깔르님께서 신청해주신 잣이사 리퀘글입니다.
톡, 토독, 툭.
나뭇잎 위에서 작게 깨금발 치듯 잔망스럽게 노니는 소리가 났다. 성미 급하게 다른 이들보다 먼저 내려온 물방울이 아직 맺혀있는 아침이슬과 한데 뒤섞여 나뭇잎 끄트머리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다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기울어진 나뭇잎으로 인해 땅에 후두둑 떨어져 그대로 스며들었다. 시선을 조금 위로 올렸다. 구름이 많지만 옅은 햇살을 내리쬐고 있는 새하얀 해는 드문드문 구름 뒤에 감춰져 있다한들 완전히 가려지지 않았다. 햇살을 타고 가는 빗방울이 살금살금 몰래 내려왔다. 여우비였다.
바스락. 수풀 흔들리는 소리가 부산스럽게 났다. 기척과 수풀 흔드는 소리가 나는 곳으로 천천히 눈동자를 움직이니 작은 새끼여우가 목만 빼끔 내밀고 나를 쳐다봤다. 뒤이어 어미로 여겨지는 큰 여우가 사람인 내 존재를 확인하고는 망설임 없이 새끼의 목덜미를 물고서 후다닥 숲 속으로 도망쳤다. 여우비가 내리는 걸 알자마자 여우가 불쑥 튀어나오는 게 어쩐지 재밌어 잔웃음을 부스스 터트렸다. 아, 이런 게 평화롭다고 하는 건가. 크고 작은 전쟁이 지금도 벌어지고 있고, 산 하나만 넘으면 바로 전쟁터인 이곳에서 평화로움을 만끽하고 있다는 것이 감사하면서도 죄스러웠다. 여우 모자가 떠난 자리에 시선을 오래 두다가, 더는 지체하지 않고 잰걸음을 쳤다. 비 내음 섞인 햇볕이 유독 신경 쓰였다.
바지런히 걸어 도착한 곳은 어느 방 앞이었다. 조심스레 문을 여니, 방 한가운데에는 얇은 유카타를 입고 이불 속에서 상체만 일으킨 채로 멀거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던 그가 자리해 있었다. 온 몸에 붕대를 칭칭 감은 그는 유일하게 밖으로 드러난 오른쪽 눈으로 나를 발견하고는 선선히 웃어줬다.
“좋은 아침, 이사쿠 군.”
깊고도 황폐한 피로로 지쳐있지만 제 이름을 부르는 것에는 그나마 생기와 감정이 미약하게나마 서려있어 잠시 뜸을 뜰이다가, 최대한 서글픔을 물러낸 미소를 지으며 뒤따라 답해드렸다.
“좋은 아침이에요, 잣토 씨.”
마찬가지로 지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였지만, 그의 이름을 부르는 음색만큼은 상냥했다.
이사쿠가 잣토와 함께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깊고도 험준한 산중에 꼭꼭 숨어서 터를 잡게 된 지는 생각보다 얼마 되지 않았다. 그래서 눈을 감고 가만히 상념에 잠기다보면 어렵지 않게 산에 들어오기 전에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에 대해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잣토는 타소가레도키 군의 두령으로서 맡은 임무를 충실히 해냈고, 이사쿠는 졸업 후 닌자의 길을 포기하고 의료 봉사자로서 전쟁터의 부상자들을 피아 구분 없이 치료해주면서 시신들을 수습해 궁색하게나마 장례를 치러주곤 했다. 이사쿠가 닌자의 길을 포기한 것에는 천성이 닌자라는 직업에 맞지 않다는 이유도 있지만, 졸업 직전에 회복 불가 판정을 받은 오른쪽 다리가 결정적이었다. 그래도 이사쿠는 아쉬움을 가지지 않았고, 닌자가 되어 전쟁터에서 동기들과 적이 되어 만나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감사함을 가지기도 했다. 다만, 잣토가 졸업하기 몇 달 전에 자신에게 제의한 타소가레도키 군으로의 스카웃을 받지 못한다는 점이, 미안할 따름이었다. 그래도 두 사람은 여전히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교류를 이어나갔다. 단순히 보은을 주고받은 사이라고 치부하기에는 그보다 더한 각별함이 필시 존재했다. 이미 잣토의 수하들 사이에서 이사쿠는 두령의 정인이나 매한가지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직접적으로 서로의 관계를 인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았다. 전쟁의 시대였다. 죽음이 만연한 시대였다. 그런 불안정한 시대에서 서로의 정을 확인한다는 것이 어떤 위험을 동반하는 일인지는 서로가 가슴 저리도록 잘 알았다. 그저, 서로가 내일도 살아있어 주기를 바라는 것 이상의 사욕을 부려서는 안 될 정도였다. 그래서 이 정도에서만 만족해야 한다. 서로의 생사를 확인하고, 얼굴을 마주보는 것만으로도 과하다고, 이사쿠는 스스로의 감정을 절제했다. 무엇보다 자신의 철없는 감정으로 잣토를 곤란하게 만드는 일은 싫었다.
