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망량의 상자」패러디.
*모브 시점으로 전개됩니다.
*고어+유혈+얀데레 주의. 일부 자극적 표현이 들어 있어서 문제시되면 바로 보호글로 돌립니다.
묻겠다. 당신에게 어느 날 절대로,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은 무언가가 생긴다면 당신은 그것을 어떻게 갖겠는가.
ㅡ이석원, 「실내인간」 中
나는 상상한다
아득하고 황량한 대지를 혼자서 걷는 남자
남자가 짊어지고 있는 상자에는 아름다운 소녀가 들어있다
남자는 만족한 얼굴로 어디까지고, 어디까지고 걸어간다
그래도
나는 왠지 몹시-
남자가 부러워지고 말았다.
ㅡ교고쿠 나츠히코, 「망량의 상자」 中
해야 할 이야기가 있다. 그와, 그 상자에 대해서.
지독한 뙤약볕이 무섭게 내리쬐어 지상의 모든 것들이 바짝 말라가던 7월 한낮의 점심 무렵, 나는 트렁크 하나만을 들고 승강장에서 기차가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도시에서 여러 일을 해봤지만 연이어 신통찮은 결과만 나왔고, 쌓여진 실패와 좌절로 인해 실패자로 낙오되어 고향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고향으로 돌아가 봤자 마을 사람들의 수군거림과 부모님의 실망어린 눈총만 받을 텐데도, 비참하게도 실패자가 돌아갈 곳은 그곳밖에 없었다. 고막을 쩍쩍 가르는 매미 소리가 시끄러웠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보면 구름 한 점 없는 마른하늘이 쨍했다. 무더위로 줄줄 흐르는 비지땀이 와이셔츠를 젖게 만들어 피부에 불쾌하게 달라붙게 만들어 안 그래도 절망적인 기분을 더욱 진창에 나뒹굴게 만들었다. 더위로 지친 축축한 한숨조차 기분 나빴다. 그렇게 잠시 승강장의 그늘 아래서 기다리니 드디어 기다리던 열차가 역으로 들어왔다. 나는 트렁크를 챙겨들어 역에 완전히 멈춰진 기차에 올라탔고, 조금 뒤에 열차는 출입문을 닫고 다시 움직여 역을 떠났다. 점점 멀어지면서 작아지는 역을 지켜보다가 귀찮을 만큼 묵직한 트렁크를 챙겨들고 객실 안으로 들어섰다. 평일 점심때라서 그런지 열차 안은 생각보다 한산했고, 조금 구식인 열차지만 에어컨도 잘 작동되어 내부는 인위적으로 쾌적한 공간이 되었다. 나는 그제야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끈적거린 땀들을 대충이나마 추슬러 닦아낼 수 있게 되었다. 나는 트렁크를 끌고 객실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텅 빈 객실이라 아무 곳이나 앉아도 상관없다. 어디가 좋을까.
아, 아니다. 객실은 텅 비어있지가 않았다. 선객이 있었다.
내가 그를 발견한 곳은 객실로 들어서는 입구에서 네 번짼가 두 번짼가 하는 좌석 부근이었다. 두 사람이 넉넉히 앉을 수 있는 긴 의자에, 그는 복도 쪽으로 앉아있었다. 얕은 기척을 가진 사람이라 나는 그의 존재를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 그의 존재를 눈치 채지 못했다. 때문에 꼴사납게도 나는 그를 보자마자 놀란 나머지 크게 주춤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상대의 존재를 뒤늦게 알아챈 건 그도 마찬가지였는지 내 당황을 목격해서야 내 존재를 인식했다. 그와 눈이 처음으로 마주쳤을 때, 나도 모르게 그에게 첫 말을 건넸다.
“저… 실례가 안 된다면 합석해도 괜찮을까요?”
