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하한다, 밀짚모자 여.”
겉으로 들어서는 단순한 형식적인 축하의 말이었지만 그 안에 내포된 의미가 무엇인지는 축하의 말을 전한 사람과, 그것을 들은 사람만이 알 수 있는 함축적인 말이었다. 짧고 무뚝뚝한 어투였지만 그 말 자체가 상대가 표현할 수 있는 최대의 찬사였으며 동시에 제 감정을 어떻게 해야 잘 표현할 수 있을까하는 고민 끝에 나온 대답과도 같이 들려, 그것이 사랑스러웠기에 루피는 활짝 웃으며 진심으로 그 말을 들어서 기쁘다는 반응을 보여주었다. 자신이 해적왕에 오르고 나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축복과 찬사의 말을 많이도 들었지만 그의 말 한마디에 들어있는 가치 이상의 것은 없다고 감히 생각해보며 루피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대로 트라팔가 로우가 서 있는 곳까지 달려가 단숨에 그에게 뛰어들어 그의 허리에 찰싹 달라붙었다. 기습에 가까운 루피의 포옹에 로우는 어느 정도 예상하면서도, 막상 닥치니 때맞춰 방어하지 못하고 그대로 당한 채 로우는 루피와 함께 뒤로 쓰러져버리고 말았다. 등과 뒤통수에 울리는 통증을 고스란히 받아야 했던 로우는 윽 하는 소리와 함께 고개를 들어 루피를 향해 잠시 원망스럽게 노려보아야 했다.
“그렇게 달려드는 짓은 그만두라고 했을 텐데, 밀짚모자 여.”
“이시시싯. 그렇지만 트랑이가 그렇게 말해주니까 기뻐서. 아, 그나저나 나랑 약속했잖아!”
“뭐?”
“내가 해적왕이 되면 밀짚모자가 아니라 이름으로 불러주기로!”
아, 그 약속 말인가. 로우는 루피의 말에 오래 전, 루피가 아직 해적왕이 되기 전에 멋대로 자신과 한 약속을 떠올렸다. 계속해서 이름으로 불러달라고 칭얼거리는 루피에게 로우는 지금의 상황을 넘기자는 생각으로 해적왕이 되면 그 때가서 제대로 이름으로 불러주기로 얼결에 약속해버렸고, 루피는 그 약속을 지금까지 기억하며 지내왔던 것이다. 약속을 언급하는 루피의 모습에 로우는 어쩌면 루피가 자신의 이름을 듣고 싶어서 해적왕이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설핏 스쳐지나갔다. 그런 로우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루피는 로우의 골반 부근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는 오른손으로 로우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제대로 이름으로 불러서 축하해줘, 로우.”
로우. 처음으로 루피의 입에서 듣는 자신의 이름에 로우는 자신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이건 반칙이라고 따지고 싶을 정도로 낮게 울리는 루피의 목소리에 로우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루피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새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돌려버리는 로우의 모습에 루피는 의문을 느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부끄럼을 타는 로우가 귀엽다고 생각했다. 지금 당장이라도 여기서 덮쳐버리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로우가 분명 화를 낼 것이 분명했기에 밤까지 참기로 하며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는 루피의 귀로, 낮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축하한다, 루피.”
…아아, 정말인지. 이래서 난 로우가 정말 좋다니까.
마지막에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내 뜻에 져주는 자신의 연인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사랑스럽고, 또 사랑스러워서 루피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대로 상체를 숙여 로우를 와락 끌어안은 채 자신의 입술과 로우의 입술을 서로 포개어 맞추었다.
미련
W. 아르카디
내가 그 남자의 허벅지 위에 머리를 베고 누우면 그 남자는 거미와 같은 커다란 손을 세심하게 놀려 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놀거나 손 안에 쏙 들어오는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식으로 손장난을 쳤다. 그 남자의 몇 안 되는 버릇 중 하나였다. 몇 번 정도 내가 귀찮다면서 그만 내 머리를 가지고 놀라고 투덜거리며 항의했지만 그 남자는 내 항의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계속 버릇을 고치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도 그만 가지고 놀라며 가볍게 충고했지만 남자는 자신의 버릇을 전혀 고칠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나도 몇 번 남자의 손놀림에 불만을 가지다가 시간이 지나고 차츰 익숙해지면서 이제는 아무도 남자의 버릇에 뭐라 하지 않았다. 익숙해지기 보다는, 처음부터 남자의 손이 마음에 들었지만 그것을 표현하기 쑥스러워서 일부러 싫은 척을 했었다. 아마, 그 남자도 나의 속내를 전부 읽고 그만두지 않았던 것이지.
