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지금까지 쓴 원피스 글들 중에서 가장 공들여서 쓴 글이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공들여서 쓴 이유가 그만큼 있어서겠지만, 사정이 있어서 결국 엎어버린 글.
0.
“ㅡ메스.”
사망선고를 내리기 위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감정들을 의도적으로 죽여 버린 의사와 같은 메마른 목소리가 허공에 울렸다.
그와 함께, 붉은 정육면체의 핏덩어리가 공중에 떠올랐다.
1.
“다시 되찾은 드레스로자와 은인들을 위하여 건배!!!”
누군가의 외침이 끝나자마자 경쾌하게 잔들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크게 울려 퍼졌다. 해방의 축제를 알리는 축포였다.
그동안의 진실이 밝혀짐으로서 그동안 나라를 검게 드리웠던 모든 어둠들은 물러나게 되었고 다시금 나라에는 소박하고 행복이 가득한 웃음소리만이 가득했다. 10년 동안이나 위선을 내세워 양면적인 정책으로 보이지 않는 폭정을 일삼았던 칠무해는 물러나게 되었으며 그를 왕좌에서 끌어내린 나라의 은인들은 국민들의 찬송과 인기를 한 몸에 얻어내어 그들과 함께 축제를 만끽하고 있었다. 10년의 고난 속에서 인내하며 끝까지 국민들을 원망하지 않고 지내온 선량한 국왕에게 다시 돌아갔으며, 한 때 갖은 비난과 모욕과 고행 속에서 지내야만 했던 왕녀는 더 이상 여린 몸으로 검을 쥐고 힘겹게 싸우지 않게 되었으며, 모든 이들의 기억 속에서 괴롭게 잊어지고 말았던 비운의 검투사도 전설적인 영광을 되찾아 명예를 얻게 되었다. 모든 것들이 제자리를 되찾게 되면서 드레스로자는 10년 동안 잊고 있었던 진정한 평화와 행복을 다시 되돌려 받아내었다.
그들만이 축제를 즐기는 것이 아니었다. 수많은 목적을 가지고 이 나라에 찾은 자들이 공동의 적을 앞두고 함께 싸우며, 마침내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었을 뿐만이 아니라 많은 국민들의 감사와 존경을 받게 되었다. 예상외의 사태들과 뜻밖의 진실들이 밝혀지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일은 잘 풀리게 되어 나라를 찾아온 이방인들 또한 자연스레 축제에 섞이게 되어 축하주를 마시고 함박웃음을 터트리며 나라의 경사를 함께 즐기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은 이들의 존경과 고마움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인물은 다름 아닌 ‘갓 우솝’, 밀짚모자 해적단의 저격수였다. 비록 그 스스로가 원해서 벌인 일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장난감이 되어 망각 속에 영원히 갇혀버린 이들을 해방시킨 구세주가 되었기에 지금도 축제의 중심이 되어 많은 이들이 아낌없는 찬양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찬양 속에서 완전히 즐기게 된 우솝은 축제장에서 가장 높은 곳에 올라 일장연설과 함께 축제를 흥겹게 돋울 자작곡을 열창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둘러싸고 서로를 어깨동무 하며 입이 찢어져라, 섬이 떠나가라 웃고, 먹고, 마시었다. 모든 것들이 화려하고 즐겁고 눈부시며 어둠 따위는 전혀 보이지 않는 밝은 빛이었다. 돈키호테 도플라밍고의 아래에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웃음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더 크고, 높게 웃었다. 지금껏 자신들을 기만한 그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사태의 뒤처리는 그간의 과정들이 허무하게 느껴질 정도로 일사천리에 풀렸다. 드레스로자의 국왕이자 칠무해 돈키호테 도플라밍고의 마지막 발악은 밀짚모자 루피와 죽음의 외과의 트라팔가 로우의 동맹을 필두로 한 세력들로 인해 무참히 실패로 끝나게 되었으며 도플라밍고는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가 죽음으로서 섬에 드리워졌던 새장은 말끔히 거둬지게 되었고 국민들을 조종하던 실들 또한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되었다. 사건이 종결되고 해군 대장 후지토라는 남은 돈키호테 패밀리의 잔당들을 붙잡아 압송해갔으며 로우의 칠무해 탈퇴 건에 대해서는 모든 일의 흑막인 도플라밍고를 해치운 것에 대한 일종의 보답 차원이자 사태를 최대한 빨리 정리하기 위해서 없던 일로 처리했으며 루피를 포함한 다른 해적들에 대해서도 후지토라가 ‘빚을 졌다.’라는 이유로 상부에는 도망쳤다는 핑계를 대주었다. 허나 다음번에는 반드시 체포하겠다는 말을 잊지 않고 남긴 채. 덕분에 해적들은 해군에게 잡혀가지 않았고 로우 또한 칠무해의 자리를 보존할 수 있었다. 잘 됐네, 트랑아. 칠무해 자리가 유지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루피가 로우의 등을 툭툭 두드리며 반가워했지만 로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로우는 자신의 직위가 유지될 수 있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마지막에 도플라밍고를 죽인 자는 트라팔가 로우였다. 확실하게 죽이기 위하여 능력을 이용해 친히 그의 심장을 꺼내어 직접 자신의 칼로 찔러 넣었다. 한 치의 흔들림과 망설임 없이 일직선으로 내리꽂은 칼은 정확히 심장을 관통하였으며, 도플라밍고는 지금까지의 권력과 능력이 무색할 정도로 비참하고 허탈하게 피를 토하며 죽어버리고 말았다. 로우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더 이상 뛰지 않는 심장과 피를 토한 채 쓰러진 도플라밍고를 번갈아 보았다. 13년간의 복수가 마침내 종지부를 찍은 순간이었다.
“트랑아, 여기서 뭐해?”
소란스럽고 복잡한 축제장에서 용케도 로우를 찾아낸 루피가 양 손에 고기를 잔뜩 쥐고 그에게 달려와 물어보았다. 축제의 구석에서 조용히 앉아 도수가 약한 술을 홀짝이고 약간의 안주거리로 요기를 채우던 로우는 자신에게 부담스러울 정도로 들이대는 루피에게서 등을 뒤로 내빼는 것으로 물러나고는 덤덤히 대답했다.
“그냥. 피곤해서 여기에 있는 것뿐이다. 그것보다 우리는 이제 동맹 관계가 아니니 그렇게 친하게 굴지 말아줬으면 좋겠군.”
“하지만 난 트랑이가 좋은데? 트랑이가 우리 동료가 되어줬으면 할 정도로!!”
“허튼 소리 집어치워라, 밀짚모자여. 난 이미 한 해적단의 선장이다.”
“시싯, 알아. 그래도 지금은 축제니까 트랑이도 같이 놀면 좋잖아!!”
“난 됐다. 흥미 없으니 하던 일이나 계속 하도록.”
“에엑!? 그치만….”
“어이, 루피!! 잠깐 이리로 좀 와 봐!!”