나는 그의 맞은편 자리를 가리키며 합석 허락을 물었다. 넓고 많은 자리가 있는데도 왜 그의 맞은편 자리를 선택했는지는, 글쎄, 혼자 고향으로 가는 길이 적적하지 않도록 만들기 위해서였나. 아니면 말동무라도 얻고 싶었던 건가. 이유야 뭐든 간에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나는 그에게 관심을 둔 것은 확실했다. 그는 내 얼굴을 무례할 만큼 빤히 쳐다보더니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나는 그의 허락을 받자 바로 감사하다는 말을 한 뒤 트렁크를 좌석 위 짐칸에 넣고 그의 앞에 어색하게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봤다.
그의 옆자리, 햇볕이 잘 들어오는 창가 쪽 자리에는 상자가 있었다.
[이치카라]상자 속 남자
W. Arcadia.
그의 외견에 대한 설명을 하자면 그는 대략 20대 초반의 청년이었고, 단정하게 잘랐지만 관리에 관심이 없는지 산발인 머리였고, 반쯤 뜬 게슴츠레한 눈과 흐리멍덩한 눈동자였고, 턱 밑으로는 약국에서 쉽게 구입할 수 있는 일회용 마스크가 걸쳐져 있었고, 기본적으로 외모는 못났다고 할 정도는 아니나 무기력감이 주는 음침함으로 호감인 인상을 주지 못했고, 옷차림은 열차를 타고 먼 곳으로 가는 여행객보다 집 근처 편의점으로 마실 나가는 백수에 더 어울리는 후줄근한 보라색 파카와 물 빠진 츄리닝 바지, 삼선 슬리퍼였다. 종합적으로 간단히 결론을 내리면, 그는 호감보다는 기피를 하게 만드는 우울한 인상의 남자였다. 하지만 나는 그에 대해 별로 개의치 않아했다. 나 또한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알고 보면 고향으로 도망치는 겁쟁이 실패자가 아닌가. 아마 그런 부분이 도리어 내가 그에게 호의를 가질 수 있게 해준 것 같다.
나와 그는 서로 마주보며 대화를 나눴지만 주로 떠드는 쪽은 나였고 그는 고갯짓으로 대충 맞장구를 쳐주기만 했다. 그는 수다를 즐기는 성격이 아닌 건지, 낯가림이 있는 건지, 그냥 사람 자체가 싫은 건지 시간이 지나도록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그리고 30분의 시간이 흘러, 꺼낼 수 있는 대화의 주제가 바닥나고 혼자 나불거리는 것에 지치고 신물이 날 때, 나는 시선을 그의 옆자리로 돌렸다.
아니, 나는 처음부터 그의 ‘상자’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다만 그것을 겉으로 표출하기가 어려워 자꾸만 화제를 빙빙 돌려나가고 있었을 뿐이다.
그 상자는 뭐랄까, 쉽게 설명이 안 되는 묘한 분위기를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스멀스멀 풍겨냈다. 나무를 깎아 만들어낸 그 상자는 대략 옆에 앉은 그의 앉은키만큼은 되어 크고 무거워 보였고, 약간의 틈새도 보이지 않는 철저함을 보여 그것은 하나의 ‘미’로까지 승화시켰다. 게다가 상자는 열차의 창가에 들어오는 여름의 건조한 햇빛을 아무 불평 없이 전부 받아내고 있어 그 모습마저 경건해보였다. 겉으로 봐서는 아무런 특색이 없어 보이는 평범한 상자. 그러나 그 상자에는 손을 뻗게 만드는 매력이 깃들어있었다. 손을 뻗어, 상자를 열고, 그 내용물을 엿보고 싶은 충동. 고대적 신화에서 감히 신의 상자를 연 여인의 심정을 나는 그 때 절실히 공감하고 만 것이다.
어느 샌가 정신을 차리고 보면 나는 대화도 멈추고 멍하니 상자를 쳐다봤고, 그는 나의 그런 시선을 말없이 관찰했다.
“헤에. 관심 있어?”
뜯어서 열어보고 싶다는 얼굴 하고 있다고, 당신.
