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의사 잣토와 생령 이사쿠라는 설정.
잊지 마세요. 더 많은 걸 잊어야 할 때가 올 거에요.
그대 기억 속에 피는 꽃이라고 말하진 마세요.
더 크고 넓은 꽃잎들을 그대는 잊어야 할 거에요.
난 그대에게 줄 게 없었어요.
피도 눈물도 내 것은 하나도 없는 몸뚱이를 그대가 가졌으면
ㅡ강정, 「나를, 그대를」 中ㅇ
귀신을 볼 수 있게 된 것에 대해 딱히 큰 감상을 품거나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저 남들과 다른 것이 보이는 구나, 하는 정도일까. 외견부터 남들과 다르게 되었으니 보이는 시야마저 달리 되었다 해서 유난을 떨 필요는 없다. 그리 여겼을 뿐이다. 주변이 북적거리게 되었다는 소소한 변화는 생겼지만 이쪽에서 신경을 쓰지 않으면 상대 쪽에서도 큰 관심을 두지 않으니 그 정도는 너그러이 넘어가도 되는 일이다. 그러니까, 이 불가사의한 능력에 대해 난처함을 가진 것이 의외로 드물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어떨까.
“잣토 씨, 무슨 생각을 그리 하세요?”
작은 걱정을 담아 자신을 부르는 친숙한 목소리에 잣토는 화급히 정신을 현실로 도로 옮겨다놓고는 작업이 멈춰져 있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정신을 차림과 동시에 현실에서의 감각이 되돌아오자 시신에서 전해 받을 수 있는 그 특유의 차가운 섬뜩함이 손끝으로 바로 전해졌다. 염(시신을 닦는 일)을 하던 도중에 딴 생각을 하다니, 망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고, 장의사라는 직업을 지닌 프로로서의 올바른 태도도 아녔기에 잣토는 스스로를 힐책하는 의미로 후 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런 잣토의 모습을 아까 전부터 줄곧 걱정에 찬 눈빛으로 지켜본 이가 있었다.
“많이 피곤하신 것 같은데 조금 쉬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아니, 괜찮다. 조금 있으면 끝나니까.”
잣토는 금방 상대의 걱정을 물리고 다시 작업을 재개했다. 조금이라도 머뭇거리거나 오래 둬서는 안 되는 작업이었다. 잣토는 다시 신중한 손길로 흰 천을 쥐고 시신의 몸을 닦는 일에 열중했고, 그 모습에 소년도 여전히 걱정에 찬 기색을 드러내고 있지만 쉬라는 권유를 더는 하지 않고 평소처럼 잣토가 하는 일을 쭉 지켜봤다. 시신을 닦는 작업을 지켜보는 귀신이라니, 새삼 그 사실을 자각하니 이만큼 음험하고 서늘한 일이 또 있나 싶었다. 그러나 여전히 잣토의 시야에 들어오는 소년은 그에게 있어 사랑스럽게만 보이는 존재였다.
그러나 사랑스럽기에, 그 안에 아직 품고 있는 차가운 온기가 불안하고 위태로워 보일 수밖에 없었다.
[잣이사]장의사의 유예
W. Arcadia.
벌써 햇수로 9년이 지난 일이다.