여차하면 무력을 이용해서 억지로 데려갈 기세를 슬슬 보이는 루피와 그것을 눈치 채고 몸을 굳혀 방어 태새를 보이는 로우의 사이로 나미의 목소리가 끼어들게 되었다. 두 사람이 잠시 가벼운 실랑이를 멈추고 시선을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돌려보니 저 멀리서 손짓으로 루피를 부르는 나미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지금이 아니면 루피를 쫓아낼 수 있는 기회가 두 번 다시없을 것이라 간파한 로우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루피에게 바로 말했다.
“네 항해사가 부른다. 그만 가보도록.”
“쳇. 그럼 나중에라도 꼭 와야 한다! 어이, 나미! 무슨 일이야?”
나미의 부름으로 결국 로우를 데려가겠다는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한 발 물러서게 된 루피는 그래도 미련이 남아 입술을 쭉 내밀고 로우와 나미를 번갈아보더니 나미의 부름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는지라 결국 나미 쪽으로 몸을 돌리고 그녀에게로 달려갔다. 로우에게 나중에라도 반드시 축제에 들어오라는 말을 빼먹지 않고 전하면서 달려가는 루피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본 로우는 이내 한숨을 쉬고는 손에 든 술잔에 입을 갖다 대어 한 모금 마시었다. 동료에게로 달려가는 뒷모습이 영락없는 그 나이대의 철없는 어린 소년이었다. 열아홉이라고는 하지만 아직도 앳된 티를 벗지 못하고 그대로 유지하며 낭만을 꿈꾸는 모습은 로우에게 있어서 가장 낯설고 눈부신 모습이었다. 더욱이 스스로의 과거와 대비하면 더욱 찬란하면서도 괴로운 밝음이었다. 로우는 이제 나미와 합류하여 인파 속에 묻혀 사라진 루피의 모습을 마지막까지 확인하고는 갈 곳 잃은 시선을 아무렇게나 허공에 던지며 무의미하게 지나가는 군중들을 살펴볼 뿐이었다.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사람들 속에서 정적을 유지하는 로우의 모습은 축제장을 가득 메우고 있는 전체적인 분위기와 비교했을 때 유일하게 달랐으며 그렇기에 참으로 이질적이었다. 지금껏 이런 분위기 속에 있어본 적이 없었으며 쉽게 적응하지 못하고 섞이지 않는 것이 그 원인이었다. 로우는 눈앞에 있지만 심리적으로는 동떨어진 기분을 느끼며 체념하듯이 고개를 저었다. 아마 자신은 쉽게 이런 분위기를 적응하지 못할 것이라는 의미의 고갯짓이었다. 로우는 시선을 위쪽으로 들어올렸다. 고개를 들자 바로 넓게 펼쳐진 밤하늘이 보이며 그 아래로 여기저기 솟아나 있는 드레스로자의 건물들이 보였다. 그 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고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건물은 드레스로자의 궁전이었다. 왕이 사는 건물답게 다른 나라의 궁전들처럼 웅장하고 화려한 특유의 미를 가지고 있었으나 여러 전투 끝에 파손되고 허물어져서 그 화려함은 많이 손상된 상태였다. 아마 몇 번의 보수를 거쳐야 이전의 미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잠시 동안 말없이 부서진 궁전을 물끄러미 보던 로우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러서야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려하고 정적으로 일어난 그의 움직임은 요란스러운 축제통에서는 전혀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고요에 잠겨있었다. 분신과도 같은 검을 손에 쥐고 사박사박 발걸음 소리를 작게 내며 걸어가는 로우의 모습을 그 누구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가 떠나고 남은 자리에는 절반 정도 남은 술을 담아두고 있는 술잔과 식어버린 안주만이 그를 대신하여 빈자리를 채워주고 있었다.
3.
트라팔가 로우의 인생의 절반은 ‘복수’라는 한 단어로 설명할 수 있으며 그것이 그의 인생의 전부라고 할 수 있었다.
로우는 13년이라는 길면서도 앗 하면 지나갈 찰나의 세월을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복수를 위해 바쳐 그것을 제물로 삼아 자신의 숙원을 이루기 위해 지금껏 그 어떠한 짓이든 망설임 없이 해내었다. 도플라밍고를 향한 복수심과 코라손의 유지를 잇겠다는 신념이 로우가 지난 13년이라는 이름의 인내의 고행 속에서 버티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토록 바라던 것들이 마침내 로우 자신의 손으로 이뤄지게 되었다. 그러나 쌓아온 나날들에서 느낀 힘듦과 괴로움보다도 더 이상 쌓아올리지 않아도 되었을 때의 허탈함과 허무함이 더 괴롭다고 그랬다. 로우는 지금껏 느끼지 못한 무기력함으로 제 몸조차 가누지 못할 정도였다. 당연한 것이었다. 지금껏 복수만을 생각하며 그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각오로 살아온 자에게 모든 것을 이루었으니 이제 네 마음대로 살아라 라고 말하는 것은 그 사람의 존재의의를 빼앗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로우의 13년의 세월이 무의미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로우의 인생은 그 13년이 끝이 아니었다. 복수의 13년을 흘려보냈으니 남은 세월은 또 무엇으로 채우며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지금껏 채워놓은 것들을 한꺼번에 바닥에 쏟아 부어 버리고 다시 저 깊은 바닥에 닿을 때까지 알 수 없는 무언가로 채워야 할 때였다. 그렇다면 앞으로 무엇을 채워 넣어야 트라팔가 로우의 인생의 나머지를 헛되게 보내지 않을 수 있을까.
이제 텅 비어버린 그릇을 바라보며 로우는 천천히 생각했다. 이제는 복수라는 것보다는 다른 것들을 채워 넣고 싶다고. 그렇게, 작게 바랬다.
뚜걱, 뚜걱, 뚜걱.
아무도 없는 빈 궁전을 채우는 것은 메마른 발소리였다. 모두가 파티에 여념이 없었으며 더욱이 싸움의 결전지가 된 탓에 절반 가까이 파손되어 엉망이 된 궁전에 굳이 찾아가 머무는 사람도 없었기에 오로지 로우의 발소리만이 텅 비어 차갑게 식어가고 있는 궁전의 내부를 메우고 있었다. 내일이면 파티의 여운에서 서서히 벗어나 궁전 증축 공사를 시작할 예정이라는 이야기를 로우는 얼핏 들었다. 궁전을 새로 짓게 되면 이전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을 찾으면서도 현재의 나라 사정을 생각해서 화려함보다도 소박함을 중시하는 디자인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의 대화중에서는 이전에 도플라밍고는 궁전을 화려하게 증축시키는 것에 집중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본래의 궁전의 디자인에서 여러 장신구과 조각상, 벽화들이 늘어나게 됨으로서 이전의 주인인 리쿠 왕가의 이미지가 아닌 돈키호테 패밀리의 색이 난폭하게 덧칠되어졌다. 그러나 지금은 궁전의 이미지에 깊이 생각할 의미는 없다. 로우는 그러한 이유로 생각을 정리하고 보폭을 유지하면서 고개를 돌려 복도의 오른편으로 길게 창이 나 있는 곳을 보았다. 둥근 보름달이 뜬 밤하늘이 한 폭의 그림처럼 길게 창을 채우고 있으면서 로우와 마주보았다. 하늘에 구멍이 난 것처럼 둥글고 깨끗하게 떠 있는 달은 검은 밤하늘과 대비되어 신비로운 느낌을 더해주고 있었다. 로우는 노스블루에 있던 시절에 저렇게 새하얀 보름달은 다른 세계로 가는 입구라고 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어디까지나 어린 시절의 동심을 자극시켜주는 동화 속 이야기였지만 저러한 달을 바라볼 때마다 로우의 머릿속에 종종 떠오르는 이야기였다.