그는 상자에 자신의 한 손을 얹고 이죽거렸다. 그 때가 그가 나에게 처음으로 말을 건 순간이기도 했다. 나는 마치 내 자신의 치부를 들킨 것 같아 부끄러운 마음에 황급히 시선을 상자에서 떼어내고 고개를 숙였지만 이미 때는 늦은 일이다. 그런 나의 모습에 그는 무슨 생각을 한 건지, 한참을 고개를 숙인 나만을 또 빤히 쳐다보더니 상자의 윗부분을 고양이의 등을 쓰다듬듯이 결 따라 슬슬 얼러 만지며 나에게 말했다.
“뭐, 그래. 어차피 상관없겠지. 있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으면 이야기 해줄 수도 있다고.”
그의 제안에 나는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마주봤다. 그는 더 이상 이죽거리지 않고 나를 쳐다만 봤다. 어쩌면, 그도 어딘가에 자신의 하소연을 털어놓을 곳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안에 쌓이고 쌓인 모든 것들을 뒷일은 생각하지 않고 와르르 쏟아낼 욕구를 오늘 처음 열차에서 만난 수다쟁이 남자를 보고 변덕처럼 솟구쳤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나에게는 앞으로 찾아오지 않을 진묘한 행운이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그와, 또 다른 그와, 상자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 * *
그는 어느 평범한 일본 중산층 가정집의 소중한 아들들 중 하나였고, 그 집안에서는 여섯 쌍둥이 중 넷째의 위치에 있는 남자였다.
그에게는 위로는 형이 셋, 밑으로는 동생이 둘이 있었다. 모두가 쌍둥이인 만큼 얼굴이 똑같았고, 형제들을 또 다른 자신이라 인식할 만큼 쌍둥이 특유의 유대를 지녔다. 하지만 쌍둥이라고 해서 여섯 모두가 동일할 수는 없다. 어른이 된 그들은 저마다의 개성을 가지게 되었고, 그도 원치 않았지만 다른 형제들과는 구분되는 고유의 특성을 지니게 되었다.
자, 그럼 여기서 여섯 쌍둥이 중 차남의 역할을 맡고 있는 인물이자 그의 둘째 형에 대해 알아보자.
그의 둘째형은 여러모로 안쓰러운 남자였다. 유명 연예인을 동경해서 항상 패션과 스타일을 따라하고 다니지만 하나 같이 방향성이 엇나가고 어설퍼서 안쓰럽다는 결과만이 나오고, 겉으로는 허세가 가득 차 있어 그럴듯한 폼을 잡거나 번지르르한 겉말들을 부끄러움 하나 없이 태연히 발설하지만 내실은 좋지 못해서 분위기에 쉽게 휩쓸리고, 형제나 주변 사람들에게 자주 무시당하고, 조금만 몰아붙여도 새가슴이라 쉽게 기가 죽어버리기 일쑤였다. 그러나 여러 의미에서 안쓰럽기는 해도 근본은 착한 사람이었다. 형제들을 사랑하고, 허세만 걷어내면 정론을 말할 줄 알고, 당하기만 하면서도 함부로 누군가에게 화를 내지 않고, 하지만 누군가가 형제를 괴롭히면 바로 앞장서서 그들을 지키기 위해 싸우고, 한없이 자상하고, 남을 감싸 안아주면서 너무도 쉽게 믿어주는 순진함까지 갖춘, 그런 남자였다. 그에 비해 그는 살아갈 의욕도 없고, 사회성은 바닥이고, 배려와 사교성을 갖추기는 고사하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람들을 밀어내는 방법 밖에 모르는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남자였다. 그는 스스로를 처분조차 불가능한 구제불능의 쓰레기로 단정 지어 자신을 고립시켰다. 그는 자신이 상자 속에 갇혀있다고 생각했다. 낡아빠졌음에도 빈틈 하나 없는 사각의 낡은 상자에 갇혀 있기만 하는 자신. 그것이 그가 지니고 있는 자신의 이미지였다. 그리고 그의 둘째 형은 상자였다. 그가 상자 속에 갇힌 쓰레기라면, 그의 형은 텅 빈 상자 그 자체인 남자였다. 겉만 번지르르하고 속에는 아무것도 없는 허울만 좋은 무의미한 상자. 열어보면 텅 빈 공허만이 자리하는 상자를 그는 혐오했다. 그 상자가, 자신의 둘째 형이 마치 자신을 가두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상자에 갇히는 것을 택했다. 상자에 갇혀있음에도 쉽게 뚜껑을 열 수 있는 상황인데도 그는 뚜껑을 열어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토록 혐오하는 공허가 들어찬 상자라 해도, 자신이 있을 유일한 곳은 결국 상자 안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둘째 형이 없으면 존재할 수가 없게 되었다. 상자에 집착하고, 그 상자를 쏙 빼닮은 형에 집착했다.
