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로우+루로우+D형제. 에이스와 로우는 사귀었던 사이였고 루피는 서서히 로우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중이지만 자각 못하고 있는 중. 커플링도 좋지만 에이스에 대한 루피의 죄책감도 표현하고 싶었다. 루피 시점, 인데 루피 답지 않아서 민망하다;
글자수는 공백 포함 11497자.
사람은 죽으면 살아있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만 살아간다고 한다. 특히 그 죽은 사람이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이라면 평생을 기억하게 되며 특별한 위치에 있게 된다고 로빈이 가르쳐 주었다. ‘죽음’이 극적인 장치가 되어서 고인에 대한 죽음에 최고이자 최악의 연출이 된다면서. 그녀의 말버릇인지, 아니면 내가 이해하지 못하기를 염두하고 말한 것인지 은유적이고 난해해서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로빈이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는 알 수 있었다. 아니, 2년 전의 나라면 로빈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은 이해할 수 있다. 지금의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으니까. 그 ‘사랑’에 ‘형제애’도 포함된다면. 에이스. 그는 생전에도 자신에게 있어서 특별하고 소중하며 사랑하는 형이었지만 죽은 후에는 더욱 잊을 수 없고 잊어서는 안 되는 존재가 되었다. 이제 에이스의 존재는 과거가 되었으며 미래에 존재하지 않게 된다. 언제나 앞으로 나아가던 에이스는 영원히 멈춰서 있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 더 이상 그 사람을 만날 수 없기에, 그 사람의 존재가 과거가 되었기에 더욱 미련과 애절함이 남아있게 된다. 그리고 그 사람을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도. 이따금 가슴의 흉터가 욱신거리며 잠에서 깨우는 경우가 있다. 레일리와 함께 있던 시절에는 더 심해서 불면증에 시달리기도 했으나 지금은 그 때와 비교하면 많이 나아진 상태였다. 다행이었다. 빈도가 줄어들수록 동료들에게 들킬 위험도 줄어들 테니까. 그들에게는 아직 제대로 에이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우리들 사이에서 에이스의 이야기는 암묵적으로 금기시되었다. 그것은 나를 배려하는 동료들의 마음이었다. 그들은 언젠가 내가 이야기 해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가끔씩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다가가 말하려고 하다가도 꾹 참고 몸을 돌려 떠난다. 나는 그 기다림을 지속시키면서도 금기를 깨뜨리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의 배려가 미안하면서도 다행으로 여겼다. 여전히 흉터의 통증이 발작적으로 찾아온다. 식도를 타고 신물이 올라와 토기를 유도한다. 내가 에이스를 대신해 몸 한가운데에 구멍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아니, 차라리 내가 그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통증이 밀물처럼 들어와 썰물처럼 빠질 때면 그러한 후회도 같이 몰려온다. 고통보다도 함께 찾아오는 죄책감이 더 지독했다. 에이스. 그럴 때마다 이제는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는 이름을 허공에 흩뿌려본다. 공백. 침묵. 정적. 돌아오는 그것들에 더욱 망자의 빈자리의 공백을 느끼며 오한에 몸을 떤다. 눈물은 흘리지 않는다. 이제 통증으로 흘릴 눈물은 메말라 버렸다. 아직도 가슴의 통증이 저려왔다. 오늘 밤은 더 길게 이어질 것 같았다. 환상통 W. 아르카디. 