몇 번을 더 발을 내딛었을까. 로우는 드디어 도착하고자 하는 장소에 발을 멈추게 되었다. 달빛조차 들어오지 않는 곳에서 로우의 앞에 거대하게 서 있는 것은 두 쪽으로 난 문이었다. 문은 잠겨있지 않고 살짝 틈새가 벌어진 채 방치되어 있었다. 로우는 한 팔을 뻗어 문을 툭 하고 건드려보았다. 크기와는 달리 문은 끼이익 소리를 내며 열리게 되었다. 문 또한 다른 곳들과 마찬가지로 여기저기 손상되어 본래의 무게감을 잃고만 것이었다. 문이 열리고 충분히 안으로 들어갈 틈만큼 벌어지자 로우는 사각거리는 옷자락 소리만을 내어 안으로 물 흐르듯이 들어갔다. 로우가 안으로 들어온 장소는 이제는 조금 낯이 익게 된 장소이자 오늘 처음 들어오게 된 드레스로자의 궁전 내부 중에서도 유일하게 로우의 기억 속에 남은 방이었다. 로우가 들어온 곳은 거대한 홀이자 한 때 도플라밍고의 간부들이 모여 대소사를 의논하던 회의실로 사용되던 곳이었다. 규칙적으로 새겨진 남다른 무늬들과 바닥을 덮은 붉은 카펫, 그리고 천장을 크게 장식하는 샹들리에는 이 방이 단순한 방이 아님을 가장 확실하고 뚜렷하게 보여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이곳에서 벌어진 소란으로 망가지고 깨지고, 부서졌으며 지금은 반쯤 폐허가 되어 보기 아까울 정도로 흉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로우는 홀 안의 모습들을 하나씩 살펴보며 마치 지금의 저 모습들이 도플라밍고의 말로를 상징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한 때는 부귀영화를 자랑하며 권력의 정점에 선 그였으나 지금은 단 하루 사이에 와르르 무너지게 되어 결국에는 허망하게 세상을 등지게 된 꼭두각시 왕의 최후를 연상케 한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하. 로우는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내었다. 그가 죽었다고 해도 여전히 그에 대한 비꼼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며 그에 대한 원망이 사그라 드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용서되는 것은 아니다. 죽으면 용서할 수 있는 기회마저 사라져 결국에는 채 풀지 못한 감정만이 남아 천천히 묶어 가슴 깊숙한 곳에 품어두었다가 때때로 그것을 풀어헤치고 꺼내들어 이미 없는 상대를 향해 비웃는 것이었다. 그것에 무슨 의미가 남아있다고 하지만, 이 무의미한 일이라도 되풀이하지 않으면 결국에는 썩어버려 독하게 퍼져버리는 것이 사람의 감정이라는 것이었다. 적어도 로우는 찌꺼기처럼 남은 감정들을 그렇게 정의내리고 있었다. 로우는 홀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갈라진 바닥의 틈새들을 이리저리 피하여 안쪽으로 들어가자 멀리서 작게 보였던 세 개의 의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의자들은 각각 다이아, 클로버, 스페이드라는 트럼프의 기호들을 바탕으로 디자인되어 만들어졌다. 그 의자들은 돈키호테 패밀리의 최고 간부들만이 앉을 수 있는 의자였다. 돈키호테 패밀리 안에서 도플라밍고 다음으로 강한 권력과 능력을 가졌던 그들의 위치를 가장 확실하고 물질적으로 보여주는 의자였다. 그 의자에 앉을 수 있다는 것은 도플라밍고의 신임을 한 몸에 받고, 그 신임을 받을만한 자격을 충분히 지녔으며, 그것들을 바탕으로 제 밑에 있는 패밀리의 부하들을 잘 다룰 수 있다는 증거였다. 그래서 패밀리에 들어온 많은 이들이 의자에 앉은 그들을 동경했으며 언젠가 자신도 그와 같은 신임을 얻어 저 의자에 앉기를 손꼽아 바랬다. 그러나 그 동경도, 의자에 깃들어 있던 그들의 신임도 한 순간에 사라지게 되었다. 로우는 의자들의 상태를 하나씩 살펴보았다. 클로버는 두 동강이 나서 등받이와 본체가 분리되어 있었으며 스페이드는 옆으로 쓰러진 채 여기저기 이가 빠지고 모래 먼지를 뒤집어 쓴 모습이며 다이아는 앞으로 고꾸라져서 칠이 대부분 벗겨진 상태였다. 눈으로 대강의 상태를 전부 확인한 로우는 그 의자들에 주인들의 모습을 겹쳐보며 차가운 시선만을 보여주었다. 아마 지금쯤 의자의 주인들은 자신들의 부하와 동료들과 함께 해군에게 끌려가 임펠다운으로 향하고 있는 중일 것이다. 이제 그들은 두 번 다시 눈부시게 빛나던 태양을 보지 못하고 어둡고 차가운 바다 속에 자리 잡은 감옥의 밑바닥에 갇혀 평생을 보내게 될 것이다. 로우는 그들에게 동정심 하나 가지지 않았다. 그들이 벌인 짓들은 결코 용서받지 못할 짓이었으며 도가 넘은 행위들이었다. 최소한 이 나라의 국민들 모두가 그들의 악행을 잊지 않고 기억하며 용서하지 않을 것이었다. 전부 다 살펴보자 그것으로 더 이상의 볼일은 없어 로우는 미련 없이 시선을 의자들에게서 돌리고 이번에는 홀의 벽 한편으로 나 있는 창문들을 보았다. 적당한 간격을 두고 있는 창문들은 각각 혼란의 여파로 금이 가 있고 문짝이 떨어져 나간 모습들이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이상할 정도로 멀쩡한 창문이 있었다. 창문들 중에서 유일하게 양쪽으로 활짝 열려있는 창문은 벽의 정 중앙에 있으면서 동시에 원래 의자들이 똑바로 세워져 있었더라면 바로 정면에 있을 법한 위치에 나있었다. 밤바람으로 창문에 걸려있는 커튼 자락이 부드럽게 흔들리면서 손짓하고 있었다. 바람의 손짓에 로우는 그에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도착하여 앞에 선 창문은 텅 비어있었다. 창문의 난간을 말없이 내려다보던 로우는 고개를 뒤로 돌려 망가진 의자들을 다시 한 번 보았다. 본래 이 방에는 의자가 총 네 개가 있었다. 트럼프의 기호대로 만들어졌으니 당연히 하트의 의자도 있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하트의 의자는 이 자리에 없다. 