잣토 콘나몬이 처음부터 장의사라는 직업을 선택한 것은 아니다. 그는 젊은 시절 어느 대기업에 취직해서는 좋은 실적을 올리며 승승장구 위로 올라가던 유능한 사원이었다. 그를 신뢰하는 상사들과 존경하는 부하 직원들, 그리고 잣토 본인마저도 그의 앞길은 화려하게 빛나는 눈부신 탄탄대로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래서 그 길이 거대한 화마에 송두리째 타버려 새까만 잿빛이 될 것이라고는, 감히 예상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사고였다. 불의의 사고. 잣토는 당시의 일을 잘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제 몸뚱이에 남겨진 사고의 흔적으로 당시의 참상을 가늠해볼 뿐이었다. 지독한 전신 화상과 반년 간의 혼수상태, 그리고 갑자기 귀신을 볼 수 있게 된 두 눈이 화마의 사고가 잣토에게 준 예기치 못한 선물이었다. 공허 속을 배회하던 정신을 일깨운 뒤 잣토는 침착하고 냉정하게 자신의 상황을 판단하고 받아들여 그에 따른 정리도 일사천리 진행했다. 눈을 뜬 그가 가장 먼저 신속히 처리한 일은 사직서 제출이었다. 회사에서는 유능한 인재를 이리 잃은 것에 유감을 표했지만, 형식적으로도 붙잡지는 않았다. 겉으로 뻔히 드러난 그의 참상을 보고 감히 붙잡을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붙잡는다고 해도 자신이 착한 사람에 도취되고 싶어 하는 얄팍한 동정심에 지나지 않았다. 아무튼 그간 쌓아둔 업적을 미련 없이 고스란히 회사에 놔두고 떠난 잣토가 선택한 새로운 길은 다름 아닌 장의사였다. 먹고 살기 위해서는 일해야 하는데 화상으로 일그러진 얼굴로 제대로 된 일을 구하기는 애초부터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니 남들은 꺼릴 직업을 선택하자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무엇보다 귀신을 보게 된 후로 어쩌면 이것이 자신의 천직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무언가의 계시처럼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로 잣토는 장의사가 되었고, 본인의 직업에 적응하면서 나름의 전문가로서의 의식도 자리 잡게 되었다.
그가 이사쿠를 만난 건 1년 전이다.
볼일이 있어 길을 걷던 중, 10대 중후반으로 짐작되는 연갈색 머리의 소년이 겁도 없이 차도로 들어가려 했기에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아이의 손목을 낚아채 인도로 끌어들인 것이 계기였다. 소년을 칠 기세로 달려오던 차는 처음부터 소년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했던 것과 같이 태평하게 지나쳤고, 차가 지나가면서 훅 끼쳐 불어온 매서운 바람 사이로 들려온 소년의 목소리는 더욱 스산했다.
“저…. 혹시, 제가 보이세요?”
그 말을 듣고서 잣토는 아차 하는 생각이 뒤미쳤다. 잣토가 구해준 아이는 생령이었다.
이미 완전히 죽어 육신을 떠나 구천을 떠도는 보통 귀신들과는 달리 생령은 조금 경우가 달랐다. 그들은 완전히 육신을 떠난 상태가 아녔다. 대개 혼수상태로 육체와 영혼과의 연결이 약해지면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영혼이 육체에서 빠져나와 방황할 때가 있는데, 그런 자들을 보고 생령이라 부른다.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존재. 그래서인지 생령은 불투명하게 몸이 비치는 흐릿한 유령들과는 달리 산 사람과 같이 뚜렷한 형태를 지니고 있었다. 그래도 평범한 사람들의 눈에 비쳐 들어오지 않는 건 여타 다른 유령들과 같은 처지지만 말이다. 그래서 잣토도 간혹 산 자와 생령을 혼동할 때가 있었는데, 소년을 구할 때가 바로 그런 경우였다.
소년은 먼저 자신의 이름이 젠포우지 이사쿠라고 밝혔다. 생령이라 차에 치여도 별 문제가 없는데도 굳이 예의바르게 구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잊지 않고 전한 그는 잣토에게 3년 전부터 의식불명으로 병원에 입원 중이라는 사정을 설명했다. 생령이 된지는 바로 며칠 전부터였는데, 처음에는 자신이 정신을 차리고 병원에서 탈출한 것인가 싶어 낭패감에 젖었지만, 지나가는 사람들 전부가 자신을 보지 못하는 것과, 병원에 찾아갔을 때 여전히 산소마스크를 끼고 요지부동 누워있는 자신을 보고 상황을 이해했다고 한다. 이런 자신의 상황을 이사쿠는 곤란해 하면서도 동시에 해방감을 느꼈다. 의식 없이 눕기만 해서 답답함조차 느낄 여지도 없었겠지만, 누워있는 자신의 모습과 반대로 의식을 잃기 전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며 돌아다니는 지금의 상황과 비교하니 불현 듯 자유가 이사쿠의 영혼으로 스며든 것이다. 그래서 일단 해결책을 찾을 겸해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그런 이사쿠를 잣토가 무심코 구해준 것이다.