결국 참지 못하고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서니 호의 잔디 갑판으로 나오니 밤하늘과 하나가 된 잔잔한 남빛 바다가 보였다. 바다를 보니 통증이 어느 정도 가라앉는 것 같았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자신을 조금이나마 위로해주었다. 바다는 언제나 바라보면 마음이 진정되었다. 2년 후 서니 호로 돌아와 빈번히 뱃머리에 올라 바다를 바라보게 된 것도 스스로 찾아낸 나름대로의 통증에 대한 치료법이었다. 어째서 이 통증은 사라지지 않고 있을까. 이제 상처는 아물고 흉터만 남아 더 이상 아프지 않아야 될 것인데 이렇게 발작적으로 가슴 깊이 찌르는 통증이 찾아온다. 처음에는 아직 상처가 완전히 낫지 못해서라고 생각했지만 상처가 낫고도 남을 시간이 지났는데도 지속되자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것을 아무에게도 말해주지 않았다. 레일리에게도, 핸콕에게도, 징베에게도, 쵸파에게도. 가슴의 흉터가 아파온다는 말을 하면 상냥한 그들은 분명히 자신을 걱정 할 테니까. 통증의 원인을 알기 위해서는 상처의 근원을 알아야 하며 그 끝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곳에는 에이스의 죽음이 있었다. 한 가운데에 구멍이 뚫려 웃는 얼굴로 영원히 잠들어 있는 그가 자리했다. 그들은 이미 에이스의 죽음으로 많은 눈물을 흘렸다. 더 이상 에이스의 죽음으로 그들이 슬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것은 고맙지만 동시에 미안한 일이었다. 쵸파에게 말하면 병명을 알 수 있겠지만 여리고 어린 선의에게 자신의 고통을 함께 알아주고 이해해달라는 말을 하고 싶지 않다. 이해, 인가. 나는 잔디 갑판에 그대로 앉아 생각했다. 나는 이 고통을 아무도 이해하지 않았으면, 공유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일까.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동료들을 믿지 못한다거나 마음을 열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내 고통을 알아 함께 슬퍼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들이 슬퍼하는 모습이 싫었다. 나는 너희들을 지키지 못하고 에이스도 구하지 못했는데 그런 내가 너희들을 슬프게 만드는 꼴은 절대로 사양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고통은 나만이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도 있었다. 형의 죽음은 동생만이 이해할 수 있다. 에이스가 죽었다는 나의 마음은 아무도 공감하지 못 한다. 그렇게 찾아오는 고립감에서 추억 속의 에이스는 더 선명해진다. 에이스. 사랑하는 나의 형. 또 다시 통증이 찾아온다. 에이스의 그리움과 사랑이 커질수록 통증은 저릿해진다. 이것은 벌 인걸까. 에이스를 지키지 못한 나에 대한 벌. 사박. 잔디밭을 밟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들려오는 방향은 뒤. 기척은 적어도 자신들의 동료가 아니었다. 서니 호에 올라탄 동료가 아닌 자는 여러 사정으로 이 배에 몇 명 있었다. 킨에몬이라기엔 가벼웠고 모모노스케라고 하기에는 무게감이 있었다. 그렇다면 단 한 명의 인물로 좁혀진다. 세 번째 이방인.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자 때마침 구름 뒤에 있던 달이 모습을 드러내며 은은하게 갑판 위를 비춰주었다. 까마귀와 같은 남청색 옷을 입고 자신의 키보다 조금 긴 칼을 어깨에 짊어진 사내. 트라팔가 로우. “갑판 위에 앉아서 뭘 하고 있나, 밀짚모자여. 오늘 보초는 너의 저격수인 줄 알았는데.” “아아, 우솝이라면 망루에 있을 거야. 지금쯤 졸고 있겠지만. 트랑이야 말로 자지 않고 뭐해?” “네 인기척에 잠이 깨서 한 번 와본 것뿐이다. 그것보다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는데, 밀짚모자여.” 