그는 그 감정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내리지 않았지만, 나라도 대신해서 감히 그 감정에 ‘사랑’이라는 명칭을 붙여줬다.
그렇다. 그는 자신과 한 날 한 시에 함께 태어나 똑같은 얼굴과 체격을 가지고, 같은 성별을 지닌 쌍둥이 형을 사랑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상자가 절실했지만, 상자는 그가 절실하지 않았다. 상자는 자신의 속을 채울 수 있고, 겉이라도 사랑해주는 사람만으로도 충분했다. 상자는 자신의 속을 감추기 위해 뚜껑을 덮고 겉을 치장하는데 열중했다. 상자의 의의는 그곳에 존재했으니까. 겉모습을 사랑해주면 속은 상관없게 된다. 텅 빈 상자보다 겉이라도 화려한 상자를 더 좋아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으니까. 상자는, 자신의 텅 빈 속을 좋아할 인간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것은 근친상간이라는 이름의 금기를 저지르려는 동생을 밀어내는 형이 지닌 심리와 비슷할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의 형에게 사랑을 고백했다. 너의 안에 들어가고 싶다고, 네 안으로 들어가야지만 내가 존재할 수 있다고. 그는 상자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졌다. 그를 상자로 만들어주고 싶었다. 그를, 자신만의 상자로 만들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서로가 상호보완적인 이상적 관계로 완성시키려 했다.
그래서 동생은 형에게 고백했고,
형은 동생을 거절했고,
다퉜고,
저항했고,
폭력을 휘둘렀고,
옷을 찢었고,
나신을 드러냈고,
비명을 질렀고,
눈물을 흘렸고,
강간했고,
살해했다.
그것들은 개연성이라고는 쥐뿔도 찾아볼 수 없는 삼류 영화처럼 하나의 장면들이 억지로 붙여진 것 같았다. 그는 문득 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아래를 현실감 없는 시선으로 내려 봤다. 정액과, 피와, 내장과, 그 아수라장의 뒤범벅 속에서 헐떡이고 있는 형.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가늘어져가는 형의 숨소리를 들은 그는 망연히 중얼거렸다. 죽는 걸까. 그는 덜컥 두려워졌다. 죽일 생각은 없었다. 그는 단지, 단지 형을 원했을 뿐이었다. 그의 텅 빈 안을 자신으로 채워 넣어서 자신을 존재시키고 싶었을 뿐이다. 자신이 그를 절대적으로 필요시하는 만큼, 그도 자신을 절대적으로 원하길 바랐다.
그래, 나는 단지 ‘상자’를 가지고 싶었을 뿐이야!
「상자」
그 단어를 떠올리자, 그의 머릿속으로 기발한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너무 기발한 발상인지라 그는 처음으로 이런 생각을 타이밍 좋게 떠올린 스스로를 칭찬해주고 싶었을 정도였다.
그는 바로 자신의 형을 데리고 형제들 몰래 밖으로 나와 그의 지인인 어느 발명가를 찾아갔다. 발명가는 자신을 찾아온 피투성이 지인 둘을 보고 기겁했지만, 날붙이를 들고 자신의 복부를 쿡쿡 찌르는 그의 협박에 비명을 삼켜야만 했다. 그는 발명가에게 형을 살리고 싶다고 말했다. 그것만 놓고 보면 죽어가는 형을 살리고 싶어 하는 동생의 갸륵한 우애로 보이겠지만, 다음의 말은 발명가를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
그는 형을 살아있는 상태로 상자 속에 넣고 싶다고 말했다.
