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어에 관한 전설이 있다.
물론, 어디까지나 마을에서 알음알음 입소문으로 전해진 것이 전설로 부풀려진 것이기에 사실 여부는 확인할 수 없는, 알맹이 없는 허풍일 가능성이 높지만 ‘허풍’이라는 말보다 ‘전설’이라는 말이 더 그럴듯하기에 마을에서는 알면서도 모른 척 전설 취급을 해줬다. 게다가 그 소재가 되는 것이 무려 ‘인어’이지 않은가. 바다하면 떠오르는 가장 유명하고 낭만적인 환상종의 이야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 우리 형을 제외하면 말이다.
형은 무척이나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옛날부터 유령이 없다면서 어두운 곳도 척척 찾아 들어갔고, 산타클로스나 요정, 천국에 대한 이야기들도 전부 어른들이 애들의 상상력을 충족시키기 위해 만들어낸 현혹적인 환상에 불과하다며 냉정하게 잘라냈다. 그런 형 밑에서 자라다보니 나도 자연스레 어린애들이 가질법한 감성이 메말랐지만, 형은 필요 이상으로 극단적이고 강박적이었다. 특히나 형은 인어 이야기를 싫어했다. 처음 내가 동네 아이들에게서 인어의 전설을 듣고 형에게 알려줬을 때, 형은 바로 눈을 세모꼴로 뜨고서 그런 흉물스러운 것이 세상에 어디 있냐며 펄쩍 뛰고는 다시는 그런 허무맹랑한 소리 하지 말라고 윽박질렀다. 마을에서는 모두가 자랑으로 여기는 인어의 전설을 왜 형만이 유난을 떨면서 싫어했는지, 어린 시절에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시간이 흐르고 귀가 좀 트이다보니 왜 그런지 대충 짐작이 갔다. 나는 집 한구석에 아무렇게나 놓여 진 먼지 쌓인 액자를 발견한 적이 있었다. 아직 갓난애였던 나, 어렸던 형, 그리고 아버지. 우리와 다르게 아버지는 듬직하고 사람 좋은 미소를 지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뱃사람이었다.
바로 앞에 탁 트이는 널따란 바다가 보이는 마을은 규모는 조금 작아도 아름답고 운치 좋기로 유명해 해마다 성수기가 되면 바다 경치를 구경하기 위해 찾아오는 관광객들이 많았다. 외지인들도 인어의 전설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진짜인지 알 수 없는, 여러 곳에서 와전되어 부풀어진 터무니없는 낭설들과 조금 섬뜩하고 잔혹한 괴담 같은 것이 붙어있어도 사람들은 그저 좋아라하고 꺅꺅거렸다. 마을 사람들과 관광객들에게 있어 인어의 존재 유무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전설이라는 이름 아래 다닥다닥 붙어있는 날조된 망상들이었다. 어렸을 적에는 인어의 이야기라면 가리지 않고 좋아했지만, 나이를 먹고 나니 장사치들의 속셈이 훤히 보이면서 이젠 유치하다는 감상도 들었기에 이젠 감흥도 들지 않았다. 형의 신경질적인 반응도 흥미를 빠르게 식히는데 한 몫을 단단히 했다. 그래도 인어의 환상과 낭만은 여전히 안에 잔존해있었다. 내 나름대로 상상해본 인어의 이미지도 있었다. 반은 사람, 반은 물고기의 모습을 한 매혹적인 존재. 나는 세상에 그런 존재가 있을까 의심하면서도, 동시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기대를 버리지 못했다. 허나 살면서 그런 존재를 만날 기회는 없겠지. 나는 혼잡한 기대와 체념 속에서 인어의 낭만을 꼭 쥐었다.
바닷가의 밤바람은 차가웠다. 나는 정박지(선박이 항구에 입항하기 전에 닻을 내리고 대기하는 수역.)에서 서쪽으로 조금 더 걸어가고 있었다. 형이 도시의 대학에 들어가 마을을 떠난 후에 생겨난 새로운 버릇 같은 거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형과 함께 지내던 집이 아직도 적응되지 않아 심란한 마음을 달래고자 시작한 밤 산책은 생각보다 오래 이어지고 있었다. 계속 걸으니 마을 외곽에 위치한 작은 등대가 보였다. 새롭게 지은 큰 등대가 생긴 후로는 방치된 채 쓰이지 않는 곳이 되었다. 이제 아무도 관리하지 않는 오래된 등대는 빠르게 바닷바람에 깎여져가고 있었다. 밤 산책은 등대에 도착함으로서 마무리 된다. 이제 다시 왔던 길을 되짚어서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풍덩.