그 남자의 손이 좋았다. 커다란 손이 머리를 쓰다듬는 것이, 거미의 다리를 연상케 하는 긴 손가락이 세심한 놀림을 보여주며 내 머리카락을 가지고 장난치는 것이, 굳은살 너머로 전해지는 미지근한 체온이 내 피부로 전해지는 것이 좋았다. 남자의 손이 내 얼굴에 닿아 볼을 쓰다듬어주면 나는 응석을 부리듯이 손바닥에 볼을 비비며 그의 체온을 느꼈다. 그럴 때마다 남자는 나에게 꼭 아기고양이 같다면서 특유의 웃음소리를 흘렸다. 귀여운 로우. 나의 로우. 남자는 웃음과 함께 말버릇처럼 중얼거리며 한 손으로 내 얼굴을 감싸 넣었다. 그러나 내 얼굴이 남자의 손아래에 들어와도, 내 체온을 남자에게 전해줘도 남자의 미적지근한 체온은 변하지 않았다.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어중간한 온기. 그것이 나와 그 남자의 관계를 가장 잘 표현하는 것 같았다. 그 남자가 다가가도, 내가 다가가도 변치 않은 체온에 남자와 나는 서로 지쳐가고, 질려갔던 것이다.
온기를 바랬다. 변치 않은 따스한 온기를 서로가 바랬지만 불행히도 우리에게 그러한 온기는 없었다. 서로의 체온이 닿으면, 몸이 뒤섞여지면 서로의 체온이, 우리의 관계가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 싶었지만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거기에 지쳐 먼저 버리고 떠나버린 것은 그 남자였다. 이제는 먼 옛날처럼 느껴지는 추억에서 자신의 것이라며 자랑하듯이 속삭이며 사랑을 나눠주던 그 남자는 저만치 멀어져버려 나에게 온기가 아닌 차가운 상처만을 주고 떠나버리고 말았다. 나는 그것을 억지로 받아들이며 홀로 눈물을 삼켜야만 했다. 이제 미지근한 관계는 냉랭한 바람만이 불어 한없이 얼어붙어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서로 사랑했는데, 사랑하고 싶었는데 어째서 네가 나만을 두고 먼저 떠나버릴 수 있냐는 것이다. 버려진 자의 한은 무엇보다도 무섭다는 이야기는 들어봤지만 실제로 내가 그 한의 주인공이 될 줄은 누가 알았겠나. 이대로 혼자 냉기를 끌어안은 채 누구의 온기도 느끼지 못하며 살아갈 수는 없었다. 얼어붙은 관계에서 남은 것은 복수뿐이었다.
그 후로 나는 그 남자의 곁을 떠나 복수를 위한 계획을 준비했다. 그도 나와 같은 배신과 냉기를 느끼게 해주고 싶어 나는 이를 악 물고 아집으로 지금까지 살아오게 되었다. 그리고 녹을 줄 모르는 한기의 끝에서, 그 녀석을 만나게 되었다.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온기, 아니 태양과도 같은 열기를 가진 그는 잠시 스쳐지나간 만남을 잊지 않고 나와의 재회에 햇살을 연상케 하는 웃음을 흩뿌리며 나를 맞이하였다. 그래, 그 열기. 그 남자로 인해 내 가슴 깊이 박혀버린 얼음송곳을 녹여버릴 수 있을 정도로 뜨거운 열기를 나는 그리워하고 있었다. 처음 느껴본 온기는 너무나도 따스하고 포근하며 상냥했다. 나보다도 어리고 순수한 그는 그 남자와 같은 꿈을 꿈꾸고 있었다. 이 바다에서 가장 자유로운 남자가 되고 싶어. 남자는 나에게 말버릇처럼 늘 말하며 자신의 꿈을 자랑스럽게 말해주었다. 자유. 그 남자의 곁에 있었을 적에는 몰랐던 단어였다. 그를 통해 나는 자유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으며, 곧이어 나는 그것을 갈망하게 되었다. 나의 갈망을 알아차린 그는 내 손을 잡으며 그로서는 드물게 쑥스러움을 드러내며 말했다. 나와 함께 있어줘. 나와 함께 저 바다를 자유롭게 누벼보자. 사랑해. 조심스럽게 속삭이는 사랑의 고백에 나는 미처 흘리지 못했던 눈물들을 그제야 눈 녹듯이 흘려보내며 오열하였다. 그리고 그 눈물 속에서 그 남자가 나에게 속삭였던 사랑의 말까지 떠나보냈다.