조금 전까지 트라팔가 로우를 구속하고 있던 의자는 폭발로 로우와 함께 날아갔다가 그가 구속을 풀어버린 후로는 버려진 채 땅바닥에 나뒹굴게 되었다. 로우는 그 후 의자의 행방을 알지 못한다. 굳이 알고 싶지도 않았으며 당시에는 그런 사소한 것에 신경 쓸 틈도 없었다. 아마 어디론가 떠내려가 버려진 채로 방치되어 있겠지, 하고 예측해볼 뿐이었다. 일부러 찾고 싶지는 않았다. 도플라밍고는 과거에 종종 로우에게 그 의자를 주겠다는 말을 했다. 로우는 그 말을 기억했고,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과분한 아량을 베풀어서 주겠다는 식으로 말하였지만 실제로는 로우를 언제까지고 자신의 아래에 두겠다는 선포나 다름없다는 것을 로우 스스로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 의자는 로우에게 있어서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마땅히 버려야 것이었으며 도플라밍고가 자신을 옮아 매고 있다는 증오스런 구속의 증표였다. 로우는 귀곡을 쥔 손에 약간의 힘을 실어 보냈다. 그는 한 때 의자에 억지로 묶여있던 신세였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이제 더 이상 트라팔가 로우를 묶어둘 것은 없었으며 하트는 깨어져 무가치한 조각이 되어버렸다. 로우에게 돈키호테 패밀리의 하트는 필요 없는 것이었다. 로우의 ‘하트’는 오직 하나만 있으면 충분했다. 로우는 다시 고개를 원위치로 돌려놓고는 바깥을 보았다. 저 아래서 많은 자들이 먹고 마시며 떠드는 소리가 로우가 있는 곳까지 메아리치며 들려왔으며 듬성듬성 모닥불을 환히 태우는 모습도 선명히 보였다. 밤은 깊어져 가는데도 축제는 식을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고 오히려 무르익을수록 더 타오를 뿐이었다. 웅웅 울리는 함성소리들 중에서도 루피의 목소리가 가장 크게 밤하늘을 찌르듯이 울려퍼져 로우는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가장 격렬하게 싸운 당사자의 목소리가 여기서 제일 기운차니 그 체력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알 수 없어 로우는 의사의 신분으로서 루피의 체력에 흥미를 가질 정도였다. 저만한 체력을 지녔기에 임펠다운에서 장상결전까지 싸워 살아남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한참을 시선을 아래로 내려 축제를 멀리서 지켜보던 로우는 슬슬 시선을 안쪽으로 끌어당겨 바로 가까이에 있는 창문의 난간을 보았다. 차갑게 식어버린 새하얀 난간을 손으로 한번 쓸어보자 소란 통에 쌓여버린 모래먼지가 로우의 손끝에 묻게 되었다. 로우가 의자에 묶여있을 당시, 도플라밍고는 이 창문가에 앉아있었다. 로우는 도플라밍고가 왜 창문에 앉는지 잘 알고 있었다. 도플라밍고는 오래 전부터 창문에 걸터앉는 것을 좋아했다. 안과 밖의 경계에 앉아 안에서는 자신이 신뢰하는 동료들의 얼굴을 보고, 밖으로는 저 아래를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을 보며 왕이 된 듯한 기분을 만끽할 수 있기에 굳이 다른 편한 자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창문에 앉는 것을 선택했다. 시원한 바람이 들어오는 창문이, 한 발자국만 떼면 밖으로 날아갈 수 있는 자그마한 출구와도 같은 창문에 도플라밍고는 아슬아슬하게 걸터앉아 책을 읽거나 바깥 경치를 즐기는 등 여가를 보내었다. 일종의 습관이자 취향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로우는 그 모습을 오래 전부터 지켜보았다. 그래서인지 로우의 기억 속에서 가장 많이 남은 도플라밍고의 모습은 창문가에 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언제까지라도 그 자리에 있을 것 같으면서도 당장이라도 창문 밖으로 날아갈 것 같은 아슬아슬하고 자유문방 한 모습을 어린 시절, 순진했던 로우는 그 모습을 동경했다. 그리고 얄궂게도 도플라밍고는 로우를 붙잡아두어 하트 의자에 묶어두었을 때도 창문가에 앉아 로우를 맞이하여 모든 상황들을 지켜보았다. 눈을 뜨고 가장 먼저 보게 된 창문에 앉은 도플라밍고의 모습에 로우는 하마터면 과거의 그 시절로 돌아갔다고 착각을 할 뻔 했다. 그 모습은 시간이 지나도 전혀 변함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곧이어 온 몸으로 느껴지는 통증과 더불어 양 손목에 채워진 해루석의 기운, 그리고 아이가 아닌 어른의 모습을 한 자신을 자각하게 됨으로서 로우는 더 이상의 착각을 하지 않게 되었지만 말이다. 로우는 잠시 머뭇거리며 망설이다가 이윽고 개의치 않기로 하자는 듯이 약간 어색하게 몸을 움직여 창가에 앉아보았다. 등을 창문의 한쪽 면에 기대고 한쪽 다리는 난간에 올린 후 다른 한쪽 다리는 안쪽에 내려놓은 자세로 앉아본 로우는 알 수 없는 낯설음에 몸이 뻣뻣하게 굳어 어색함을 한껏 느껴야만 했다. 몸을 이리저리 틀고 최대한 편안하게 앉으려고 해도 떨칠 수 없는 것이라 로우는 결국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면 익숙해지겠지 하는 생각으로 체념하게 되었다. 그러다 문득 로우는 자신이 도플라밍고와 같은 자세로 창문틀에 앉아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의도치 않은 것이지만 그와 같은 자세로 앉아있게 된다고 생각하니 묘한 기분이 들어 그것을 떨치기 위해 고개를 방 안쪽으로 돌려버렸다. 난장판이 된 넓은 홀을 보며 로우는 기억의 바다에서 아직 완전히 밑바닥에 잠기지 않은 선명한 기억 하나를 건져내어 들여다보았다. 그 기억은 로우가 도플라밍고를 죽이던 당시의 기억이었다.
