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보다 분량이 많이 늘어나버렸습니다(...) 급전개가 있을 예정입니다.
아무렇지 않지 않은 사람이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면 그게 얼마나 눈물겨운 노력의 결과였는지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으시죠.
ㅡ박완서, 「기나긴 하루」 中
푸른 장미의 꽃말은 ‘불가능한 것’이라고 한다.
과연 그러한 꽃말에 걸맞은 최고의 미를 밤이슬과 함께 머금고 있었다.
정원사는 발을 내딛자마자 시야에 펼쳐진 푸른 절경을 숨 쉬는 것조차 잊어버린 채 멍하니 바라봤다. 이 세상의 아름다움이 맞는 것인지, 이곳 자체가 현실적 공간인건지에 대한 의구심을 가지게 하는 화원의 아름다움은 소문에 곁들어진 수많은 찬사로 범벅이 된 미사여구가 감히 뒤쫓지 못할 만큼의 황홀경을 화려하게 펼쳐냈다. 드디어, 드디어 이곳에 다다른 것이다. 뜬소문으로만 존재하던 푸른 장미 화원의 실경을 두 눈으로 생생히 목격하는 정원사로서의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 쵸로마츠는 하마터면 감격에 다리가 풀려 주저앉을 뻔 했다.
극적인 날에 걸맞게 밝은 만월이 뜨는 날 밤, 오소마츠는 쵸로마츠를 밤늦게 몰래 불러내 그를 데리고 뒤뜰을 지나 저택 뒤편에 위치한 작은 수풀을 거쳐 이윽고 높다란 덤불 울타리와 그 한 가운데에 덩그러니 있는 낡은 문 앞에 섰다. 놀라서 나자빠지진 말라고. 오소마츠는 어른들의 눈을 피해 장난을 실행에 옮기는 악동처럼 한쪽 눈을 찡긋거려 의미심장한 말을 쵸로마츠에게 던지고는 재킷 안주머니에 고이 넣어둔 화원으로 통하는 열쇠를 꺼내 문손잡이 아래에 있는 열쇠구멍에 넣었다. 철컥. 열쇠는 한 치의 뒤틀림 없이 딱 맞아 들어갔지만 녹 때문에 조금 뻑뻑하게 돌아갔다. 그래도 문은 문제없이 열렸고, 그렇게 해서 쵸로마츠는 비밀의 화원에 영광스러운 첫 발을 내딛게 되었다.
“어때, 대단하지?”
오소마츠는 쵸로마츠의 뒤에서 손가락으로 코 밑을 쓸면서 마치 자신의 화원인 양 뽐내는 어투로 자랑했다. 그는 이미 오소마츠 보다도 훨씬 이전에, 그리고 자주 화원에 발을 들이고 풍경을 감상한 익숙함으로 양 주머니에 손을 꽂고 쵸로마츠를 지나 작은 화원 안을 산책하듯이 한 바퀴 쭉 돌아봤다. 중간 중간 상한 장미가 있지 않은가 눈으로 대충 훑어보면서 오소마츠는 본격적으로 쵸로마츠를 이곳으로 데려온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사실 얼마 전에 쵸로 씨한테 이 화원을 맡기기로 결정 되었거든.”
“네!? 그, 그게 정말인가요?”
“응. 뭐, 절반의 결정이긴 하지만 말이야.”
“절반이라는 말은….”
“본래 이 화원은 외부의 솜씨 좋기로 유명한 정원사들을 비밀리에 불러서 관리를 시켰는데 결과물들이 하나 같이 마님의 성에 차지 않고 오히려 심기만 건드린 탓에 자신의 소중한 장미를 망친다며 불같이 화를 내는 마님의 등쌀에 쫓겨났거든. 마님의 히스테리는 옛날부터 무서우니까 말이야~”
그 말까지 듣고 쵸로마츠는 반사적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정원사로 일하면서 몇 번 마주친 중년의 마님은 그 나이에도 여전히 아름다운 미모를 구가했지만 조금이라도 자신의 마음에 차지 않거나 불만이 생긴다면 역정을 내면서 사람을 잡아먹을 기세로 몰아붙이는 경우가 많았다. 쵸로마츠는 일을 성실하고 똑바로 한 덕분에 아직까지 마님의 화를 산 적이 없으나, 지나가는 식으로 몇 번 메이드들을 잡아 세워 몰아붙이다 못해 손찌검까지 날린 모습을 본 적이 있어(이로 인해 관둔 사용인들도 적잖게 있다고 한다.)쵸로마츠는 더욱 마님의 앞에서는 정신 똑바로 차리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원사를 안부를 수도 없잖아? 한참 동안 마땅한 정원사를 찾지 못하다가, 쵸로 씨가 이 저택에 들어온 거지. 쵸로 씨가 성실한데다가 일도 흠 잡을 데 없이 잘해서 도련님이 주인어른한테 쵸로 씨에게 화원 일을 맡겨보자고 제의한 거지~”
“도련님께서요?”