그리고 마침내 내 복수는 성공하게 되었다. 그의 도움으로 나는 남자의 심장에 내 칼을 꽂아 넣을 수 있었다. 마지막 남자가 나에게 지었던 표정은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처음으로 보는 남자의 경악에 찬 표정은 묘한 카타르시스를 안겨주었고, 나는 그가 그 자리에 함께 있지 않았다면 반쯤 미쳐서는 남자의 시체를 마구 난도질 했을지도 모른다. 봐, 이게 당신이 나에게 준 배신이고 상처야. 나는 당신의 온기를 바랐는데 당신은 나에게 그것을 주지 않았어. 이제 알겠어? 이제는 내 심정을 이해할 수 있겠어? 원망에 찬 비통의 질문들을 마구 퍼부어주고 싶었지만 이미 그 남자는 죽어버렸고, 나는 그 남자에게서 더 이상의 대답은 듣지 못하게 되었다. 만약, 남자가 나의 질문을 들었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해줬을까.
죽기 직전, 그 남자는 나의 얼굴에 손을 뻗었다. 덜덜 떨리듯이 뻗어오는 남자의 손은 닿아야 할 곳에 도착하지 못하고 그대로 힘없이 추락하여 땅에 떨어졌다. 남자는 어디로 손을 뻗으려고 했을까. 닿지 못한 남자의 손끝이 정말로 닿은 것처럼 볼 한 쪽이 따끔거렸다. 물에 번져 흐릿해진 수채화처럼 추억의 파편이 불현 듯 떠올랐다. 내가 남자의 다리에 머리를 기대고, 남자가 나에게 얼굴을 쓰다듬어 주던 빛바래지고 쓸모없어진, 서로에게서 버려진 그 낡은 추억이었다. 때맞춰 그가 내 곁으로 다가오자, 나는 앞뒤 가리지 않고 그의 품에 도망치듯이 달려들어 내가 먼저 그에게 키스를 했다. 그 남자의 시신 앞에서 나는 다른 남자와 입을 맞추었다. 그의 온기가 나를 위로해주기를 원하면서, 그 남자에게 확실하게 이별을 선고하고 싶었다. 이제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그 남자가 죽고 많은 시간이 흘렀다. 나와 그는 약속대로 함께 바다를 누비기 시작했다. 비록 같은 배에 타지는 않았지만 인연은 계속해서 이어져서 그는 틈만 나면 내가 있는 곳으로 찾아왔고, 때때로 내가 그가 있는 곳으로 찾아가기도 했다. 서로가 위험할 때마다 망설임 없이 제 몸을 던져 상대를 지켜주었고, 서로가 힘들거나 기쁜 일이 있으면 함께 힘들어했고, 또 함께 기뻐했다. 아아, 이거였어. 내가 원하던 것은 바로 이거였어. 수많은 일들을 겪고, 그가 내 곁에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마다 나는 내 행복을 확인하고 싶다는 듯이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나는 외로웠다. 온기가 그리웠다. 그래서 그와 함께 있는 이 순간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소중한 것이다. 자기암시처럼 내려져오는 말을 나는 순순히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껏 내가 해온 일들 모두가 모래성처럼 허무하게 무너져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꿈이 이뤄지게 되었다. 정말로 그는 스스로 호언장담했던 것처럼 이 세상에 더할 나위 없는 비보를 손에 넣고 많은 이들의 존경과 선망의 대상이 되어, 이 바다에서 가장 자유로운 남자가 되었다. 누구도 뺏을 수 없고 부정할 수 없는 자리에 올라선 그는 가장 먼저 나에게 달려와 자신의 모습을 자랑하듯이 말하며 내 이름을 불러주었다. 로우. 로우. 지겹지도 않는지 노래처럼 불러대는 그의 부름에 나도 그의 이름을 따라 불러주며 보답해주었다. 그는 기쁘다는 듯이 나를 품 안에 가두며 말했다. 사랑해, 로우. 몇 번을 만져도, 안겨도 변치 않는 온기에 나는 행복감을 온 몸으로 느끼며 나 또한 그의 허리를 끌어안고 함께 몸을 포개었다. 따뜻하다, 행복해, 사랑해. 몇 번이고 나는 주문처럼 자신을 위한 기쁨의 표현들을 한껏 쏟아내었다.
ㅡ정말로 행복한 거야?