어쨌든, 그런 경위로 해서 지금까지 잣토의 곁에는 이사쿠가 머물게 되었다. 평소에는 서로의 말동무 상대가 되어주거나, 소소한 재미에 어울려주거나 하는 사소한 일들이 전부였지만, 그 중에서도 잣토에게 있어 가장 인상적인 이사쿠의 모습은 시신을 염습하는 자신의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는 이사쿠의 모습이었다. 그 때만 되면, 이사쿠는 일이 끝날 때까지 가만히 잣토의 작업을 지켜보기만 했다. 종종 잣토가 작업하는 시신의 원래 주인이 그들을 배회할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면 이사쿠가 그를 데리고 한쪽 구석으로 가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말소리가 작아 무슨 내용인지 잣토는 알지 못했지만, 눈 흘김으로 훔쳐보는 이사쿠의 모습은 마치 추도문을 읊는 신부의 경건함과 죽은 자들에 대한 자비, 그리고 산 자는 결코 온전히 가질 수 없는 공감이 은밀히 풍겨져 와 잣토는 자신이 하고 있는 작업마저도 성스럽게 여겨질 정도였다.
아직 이승에 대한 미련이 남은 영혼의 손을 잡아주고는 고개를 숙여 눈꺼풀을 파르르 떠는 이사쿠의 모습은 숨이 멎을 만큼 아름다웠고, 그 모습에 정욕을 느끼는 자신이 너무도 불경스러워 형체도 없는 신에게 고해를 바쳐야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산자의 것이 아녔다. 그 아름다움은 죽음으로 치장된 금단의 것이었다.
잣토는 제 얼굴에 송골송골 맺혀서 붕대마저 적시고 있는 구슬땀을 손등으로 대충 닦아냈다. 물과 알코올로 적신 흰 천으로 시신을 구석구석 닦아내고, 몸에 남은 오물들이 새어나오지 못하도록 조취를 취하고, 마지막으로 시신 밑에 수의를 깔아 나중에 수의를 입힐 때 용이할 수 있도록 하는 밑 작업까지 마무리하면 장의사로서 해야 할 일은 완수된다. 시신에 수의를 입히는 일은 나중에 유족들을 참관시켜 진행할 예정이다.
잣토는 그제야 여유를 가지고 작업대 위에 올려 진 시신을 내려다봤다. 이번에 맡은 시신은 상당히 어린 축에 속한 사내아이였다. 잣토는 염습하기 전 봤던 자료에서 시신의 향년이 이사쿠와 비슷한 연배인 것을 떠올렸다. 소년의 얼굴은 살아있다는 화색 없이 창백하게 질린 백짓장처럼 된 만큼 그 얼굴에 드러난 표정 또한 단 한 점의 자잘한 감정 없이 깨끗했다.
“이 애는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어요?”
“듣자하니 자살했다고 하더군. 자살 원인까지는 듣지 못했지만.”
자살 방식은 과도한 약물 복용으로 인한 것이라서 겉으로 봤을 때 시신의 상태는 상당히 깔끔했다. 이사쿠는 시신을 내려 봤다. 그의 눈빛에는 동정이나 연민 같은 연약한 감정이 깃들어있지 않았다. 그것이 뭔지 잣토는 충분히 헤아릴 수 있지만, 그 눈빛 안에 뭔가가 서렸다는 존재 자체만 알고는 더 들여다보는 것을 관뒀다.
이사쿠의 피부색도 누워있는 제 또래의 아이 것과 상당히 닮아있었다.
“잣토 씨.”
밀폐된 작업실에 소년의 또렷한 목소리가 허공을 울렸다. 바로 옆에 있는데도, 자신의 얼굴을 올려다보고 있는데도 잣토는 아이의 얼굴을 마주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 뒤에 무슨 말이라도 날아올 것 같은 부름이었지만, 이사쿠는 그 뒷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자신의 이름 뒤에 슬금슬금 뒤따라 온 것은 상냥함이었다.