쵸로마츠는 오늘 낮에 만난 도련님의 얼굴을 떠올렸다. 푸른 정장과 넥타이가 인상적이었던 자신과 같은 나이대의 청년이 주인어른에게 자신을 추천해줬다는 말이 영 믿겨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쵸로마츠는 오늘 낮에야 도련님의 얼굴을 직접 볼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뭐, 집안일에는 관심 없다고 해도 은근히 지켜보고 계셨던 거겠지~ 때마침 주인어른께서도 쵸로 씨 일을 좋게 보고 있었으니까 주인어른도 도련님의 추천을 받아들였던 거고.”
“그러면, 마님께서는….”
“말했잖아, 절반의 추천이라고. 유감스럽게도 마님은 아직 확답을 안주셔서 말이야~ 하지만 주인어른 승낙도 나왔으니 뭐든 대답이 나오지 않겠어? 그리고 일을 열심히 하면 마님께서도 좋게 좋게 나와 주시겠지~”
“상당히 무책임하게 들리는데요, 그거.”
남은 절반, 그것도 화원의 실질적인 주인이라 할 수 있는 마님의 허락과 신뢰를 완전히 얻어내지 못한 사실에 조금 풀이 죽은 기세가 되어버린 쵸로마츠의 모습을 본 오소마츠가 바로 뒷말을 덧붙이며 쵸로마츠에게 은근한 격려를 실어서 넣어줬다. 설렁설렁 던지는 격려에 쵸로마츠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오소마츠가 있는 쪽을 쳐다봤지만, 그 말에 기운을 어느 정도 받은 것은 사실이기에 금방 피식하고 웃어버렸다. 그 말이 맞았다. 실제로 여기까지 온 것도 자신의 노력 덕분이지 않은가. 한편, 오소마츠는 그새 화원을 한 바퀴 다 돌고 쵸로마츠의 앞에 폴짝폴짝 뛰어와 마주섰다.
“자! 그렇게 되었으니 일단 시험 차 한 달 동안 이 화원을 관리해보도록 해. 성과가 좋으면 그대로 화원 정원사로 영구 낙찰이지.”
“만약 마님의 마음에 계속 들지 못하면….”
“에이, 쵸로 씨. 굳이 그걸 말해줘야 아는 거야?”
짓궂게 말한 뒤 엄지손가락으로 목을 가로로 죽 그어버리는 오소마츠의 모습은 상대방의 일자리가 걸려있는 중대한 일인데도 여전히 무게감 하나 없이 장난스러워서 쵸로마츠는 영구 취직과 해고가 달려있는 이 중요한 기로를 제대로 자각해 달라며 따지고 싶었다.
“어때, 그래도 해볼 생각?”
이제 남은 것은 쵸로마츠의 대답이었다. 꿈의 완성을 위해, 실현을 위한 또 한 걸음을 내딛을 때였다. 대답은 훨씬 이전부터 정해졌음에도 막상 눈앞에 선택의 순간이 찾아오자 망설임이 찾아오고 그로 인해 자신감이 위축되어버린 탓에 쵸로마츠는 쉽사리 대답을 내놓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들어 올려서 오소마츠를 중심으로 시야를 넓혔다. 다소곳이 피어있는 푸른 장미들과 그들이 머금은 밤이슬을 비추고 있는 만월의 새하얀 빛, 그리고 자연의 절경에 둘러싸여 있는 오소마츠의 여유로운 미소. 그 미소를 보자, 쵸로마츠는 그가 마치 자신에게 어떤 격려와 안심을 보내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괜찮아. 너라면 괜찮을 거야. 그의 입 꼬리에 내걸린 초승달 같은 호선이 꼭 자신을 향해 그리 속삭여주는 것 같았다. 그 미소만을 봤음에도, 쵸로마츠는 오소마츠가 자신을 믿고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꼈다.