무언가가 수면에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큼직한 것이 바다에 빠지는 것처럼 들렸기에 화들짝 놀라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밤바다는 여전히 잔잔한 수면을 유지하면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굴었다. 잘못 들은 건가? 그리 의심할 때, 다시 소리가 들렸다. 첨벙. 이번에는 널찍한 뭔가로 물을 때리는 소리였다. 소리는 등대의 바로 밑에서 들렸기에 조심조심 등대 쪽으로 걸어갔다. 뭐지? 원인을 알 수 없는 연이은 큰 소리에 온몸이 뻣뻣하게 긴장되어 침을 꿀꺽 삼켰다. 등대에 도착하자 조심히 고개를 내밀어 바로 밑에 있는 바다를 살폈다.
등대 밑에 있는 것은 한 소년이었다.
내 또래로 짐작되는 소년은 기이하게도 어두운 밤바다 속에서도 환하게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진주같이 새하얗고 투명한 피부, 짙은 갈색 머리카락, 커다란 눈동자, 붉은 입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매끈한 상반신, 그리고 소년의 뒤에서 붉은빛으로 팔랑팔랑 흔들리고 있는 물고기의 꼬리.
전설 속의, 인어.
눈이 마주치자 인어는 원하는 것을 이뤘다는 것이 기쁜지 베시시 웃었다. 순수하고 말갛게 웃는 인어의 미소를 처음으로 목도했을 때 과연 어떤 반응을 비춰야할까. 어쨌든 당시의 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그 후로 나는 밤마다 등대 밑에서 인어를 만날 수 있었다. 매일은 아니더라도 사흘에 한 번 꼴로 인어는 등대로 찾아와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겉으로 보기에는 나와 비슷한 또래로 짐작되는 인어는 전설에서 흔히 묘사되는 여자의 모습이 아닌 남자의 모습이었지만, 보기만 해도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위험한 매력은 성별을 초월하고 있었다.
인어와 만났다고 해서 딱히 일상이 크게 달라지거나, 무언가를 얻어내는 건 없었다. 밤 산책 중에 인어를 만나게 되면 인어는 한동안 내 주변을 헤엄치면서 배회하다가, 시간이 지나 새벽이 되면 다시 바다 속으로 스르르 들어가는 게 전부였다. 나에게 뭔가를 요구하거나 내 부탁을 들어 주겠다 나선 적도 없었다. 그저 어쩌다 나를 보게 되면 처음 만났을 때처럼 반갑다는 듯이 환하게 웃어주는 것이 전부였다. 나는 등대에 기대어 앉아 인어가 헤엄치면서 노는 모습을 구경했다. 인어는 혼자서 물장구를 치고 놀다가, 심심하면 물고기들을 불러들여 경주를 벌이기도 했다. 나는 내색은 안했지만 매번 놀라움 속에서 인어의 순간들을 감상했다. 어렸을 적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전설 속 존재가 실제로 나타나 움직인다고 하는데 당연히 놀라지 않을 수가 있을까. 몇 번을 봐도 질리지 않은 광경이었다. 더욱이 인어의 아름다움 또한 보면 볼수록 찬사를 아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언젠가 인어가 뭍 밖으로 펄쩍 뛰어 올라와 내가 있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앉은 적이 있었다. 그 때 완전히 물 밖으로 나온 인어의 하반신은 마치 보석으로 만들어진 것 같았다. 약간 색이 옅은 붉은색을 바탕으로 유려한 곡선과 무지개 빛으로 반짝이는 비늘로 짜여 진 지느러미는 산호와 진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싶으면서도, 지금껏 살면서 상상해본 인어의 꼬리보다도 훨씬 훌륭한 미에 내 상상력이 얼마나 진부하고 초라했는지 통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인어는 내가 꼬리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자 내 속내를 전부 읽어냈는지 소리 없이 쿡쿡 웃더니 다시 바다 속으로 풍덩 들어갔다. 아무래도 제 꼬리를 한번 쯤 자랑해주고 싶었던 것 같았다.
한 가지 신경 쓰이는 것이 있다면, 인어는 한 번도 말을 하지 않았다.