은근히 넘어가려고 한 내 의도를 읽은 것인지 로우는 쉽게 넘어가지 않고 질문의 대답을 독촉했다. 나는 대답 대신 가만히 앉아 로우를 올려다보았다. 평소에도 키가 커서 올려다 봐야하는 로우를 앉아서 보니 고개가 뒤로 더 넘어가게 된다. 달빛도 막아버리는 모자의 챙 아래로 로우의 얼굴이 보였다. 얼굴에 그려진 표정은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지 않고 그저 덤덤히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문득 로우가 자신을 살려줬으며 지금의 흉터가 남은 상처를 치료해준 인물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렇다면 그는 알고 있을까. 간혹 찾아오는 이 기이한 통증의 의미를. 동료들에게도, 자신을 도와준 사람들에게도 말하지 않은 자신만의 고충을 로우에게 말해도 되는 것인가 하는 갈등이 피어올랐다. 단순히 상처를 치료해준 인물이라서? 지금 동맹을 맺고 있는 상대라서? 그러한 이유로 간단히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다른 인물들에게는 망설임 없이 말하지 않기로 결정한 반면 로우에게는 말해도 괜찮을지도 모른다라는 생각이 조금이나마 생겨나는 것은 그를 만나고 난 후로 통증이 조금은 잠잠해진 느낌이 들어서기 때문이었다. 단순히 그의 존재가 통증을 가라앉혀 주고 있는 것이라면 로우가 자신의 몸에 무슨 짓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의혹도 자연스레 생겨난다. 그러나 자신은 트라팔가 로우를 믿고 있기에 그 의혹은 의혹으로서 묻어놓았다. 눈앞에 있는 남자가 무슨 이득을 바라고 이렇게 번거로운 일을 벌이겠냐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에이스. 그래. 눈앞의 남자를 신뢰할 수 있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생기는 것부터가 자신과 로우 사이를 이어주는 또 다른 인연의 끈 덕분이었다. 그는 에이스를 사랑했고 에이스도 그를 사랑했다고 한다. 언젠가 그를 붙잡고 왜 자신을 구해줬는지 물어봤을 때 넌지시 말해주었다. 뜻밖의 대답이었지만 그것이 전부였으며 충분한 이야기이다. 그 사랑이 무엇인지, 어떤 형태인지, 자신과 같은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그는 에이스를 사랑했던 인물이었고 에이스도 그를 사랑했었다. 그 사실이 중요했다. 그리고 지금도 트라팔가 로우는 에이스를 그리며 사랑하고 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추억 속에서만 존재하게 된 에이스의 잔상을 어떻게든 길게 유지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거기서 찾아오는 동질감일까, 연민일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로우와 마주보았다. 로우와 마찬가지의 표정을 지으며 일어나는 나의 모습에 로우는 의외인 것인지 눈빛이 조금은 달라졌다. 오른손을 올려 가슴팍의 상처를 쓸어보았다. 여전히 통증은 시큰거리며 신경을 자극해 신물이 올라오도록 하고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이런 상태에서는 제대로 싸울 수도 없다. 다행히 통증은 전투 시에는 일어나지 않았다. 이것도 때와 장소를 파악하고 일어나는 것일까. 상처를 쓸어내리는 나의 손을 로우의 눈길이 따라간다. 내 행동만으로도 그는 내가 왜 이 밤중에 홀로 일어나 갑판 위에 앉아있는지 파악하는 것 같았다. 문득 이 상처의 의미를 가장 깊게 이해하고 있는 인물이 그일지도 모른다는 바람에 가까운 생각이 들었다. 먼저 질문을 꺼낸 것은 드물게도 로우였다. “흉터가, 아픈 건가.” “응. 이상하게 욱신거리며 아파. 뭘 제대로 못 먹을 정도로. 레일리하고 같이 수련 받을 때는 며칠 잠도 제대로 못 잘 정도였는데 요즘에는 좀 나아졌어. 상처는 이미 다 나았는데 말이야.” “…그 사실, 너의 선의나 동료들은 알고 있나?” “아니. 몰라. 이런 이야기를 해주는 것도 네가 처음이고, 아마 트랑이가 유일하게 아는 사람일거야.” “그런 이야기를 나에게 말해줘도 되는 건가.” “응. 