌려 다시 보건실 안으로 들어와서는 이사쿠의 머리를 한 번 큼직하게 쓰다듬어줬다. 갑자기 무게감 있으나 부담 없이 내려앉은 익숙한 손길에 이사쿠는 바로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잣토는 늘 그렇듯 신기루처럼 순식간에 눈앞에서 자취를 감췄다.
흔적도 없이 떠나버린 잣토의 공백을 이사쿠는 멍하니 보다가 이윽고 어색하게 손으로 벌겋게 달아오른 귀를 감싸 쥐며 뒤늦은 쑥스러움을 드러냈다. 분명 그가 머리를 쓰다듬었을 때 머리카락으로 애써 감췄던 붉은 귀를 발견했을 거라고 생각하니 이사쿠는 다른 것보다 그것이 민망스러웠다.
그가 가까이 다가왔을 때 맡을 수 있었던 체취와 머리에 눌려진 손바닥의 온기가 이사쿠의 주변을 여전히 맴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