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위기 있는 루로우를 쓰고 싶어서 짧게 써보는 단문.
그는 항상 어느 작은 놀이터의 그네에 앉아 있는 사람이다.
꼭 저녁놀이 거의 다 저물 무렵, 어스름이 식어가는 초저녁쯤에 집을 나서서 10분여 정도 걸어 가다보면 나오는 작은 놀이터에 그는 앉아있었다. 루피는 그를 의식해서 발견한 것이 아니다. 그의 존재를 처음 의식하고 그 모습을 처음 눈에 들여서 발견하기 전에도 그는 매일 놀이터에 찾아와 지정석인 오른쪽 그네에 앉았을 것이다. 어쩌면 루피는 전에도 그의 존재를 발견했을 것이다. 다만 놀이터의 부속물 중 하나로 무심히 흘러 넘기거나 다른 상념에 정신이 팔려 그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했을 뿐이다. 어쨌거나 중요한 건 루피는 이제 놀이터의 남자를 알게 되었다. 그것이 중요했다.
남자의 복장은 같았다. 흰색 바탕에 검은 얼룩무늬가 그려진 털모자와 검은 트렌치코트, 그 아래로 보이는 청바지, 목을 칭칭 감은 털실로 짠 검은 목도리. 놀이터에 지내는 허름한 노숙자로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는 항상 그네에 앉아 멍하니 하늘만을 올려다보기만 할 뿐 그 이외에 다른 행동은 하지 않았다. 어스름의 시작부터 새벽의 끝까지 남자는 하염없이 자리를 지켰다. 루피는 한 번 의식하기 시작한 이후로 계속 남자의 모습을 목격했다. 기다림으로 만들어진 사람 같았다. 무엇을 기다리는지도 모르는 기다림으로 남자는 매일 놀이터의 그네에서 자리를 지켰다.
루피가 남자에게 처음으로 말을 걸기 위해 내민 것은 근처 편의점에서 구입한 따뜻하게 덥혀진 녹차였다.
남자는 루피가 불쑥 내민 그것을 거절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두 손으로 받아들고 마시지도 않은 채 한참이나 손에 쥐고 있기만 했다. 그리고 루피는 잠시 어색히 서 있다가 저녁 식사 시간이 되자 머뭇거리며 집으로 돌아갔다. 그것이 두 사람이 나눈 첫 교류였다.
그것을 계기로 루피는 항상 음료수를 사서 남자가 있는 놀이터를 방문했다. 음료수의 종류는 그야말로 다양했다. 남자는 어떤 음료수를 내밀어도 묵묵히 그것을 받아들어 손에 난로 대용으로 가만히 쥐고 있기만 했다. 가끔은 손에 쥐다가 음료수를 마실 때도 있었다. 루피는 그 행동 패턴을 통해 남자의 취향을 알아냈다. 남자가 주로 많이 마시는 것은 캔커피였다. 그것을 알게 된 후로 루피는 항상 남자에게 캔커피를 손에 쥐어줬다. 두 사람의 대화는 루피의 일방적인 말이 전부였다. 루피는 비어있는 남자의 옆자리, 왼쪽 그네에 앉아 수선스럽게 그네를 타고는 남자의 흥미를 돋우기 위해 별의별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자신의 형제, 친구, 자신에 대한 이야기까지. 상대의 대답은 없었으나 루피는 그 대화를 즐겼다. 대답이 없어도 남자가 자신의 말을 경청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챌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자신의 말을 가만히 들어준 적은 처음이라 루피는 텐션이 올라 에이스나 사보가 얼른 들어오라고 법석을 떨 때까지 그 추운 놀이터에서 남자의 곁을 메웠다.
어느 날, 이제는 일상이 되어 루피가 캔커피와 콜라를 들고 놀이터를 찾아왔을 때 먼저 그네에 착석한 남자가 가만히 입을 열었다.
“늘 신세를 지는군, 밀짚모자 여.”
남자의 목소리를 처음 들은 것과 동시에 자신을 가리킨 건지 짐작되지 않은 낯선 호칭에 당황한 루피는 그대로 굳어버려 한참을 가만히 서 있다가 정신을 차려 사태를 파악하자마자 평소 이상의 수선을 떨며 남자를 붙잡고 말을 했다는 것에 엄청난 리액션을 선보였다. 사실, 하도 말을 하지 않은 통에 루피는 진지하게 남자가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 가 골몰하기까지 했다. ‘밀짚모자 여’라는 호칭은 루피의 이름을 알지 못해 항상 쓰고 다니는 밀짚모자를 보고 본명대신 부른 거라 루피는 바로 자신의 이름을 가르쳐줬지만, 남자는 끝까지 루피를 ‘밀짚모자 여’라는 호칭으로 불렀다. 루피는 그것에 아쉬움을 느껴도 남자만이 부를 수 있는 호칭이라 생각하니 바로 웃음이 나와 쉽게 납득했다. 그 후로 남자는 필요가 생기면 가끔 루피를 밀짚모자 여 라는 특이한 이름으로 불렀다.