발명가는 덜덜 떨면서 고민한 끝에 결국 당장에 자신의 목숨부터 보존하는 것을 택하고 말았다. 그리고 발명가는 그의 형을 상자에 넣는 작업을 개시했다. 반나절 가까이 걸린 대대적인 작업을 쭉 지켜보던 그는 자신의 형에게 있어서 불필요한 부분들이 깨끗이 치워지는 것을 만족스럽게 지켜봤다. 그의 형은 이제 더 이상 촌스러운 바지를 입을 필요도, 자신의 얼굴을 살펴볼 거울을 들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 부분에 있어서 그는 특히나 마음에 들어 했다. 그리고 몇 가지 작업을 더 거친 끝에, 그의 형은 마침내 상자 안에 들어갔다. 그의 크기에 딱 들어맞게 제작된 상자는 빈틈없이 메워졌다. 그는 상자 속의 쌍둥이 형을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윽고 오묘한 표정으로 상자를 끌어안았다. 아아, 이거다. 자신이 원했던 모든 것이 이 상자 안에 전부 들어있다. 그는 상자를 끌어안으며 그런 생각을 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집을 나섰다. 상자 속의 쌍둥이 형을 소중히 품에 안고 그는 정처 없이 떠돌다가 무더운 여름의 점심 무렵, 이 열차에 형과 함께 올라탔다.
그 기나긴 여정의 중간에서 나는 그를 만날 수 있는 우연을 손에 넣게 된 것이다.
* * *
열차는 이제 30분 뒤에 역에 도착할 예정이라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그 말에 나와 그는 방송에 잠시 귀를 기울였다가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적한 시골 마을의 정경이 빠르게 스쳐가는 것이 보인다. 시야에 익숙한 풍경. 고향의 인근에 다다랐다는 의미였다. 나는 마지막으로 차창 옆에서 계속 풍경을 감상하는 것처럼 우직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상자에게로 시선을 올렸다, 여름의 건조한 햇살을 받고 있는 상자는 그 덕택일까, 생기가 있어 보였다. 살아있는 상자. 그의 형은 말 그대로 상자 그 자체가 된 것이다. 나도 모르게 손이 입 부근으로 올라갔다. 심장이 요동쳤다. 저 상자를 열어보고 싶다는 기묘한 충동이 나를 부추기게 만들었다.
저 안에 있다. 저 안에, 그가 채워져 있다.
“상자 안을, 보고 싶습니다.”
나는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그에게 부탁했다. 내 부탁에 그는 잠시 반쯤 감은 눈을 더욱 가늘게 좁혀 나를 시험하듯이 응시하다가 이윽고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이야기도 다 했으니 상자를 보여주지 못할 것도 없겠다 싶은 거겠지. 그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상자를 집어 들어 무릎 위에 얹었다. 그리고는 내가 정면으로 보고 있는 면에 난 두 개의 작은 여닫이문을 열었다.
그리고 상자가 열렸다.
상자 안에 들어있는 것은 그 이야기대로 한 남자였다. 상자를 들고 있는 남자와 똑같은 얼굴을 지녔으나 굵은 눈썹이 인상적인 청년은 핏기 없는 새하얀 얼굴과 목, 흉부를 제외하고는 그 외의 불필요한 신체 부위가 전부 떨어져 나간 상태였다. 그래서 자칫하면 아주 정교하게 잘 만들어진 인형이나 석고상으로도 착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상자의 크기에 딱 맞아떨어져 속을 꽉 채우고 있는 그의 형은 멍한 얼굴로 아무 말 없이 있다가 돌연히 초점 없는 눈동자를 또록, 하고 굴렸다. 그의 형은 상자 밖의 나를 발견했다. 아아, 살아있다. 이 남자는 상자 속에서, 저런 모습으로도 분명히 살아있다. 그 경이로운 모습에 나는 숨이 턱 막혀 제대로 숨 쉬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나는 이렇게 아름다운 것을 지금껏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나는 평생에 있어서 볼 수 있는 모든 미보다도 더 한 차원에 있는 것을 목격하는 영광을 얻은 것이다.