그 말과 함께 모든 것이 사라졌다. 지금까지 함께 바다를 헤쳐와 주었던 동료들, 그를 칭송하는 많은 사람들과 그의 동료들, 그리고 그마저도 마치 처음부터 실체가 없었던 신기루처럼 허무하게, 눈 깜빡 할 사이에 사라지고 말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텅 빈 공간에 홀로 남아 서있었다. 오직, 나 혼자 뿐이었다. 오싹하게 밀어닥치는 한기에 나는 다급하게 나만의 태양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존재를 찾아다녔다. 루피? 어디 있는 거야, 루피? 평소에는 부르지 않아도 제가 알아서 찾아오던 어린 연인은 내가 애처롭게 불러대도 나타나지 않았다. 어째서. 왜 아무도 없는 거야. 추워. 이 한기는 그 남자가 죽은 이후로 느끼지 못해서 더욱 더 살에 에일 듯 불어 닥쳐오는 것 같았다. 누가, 아무라도 좋으니까.
귀여운 로우, 나의 로우.
다정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이제는 들을 일 없는, 망가지고 퇴색되어 그 음색조차 떠올릴 수 없었던 속삭임이 오랜 시간을 뛰어넘어 다시금 듣게 되는 기분은 과연 어떤 것일까. 눈앞에 펼쳐진 것은 이제 잊었을 거라고 생각한 그 남자와의 추억의 일부분이었다. 작고 어린 나는 그 남자의 허벅지에 머리를 베고 누워 남자의 손길을 즐기고 있었으며, 그 남자는 손가락을 까닥까닥 놀리며 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다가, 젖살이 통통한 내 볼을 쓸어주거나, 새까맣고 짧은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행위를 반복적으로 하고 있었다. 귀여운 로우, 나의 로우, 나만의 로우. 그 남자는 주문처럼, 세뇌처럼 당연하다는 듯이 나에게 몇 번이고 사랑의 속삭임을 전해주었다. 거짓말. 거짓말이야.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 않잖아. 그렇게 나를 버리고 갔으면서 이제 와서 왜 내 눈앞에 나타나는 거야. 귀를 틀어막고 눈을 감으며 비탄에 찬 울부짖음 뒤늦게 환영을 통해 내지르듯이 토해내었다. 당신은 죽었잖아. 내 손으로 죽였잖아. 그래놓고는 이제 와서 다 낡아빠진 추억을 내세워서 내 눈 앞에 나타나지 말란 말이야!
로우.
다시금 들려오는, 흩날리듯이 사라질 것 같이 희미한 그의 부름에 나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뜨고 귀를 열어 이제는 변해버린 그 남자의 모습을 보았다. 남자는 평소와 같이 분홍색 털 코트를 망토처럼 걸쳐 입고 새까만 선글라스를 쓴 채 의자에 앉아있었다. 하트의 의자. 그가 언젠가 나에게 주겠다며 맹세처럼 약속했던, 어쩌면 정말로 내가 앉았을지도 모르는 내 의자에 앉아 왼쪽 가슴에 피를 흘리며 앉아있었다. 그곳은 심장이 있는 자리였으며 동시에 내가 그 남자를 찌른 부위였다. 피를 흘리며 홀로 앉아있는 그의 모습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도 외로웠으며 비애로 가득 차있었다. 내 발걸음은 그의 앞에 멈추게 되었다. 내가 온 것을 알았는지 그 남자는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두 눈에서도 피눈물이 흘러내려 괴이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니, 혐오스럽다거나 하는 그런 생리적인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안타까웠다. 그리고 동시에 깨닫게 되었다. 내가, 그를 이렇게 만들어버린 것이라고. 로우. 그는 구원을 바라는 것처럼 내 이름을 다시 한 번 부르고는 오른손을 들어 나에게로 뻗었다. 그 때, 죽기 직전 나에게 보여주었던 그 행위와 동일했다. 그러나 그의 피에 젖어버린 손은 그 때와 마찬가지로 끝내 닿지 못하고 추락하고 만다.