그리고 그의 말처럼, 정말로 모든 것이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스쳐들었다. 오소마츠 씨가 있어준다면, 그가 이렇게 자신의 옆에서 웃어주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자신답지 않은 안일한 생각임에도 불구하고 쵸로마츠는 주먹을 꽉 쥐어서 잔뜩 긴장에 찼지만 그럼에도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외쳤다.
“해, 해보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처음 저택의 정원사로 들어왔을 때 인사를 올렸던 그 때처럼, 잔뜩 굳어진 목소리와 90도로 숙여진 허리를 오소마츠의 앞에서 다시 한 번 보여줬다. 기합이 잔뜩 들어간 쵸로마츠의 인사에 오소마츠도 기세에 밀려 잠시 놀라서 눈을 두세 번 정도 끔뻑거리다가 이내 만족의 의미로 이가 훤히 드러날 만큼의 시원한 미소를 멋들어지게 지어보이고는 걸음을 옮겨 쵸로마츠의 바로 코앞에 서서는 그의 어깨를 두드려줬다.
“오우! 역시 쵸로 씨~ 시원스럽게 대답해줄 알았다니까! 한 달 동안은 나도 쵸로 씨랑 같이 화원에 올 테니까 나야말로 한 달 동안 부탁 좀 할게.”
“아, 네!!”
“이야, 대답 한 번 씩씩하네. 역시 동정원사 쵸로마츠 씨!”
“잠깐! 정원사 앞에 이상한 글자 넣지 말라고!!”
결국 마지막에는 얼빠진 말을 하는 오소마츠와 그런 오소마츠의 말에 절묘하게 태클을 넣는 쵸로마츠의 대화로 마무리 되었다. 평소에는 조용하던 화원 안이 갑자기 두 남자로 인해 시끌벅적해지자 장미들도 긴 잠에서 눈을 부비고 깨어나 무슨 일인가 싶어 둘의 대화를 바람결 따라 기웃거리며 살폈다. 화원에 처음 발을 들인 낯선 남자와 함께, 오래 전부터 화원에 발을 들였음에도 자신의 푸른빛과는 여전히 어울리지 않는 이질감으로 채색된 붉은 남자가 화원 안에서 오랜만에 웃고 있었다. 자신들이 화원에 심겨지고 나서 처음 보게 되는 남자의 웃음에 푸른 장미들은 신기하다는 듯이 남자의 웃는 낯을 흥미롭게 살폈다. 하지만 그런 장미들의 시선을 알아채지 못한 두 남자는 여전히 만담을 주고받으며 떠들썩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오소마츠의 바보 같은 말에 태클을 걸면서도 쵸로마츠는 한 구석으로는 오늘의 일을 자신의 꿈이 실현된 중요한 날로서 기억에 남길 것이라 다짐했다. 그리고 그 다짐대로 쵸로마츠는 이 날의 일을 절대로 잊지 않았다.
정신을 차려 되짚어보면 오소마츠가 중심에 놓여 진 그 날의 추억은, 시간의 흐름으로 멀어졌을 때 덧없는 기억으로 비춰지고 말았다.
그 날의 일을, 쵸로마츠는 다른 의미로 잊을 수 없게 되어버렸다.
* * *
그 날 이후로 쵸로마츠는 한 달이라는 기간 동안 화원의 임시 정원사로서 일하게 되었다. 다만 대외적으로 화원과 관련된 일들은 전부 비밀로 붙여지는 지라 평소에는 본래의 정원사로서 정원의 나무들을 관리하고, 밤에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몰래 화원으로 들어가 장미들을 다듬는 일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다보니 사실상 자는 시간을 줄여가며 하루 종일 일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이 되어버렸기에 육체적으로 더욱 고되어버렸지만, 그래도 푸른 장미를 자신의 손으로 쓸어보면서 깔끔하고 예쁘게 다듬을 때가 되면 쵸로마츠는 자신의 피로도 이렇게 잘라지는 것 같은 보람을 체감하여 힘든 것도 전부 견뎌낼 수 있었다.