확실히 죽여야 한다. 로우는 몇 번이고 그렇게 다짐했다. 도플라밍고의 능력이라면 훤히 다 알고 있었다. 로우는 오랫동안 그의 밑에 있으면서 복수를 위해 그의 능력을 최대한 깊게 분석하고 알아냈으며 만일의 수까지 전부 계산 안에 넣어두었다. 그렇게 많은 시간을 투자하여 분석한 결과, 로우는 도플라밍고를 확실하게 죽이기 위해서는 메스로 도플라밍고의 심장을 직접 적출해내어 칼로 심장을 직접 찌르는 것 이외에는 방도가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도플라밍고라면 설령 목이 떨어져 나간다고 해도 기상천외한 수로 되살아날 인간이라는 것을 로우는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어중간한 수로 덤벼들어서는 오히려 역으로 당할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로우는 심장을 직접 노리는 것을 택했다. 심장은 뇌와 더불어 인간의 가장 중요한 부위이며 생명 그 자체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심장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은 지금껏 없으며 심장에 직접적으로 타격을 받으면 누구나 죽게 된다는 것을 로우는 의사로서의 지식을 쌓으면서 누구보다도 절감하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상대의 심장을 적출해내어 직접적으로 타격을 줄 수 있는 로우의 능력은 상대를 확실하게 죽일 수 있다는 점에서 적합했다. 드레스로자에 도착하고 도플라밍고와 치룬 첫 전투에서 로우는 몇 번이고 도플라밍고에게 메스를 시도했다. 그러나 도플라밍고도 그런 로우의 능력의 위험성과 더불어 의도를 간파해냈는지 아슬아슬하게 로우의 공격을 피할뿐더러 오히려 반격까지 해내어 끝내 로우를 굴복시키는 것에 성공했다. 그러나 두 번째부터는 상황이 달라졌다. 혼자서 도플라밍고의 모든 공격을 버겁게 견뎌야만 했던 로우였으나 두 번째에서는 로우와 동맹을 맺었을 뿐더러 그의 사정을 알고 함께 싸워주기로 한 루피와의 공동전선을 통해 로우는 전과는 달리 도플라밍고의 틈을 더 쉽게 발견할 수 있었고, 마침내 루피가 도플라밍고에게 마지막 한 방을 날리게 되어 도플라밍고가 공중에 떠오르게 되었을 때 로우를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메스를 이용해 그토록 원하던 도플라밍고의 심장을 손에 쥐게 되었다. 자로 잰 듯이 정육면체로 똑바르게 꺼내어진 심장은 도플라밍고의 왼쪽 가슴에 텅 빈 구멍만을 남긴 채 힘없이 로우의 손아귀에 떨어지게 되었다. 로우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듯이 뛰어오르는 도플라밍고의 심장을 드디어 마주하게 된 로우는 뜻밖에도 실망감부터 느꼈다. 내심, 도플라밍고의 심장은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특별할 것이라는 기묘한 기대함이 로우의 마음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있던 탓이었다. 막상 이렇게 손에 쥐어보니 다른 이들과 하등 다를 바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로우는 김이 빠졌으나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는 천천히 귀곡을 들어올렸다. 지금은 감상에 빠져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제, 복수의 완성이 눈앞에 이르게 된 것이다.
로우…!!
로우의 이름을 도플라밍고의 목소리가 쥐어짜듯이 새어나왔다. 로우는 마지막으로 도플라밍고를 보았다. 저 멀리 쓰러져 있는 도플라밍고가 분하고 겁에 질린 표정으로 로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으로 보게 된 도플라밍고의 표정에 로우를 호기심이 일어 걸음을 옮겨 도플라밍고에게로 다가갔다. 가쁜 숨을 쉬며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있는 도플라밍고는 선글라스가 벗겨진 눈으로 로우를 향해 치켜뜨고 있었다. 이윽고 도플라밍고의 앞에 도달한 로우는 도플라밍고가 자신에게 처음으로 보여주는 패배자의 얼굴에 묘한 희열감과 동시에 실망감이 들어 더욱 더 눈빛을 차갑게 만들고 그의 심장을 보란 듯이 앞으로 내밀어 보였다. 도플라밍고의 심장은 이제 곧 자신에게 닥쳐올 운명을 알아차린 것인지 전보다 더 세차게 뛰고 있었다.
예전에 나에게 한 말을 기억하고 있나, 도플라밍고.
너는 기억해내지 못할지라도 나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어. 로우는 입 밖으로 낸 말의 바로 뒤에 이어질 말은 굳이 꺼내지 않았다. 그 대신으로 로우는 도플라밍고가 과거, 13년 전의 무력했던 자신에게 비난처럼 내뱉은 말을 오랜 세월을 뛰어넘어 다시 그에게 돌려주었다.
「약한 자는 죽을 방법조차 선택하지 못해.」
로우는 그 말을 가슴 속에 새기고 또 새겼다. 13년 전, 생명의 은인이자 스승이었고, 부모나 다름없는 사람이었으며 가장 존경하던 인물이었던 이의 시체를 끌어안고 피눈물을 흘리던 13살의 로우에게 도플라밍고는 그런 말을 남기었다. 로우는 그 말을 절대로 잊지 않았다. 가슴에 그 문구를 피로 새기고 고통으로 각인하며 그 말을 반드시 도플라밍고에게 그대로 되갚아 주겠다고, 13살의 소년은 지독한 복수와 함께 그러한 각오를 다짐하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마침내 그 말을 고스란히 되돌려준 로우는 이제 아무것도 무섭지 않았다. 지금의 로우는 복수의 달성만을 바랄 뿐이었다.
이제, 전부 끝이다.
로우의 기억은 귀곡의 한 서린 칼날이 도플라밍고의 심장 한가운데를 꿰뚫는 그 순간에 끝나게 되었다.
기억을 전부 되짚어본 로우는 이제 다시 그 기억을 바다 속에 던져넣었다. 바다 속으로 들어간 기억은 시간이 흐르면 무의식이라는 이름의 밑바닥에 도착하여 다른 기억들처럼 파묻히게 될 것이다. 회상에서 빠져나와 현실로 돌아온 로우는 잠시 들리지 않았던 바깥의 웃음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었다. 흥겨운 노랫가락이 공기를 타고 넘실대며 사람들과 함께 춤을 추었다. 너나할 것 없이 환하게 웃으며 모닥불을 주위로 빙글빙글 도는 모습은 그저 바라보기만 할 뿐인데도 저절로 흥이 날 정도로 즐거워 보였다. 로우는 고개를 약간 옆으로 비딱하게 기울이며 벽에 기대어 보았다. 그리고 방금 전까지 떠올린 기억들 중 여운이 남은 잔상을 하나 눈앞에 아른거리며 그려보았다. 마지막에 마주하게 된 도플라밍고의 얼굴. 이상하게도 로우는 아무리 용을 쓰고 그려내 보려고 해도 도플라밍고가 최후에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떠올리지 못했다. 심장을 찌르는 것에 정신이 팔려 제대로 기억해내지 못한 탓일지도 몰랐으나 로우는 이상하리만치 기억을 떠올리지 못하는 것에 답답함을 느껴 그것을 최대한 그려내는 것에 약간의 집착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어른거리는 잔상은 좀처럼 뚜렷해지지 못하고 로우의 눈앞에서 서서히 흩어지게 된다. 제 뜻대로 풀리지 않고 잡힐 듯 잡히지 않으며 놀리듯이 거리를 벌리는 행세가 꼭 생전의 도플라밍고와 다를 바가 없어 로우는 분한 심정이 들었다. 이제 앞으로 기억 속에서 형태만 남게 될 자인데도 도플라밍고는 계속해서 로우를 곤혹스럽게 만든다. 로우는 결국 제 풀에 지쳐 떠올리는 것을 포기하고는 한숨을 쉬며 이번에는 반대쪽으로 고개를 꺾었다.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으면 중간에 그만두는 것은 로우의 나쁜 버릇 중 하나였다. 어렸을 적부터 가지고 있던 로우의 버릇에 대해 도플라밍고도 잘 알고 있어서 그것에 대해 종종 어린 그에게 훈계조로 말한 적이 있다. 그럴 때마다 로우는 어린애 취급하지 말라고 손사래를 치며 불평했다. 사실은 그런 버릇 자체가 어린아이의 습성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로우도 잘 알고 있었다. 다만 그것을 다른 누군가가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지적하면 어린 시절의 그는 괜히 분함을 느끼고 상대의 말에 반항을 했다. 그런 반응 자체도 어린아이 같은 것인데도 불구하고. 이제는 벌써 오래 전에 어른이 되었는데도 로우의 몇몇 부분에서는 어린아이로서의 감성과 습관이 남아있었다. 로우는 그것을 극도로 싫어하면서도 아직까지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어째서인지는 로우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부분이었다. 로우는 다시 한 번 도플라밍고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여전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는 흐릿한 기억의 파편이었다.