처음 만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잣토는 이사쿠에게 반은 감탄으로, 나머지 반은 가벼운 질림으로 너는 너무 상냥하다 말한 적이 있다. 요즘 세상에 그렇게 물렁거려서는 나중에 정신 차리고 제대로 살게 되었을 때 힘들다고, 그리 말한 적이 있었다. 그 말을 듣고 이사쿠는 그런가요, 하고 옅게 웃고 넘어갔다.
그리고 잣토는 그 날의 대화를 두고두고 후회했다. 아스라이 흩어져 사라지는 이사쿠의 미소를 그대로 떠나보내 잃어버린 것을, 지울 수 없는 미련으로 박제해버렸다.
* * *
3월 초입으로 들어섰지만 여전히 날씨는 꽁꽁 얼어붙었다. 한겨울 추위보다 더 극성맞게 억세다 하는 꽃샘추위였다.
잣토는 이 시기에 즐겨 입은 고동색 트렌치코트의 옷깃을 여며 자꾸만 안으로 비집고 들어가려는 봄바람을 막아냈다. 몸이 이렇게 되고서는 더위와 추위 양쪽 모두가 버티기 힘겨워졌다. 화상으로 인해 피부가 약해져서 그런 것이라는 의사의 소견이 떠올랐지만, 잣토는 위안 삼아 던졌을 그 말이 자신의 몸 어딘가가 망가졌다는 뜻으로 밖에 해석되지 않았다. 잡생각은 그쯤에서 갈무리하고, 잣토는 자신을 반겨주며 열리는 자동문을 통과해 바깥보다는 뜨듯한 공기가 꾸역꾸역 메워져있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규칙적으로 구두가 바닥에 울리는 소리를 내면서 발걸음을 멈추지 않던 잣토는 접수처를 지나 안쪽에 있는 엘리베이터에 탑승하고는 3층을 눌러 위로 올라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엘리베이터는 3층에 도착했고, 문이 열리고 나서 내린 잣토는 입구서부터 속으로 반복해서 뇌까렸던 숫자와 똑같은 호수가 적힌 입원실 앞에 서고서 두 번 노크했다. 안에서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잣토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자 습기로 눅눅히 채워진 가습기의 공기가 잣토를 향해 훅 끼쳐들었다. 바깥과 달리 지내는 데 큰 불편함이 없는 딱 좋은 온도를 유지하고 있는 병실에서 들을 수 있는 것은 산소마스크 안에서 힘없이 울리는 숨소리와 여러 복잡한 기계들이 삐삐거리며 작동하는 소리가 전부였다. 잣토는 코트를 벗은 뒤 문을 닫고 안으로 깊이 들어갔다. 생령일 때나 잠들어 있을 때나 새하얀 혈색이 안타까운 이사쿠의 단정한 얼굴이 잣토의 한쪽 눈에 고스란히 들어왔다.
“여, 이사쿠 군. 또 와버렸어.”
이곳에 있는 건 알맹이 없는 껍데기에 불구하고, 본인과는 이미 전부터 면식이 있는 것도 모자라 묘한 연정까지 생기고 있는 단계에 도달했는데도 굳이 의식이 없는 그에게 가벼운 투의 인사를 전하는 기분은, 이런 표현이 과연 적당할지 모르겠지만, 부정(不淨)했다.
잣토는 침대 밑에 들어가 있던 작은 의자를 꺼내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능숙히 자리를 잡고 앉고서 이사쿠의 손을 잡았다. 쉽게 손 안으로 전부 들어오는 잠자는 소년의 손은 작고 차가웠다. 잣토는 그 냉기를 물리치고자 이사쿠의 손을 자꾸만 주물렸다. 그 정성 덕택인지 조금 시간이 걸리진 했지만 이사쿠의 손이 조금씩 뻣뻣함이 풀어지고, 잣토로부터 얻어와 더덕더덕 붙여놓은 온기로 전보다는 그나마 온기가 있는 모양새는 차리게 되었다. 이렇게 계속 온기를 주어 전신으로 퍼져나가면 굳게 닫혀있는 저 눈꺼풀도 겨울이 지나 눈 속에서 발아하는 새싹과 같이 사르르 녹아 트여질까.