쵸로마츠가 밤마다 화원으로 갈 때마다 오소마츠도 동행했다. 쵸로마츠가 일을 제대로 하고 있는 지에 대한 일종의 감시역과 더불어 화원으로 통하는 열쇠는 오소마츠에게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모두가 잠들 때 밖으로 나와 뒤뜰로 가보면 어김없이 오소마츠가 먼저 나와 등불을 손에 들고 쵸로마츠를 반겼다. 그런 오소마츠에 대해 쵸로마츠는 혼자서 밤에 화원을 관리해야 한다는 적적함에서 벗어날 수 있어서 기쁘면서도, 가뜩이나 평소에도 집사 일로 사용인들 중에서 가장 일찍 일어나 준비하는데 자신 때문에 그나마 없는 잠자는 시간을 더욱 줄여야하는 오소마츠에 대한 미안함, 그리고 자신에게 화원의 열쇠를 맡기지 않은 것에서 그가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 것인가 싶은 섭섭함이 한데 뒤섞여 여간 복잡한 심정이 아닐 수 없었다. 쵸로마츠가 작업을 할 때마다 오소마츠는 대개 하릴없이 화원을 빙빙 둘러보거나, 달빛이 어두울 때면 쵸로마츠 주변에 등불을 가져다가 밝혀주거나, 화원 입구 근처에 앉아 늘어지게 하품을 하면서 간간히 쵸로마츠에게 말을 거는 식이었다. 그럴 때마다 쵸로마츠는 정신 사나우니 돌아다니지 말라는 말과 시답잖은 소리로 사람 짜증내게 하지 말라는 불만과 태클을 열심히 걸어야만 했다. 하지만 쵸로마츠의 짜증에도 오소마츠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는 식으로 무던히 넘기면서 대충 끝내고 얼른 들어가자는 말로 쵸로마츠의 신경을 서슴없이 벅벅 긁었다. 그런 오소마츠에 대해 쵸로마츠는 몇 번이고 자신에게 열쇠를 맡기고 먼저 들어가라, 내일 아침 일찍 바로 열쇠를 돌려주겠다고 말했음에도 오소마츠는 끝까지 쵸로마츠의 작업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줬다. 이런 일이 몇 번 반복하고 나니 결국 제풀에 지쳐 체념하는 쪽은 쵸로마츠였다.
그래도 이런 식으로 그럭저럭 보름을 보냈다. 그동안 쵸로마츠는 화원 관리 전보다도 오소마츠와 함께 지내면서 그와 여러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달빛 아래서 푸른 장미를 다듬으며 오소마츠와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만으로도 낭만적으로 다가옴과 동시에 자신과 그, 단 둘만이 아는 비밀을 서로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에 저가 오소마츠에게 특별한 존재가 된 것 같아 이유도 모르게 조금 가슴이 떨릴 때가 가끔 있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쵸로마츠는 낮에도 오소마츠가 일하는 모습을 눈으로 뒤쫓을 때가 늘어났다.
그 과정에서 쵸로마츠는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오소마츠와 저택의 젊은 도련님과의 사이에 대해서였다.
사용인들 중에서 가장 최근에 저택에 들어온 쵸로마츠는 도련님에 대해 많은 것을 알지 못했다. 같이 일하는 사용인들을 통해 듣게 됨으로서 간접적으로 알게 된 정보들이 전부였는데, 평소에는 푸른 장미색과 같은 빛깔의 양복을 자주 입고 다니고 겉으로는 남자답고 조금 허세에 찬 말투를 사용하지만 본래는 상냥해서 사용인들에 대해서도 함부로 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아랫사람들이 자신을 떠받드는 것에 대해 지금도 여전히 부담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머니에게 혼나고 있는 메이드들을 감싸주는 일도 많았고, 사용인을 불러서 시키면 되는 일도 되도록 직접 나서서 하였다. 그런 도련님 이다보니 당연히 사용인들 사이에서는 평판이 좋았고, 메이드들도 이따금 양복 외의 이상한 센스로 치장하고 다니면서 안쓰러운 대사만 읊지 않는다면 정말 멋진 분이라면서 호평을 아낌없이 남겼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사용인들과의 거리감이 존재하는 분이었고, 그 점이 쵸로마츠가 그와 정식으로 만난 때가 한참 늦춰진 이유이기도 했다.