그의 형은 나를 보더니 어떤 표정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뭔가 말이라도 하고 싶은 걸까? 하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못했다. 미세하게 뻐끔거리는 입술은 제대로 말을 형성해내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분명히 말을 하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는 걸까. 상자 속 남자는 어떤 심정으로, 어떤 생각으로, 어떤 말을 하고 싶은 걸까.
“헤에, 뭐야. 오늘따라 기분이 좋은가 보네.”
그는 상자 속에서 뻐끔거리는 자신의 형을 보고 이전까지와는 다른 미소를 보였다. 그 또한 형의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은 듯 했다. 그리고 이걸로 충분히 보여줬다고 생각한 건지 나에게 양해도 고하지 않고 그는 상자를 도로 닫았다. 그의 형은 다시 상자 안을 완전히 채우게 되었다. 그는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걸까. 상자 속에 있는 그는 자신을 상자에 넣은 동생에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그의 형은 형제를, 특히나 동생을 무척이나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동생들의 잘못에도 화 한 번 내지 않고 너그러이 용서해주며 그들이 원하는 것이라면 거리낌 없이 들어주는 훌륭한 형이었다. 그럼 그 남자는 이것마저 용서해줄까. 상자 안에 들어가 속을 채우고, 그것을 넘어 진정한 상자 그 자체가 되어 더 이상 빈 존재가 되지 그는 자신을 필요로 하는 동생과 함께 아무도 없는 대지를 정처 없이 떠돌게 되었다. 그런 동생의 어리광을, 형은 받아줄 것인가.
잠시 뒤, 열차는 역에 도착했고, 나와 그는 함께 열차에서 내렸다. 나는 이 역이 종착점이지만, 그는 종착점이 아녔다. 그는 다만 내가 내리기에 덩달아 따라 내린 거라고 했다. 행선지는 정해지지 않았다. 그는 계속 상자와 함께 방랑할 뿐이다. 나는 그와 좀 더 함께 있고 싶었으나 열차에서 만난 인연은 열차에서 내림과 동시에 끊어지게 되는 거라 나는 그에게 서쪽으로 가는 길만 알려준 뒤 그와 역 앞에서 헤어졌다. 나와는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는 상자를 짊어진 그의 구부정한 등이 유독 인상적이라 나는 잠시 길에 서서 그 등이 멀어지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리고 나는 그가 육안으로 분간하기 힘들 만큼 멀어질 때쯤에야 본가로 발걸음을 향했다.
이것으로 그의 이야기는 끝났다. 그 후로 나는 그의 안부가 궁금해 몇 차례 수소문을 해봤지만 그에 대한 소식을 듣지 못했고, 지금까지도 그들을 만나지 못했다. 이제 조금 뒤 나는 이 글을 쓴 종이들을 전부 태워야 한다. 그와 했던 약속을 지켜야하니 아쉬워도 어쩔 수 없다.
상자 속의 남자와 그와 똑같은 얼굴로 상자를 안고 다니는 떠돌이 남자.
그러면 상자 속의 남자는 과연 행복할까. 자신을 상자에 넣은 것으로 행복해하는 동생을 보고 형은 어떤 감정을 손에 넣을 수 있을까. 하지만 적어도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상자를 안은 그는 분명 자신의 볼품없는 인생에 있어서 가장 최고의 행복을 만끽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상자에 넣어 단 둘이서 여행을 떠난다. 비록 그것이 뒤틀리고, 어긋나고, 더없이 측은해도 부족함이 없는 지고지순한 행복일지도 모른다. 그의 행복과 사랑은 분명 상자 안에 가득 차있었다.
내가 상자 속의 남자를 일순간 웃고 있던 것처럼 봤던 건, 아마 그런 이유 때문이지 않았을까.
ㅡ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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