그저, 이렇게 서로가 살아갈 수만 있다면.
안타깝게도, 그 소박한 바람만으로 만족했던 시절도 있었다.
평소처럼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전장을 떠돌며, 부상자들을 치료해주고, 오늘도 때를 맞추지 못해 자신의 손아래서 차갑게 식어가 구하지 못한 사람들을 묻어주던, 이제는 일상인 그런 평범한 날에 이사쿠는 고개를 들어 자신의 주변을 둘러봤다.
황량한 벌판 위에 빽빽이 솟아난 것은 죽음과 공허가 전부였다. 자신이 아무리 사람을 구해도, 날이 갈수록 욱신거리는 다리를 질질 끌고 방랑해도, 결국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펴보면 산 사람 보다 죽은 사람이 훨씬 많았다. 그런 시대였고, 그것이 당연한 이치로 받아들여지던 시대였다. 그러나 이사쿠는 아직도, 그것을 당연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누군가의 죽음을 자신에게서 떨어뜨려 놓을 수가 없었고. 그러다보니 자신도 눈치 채지 못한 새 천천히 허무함으로 지쳐갔다. 자신의 일에 회의감을 가지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사람이 죽는 것도 태어나 살아가는 것만큼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언제까지 부조리한 죽음 속에서 이런 황폐함을 지켜봐야 할지를 생각하면, 눈앞이 아득해질 수밖에 없었다. 전쟁은 죽은 자가 아닌, 산 자를 서서히 좀먹어간다는 말이 맞는 셈이었다.
이사쿠가 그런 허망의 수렁에 잠겨갈 때, 잣토가 쓰러졌다.
주군을 지키다가 대신 칼침을 맞았다고 하는데, 하필이면 그 칼에 맹독이 발라져 있어 사경을 헤매고 만 것이다. 오래 전, 자신의 몸을 거의 불살라 버렸던 화마에 삼켜졌을 때와 맞먹는 고통 속에서 잣토는 다른 선의들은 모두 물러내고 이사쿠만을 찾았다. 손나몽을 통해 사정을 들은 이사쿠가 한달음에 달려왔고, 성에 있는 선의들의 도움을 받아 이사쿠는 잣토의 목숨을 살려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독의 후유증은 꽤나 오래 가는 것인지라 금방 복귀하는 건 어렵다는 것이 다른 선의들의 소견이었다.
항상 죽음을 길동무로 삼고 다니며, 겉으로 봐도 죽음을 둘러매고 다니는 남자긴 하지만, 이번만큼 죽음과 가까운 모습을 보여주기는 처음인지라 이사쿠는 자신이 무슨 정신으로 잣토를 치료했는지조차 거의 기억해내지 못했다. 다만 손나몽이 자신마저 쓰러져 환자가 또 하나 늘어나는 게 아닐까 노심초사로 지켜봤다고 하니 맨 정신으로 치료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 때, 이사쿠는 처음으로 죽음보다 더한 두려움을 겪었다. 지옥에 있는 심정이라는 관용구를 써도 당시의 제 절망이 얼마만큼 이었는지 다 설명할 수 없을 정도였다. 좋아하는 사람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실감이, 현실이 되어 다가오는 것만큼 끔찍한 것은 없었고, 그와 동시에 가장 잔혹한 방식으로 자신이 잣토를 얼마만큼 소중히 여기며 사랑하고 있는지 재차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잣토가 의식을 차린 날, 이사쿠는 한 가지 결심을 세웠다.
“오늘 밖에 여우비가 내렸어요.”
“호오. 한동안은 비가 잘 내리지 않았었는데.”
“네. 여우비라도 내려서 다행이에요. 참, 조금 전에 숲 쪽에서 아기 여우하고 어미 여우를 발견했어요. 여우비가 내려서 그런가.”
“그러고 보면 여우비는 여우가 신통력을 부려서 내리는 비라고도 하지.”
“아, 그럼 역시 그 여우 모자가 비를 내리게 한 걸까요?”
“글쎄… 어쩐지 즐거워 보이는군, 이사쿠 군.”
“네?”
“비가 내리는 게 그렇게도 반가운 건가? 난 지금까지 자네가 비를 싫어하는 줄 알고 있었는데.”