그런 도련님이 유일하게 허물없이 대하고 가까이 여기는 인물이 오소마츠였다. 옛날부터 친구처럼 같이 다녔다고 하는 두 사람은 지금도 마음먹고 찾아보면 같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포착할 수 있을 만큼 각별해보였다. 쵸로마츠도 그런 두 사람을 가끔씩 발견할 때가 있었다. 정원수의 꼭대기를 다듬기 위해 사용하는 높다란 사다리 위에 앉아 저택의 창문을 들여다보면 명확히 보이지 않더라도 도련님의 방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웃고 있는 오소마츠의 얼굴 정도는 확인할 수 있었다. 방주인과 대화를 나누고 있음이 거의 확실해 보이는 오소마츠는 무슨 이야기가 그리 좋은지 편안한 미소로 상대의 말에 즐겁게 맞장구를 쳐줬다. 그리고 쵸로마츠는 그 모습을 볼 때마다 기분이 묘하게 얹잖아지고 말았다. 친구 내지 형제의 이미지가 은은히 전해져오는 두 사람의 사이는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을 것처럼 보여 졌다.
화원에 있을 때도 저렇게 웃지 않았으면서.
먼저 창문에서 시선을 뗀 쵸로마츠는 화풀이에 가깝게 가위를 거칠게 휘둘러 조금 굵은 나뭇가지를 썩둑 잘라냈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가깝게 지내시는 거 아니에요?”
끝내 참지 못하고 밤의 장미 화원에서 벼르던 말을 꺼낸 건 쵸로마츠였다. 평소처럼 화원 입구에 자리를 잡고 앉아있던 오소마츠는 앞뒤 맥락도 없이 튀어나온 쵸로마츠의 핀잔에 의미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울타리에 기댔던 몸을 일으켜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도련님하고 원래부터 그렇게 가깝게 지낸 거예요?”
“뭐야, 그 얘기였어? 뭐, 이래저래 오랫동안 얼굴 봐온 사이이고, 나이도 같으니까 도련님 쪽에서는 날 친구 비슷하게 생각하고 계신 거겠지.”
“하지만 너무 무례한 건 아닌지….”
“뭐, 주인어른이나 마님이 알면 뒷감당이 힘들겠지만 어찌해서 잘 지내왔잖아, 안 그래? 그것보다 왜 갑자기 그 부분에 대해 태클을 거는 거야, 쵸로 씨~ 다른 사람들은 알고 있어도 그냥 넘어가는데 말이야.”
“그, 그건… 오, 오소마츠 씨는 언젠가 그런 태도 때문에 주인어른한테 크게 찍혀서 쫓겨날 것 같아 보는 제 쪽이 더 노심초사라서 그런 거라고요!”
“엑, 뭐야 방금 그 말! 나 그렇게까지 신용이 바닥이었던 거냐!!”
본심을 숨기기 위해 급하게 내던진 말에 아무리 오소마츠라도 가만히 듣고 흘리기는 어려웠는지 반쯤 상처 받았다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장미들 너머로 쵸로마츠가 있는 곳을 향해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쵸로마츠는 조금은 찔린 심정인지라 애써 일에 열중하는 척 장미들을 겉으로만 살펴댔다.
‘그것’을 발견하게 된 것은 그런 대화 속에서 불쑥 튀어나온 우연으로 빚어지게 되었다.
“어라? 이건….”