「제가 죽으면, 잣토 씨께서 제 장례식을 잣토 씨가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어느 날 그 말을 들었을 때, 잣토는 그것을 조금 도가 지나친 장난으로 받아들이고자 했다. 그러나 이사쿠의 맑고 흔들림 없는 눈빛이 그에게 그럴 틈조차 엿볼 여지마저 빼앗았다. 그의 작업을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던 이사쿠의 안에서는 이미 그의 손길이 자신에게 주어질 마지막 구원의 손길로 비춰졌다. 잣토는 이사쿠에게 무슨 말이라도 해주고 싶어 했다. 아직 포기하기에는 너무 이른 나이가 아니냐고, 장기간 생령으로 있으면 나중엔 정말로 육체와의 연결이 약해져서 그대로 죽어 유령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래도 아직 기회는 있다고, 그런 말을 해줘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잣토가 정말로 이사쿠에게 전하고 싶어 하는 말은 그런 상투적이고 교훈적으로까지 들려오는 힘없는 설득 같은 것이 아녔다.
「제 몸을 다른 누구도 아닌, 잣토 씨가 직접 깨끗하게 닦아줬으면 해요. 그게 제가 살면서 처음으로 바라는 소원이에요.」
그러나 이사쿠가 한발 앞서 잣토의 속뜻을 읽어버렸기에, 그의 말이 형태로 만들어져 입 밖으로 나오기 전에 먼저 막아냈다. 그 말의 다음으로 지어진 미소는, 기대와 미안함이 어지러이 뒤섞여진 여린 슬픈 빛이었다.
그 말이 나오고 나서 벌써 며칠이 지났다. 그 후로 이사쿠의 입에서 당부 차 같은 내용이 재차 반복되는 일이 없었고, 그 대화를 상기시키는 언행도 일체 드러내지 않으며 서로 평범하게 대화를 나누고 함께 지내는 일들만이 반복되었다. 그러나 잣토의 안에서 이사쿠의 말은 여전히 잔존하여 일종의 의무감 비스무리 한 것을 억지로 상기시켰다. 그도 이미 이성적으로 상황을 판단했다. 병문안을 올 때마다 나날이 안 좋아지는 안색과 주치의의 비관적 전망만이 꽉 들어찬 소견만으로도 소년의 죽음은 모두가 부정하지 않는 기정사실이자 벌써부터 실현된 현실이었다. 이사쿠로부터 유언을 들은 후로 잣토는 몇 번 정도 상상했다. 이사쿠의 시신을 작업대에 올려놓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을 흰 천으로 구석구석 닦아내는 자신의 모습. 속세의 모든 미련과 오물들을 전부 걷어내어 조금이나마 태어났을 때의 아무것도 더럽혀지지 않은 순백의 상태로 돌려내는 작업. 그러나 그 작업을 행하기 전부터 이미 이사쿠의 몸은 눈부시도록 너무도 새하얗다. 그리고 그 위를 기어 올라가는, 지옥 불에 가까운 뜨겁고 사나운 화기에 달궈졌던 자신의 손끝 모양새를 덧그릴 때쯤이면 자신이 언제 이런 고약한 취향이 생겼나 싶은 자괴감이 몰려들었다.
몇 번이고 상상하고 또 그 위에 상상을 이어 붙인다. 그리고 겹겹이 쌓여가는 상상의 틈새에서 그는 자신이 소년을 얼마나 안고 싶어 하는 지를 깨닫고, 그것을 감히 갈구해본다. 설령 그것이 아무 의미 없이 텅 비어버린 주검의 것이라 한들, 잣토는 그마저도 사랑할 자신이 충분했다.
“이사쿠 군.”
그러나 그럼에도,
“나는 네가 죽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분명 머지않아 찾아올 봄날의 온기보다 따스할 온기를 품에 넣고 싶기에, 그는 소년을 대신해서 부질없는 희망을 계속 잡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