“…무슨 얼굴을 하고 있는 거야.”
나지막하게 중얼거려보는 로우의 말에 대답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말을 경계로 로우의 눈꺼풀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앉기 시작했다. 하루 동안 몇 번이고 치룬 싸움과 모든 일이 끝났다는 사실에서 긴장이 한꺼번에 풀려 그것들이 전부 잠으로 변해 로우에게 수면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었다. 서서히 흐릿해지는 시야와 의식에서도 로우는 필사적으로 파편의 실마리를 붙들고 그려내보려고 했지만 지금으로서는 무리인 일이었다. 결국에는 포기하고 잠시나마 눈을 붙여 휴식을 취하자는 결정을 내려 순순히 무의식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는 와중에 로우는 마지막으로 이러한 생각해보았다. 자신은 후련한 것일까. 복수에 성공하고, 도플라밍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얻은 것에 자신은 기뻐하고 있는 것일까. 과거, 복수를 이루기 전의 로우라면 분명 그 대답에 그렇다라고, 후련하며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것이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로우는 과거의 자신과 같은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지금의 로우는 극심한 피로함과 허무함에 제 몸을 가누기조차 힘겨운 상황이었다. 어떤 감정조차 로우에게는 직접적으로 와 닿지 못하고 그저 머나먼 이상과도 같은 것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복수라는 것은 이렇게나 피곤하고 무거운 일이다. 그것을 깨달으며 로우는 이제 완전히 눈을 감았다. 로우를 비추는 새하얀 달빛 덕분인지 로우의 안색은 전보다 더 핏기가 가진 행색이었다. 돌이켜보면 늘 선잠만을 청하던 로우였기에 이토록 피곤을 느끼고 잠을 필요로 한 적은 처음이었다. 로우는 참으로 오랜만에 아주 깊은 잠을 잘 것 같다고 생각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완전히 의식을 잃게 되었다.
고요라는 이름의 심해에 잠겨버린 로우와는 대조적으로 바깥에서는 브룩이 친히 바이올린으로 반주를 올린 빙크스의 술을 부르기 시작했다. 노랫말 사이사이에 흥을 돋우는 웃음소리가 들어가며 저 높은 곳에서 깊은 잠에 빠져든 해적에게도 닿을 정도로 높게 솟아올랐다.
부디, 이제는 편안하고 행복한 꿈을 꾸기를 기원하는 것처럼.
4.
바다는 물결을 따라 넘실거리고, 바람은 그 위에 올라타 흥겹게 춤을 추고, 바람의 춤사위를 따라 바다 특유의 짭짜름한 내음과 파도소리가 창문을 통해 흘러 들어오게 된다. 시원하게 들어온 바람은 반투명한 커튼 자락을 흔들어대며 자신이 여기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흔들리는 커튼의 아래에서 한 소년이 소파 위에서 잠들어 있었고, 창문가에는 한 남자가 책을 읽으며 앉아있었다. 소년도 조금 전까지 남자와 같이 책을 읽고 있었는지 배 위에 읽다만 책이 펼쳐진 채 놓여 져 있다. 소년의 옷차림은 고급스러운 재단으로 만들어진 단정한 양복이었으며 머리 위에는 소년의 머리에 꼭 들어맞는 털모자가 씌워져 있었다. 소년의 머리에 딱 들어맞는 모자는 시중에 파는 것과는 달리 자체적으로 주문되어 만들어진 것으로 보였다. 소년의 머지않은 곳에 있는 남자는 소년과 비교했을 때 수배는 될 법한 덩치를 가지고 있으며, 어깨에 분홍빛 털코트를 걸치고 있고, 짧게 깎은 노란 머리를 하고 검게 칠해진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멀리서 봐도 한 눈에 들어올 정도로 특이한 행색을 지닌 남자는 마치 소년이 깨어날 것을 기다리는 것처럼 아무 말 없이 독서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아니, 사실은 집중하는 척만 하고 있었다. 조금 있으면 소년이 깨어날 것이라 짐작한 남자는 눈은 여전히 책에 고정되어 있지만 의식은 소년에게로 집중하고 있는 중이었다. 남자는 굳이 소년을 깨우지 않았다. 남자는 이 기다림을 즐겼으며 자연스럽게 소년이 눈을 뜨는 모습을 보는 것을 더 좋아했기 때문이다. 남자의 시선에서는 잠에서 서서히 깨어나는 소년의 모습은 마치 기적처럼 비춰졌기에 남자는 그 자그마한 기적을 보기 위해서라면 사사로운 기다림 정도는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남자에게 있어서 소년은 그것마저도 사랑스럽게 보이게 만드는 존재였다.
이제 곧, 소년이 눈을 뜰 시간이다.