화원의 가장 구석, 빽빽이 우거진 장미 덤불 아래, 달빛이 서린 새파란 푸른빛 아래서 작게 웅크리고 있는 것은 그와 상반되는 붉은빛. 덤불을 헤치고 장미들을 잠시 거둬내야 겨우 발견할 수 있는 그것은 땅에 뿌리를 내려 작지만 그래도 구색에 맞춰 온전히 피어난 붉은 장미였다. 단 한 송이만이 피어있는 그것은 푸른 장미들에게 눌려 제대로 햇볕과 양분을 얻지 못해 크기도 작고 생기도 없어 싱그러운 느낌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볼품없는 모습 그 자체라 그냥 살펴도 장미의 화려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상품으로서도, 관상으로서의 가치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그것은 다만 그 자리에 조용히 피어나 제 생명의 존재를 피력했다. 그런 필사적인 생존과 더불어 기품 있는 푸른 빛 사이에 유일하게 상반된 빛깔을 띠어서 그런지 쵸로마츠는 정원사 이전에 평범한 사람으로서 그 장미가 어쩐지 눈길이 가 신경이 쓰였다. 붉은 장미라면 밖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이곳에만 존재하는 귀한 몸인 푸른 장미와는 달리 지천에 널리 퍼져서 피어있는 가장 흔한 장미였고, 쵸로마츠도 정원사의 일을 하면서 지겹도록 손을 본 평범한 장미인데도 말이다.
“쵸로 씨, 무슨 일이야? 혹시 숨겨진 보물이라도 발견한 거야!?”
쵸로마츠가 한참 동안 대답이 없자 의아하게 여긴 오소마츠가 머리 뒤에 깍지를 낀 상태로 터덜터덜 쵸로마츠가 있는 곳으로 다가오자 쵸로마츠는 정말로 오소마츠의 말대로 어떤 작은 보물을 찾아낸 것처럼 조금 들뜬 목소리로 그가 장미를 잘 볼 수 있도록 자세를 옆으로 비켜준 뒤 말했다.
“아, 오소마츠 씨. 여기 좀 보세요. 이런 곳에 붉은 장미가 있어요.”
“붉은, 장미?”
그 단어를 읊조리고, 부자연스럽게 발걸음을 멈추고 머리 뒤로 넘긴 손을 풀었지만, 쵸로마츠는 장미를 살피니 여념 없어 오소마츠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다.
“이곳에는 푸른 장미만 있는 줄 알았는데 여기서 붉은 장미를 보니 어쩐지 새삼스럽네요. 아, 이건 나중에 따로 다른 곳에 심어두는 편이 좋겠죠? 계속 이런 곳에 있으면 햇빛도 제대로 못 받아서 잘 자라지 못할 테니까….”
“아니, 뽑아버려.”
“…네?”
“그건 뽑아버려야 해.”
평소와 같은 가벼운 목소리와 생글생글 웃는 미소인데도, 그 안에는 위화감이라는 이름의 가시가 날카롭게 박혀있었다.
오소마츠의 매정한 말에 쵸로마츠는 놀라 그를 올려다보며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다. 푸른 장미 화원에 어울리지 않는 붉은 장미의 존재를 용납해서는 안 된다는 듯이 필요 이상으로 딱 잘라 뿌리째 뽑을 것을 단정 짓는 오소마츠의 낯빛은 때마침 구름 밖으로 나온 달빛에 비춰져 더욱 새하얗게 빛났다. 그 모습을 통해 느껴지는 선연함에 쵸로마츠는 저도 모르게 몸을 흠칫 떨고 말았다.
“쵸로 씨가 못한다면 내가 대신 하지 뭐~”
쵸로마츠가 자신의 얼굴만을 빤히 쳐다만 보고 아무 것도 못하자 오소마츠는 개의치 않다는 태도로 자신이 대신 뽑을 것을 자처하고는 쵸로마츠가 미처 말릴 틈도 없이 가시가 돋아난 장미의 줄기를 면장갑을 낀 손 그대로 움켜쥐고는 단번에 뽑아버리고 말았다. 게다가 그 붉은색마저 온전히 유지하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이 줄기를 잡던 손을 위로 올려 장미꽃을 사정없이 우그러뜨렸다.