아. 잣토의 말을 듣자 이사쿠는 무심코 자신의 오른쪽 다리에 손을 얹었다. 날이 흐리거나 비가 오면 자신의 다리가 평소보다 더 쑤셔온 탓도 있고, 원래부터 흐린 날을 좋아하지 않는 것도 있지만, 자신의 다리만큼이나 잣토의 몸 상태도 현저히 나빠지기에 더욱 비를 싫어하게 된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하지만 그것을 솔직하게 말하기에는 어째 부끄러운지라 이사쿠는 살짝 말을 돌리는 의미에서 잣토의 물음에 이리 답해줬다.
“여우비는 좋아해요. 날이 흐리지 않고, 비와 해를 동시에 볼 수 있잖아요. 구름으로 잔뜩 흐린 날보다는 비가와도 해가 환히 나오는 날이 더 좋잖아요.”
“…그렇군. 나도 자네가 이리 들뜬 모습을 보는 게 더 좋군.”
그리고 잔물결 같은 웃음으로 이사쿠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아, 오늘은 비가 와줘서 정말 다행이다. 이사쿠는 속으로 여우 모자에 대한 깊은 고마움을 표했다. 독으로 심신이 피폐해진 탓에 잣토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은 꽤나 드물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의 웃음은 옛날의 것과 상당히 많이 닮았기에 이사쿠는 이곳이 오두막이 아닌 보건실이라는 착각마저 들었다. 자신과 잣토가 가장 행복하다 말할 수 있을 것 같은 그 시절 말이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고 해도 독의 후유증은 아직도 잣토의 몸 안에 잔존해 있었고, 치료하는 과정에서 가뜩이나 화상으로 성한 데가 없는 몸에 한층 더 부담이 가서 앞으로 얼마나 더 살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이제 정말로, 잣토는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것 없는 몸이 되었다. 그렇다면, 얼마나 남아있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잠시라도 좋으니 그에게 삶의 평온함과 안식을 주고 싶었다. 전쟁의 잔혹함과 죽음의 공허함에서 나약하고 비겁하게 도망친다고 해도 더는 그곳에 있고 싶지도, 잣토를 잃고 싶지도 않았다. 그것이 인생의 대부분을 타인에 대한 이타심으로 살아온 이사쿠가 생애 처음이라 감히 말해도 될 만큼 강렬하게 품은 이기적인 소원 하나였다.
잣토 씨, 저와 함께 떠나실래요?
그 날도 잔비가 내렸었다. 잣토는 진지한 표정이지만 여전히 앳된 티가 지워지지 않고 남아있는 이사쿠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다가, 머지않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혹은 이 날을 예감하고 기다렸다는 듯이 답해줬다.
그 말은 내가 먼저 이사쿠 군에게 말해주고 싶었는데 말이지.
그 말을 듣고 또 펑펑 울어버린 자신을 보며, ‘자네는 정말 보는 사람을 곤란하게 만들 만큼 눈물이 많아서 탈이야.’라고 달래주는 잣토의 쓰다듦에 이사쿠는 제 눈물을 추스르지 못하고 한참이나 그를 붙잡고 매달려야 했다.
찰나의 평화 속에서 두 사람은 비로소 서로가 깊이 품었던 피로와 지침을 겉으로 드러낼 수 있었다. 서서히 죽어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지금껏 살면서 이토록 행복하고 편안한 적은 없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두 사람은 지금 이 순간이, 무엇보다도 소중했다.
이사쿠와 생각이 일치했는지, 잣토는 두 팔을 벌려 이사쿠에게 자신의 품을 한껏 드러내 보여줬다. 이사쿠는 그런 잣토의 모습에 잠시 머뭇거리다가, 꾸물꾸물 잣토의 품 안으로 파고 들어갔다. 진한 약초 냄새와 아직도 채 가시지 않은 독 냄새, 그리고 화상과 독으로 점차 썩어 들어가는 살내음이 뒤섞여 이사쿠의 후각을 자극했다. 그것을 불쾌히 여기지 않고 한껏 들이마셨다. 잣토도 이사쿠의 마른 낙엽을 닮은 연갈색 머리카락에 코를 박고 조금 달콤한 향이 감도는 약초 냄새를 음미했다.
잣토 씨, 만약에…. 이사쿠는 거기까지 말을 잇다가 이내 관두고 더욱 깊이 잣토의 품 안에 파고 들었다. 아직은, 아직은 살아있다. 적어도 지금은 그 살아있음에, 지금의 평온함에 취해 있어도 괜찮지 않을까. 그런 이사쿠를 위로하듯이 잣토는 말없이 이사쿠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평소처럼, 옛날처럼, 지금처럼.
툭, 투둑.
밖에는 여전히 여우비가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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