작은 떨림은 의식이 위로 항해 올라오는 준비 단계였다. 하나의 징조처럼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은 이윽고 조심스럽게 알을 깨고 나오는 갓 태어난 아기 새와 같은 섬세함으로 서서히 떠지면서 마침내 로우의 두 눈동자에게 잠시 동안 무의식이라는 이름의 심연 속에서 잠겨있던 두 눈에 여러 빛깔의 색을 비추게 해주었다. 쏟아져 들어오는 빛깔들 다음으로 로우의 감각을 자극하는 것은 익숙하다 못해 이제는 맡는 것만 해도 안정감이 찾아오는 바다 특유의 짠 내였다. 옅은 내음을 봐서 바다는 로우가 있는 곳에서 조금 먼 곳에 있으며 이 냄새는 바람을 타고 흘러 들어온 것이었다. 그 증거로 짠 내는 여기까지 오는 동안 바람에 대부분 흩어져서 많이 옅어져버렸기 때문이다. 오랜 해적 생활로 육지보다도 바다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로우는 저절로 바다의 향을 구별하는 법을 터득해냈기에 이를 구분할 수 있었다. 빛과 냄새로 의식이 어느 정도 돌아온 로우는 자신이 잠시 잠에 들었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깨닫게 되었다. 그래도 아직은 잠결이 완전히 떠나지 않아 로우는 오른쪽 손등으로 이마를 짚으며 잠의 여운에서 여유롭게 벗어나고자 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로우의 여유는 오래 가지 못했다. 이마로 옮겨지는 동안 시야에 스쳐지나간 손등에서 위화감을 느낀 로우는 손등을 이마에서 조금 아래로 내려 시야의 정중앙에 놔두었다. 그리고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하였다. 로우의 두 눈에 들어온 것은 보기 좋게 그을어진 구릿빛 피부와 그 위에 새겨진 문신과 가느다란 손가락과 그 끝에 박힌 굳은살이 있는 어른의 손이 아닌, 작고 부드럽고 연약하며 새하얗고 굳은살과 문신 하나 없는 깨끗한 어린아이의 손이었다. 로우는 화들짝 놀라 곧바로 상체를 일으켜 손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몸 구석구석을 살펴보았다. 적당히 근육으로 이루어진 마른 몸매와 호리호리한 팔다리, 상반신의 절반 정도를 채워 넣던 문신과 그 위를 덮은 검은 코트와 청바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 대신 로우의 몸을 이루고 있는 것은 자그마한 키와 젖살이 아직 남아있어 적당히 살집이 있는 어린아이의 체형, 그리고 온 몸을 꽉 죄듯이 정갈하게 차려 입혀져 있는 고급 아동용 정장이었다. 지금 로우에게 닥친 상황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잠시 잠든 사이에 어른에서 아이가 되었다고 말할 수가 있었다. 완전히 방심하고 있는 틈에 벌어진 예측 밖의 사태에 로우는 머릿속이 백지처럼 새하얗게 되다 못해 지금 여기서 다시 눈을 감고 기절하면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답지 않게 허튼 생각까지 들 정도로 패닉에 빠진 상황이었지만 그럼에도 로우의 두뇌는 아슬아슬하게 이성을 붙들고 지금 상황에 대한 원인들을 분석하였다. 어른이 갑자기 아이로 회춘하게 되는 황당무계한 일이 실제로 일어날 것 같으냐, 하는 상식적이고 근본적인 반론이 로우의 머릿속에서 바로 떠올랐으나 여기는 그랜드 라인, 그것도 신세계이다. 상식이라는 단어는 여기서는 절대로 도움이 안 될뿐더러 오리혀 상황 파악에 장애물이 되는 불필요한 것으로 치부될 정도로 이곳은 상상 그 이상의 일이 예기치 못하게 닥쳐오는 곳이다. 그럼으로 지금의 로우가 가장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어떻게 해서 자신을 어린아이로 되돌렸냐가 아니라 자신이 어린아이가 된 이유와 현재 자신이 있는 곳에 대한 위치 파악이었다. 머릿속에서 두 가지의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야 한다는 결론이 내려졌을 때, 로우는 뒤늦게야 자신이 있는 장소를 살펴볼 수 있었다. 로우가 조금 전까지 누워있던 곳은 자그마한 붉은 소파 위였으며 방 안은 최소한의 인테리어 소품들만이 배치되어 간소하게 꾸며져 있지만 책장을 빼곡히 채운 책들은 척 봐도 시중에서 간단히 구할 수 있는 책들이 아니며 인테리어 소품들은 밖에 가지고 가서 팔면 몇 천만 베리는 기본으로 받을 수 있을 정도로 고급 공예품들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로우는 자신이 그것들을 하나하나 기억하고 있었으며, 오래 전에 자신의 뛰어난 기억력과 식별력으로 눈에 익어버린 것들이라는 사실을 금방 알아차리게 되었다. 로우는 그것들, 정확히는 이 방을 어디서 보았는지, 자신의 기억에서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깨달음과 동시에 그는 자신의 뒤통수를 거세게 때리는 충격을 느끼고 말았다. 다시금 로우의 시선이 두 손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믿기지 않은 사실을 재차 확인하듯이 바라본 손은 여전히 작고 연약했다. 다시 고개를 든 로우는 믿을 수 없는 사실에 대한 충격으로 망연히 중얼거렸다.
“그럴 리가. 설마… 여긴….”
“음? 이제 일어난 거냐.”
로우의 혼잣말을 잘라버린 인물은 깜짝 상자에 튀어나오는 삐에로 인형과 같이 갑자기 튀어나오며 자신의 존재를 그에게 알렸다.
그 목소리를 로우는 분명히 알고 있다. 잊을 리가 없는 목소리이다. 아마 로우가 평생을 기억하고 싶지 않아도 기억하게 될 목소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동시에 지금의 로우가 절대로 들을 수 없으며 앞으로도 들을 수 없는, 들어서는 안 되는 목소리여야만 했다. 중저음으로 깊게 울리는 목소리는 로우의 뒤쪽에서 들려왔다. 그 방향은 지금도 방 안으로 흘러들어오는 바다의 체취가 불어오는 방향이었다. 로우는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어버린 목을 애써 움직여 뒤를 돌아보았다. 소파의 등받이 너머, 벽에 유일하게 난 창문에 덩그러니 앉아있는 한 남자가 있었다. 창문에 매달린 반투명한 커튼과 함께 부스럭대며 작게 흔들리는 분홍색 털코트를 어깨에 걸치고 선글라스를 쓴 금발 커트 머리의 체격이 큰 남자는 무릎 위에 책을 올려놓고 입가에는 큰 호선을 그린 채 로우를 바라보았다. 마치 로우가 깨어나기를 줄곧 기다렸다는 태도였다. 로우는 그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조금 앳되고 세세한 차이점을 제외하면 로우의 눈앞에 있는 인물은 틀림없는 그 남자였다. 돈키호테 패밀리의 보스이자 칠무해 중 한 명, 전 드레스로자의 국왕. 그리고 트라팔가 로우가 가장 많이 증오한 남자이자 오랜 시간을 뛰어넘어 마침내 몇 시간 전에 제 손으로 죽인 복수의 대상.
“훗훗훗. 너 답지 않게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구나, 로우. 무슨 꿈이라도 꾼 거냐?”
돈키호테 도플라밍고는 새하얗게 질린 안색으로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어린 로우를 보고 그렇게 말했다. 도플라밍고의 물음은 그저 어린아이가 단순히 악몽을 꾼 후에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어른을 찾고 있는 것이라 생각해서 나온 것이었다. 말 그대로 순진하고 여린 어린 아이를 돌보는 어른으로서 던지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어서야 비로소 로우는 자신의 모습과 도플라밍고의 생존에 대한 가장 적절한 대답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뒤이어 로우 스스로가 놀란 정도로 침착하고 덤덤한 어조로 말했다.
“그래, 이건 꿈이로군. 그것도 지독한 악몽.”