오소마츠의 손아귀에 붙잡혀 그대로 송두리째 뽑혀 나간 붉은 장미는 그것으로 제 연약하고 덧없던 삶과 같은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제아무리 면장갑을 쓰고 있었다 해도 얇은 장갑으로는 날카로운 장미 가시를 막아내기 역부족이었고, 뽑았을 때 필요 이상으로 줄기를 잡은 손에 힘을 실어 넣은 탓에 가시가 더 깊숙이 손바닥을 파고든 탓도 컸다. 덕분에 오소마츠의 손 안에 흘러나오는 붉은 꽃잎은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손에서 면장갑을 적시고도 남는 핏물을 덧입혀서 그런지 본래 피어있을 때보다 훨씬 더 싱싱하고 붉었다. 그리고 쵸로마츠는 그 모든 광경을 아연한 심정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말았다. 무언가를 떨쳐내려는 듯이, 부정하려는 듯이 평소답지 않은 모습까지 보이며 장미를 뽑아버린 오소마츠의 모습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 행위의 이유도, 저질렀을 심정도 당최 종잡을 수 없었다. 애초에 지금 이 순간, 자신의 눈앞에 있는 인물이 정말로 그인지조차 의심스러웠다.
게다가 어째서,
“쵸로마츠 씨.”
오소마츠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쵸로마츠의 이름을 불렀다.
“다음번에도 저런 장미를 발견하면, 바로 뽑아서 버려야해. 알았지?”
잔잔한 미소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오소마츠는 쵸로마츠에게 중요한 당부를 남겼다.
ㅡ어째서 그런 눈빛을 하고 있는 거지.
쵸로마츠는 오소마츠의 당부에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장미 꽃잎이 바닥에 전부 떨어져 머금은 핏물을 전부 뱉어내 땅을 적시고, 적셔진 땅이 금방 말라버리는데도 쵸로마츠는 차마 그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겉으로 봐서는 평소의 미소와 다를 바 없는 선혈의 꽃잎 위에서 지어진 미소는, 우습게도 푸른 장미들 사이에서 감히 홀로 눈에 띄었던 그 작고도 쓸쓸했던 붉은 장미와 상당히 닮아있었다.
* * *
“대체 그 날 밤에 그건 뭐였을까.”
그 일이 있고 사흘이 흘렀다. 표면적으로 봤을 때는 아무 문제없이 일상으로 되돌아간 것처럼 보였다. 오소마츠는 집사 본연의 모습으로 되돌아왔고, 붉게 물들여졌던 면장갑도 다시 티끌 한 점 없는 새하얀 모습을 되찾았다. 그런 오소마츠의 모습을 볼 때마다 쵸로마츠는 그 날의 일이 마치 한밤의 꿈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그것은 꿈이 아니었고, 엄연한 사실이었다. 그래서 쵸로마츠는 그 날의 일에 대해 오소마츠와 좀 더 자세히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했지만, 그 화제와 조금이라도 연관된 말을 꺼내기라도 하면 오소마츠는 능숙하고 교묘하게 다른 화제로 돌리거나 일을 핑계로 자리에서 벗어나기 일쑤였다. 단 둘이 있을 수 있는 화원에서 때를 노려도 마찬가지로 오소마츠가 대화의 주도권을 시종일관 놓치지 않고 꽉 잡고 있어서 치고 들어갈 타이밍을 잡을 수가 없었다. 결국 이런 식으로 지리멸렬하게 사흘이라는 시간을 떠나보내고만 쵸로마츠는 슬슬 인내심이 한계점에 도달해가고 있다는 것을 절감하며 창고 벽에 세워둔 사다리를 화풀이로 조금 세게 걷어차고 말았다. 하여튼 이런 때에만 약삭빠르게 요령만 좋아서. 그것을 시작으로 한참 동안 오소마츠에 대한 불만들을 혼잣말로 죄다 쏟아낸 쵸로마츠는 마지막에 한숨을 마침표 삼아 찍어내 마무리를 한 뒤 답답함에 하늘을 올려봤다. 오늘도 날씨 한 번 빌어먹게 좋네.
그 때, 확실히 분위기가 평소와 달리 어딘가 이상했어.
혹시 붉은 장미와 관련해서 안 좋은 기억이라도 있는 건가. 그렇다면 자신이 오소마츠에게 상당히 실례된 일을 한 것이 아닐까. 그런 추론을 내봐도 쵸로마츠는 그 이상의 추측을 이어나가지 못했다. 지금에서야 되짚어서 차근히 살펴보면, 자신은 오소마츠에 대한 개인적인 일들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다는 나름 충격적인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대화의 주제는 대부분 쵸로마츠를 통해서 나왔고, 오소마츠는 그 주제에 따라 대화를 이어나가는 것을 거들어주거나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꺼내는 별 실속 없는 시시한 잡담과 말장난이 전부였다. 그렇게 많은 시간을 공유했고, 그 시간 안에서 수많은 대화를 주고받았는데도 쵸로마츠는 오소마츠라는 남자에 대해 완전히 알지 못했다. 그 사실이 오소마츠에게 비참함을 안겨줬다.