괜찮아.” 말을 꺼내기 망설였던 것 치고는 대답은 생각보다 빨리 나왔다. 시원하게 나오는 내 긍정에 로우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유일. 이야기를 하면서 이 단어에 유독 힘이 들어가게 되었다. 나와 그만이 공유하는 유일한 사실이며 비밀이라는 것이 왠지 모르게 가슴이 뛰게 만들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처럼 냉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상냥했다. 말투와 행동에서 타인을 배려하는 것이 묻어난다. 사람을 치료하는 의사이기 때문일까. 가끔씩 쵸파와 행동이 겹쳐 보일 때도 있었다. 내 대답에 로우의 미간이 좁혀졌다. 난감하다는 표정 같았다. 부담스러워 하는 것이 아닌 과연 자신이 동료들을 제치고 이러한 사실을 알아도 되는가 하는 표정 같았다. 아닐 수도 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한 발짝 발을 앞으로 내딛어 로우와의 거리를 좁혔다. 그의 작고 검은 눈동자 안에 나의 흉터가 들어오고 있었다. 오롯이 그가 나의 상흔을 보고 있다는 사실이 어쩐지 형용하기 어려운 감정을 부르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만 덕분에 통증은 다시 한 번 깊은 바다에 빠진 것처럼 가라앉고 있었다. 나 또한 그 바다 속에 침몰하고 있었다. “트랑이는 왜 그러는지 알고 있어? 트랑이가 치료해 줬으니까 왠지 알 것 같아.” 그는 이 통증의 의미를 알고 있을까. 이 상처를 두 손으로 직접 만져보고 치료한 의사로서 이전 환자가 겪고 있는 병명의 이름을 대답할 수 있을까. 그러한 기대로 나는 죽음의 외과의의 판단을 기다렸다. 로우는 잠시 나를 관찰하듯이 바라보았다. 그가 나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잠시 후, 로우는 한숨을 쉬었다. 그 한숨이 이유를 알고 있다는 대답과도 같아서 점점 심장이 벅차올랐다. 동시에 통증도 다시금 수면 위로 올라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었다. 자신의 정체가 들키는 것에 두려운 것일까.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로우의 칼이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건 환상통(幻想痛)이다.” 환상통. 처음 들어보는 단어에 에? 하는 의미 없는 소리가 먼저 나왔다. 쵸파가 자주 말하는 의학적 병명 뭐 그런 종류인 것일까. 설마 희귀병이나 불치병 같은 것인가 싶어 살짝 두려워졌다. 아무리 나라고 해도 이 통증과 평생을 함께 보내기는 아무래도 꺼려진다. 내 반응으로, 아니 처음부터 내가 환상통의 의미를 알고 있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는지 로우는 계속해서 내 흉터를 뚫어져라 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환상통 혹은 환지통. 영어로는 Phantom Pain. 극도의 통증을 느꼈던 부위나 절단된 부위에서 느껴지는 통증이다. 의학적으로는 이미 완치가 되었으나 해당 부위에서 가벼운 불편함부터 극도의 아픔까지 통증을 느끼거나 더위나 추위, 간지러움, 압착, 쓰라림, 쑤시는 아픔 혹은 짓누르는 감각 등을 느끼며 고통을 호소하지. 말 그대로 환상이다.” “그럼, 치료할 수 있어?” “…이것은 의사도 치료하기 힘든 병이다. 환상통은 흔히들 마음의 병이라고 하지.” “마음의 병.” “그 흉터를 얻은 경위를 생각하면, 너라도 병의 원인을 알 수 있겠지.” 마음의 병. 그런 것이었구나.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통증의 정체와 원인을 알았음에도 덤덤했다. 이미 예상했는지도 모르겠다. 다른 상처들도 아니고 유독 가슴에 새겨진 흉터 안에 끈질기게 남아 잔류하고 있는 통증의 정체를. 에이스. 이유를 아니 이 통증이 에이스처럼 느껴졌다. 그가 내 안에 남아 흐르며 자신은 죽었다고, 그렇지만 네 안에 남아있다고 외치는 것 같았다. 