그러나 루피는 남자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가르쳐 달라고 몇 번이나 통사정을 해도 남자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남자 쪽은 그나마 이름 대신으로 부를 만한 호칭이 있는데 자신은 그런 게 없다는 게 불공평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루피는 남자가 싫지 않았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루피는 놀이터에서 이뤄지는 작고도 신비한 만남을 누구와도 공유하지 않고 저만의 비밀로 삼아 즐겼다.
남자는 자신의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고, 루피도 거기에 대해서는 특별히 추궁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끔, 그것이 신경 쓰이는 날이 있다. 날씨가 맑아서 밤하늘에 별들이 총총히 많이 뜬 날이나 달이 어느 때보다 크고 환히 빛나는 날. 어느 때보다 선명히 남자의 옆모습이 새하얗게 빛나며 선명히 눈에 들어올 때, 동시에 남자의 기다림이 뚜렷이 윤곽으로 그려져 외로움을 부각시킬 때, 루피는 더 없이 남자가 신경 쓰여 안달이 나면서 동시에 바로 옆에 있는데도 멀게만 느껴지고, 닿으려고 하면 달빛과 별빛에 섞여 바스라지지 않을까 노파심이 생겼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눈이 내리는 날, 작고 둥근 눈송이들이 보슬보슬 내리며 어느 때보다 추운 날에도 루피는 놀이터를 찾았고, 남자도 루피보다 앞서 놀이터에 있었다. 그는 늘 앉는 오른쪽 그네에, 평소와 같은 옷차림으로 루피가 질리지도 않고 사오는 캔 커피를 받아들었다. 눈이 내려서 그런지 오늘따라 놀이터 안은 적막이 촘촘히 들어찼고, 루피도 잠시 화두를 꺼내지 앉고 남자의 옆에 앉아 가만히 눈이 내리는 것을 관찰했다. 그러다 루피는 고개를 돌려 남자를 응시했다. 털모자 아래로 보이는 남자의 얼굴과 옆선, 그리고 목도리의 틈새 사이로 보이는 목선과 머리카락까지. 눈이 내려서 그럴까, 루피는 오늘따라 남자에 대한 관심과 신경이 지대하게 높아졌다.
“있지, 너는 여기서 무엇을 기다리는 거야?”
루피는 이 기회에 남자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줄곧 묻고 싶었던 질문을 던져봤다.
남자는 그 질문을 듣고 하늘로 치켜들던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리고 루피를 직시했다. 처음으로 남자가 루피를 마주보는 순간이었다. 그 반응에야 뒤늦게 루피는 남자가 이 질문을 줄곧 기다리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스쳐들었다. 남자는 다만 루피를 바라볼 뿐 그 이외에 다른 말도, 행동도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 손에 쥐어진 캔의 온기가 차차 식어가고, 그 위에 눈송이가 하나씩 내려앉아 녹아내려 물이 될 때도, 둘은 서로를 오랫동안 바라봤다. 루피는 줄곧 신경 쓰였다. 기다림으로 놀이터에 묶여 망부석처럼 자리를 지키는 남자의 모든 것이.
남자는 한참 뒤에야 아주 자연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글쎄. 누군가가 돌아오기를 기다린 건지, 아니면 여기서 나를 데려가 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건지, 그것도 잊어버릴 만큼 단지 기다렸을 뿐이라 잘 모르겠군.”
남자에게 남은 것은 기다림뿐이었다. 시간이 흘러 마모되고 퇴색되어 전부 날아가 버린 계기 뒤에 남은 건 남자의 현실적 처지 그 자체였다. 남자는 이제 기다림을 위해 기다렸다.
“너는, 어느 쪽이지?”
남자의 질문에 루피는 흐음, 하는 추임새를 흘리다가 자신이 앉은 그네를 그대로 흔들어봤다. 끼익. 삐걱거리는 그네의 이음새 부분이 무난히 울렸다. 루피는 잠시 질문을 답을 생각해보다가 두어 번 그네를 탄 뒤에 갑자기 그네에서 펄쩍 내려서는 남자의 앞에 서서 말했다.
“난 어느 쪽도 아니야. 난 그저 너랑 이렇게 같이 있고 싶은걸.”
그 말의 다음으로 루피는 남자에게 입을 맞췄다. 처음부터, 이렇게 하고 싶었다는 생각이 그 뒤를 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남자는, 트라팔가 로우는 그 말에 긍정하듯 두 팔을 뻗어 루피의 목을 감쌌다.
눈 위로 떨어진 캔 커피는 그대로 새하얗게 파묻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