계속 인어의 행동거지를 살펴본 결과, 인어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말을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제 의사를 표현하고 싶을 때 굳이 번거롭게 손짓을 하거나 꼬리로 수면을 때리는 수단을 사용했기에 추측은 거의 확신에 가까웠다. 왜 말을 하지 않는 걸까? 전설에서 인어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아름다워 뱃사람들을 현혹시키는 마력을 지녔다고 한다. 어떤 목소리일까? 얼마나 아름답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제각기 다른 환상을 지니면서도 공통적으로 인어의 목소리가 아름답다고 칭송할까. 인어를 만나는 날이 길어질수록, 인어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는 욕심도 커져갔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다. 인어와 대화 하고 싶었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내 형편없는 목소리를 인어가 좋아할지 모르겠지만, 한 번이라도 좋으니 서로의 목소리를 섞고 싶었다.
좀 더, 인어에 대해 알고 싶어졌다.
“있잖아, 왜 아무 말도 안하는 거야?”
기어이 용기를 쥐어짜내어 인어에게 물었다. 인어는 오늘도 밤바다를 유영하고 달빛에 몸을 쬐며 나름대로의 유희를 즐기고 있었다. 그런 내 질문에 인어는 잠시 놀란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빤히 응시했다. 그러고 보면 내가 처음으로 인어에게 말을 건 순간이기도 했다. 나는 그것이 어째 부끄러워져 더욱 양 무릎을 안쪽으로 끌어 모아 감싸 안고서는 고개를 푹 수그리고서 뒷말을 이었다.
“그냥, 목소리가 듣고 싶어져서. 혼자 놀면 재미없잖아. 나 같은 거라도 좋다면 말동무가 되어줄 테니까… 아니, 인간이랑 말 섞기 싫다면 그냥,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 목소리, 들려주면 안 돼?”
침묵이 흘렀다. 익숙한 침묵인데도 지금은 시리도록 차가웠다. 멀리서 치는 파도소리가 섬뜩하게도 들렸다.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혹시 화난 건가 싶어 나는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슬며시 들어 인어를 봤다.
달빛이 펼쳐진 바다에서 인어는, 처음으로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봐줬다.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 길고도 짧았던 찰나의 꿈에서 깨어나 버린 것 같았다.
어떤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인어는 붙잡을 틈조차 주지 않고 풍덩 소리를 내면서 깊은 바다 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인어는 등대로 찾아오지도, 내 앞에 나타나지도 않았다.
두 달 뒤, 형이 마을로 돌아왔다.
대학에서의 공부가 잘 되어가고 있는지 형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잘 지냈냐고 안부를 물었다. 나는 그 질문에 마땅히 대꾸할 말이 없어 그냥 고개를 주억거리기만 했다. 그 날 저녁은 형이 직접 차려줬다. 해가 저물고 밤이 다 되었는데도 마을은 부산스러웠다. 한창 관광객이 찾아올 성수기였다. 여긴 여전하구나. 형은 창 밖에 보이는 마을의 불빛들을 보면서 그런 말을 흘렸다. 간간히 집 안으로 인어의 전설을 떠드는 사람들의 말소리가 흘러들어왔다. 그럴 때마다 나는 자연스레 인어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렸다. 저절로 귀를 틀어막고 싶었지만, 바로 앞에 형이 있어서 그럴 수가 없었다. 문득, 인어 이야기를 싫어했던 형 생각이 났다. 나는 버릇처럼 곁눈질로 형의 상태를 살폈다. 뜻밖에도 형의 얼굴은 차분했다. 기분 나쁜 기색은 거의 보이지 않았고, 다만 이유 모를 회한만이 어른거렸다. 그 모습을 보니, 왠지 지금이라면 물어봐도 괜찮을 것 같았다.
“형.”
“응? 갑자기 왜 그래?”
“형은 어째서 인어를 싫어하는 거야?”
내 질문에 형은 갑자기 던져온 질문에 당혹스러운지 들고 있던 숟가락을 흠칫 떨었다. 그리고는 내 질문에 대한 의중을 읽어내려는 듯이 가늘게 눈매를 좁히면서 내 얼굴을 뚫어져라 살폈다. 옛날에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지를 때마다 보인 형의 모습이었기에 나는 지레 발등이 찍힌 사람처럼 시선을 머뭇머뭇 피했다. 아, 역시 화내려나. 그러나 내 짐작과 달리 형은 조금 뒤에 한숨을 푹 쉬고는 숟가락을 놓고 덤덤히 말했다.
“딱히 인어가 싫은 건 아니야. 아버지 때문에 그렇지.”
“아버지?”