흉터 위에 올려놓은 손을 말아 쥐었다. 밀짚모자 아래서 있는 내 표정은 말도 못할 정도로 일그러져 있을 것이다. 에이스는 나를 원망하고 있을까. 이런 도움도 안 되는 동생을 지키다가 죽은 것에 슬퍼하며 원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남겨두고 떠난 것에, 그렇게 만든 동생에게 분노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죄책감이, 서로 제각기 다른 죄책감들이 X자로 교차하며 소용돌이 치고 있다. 심장을 쥐어짜는 통증이 격해진다. 자신의 마음은 이정도로 병들어 있으며 정신도 그에 지쳐 피폐해져 있었다. 지쳐있었다. 통증에, 에이스의 죽음에, 죄책감에. 이렇게 지독한 피로감은 처음이었다. 식은땀이 뺨을 타고 흘러 내려갔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모든 것들이 자신으로 인해 초래된 일이라는 것이다. 이 잔재된 통증도, 그것을 만드는 죄책감도, 남아버린 사람들에 대한 슬픔도. 모든 것이 자신이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다. 몇 번이고 미안하다고 외쳐도 부족하며 평생을 바쳐 속죄해도 충분한지 어떤지 알 수 없었다. 당장에 눈앞의 인물에게 나는 얼마나 깊이, 많이 사죄를 해야 그 사람의 슬픔을 위로해줄 수 있을까. 이 통증은 그에 대한 낙인이었던 것이다. 순간적으로 현기증이 일어나 몸이 비틀거렸다. 로우가 깜짝 놀라 흔들리는 내 몸을 잡아주기 위해 내 오른팔을 붙잡았다. 그 팔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흉터를 쓰다듬고 있던 손이 있었다. 투박한 손길이 느껴졌다. 차갑지만 온기가 있었다. 로우 덕분에 쓰러지지 않을 수 있었다. 내가 중심을 잡고 다시 서자 로우는 미끄러지듯이 내 팔을 놓아주었다. 이런 내 반응에 그는 적잖게 놀라는 반응이었다. 하긴, 전투 이외에 현기증이라는 것을 느낀 적은 처음이니까. 동료들이 봤더라면 내가 중상을 입은 것과 같은 반응을 보이며 호들갑 떨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로우는 내 팔을 붙잡은 것 이외에는 아무런 말도, 반응도 해주지 않아 소란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표정이 내가 그를 알게 된 이후로 처음 보는 것이었다. “미안. 고마워.” “…괜찮은 건가.” 로우의 질문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긍정의 대답을 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는 침묵을 대답으로 대신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다행이었다. 피로감이 몸을 짓눌렀고 가슴을 찌르는 통증은 속을 뒤집어 놓고 있었다. 식은땀과 오한이 찾아오며 몸이 떨리는 것을 간신히 억눌렀다. 이 한기. 에이스가 죽을 때 느꼈던 감각과 비슷했다. 입 안쪽 살을 씹으며 어떻게 해서는 떠올리지 않으려고 했지만 입안에 퍼지는 피 맛이 오히려 머릿속을 자극시켜 기어이 끄집어내었다. 비릿한 피 냄새. 텅 빈 구멍, 공허한 미소. 사랑해줘서 고마워. 나는 그 감사를 받을 자격이 없었다. 형을 구하지 못한 동생 따위. 갑판 난간이 있는 곳까지 걸어가 그곳에 기대어 주저앉게 되었다. 더 이상 서 있는 것도 힘들었다. 로우는 조용히 내 뒤를 따라 걸어왔다. 그대로 지나쳐도 될 것을 계속 따라오는 이유가 뭘까. 의사이기 때문에? 아니면 동맹이기 때문에? 어느 쪽이든 로우가 곁에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위로가 되었다. 그의 존재만으로도 충분했다. 로우는 내 앞에 서서 천천히 무릎을 굽혀 앉았다. 그 자세가 처음 바다로 나와 알라바스타에서 만나게 된 에이스를 떠올리게 해서 더 지끈거렸다. 에이스의 미소가 자연스레 떠올랐다. 철부지 동생을 둬서 형은 늘 걱정이다. 자신이라는 존재는 에이스에게 걱정만 끼치고만 있었다. 평생 그에게 의젓하고 믿음직스러운 동생으로서 성장하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가 짙게 남아있다. 