아아, 나는 깨닫게 되었다. 인정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나를 버리지 않았다. 그를 버린 것은 바로 나였던 것이며 나는 아직도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는 줄곧 나에게 사랑을 전하였는데 나 스스로가 그것이 미적지근한 사랑이라고 판단하며 그의 사랑을 멋대로 결정짓고 제 마음대로 떠나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바라기도 했다. 그가 나를 붙잡아주기를. 더욱 더 많이 사랑해 줄 테니 곁에 있어달라고, 아니 그가 매달리지 않아도 내가 그의 곁에 있고 싶었건만 나는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미련을 배신으로 착각하여 끝내 지금껏 나를 기다려준 그의 심장에 비수를 꽂아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저지르고 만 것이었다. 필사적으로 복수에 몸을 맡겼던 것도, 도망치듯이 그의 온기에 몸을 맡겼던 것도 이러한 자신의 모순을 견딜 수가 없는 비겁한 도피였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를 아직도 사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사랑은 미련이 되어 잘게 바스러진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었다. 도플라밍고. 도피. 그가 죽은 후로 지금껏 부르지 못한 그의 이름을 그제야 비명처럼 외치며 무너지듯이 그의 무릎 위로 쓰러지게 되었다. 피에 물들어진 왕좌, 추락해버린 왕, 엇갈리다가 뒤늦게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찾아온 사랑. 모든 것이 지독한 비극처럼 느껴졌다. 왜 나는 그의 사랑을 의심하고 배신했는가. 그는 변함없는 사랑을 가지며 빈 하트의 왕좌의 옆에 하염없이 기다렸는데 왜 난 그 기대를 피에 젖게 만들었을까. 모든 잘못을 깨달은 난 그를 위한 참회의 눈물을 쏟으며 힘없이 떨궈진 그의 손을 주워 그 날의 추억처럼 자신의 얼굴에 비벼대었다. 그토록 좋았던, 은은한 온기에 취했던 꿈같은 날에 겪었던 온기, 감촉을 다시금 느끼고 싶었다. 그러나 이제 그의 손에는 그 자그마한 온기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시신에서 풍겨져 오는 죽음의 냄새와 감촉이 내 뺨을 질책하듯이 사납게 내리치고 있었다.
* * * * *
“로우, 일어나봐. 로우.”
자신의 몸을 부드럽게 흔들며 속삭임으로 깨우는 목소리와 손길에 로우는 천천히 눈을 떠 눈앞에 있는 상대를 보았다. 로우와 똑같이 전라로 나란히 침대에 누워있던 루피가 드물게 걱정과 놀람으로 찬 표정을 지으며 로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로우는 아직 잠에 취한 탓인지 멍하니 눈을 두어 번 깜빡거리며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더니 뒤늦게 정신을 차린 것인지 비척거리며 상반신을 일으켰다.
“루피…? 갑자기 왜 그렇지?”
“아니, 로우. 너 모르는 거야?”
“뭐가 말이냐.”
“너, 울고 있어.”
루피의 지적을 듣고서야 로우는 자신이 지금껏 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두 눈 가득 흘러내리고 있는 눈물을 자각하고 난 뒤에도 그치지 않고 있으며 하염없이 로우의 얼굴을 흠뻑 적시고 있었다. 그렇구나, 나는 슬픈 거였어. 그 때, 도플라밍고를 직접 두 손으로 죽였을 때 자각하지 못했던 애탄을 지금에서야 느끼고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것이었다. 루피가 해적왕이 된 순간, 루피가 도플라밍고의 꿈을 대신해서 이룬 순간 로우는 가슴 한 구석에서 지금껏 비현실적으로 생각했던 도플라밍고의 죽음을, 사랑했던 연인의 죽음을 그 때서야 인정하면서 동시에 더 이상 그가 살아있지 않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응어리진 채 남아있던 미련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게 되자 로우는 가슴을 깊게 파고드는 그것을 참지 못하고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천천히 몸을 숙이며 꺽꺽 울음소리를 내었다. 눈물은 이제 영원히 멈추지 않겠다는 듯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연약하고 가엾은 연인의 울음에 루피는 잠시 놀란 표정으로 지켜보다가 이내 자신만이 알 수 있는 애매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로우가 무엇으로 인해 울고 있는지 모르지만, 본능적으로 연인의 비련을 알아차린 것인지도 모를 표정을 지으며 루피는 느릿하게 팔을 뻗어 로우를 자신의 품 안으로 넣어주었다. 맨살에 직접적으로 와 닿는 온기는 그 와중에도 상냥하고 따스해서 로우는 끝내 참아내는 것을 포기하고 목을 놓아 울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까지 너는 나를 원망하지 않았고, 내가 돌아올 것을 믿으며, 끊임없이 나를 기다렸다. 이제 너는 미련이라는 이름이 가지고 피에 젖은 왕좌에 앉아 내 가슴에 한이 되어 남겠지. 매일 밤 꿈을 꾸면 너는 그 모습으로 나를 맞이하겠고, 나는 너의 무릎에 기대어 눈물을 흘려보낼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온기에 기대어 위로를 받겠지. 앞으로 닥치게 될 스스로의 운명을 생각하면 지금껏 내가 저지른 죗값에 비해 가볍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추억 속의 어린 나는 너의 손길에 미소를 지으며 행복해했고, 나의 미소에 너 또한 행복하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그 행복은 지금 어디로 가서 지금껏 돌아오지 않고 있는 것일까.
끝내 닿지 못한 너의 손끝이 정말로 닿았다면, 그렇게 되었다면 나는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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