“하긴, 넌 모르겠지. 네 귀에 그딴 말 안 들어가려고 내가 마을 사람들 붙잡고 닦달해서 얼마나 고생했는지 넌 모를 거다.”
형은 다시 한 번, 먼젓번 것보다 더 깊은 한숨을 길게 내쉰 뒤 내가 몰랐던 인어의 숨은 전설을 가르쳐줬다.
아버지는 뱃사람이었다.
생전의 아버지는 바다에 대한 낭만과 모험심을 품었고, 항상 허세에 찬 의미모를 말만 늘어놔서 안쓰러웠지만 사람은 바보 같이 무척이나 좋았던 사람이라고 한다. 아버지는 매번 큰 배를 타고 험한 바다를 누비면서 여러 나라를 다녔고, 마을에 돌아올 때면 어렸던 형에게 이국적인 이야기들을 선물 보따리를 풀어내는 것처럼 장황하면서도 실감나게 설명해주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인어의 전설을 믿으셨다. 마을 사람들은 반신반의하는 그 이야기를, 아버지는 누구보다도 굳게 믿으셨다고 한다. 입버릇처럼 자신은 언젠가 인어를 찾아낼 것이라며 한 점 부끄럼 없이 당당하게 포부를 밝히셨다. 위험을 무릅쓰고 여러 바다를 누비는 것도 전설 속 인어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형은 한심하게 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자랑스럽게 여겼다고 한다.
그리고 내가 태어난 해, 아버지는 항해를 나갔다가 큰 해일을 만나 바다에 빠져 죽었다. 아버지의 비보를 들은 어머니는 충격에 몸져누웠고, 형은 매일 울면서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뱃사람들 중심으로 아버지에 대한 소문이 떠돌았다.
아버지가 사고로 죽기 전에 인어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소문은 점점 부풀려져 마을 이곳저곳에 퍼져나갔다. 어떤 사람은 아버지가 인어에게 홀려 남들의 눈을 피해 밀애를 즐겼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인어의 저주를 받아 아버지가 죽었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사실은 죽지 않고 살아서 인어와 함께 바다 깊숙한 곳에 들어가 함께 지내고 있을 거라고 했다. 형은 그런 소문들에 대해 분개했다. 아버지의 죽음이 모욕당하는 기분이었고, 생전에 인어에 대한 애착을 드러내면서 마지막으로 떠나기 전까지 인어에 대한 말만 늘어놓았던 기억 속 아버지에 대한 묘한 배신감과 실망이 솟구쳤다. 그리고 어머니가 끝내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시고 그대로 아버지를 따라 돌아가신 날, 형은 장례식 장에서 벌겋게 충혈 된 눈으로 마을 사람들을 흉흉하게 노려보면서 다시는 아버지와 인어를 엮어서 그런 말을 하지 말라고 발악하듯이 소리쳤다.
그러나 여전히 마을 사람들은 형제의 눈과 귀를 피하면서 서로서로 아버지와 인어에 얽힌 저마다의 추측을 내놓으면서 하나의 전설로 포장하고 있었다.
인어의 전설을 모아서 엮은 책에 이런 전설이 적혀있었다. 어느 지방에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인어가 있었다. 인어는 어느 인간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는데, 그 남자가 불의의 사고로 죽어버리자 인어는 평소 좋아하던 노래도 부르지 않고 매일매일 구슬프게 울었다. 그 아름다운 목소리가 다 쉬어버리도록, 쉬지 않고 서글피 울음소리를 냈다. 그리고 인어는 끝내 목소리를 잃어 평생을 말을 하지 못하고 살다가 끝내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면 너도 그랬던 걸까. 아버지를 사랑한 너도 전설 속 또 다른 인어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매일 같이 울다가 결국에는 목소리를 잃어버리고 만 것일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 새 등대에 도착해 있었다. 잔잔한 바닷바람이 불었고, 바다는 깊은 고요를 덮고서 조용히 잠들어 있었고, 너는 오늘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어쩌면 그 인어는 내가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아챘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람들 앞에서는 드러내지 않았던 모습을 일부러 나에게 보여준 것이겠지. 마을 사람들이 나를 볼 때마다 이구동성으로 아버지를 무척이나 빼닮아 간다며 했던 게 떠올랐다. 주먹을 꽉 쥐었다. 입술을 깨물었다. 마을 사람들도, 형도, 아버지도, 인어도, 전부 다 미웠다. 모두가 한통속이 되어 나를 바보로 만든 것 같았다.