왜 자신은 그에게 있어서 좋은 동생으로 남지 못했을까. 망자에 대한 후회를 곱씹어 봤자 무의미한 일인데도 수백 번이고 생각하게 된다. 고개를 들어 로우를 보았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내 상태를 지켜보기만 했다. 자신이 함부로 말을 꺼낼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래도 무슨 말이라도 듣고 싶어 나는 짓궂은 마음에 물었다. “트랑아. 너는 에이스가 좋다고 했지.” “…그래.” “지금도, 좋아해?” “…아아.” “그럼, 트랑이는 내가 싫겠네.” “…어째서 그렇게 되는 거지?” “난 에이스를 지키지 못했으니까. 에이스가 나를 지키다가 죽었으니까. 나 때문에 에이스가, 죽었으니까.” 나의 말에 로우의 눈이 순간적으로 커졌다가 또 순식간에 원래대로 돌아왔다. 대신 그의 미간이 전보다 더 짙게 구겨지고 말았다. 화내는 것일까. 어째서 화를 내는 걸까. 틀린 말이 아닌데. 나도 내 자신을 용서할 수 없고 원망하고 있는데 그가 나를 원망하고 미워하지 않는다면 이상한 것이다. 어쩌면 그는 전쟁에서 나를 구하고 싶지 않았지만 에이스의 동생이라는 이유로 살려줬는지도 몰랐다. 에이스라는 인연의 끈만 없었더라면, 자신은 그 전쟁에서 죽었을 것이다. 지금도 로우는 나를 원망하고, 죽이고 싶어 하지 않을까. 동맹이라는 것도 가까이에 있으면서 내 목을 베기 위한 기회를 노리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그가 얼마만큼 에이스를 사랑했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상대가 에이스라면, 분명 엄청 많이 좋아했을 것이다. 에이스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좋아할 테니까. 알면 알수록,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만큼, 그 사람의 죽음에 대한 상실감이 커진다. 나에 대한 원망도 커진다. 로우는 잠시 따질 사람처럼 뭐라 입을 열려고 하다가 이내 그만두고 입을 꾹 다물고 한동안 고개를 숙여 무엇인가 생각하고 있었다. 내 반응이, 발언이 상당히 뜻밖이었으며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정곡을 찔러서 당황한 것일까 궁금했기에 나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로우의 대답을 기다렸다. 잠시 후, 로우는 이전보다 더 무거운 한숨을 뱉으며 입을 떼었다. “너 답지 않은 말이군, 밀짚모자여.” “응. 동료들이 들었더라면 분명 놀랐을 거야. 그래서 로우는 어떻게 생각해?” “딱히 널 원망할 마음은 없다. 그 때는 네가 있든 없든 상황은 바뀌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그만해라, 밀짚모자여. 나는, 그 자리에 없었다. 너와 다르게.” 괴롭게 짜여 진 로우의 말에 나는 온 몸이 얼어붙은 것처럼 그대로 굳어져 아무런 말도,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로우의 표정만으로도 그가 나에게 화를 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화는 내가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에이스를 죽게 만든 나에 대한 원망의 화가 아닌, 계속해서 자책하고 있는 나에 대한 걱정이 섞인 화와, 그 자리에 있지 못하고 최소한의 구하려고 한 행동도 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원망에 대한 화가 섞여서 드러내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에이스의 죽음에 대한 로우의 감정의 파편을 볼 수 있었다. 그도 나처럼 스스로를 원망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그 자리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구하려고 하지 못하고 죽게 내버려 둬야했던 것에 대한 자책의 원망. 비교하면 달랐지만, 소중한 사람을 잃은 자책은 같았다. 