어째서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오소마츠와 관련해서 자신이 이런 감정까지 느껴야 하는 것일까.
아니, 사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조금씩 깨달아가고 있었다. 그와 둘만의 시간과 비밀을 가지는 것만으로도 꿈을 이루었다는 성취감에 앞서 만족감과 우월감, 그리고 벅차오르는 기쁨을 얻을 수 있었던 이유를, 쵸로마츠는 최근에 들어서야 비로소 확신을 거머쥘 수 있었다.
자신은, 오소마츠를 좋아하고 있다.
“어이.”
쵸로마츠가 마침내 오소마츠를 향한 자신의 감정을 하나의 문장으로서 확정지었을 때, 누군가의 낮은 목소리가 쵸로마츠를 짧게 불렀다.
부름에 따라 고개를 돌려보니 그곳에는 다름 아닌 주인어른의 외아들인 도련님이 서있었다. 소매를 걷은 새하얀 와이셔츠와 주름 하나 없는 양복바지, 그리고 푸른색 넥타이를 맨 그는 지난번의 복장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가벼운 복장을 하고 있었다. 짙은 눈썹을 팔자로 만들어 쵸로마츠를 안 좋은 인상으로 지켜보고 있던 도련님은 쵸로마츠와 눈이 마주치자 잠깐 눈썹을 꿈틀거렸지만 금방 원상태로 돌아왔다.
“훗. 제대로 마주보는 건 이걸로 두 번째인가.”
“도, 도련님께서 저에게 무슨 볼일로….”
“쭉 생각하고 고민했지만, 역시 그대도 이 일에 대해서 알아두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 말이지.”
“무엇을 말입니까?”
“쵸로마츠 씨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심정일지 어쩐지 조금 정도는 이해가 될 것 같아서 말이다. 훗, 정말로 여러 사람 곤란하게 만드는 재주는 타고났군.
…하지만 그럼에도 미워할 수 없지. 그런 점에서도, 사람을 곤란하게 만들어버리지만, 어쩔 수 없나.”
독백처럼 마지막 문장을 중얼거리는 카라마츠의 눈빛이 무언가를 그려내 호수의 일렁이는 표면처럼 한 순간 넘칠 듯 흔들렸다.
“‘형’은 그런 사람이니까.”
“…네?”
쵸로마츠가 도련님의 입에서 나온 호칭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반문하자, 그는 대답 대신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럼, 여기서 계속 이야기를 나누기도 그러니 내 방으로 가서 자세한 설명을 해주도록 하지.
그대도 확실히 알고 싶을 것 아닌가. 그 사람에 대해.”
그는, 카라마츠는 그런 식으로 쵸로마츠를 자신의 방으로 자연스럽게 유도했다. 그리고 그 뒤에 지어주는 조금 씁쓸한 미소는, 이 자리에는 없는 누군가와 상당히 빼닮아있었다.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에는 허투루 넘길 수 없는 닮은 형태에 쵸로마츠는 잠시 머뭇거리며 대답을 유보하다가, 이윽고 결심을 굳히고는 카라마츠를 따라 그의 방으로 향했다. 마치 처음 오소마츠의 뒤를 따라 화원으로 향했던 것과 같은 은밀함에 쵸로마츠는 자꾸만 쿵쾅거리는 제 심장 부근의 옷자락을 세게 말아 쥐었다. 카라마츠가 자신에게 할 이야기가 무엇인지, 오소마츠와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인지 지금의 쵸로마츠로서는 어느 무엇 하나 제대로 종잡을 수 없었지만, 지금의 그를 따라가면 자신이 모르는 오소마츠에 대한 면들을 들춰내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것만큼은 유일하게 확신할 수 있었고, 그것 하나만으로도 쵸로마츠에게는 카라마츠의 뒤를 따를 이유가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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