얼마나 사랑했던 걸까. 목소리마저 바쳤을 만큼 너는 아버지를 사랑했던 걸까. 얼굴도 기억 안 나는 아버지가 미치도록 싫었다. 인어의 목소리를 앗아간 아버지가 죽도록 미웠다. 목소리도, 눈물도, 마음도 전부 가져가버린 그가 너무도 부러웠다.
아, 나도 결국에는 그 인간의 아들이라는 건가.
더는 서 있을 기력도 없어 바다 앞에서 주저앉았다. 너의 마지막 얼굴이 자꾸만 눈앞에 맴돌았다. 그런 모습조차도 너는 참으로 아름다웠다. 아버지가 왜 그렇게까지 인어에게 매달렸나 싶었던 게 납득이 갈만큼 너는 너무도 위험했다. 어째서 뱃사람들이 인어를 그만큼 선망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두려워했는지 확실히 이해가 갔다. 너는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저 어두운 바다 밑에서 또 다시 눈물을 흘리며 혼자 슬퍼하고 있을까. 그리 생각하니 갑자기 마음이 울렁거렸다. 차갑고 어두컴컴한 바다 밑에 있을 너를 그냥 둘 수 없었다. 허겁지겁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첨벙.
물소리가 났다. 무언가가 수면 위로 솟아나왔다. 우윳빛 진주처럼 매끈하고 투명한 살결, 깊이를 짐작할 수 없는 커다란 눈동자, 물에 젖은 검은 머리카락, 붉게 번져있는 입술.
인어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아. 나는 다리에 힘이 풀린 것처럼 털썩 주저앉았다. 인어는 아무 표정도 없이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갑자기 머릿속이 새하얗게 되면서 하고 싶었던 말들이 전부 지워졌다. 아버지에 대한 것, 목소리에 대한 것, 너에 대한 것까지 전부 묻고 싶었는데, 네 얼굴을 보니 너를 봤다는 것만으로도 족한데 뭐가 더 중했던가 싶었다.
그저, 이렇게 만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는데.
인어는 물 밖으로 손을 뻗어서 천천히 내 뺨을 어루만졌다. 바다 속에 있어서 그런지 인어의 손은 무척이나 차가웠고, 상상했던 것만큼 부드러웠다. 살짝 떨리고 있는 손끝에서 나는 책 속의 인어가 마지막에는 물거품이 되어버렸다는 구절을 떠올렸다. 너도 언젠가 물거품이 되어 이 바다에 녹아 흔적도 없이 사라질까. 눈시울이 울컥 뜨거워졌다. 당장 인어의 손을 잡아채어 물 밖으로 끌어내 나만이 볼 수 있는 곳으로 데려가고 싶었다. 인어의 목소리를 되찾게 하고 싶었다. 아버지의 대신이라도 좋으니 나를 사랑해줄 수 없냐고 매달리고 싶었다. 아버지만큼, 아버지보다 더 사랑해줄 수 있다고, 그 사람처럼 갑자기 너의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내 뺨을 매만지는 인어의 손 하나 잡지 못하고 가만히 그 손길에 기댈 수밖에 없는, 그런 한심한 놈이었다.
“…가지마.”
간신히 꺼질 듯 한 목소리로 그런 추한 매달림만 전하고 말았다.
인어는 내 말에 잠시 놀라다가, 나를 위해서인지 애써 웃어줬다.
처음 만났을 때의 그 웃음과 닮아 있었지만, 그 때의 천진함과 밝음은 슬픔으로 옅어져버리고 말았다.
인어는 내 뺨에서 손길을 거두더니 잠시 수평선이 있는 곳으로 헤엄치다가 뻐끔뻐끔 입모양으로 무어라 말을 전했다. 그리고는 다시 헤엄쳐 나가더니 이윽고 바다 속으로 들어가 말끔히 자취를 감춰버리고 말았다. 나는 한참 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인어가 떠난 자취만을 멍하니 바라봤다. 뺨에 남아있는 물기는 금방 다른 물기로 씻겨 내려갔고, 서늘했던 손길의 체온도 벅차오르는 뜨거운 물줄기로 빠르게 사라졌다. 너도, 나도, 서로에게 어떤 흔적도 남기지 못했다는 사실만이 날카로운 비늘이 되어 가슴에 박혀있을 뿐이었다.
「잘 있어. 안녕.」
다시 고요함을 찾은 바다는 위로하는 것처럼 인어가 떠난 자리를 물결로 가만히 덮어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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