그제야 나는 로우에게 통증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지, 그의 곁에 있는 것으로 통증이 누그러졌는지 조금은 알 수 있었다. 공감. 무의식적으로 나는 로우의 감정을 감지 했는 것인지도 몰랐다. “나는 화권이 죽은 것으로 그의 동생을 원망할 정도로 속이 좁은 자가 아니다. 환상통이 생긴 이유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겠다. 나으라고 강요하지 않겠다. 그 통증을 없애는 것은 어디까지나 너의 의지에 달려있으니까. 그러나 너의 형을 생각한다면 그런 식으로 말하는 그만 둬.” 타박하는 어조의 로우의 말은 어렸을 적, 자신을 야단치던 에이스와 닮아있었다. 그의 상냥함은 에이스와 닮았다. 그래서 로우를 보면 자연스레 에이스가 떠오르는 것일까. 멍하니 로우의 말을 듣다가 잠에서 깨어나고 처음으로 미소가 번졌다. 힘이 없었지만 그래도 미소였다. “…위로하는 거야?” “마음대로 생각해라.” “트랑이는 상냥하구나. 에이스가 좋아할만해.” 그래서 나도 네가 좋아질 것 같아. 그 다음 말은, 어째서인지 밖으로 내보내지 않고 그대로 삼켜버렸다. 어쩐지, 그 말을 하면 로우가 상당히 곤란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 환상통을 없애기 위해서는 마음의 상처가 나아야 한다. 에이스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에서 벗어나야 한다. 스스로를 용서해야 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고, 자신은 마음의 병을 영원히 끌어안은 채 살아가야 한다. 그것이 자신의 육신마저 갉아먹게 될지도 모르는데도. 동료들도, 에이스도, 로우도 원하지 않을 일이었다. 언젠가 자신을 용서하는 날이 올 것인가. 죄책감에서 벗어나게 될 날이 올 것인가. 그 때가 되면 이 통증도 자연히 사라지게 되겠지. 그 때가 언제인지, 올 수 있는지 없는지 불확실하다. 그러나 로우가 있다면, 이 죽음의 외과의가 있다면 그 날이 오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가 되면, 다른 죄책감을 떠안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도 희미하게 들면서. 상체를 일으켜 팔을 뻗어 로우의 팔을 붙잡았다. 갑자기 잡혀진 팔에 로우의 몸이 움찔거렸지만 빼내려고 하지 않았다. 불쾌한 기색도 없이 그저 순수하게 놀란 것 같았다. 잡은 로우의 팔을 내 쪽으로 당겼다. 다가오는 그의 손에 새겨진 문신이 달빛 아래서 선명히 드러났다. 그의 손은 상대의 심장을 손쉽게 빼낼 수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죽어가는 상대의 심장을 다시 뛰어오르게 만들 수 있었다. 지금도, 자신의 심장이 뛰어오르고 있었다. 평소보다 강하게, 뜨겁게, 격하게. 로우의 손이 도달한 곳은 자신의 흉터였다. 손가락과 손바닥의 촉각을 통해서 로우에게 흉터의 감각을 전해주었다. 갑작스레 만져진 것에 놀란 것인지, 마치 만져서는 안 될 것을 만진 것처럼 로우는 퍼특 놀라 순간적으로 손을 빼내려고 했으나 그의 팔을 쥔 내 손에 힘이 들어가면서 그것을 막아내었다. 흉터를 통해 로우의 굳은살의 감촉과 옅은 온기가 느껴졌다. “밀짚모자여?” “그냥. 이렇게 있어줘.” “…의미가 있는 건가.” “음, 이러면 통증이 좀 나아지는 것 같아. 트랑이는 의사니까 병을 낫게 해줘야 하지 않겠어?” 의사의 의무감을 내세우자 로우도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어차피 더 이유를 드러내며 빼내려고 해도 놔줄 생각은 없었지만. 그리고 실제로 그의 손길이 닿자 통증이 가라앉았다. 이렇게까지 통증이 거의 느껴지지 않은 적은 처음이었다. 마법 같았다. 그의 능력처럼. 더 이상의 대화는 이어지지 않고 고요함과 나와 로우 사이에서만 들리는 심장소리만이 울렸다. 천천히 눈을 감아 나와 그만이 느낄 수 있는 감각에 집중했다. 서로의 온기가 겹쳐지면서 자그마한 불꽃이 생겼다. 불. 에이스의 온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