한순간 공포심과 패닉에 젖은 눈빛과 표정은 순식간에 사그라져 어린아이의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냉정하고 현실적인 빛을 띠게 되었다. 죽음의 외과의라는 명성에 걸 맞는 기백이었다. 평정을 되찾은 로우의 모습에 도플라밍고는 이미 예상했지만 그래도 아쉽다는 의미로 어깨를 크게 으쓱여보고는 이미 오래 전에 흥미를 잃은 펼쳐진 책을 일부러 소리 나게 덮었다.
“훗훗훗. 역시 넘어가지 않는군. 어지간히도 재미없는 녀석으로 자라버렸다니까.”
“닥쳐. 더 이상 내가 네 녀석의 장단에 어울려줄 것 같아?”
찌를 듯이 날카롭게 세워진 로우의 눈매에는 그 나이에 있어야 할 어린아이 특유의 순수함은 이미 오래 전에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흔적조차 보이지 않고, 오랜 세월을 통해 저 깊은 곳에서부터 쌓여져 농축된 독기가 서려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었다. 특정한 누군가를 향해 어금니가 세워진 독기는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독기를 만들어 낸 근간이 된 애증을 찾아볼 수 있었다. 그만큼의 한이 서린 로우의 눈빛에 도플라밍고도 그 앞에서는 더 이상의 미소를 유지하는 것이 힘들 것인지 조금 입매를 아래로 끌어내리게 되었다. 한참을 도플라밍고를 노려보던 로우는 잠시 후에야 진정이 되어 조금은 눈매의 날을 무뎌지게 만들고 어깨에 잔뜩 들어간 힘을 풀어내었다. 지금은 도플라밍고를 상대로 감정을 무의미하게 소모할 때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우선순위를 자각한 로우는 냉정하게 자신이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을 찾아야 된다고 생각하고 감정을 애써 집어넣은 후에 줄곧 앉아있던 붉은 소파에서 내려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도플라밍고와 마주섰다. 3미터도 넘은 상당한 거구의 도플라밍고와 비교했을 때 유년 시절의 로우의 체격은 드레스로자의 요정으로 불리었던 톤타타 일족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와 극심한 차이를 두고 있었다. 이렇게 마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로우로서는 도플라밍고를 향한 과거의 원한들이 들끓어 올라 저절로 온 몸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였으나 현 상황에 대해 자신보다 더 잘 알고 있을만한 인물은 지금으로서는 도플라밍고 이외에는 없을 것 같았기에 어쩔 수 없이 로우는 그에게서부터 사실 확인과 정보를 얻기 위해 대화를 계속해서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여기가 내 꿈이라면 왜 네 녀석이 여기에 있는 거지?”
“글쎄. 그걸 당사자인 네가 물어보면 안 되지. 여기가 네 꿈이라면 날 여기로 불러들인 건 너의 무의식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확실한 대답 대신 자신이 나타난 원인을 로우에게 떠넘기면서 다시 처음 때처럼 능청스럽게 웃어버리는 도플라밍고의 모습에 로우는 곧바로 미간을 거칠게 좁혀서 울컥해서 솟아오른 자신의 화를 짧고 강렬하게 보여주었다. 만일 도플라밍고의 말을 사실이라고 가정한다면, 로우가 꿈속에서 무의식적으로 도플라밍고의 존재를 만들어내어 자신의 앞에 불러들였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로우는 알기에 이를 악 물었다가 일부러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말의 중간마다 끊어서 그에게 대답해주었다.
“나는, 네 녀석의, 그런 점이, 싫다는 거다.”
그 말을 끝으로 결국 로우는 도플라밍고에게서 몸을 돌려 방으로 뛰쳐나가고 말았다. 더 이상 그의 앞에 서있으면 그의 죽음으로서 모든 것을 끝내고 벗어나려고 했던 그를 향한 모든 악감정들이 다시금 활화산의 용암들처럼 붉고 뜨겁게 터져 나와 스스로가 다시금 꿈속에서 도플라밍고를 또 한 번 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로우의 머릿속에서 스쳐지나갔기 때문이었다. 다시 한 번 죽인다고 해봤자 이미 죽은 망자를 상대로는 의미 없는 일이었다. 그에게서 도망치는 것은 로우의 자존심이 결코 허락하는 일이 아니었으나 망자의 환영이라고 생각하면 로우도 조금은 유연하게 행동할 수가 있었다. 다분히 감정적인 행동이었지만 지금의 로우가 그것을 알아차리고 다시 이성적으로 행동하기에는 당장은 무리인 일이었다. 문을 벌컥 열고 밖으로 뛰쳐나가는 로우를 도플라밍고는 굳이 붙잡지 않았다. 여기가 꿈속이라고 한다면 로우가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 이상 이 세계에서 서로가 벗어날 수 없는 것이고, 어디에 있든지 다시 찾아내면 된다는 것을 꿈의 일부분인 도플라밍고는 잘 알고 있었다. 도플라밍고는 창문에 계속 앉아 로우가 나간 문 밖을 잠시 응시하다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갈매기의 높다란 울음소리가 파도소리와 어울러져서 먼 곳에서부터 메아리치며 퍼져나가고 있었다. 그 소리를 들으며 도플라밍고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훗훗훗. 그래. 네 녀석이 만나고 싶어 하는 녀석은 따로 있으니까.”
추임새처럼 들어간 그의 웃음소리는 갈매기와 파도의 소리에 흔들려 체념적이면서도 쓰디 쓴 맛을 느끼게 하였다. 그에 따라 다시 한 번 우짖는 갈매기의 울음소리가 약간 구슬프게 들려왔다.
도플라밍고가 방에 남겨진 사이, 방에서 나와 기다란 복도를 걷는 로우는 자신이 현재 걷고 있는 이 복도 또한 많이 눈에 익은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조금 전까지 머물고 있던 방도 그렇고, 지금의 복도도 그렇고, 모든 것들이 로우의 머릿속에서 퍼즐 조각처럼 하나 둘 씩 맞춰져서 로우의 추억 속에 깊이 잠겨 있던 어느 한 장소를 그려내었다. 이제는 세피아 색으로 바래져서 흐려지고 찢겨진 기억 속에 존재하여 거의 잊혀 지다시피 했으며, 스스로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잊어버리자 다짐했던 장소였다. 그러나 그런 로우의 다짐이 무색해지게 너덜너덜해진 기억은 다시 한 번 돌아왔다는 것만으로도 세피아 색의 장막을 걷어내고 다시 밝게 덧칠되며 찢어진 조각들도 모여들어 하나씩 원래대로 맞춰져가게 되었다. 로우는 바삐 걸어가는 와중에 언제 읽었는지는 명확히 기억나지 않은 어느 책의 글귀가 떠올렸다. 책에서는 사람은 흔히 망각할 수 있는 동물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잊어버렸다고 착각하는 것이며, 실제로는 그렇게 착각된 기억들이 무의식 속에 잠들어 있다가 어떠한 계기로 떠오르는 것뿐이라고 적혀있었다. 로우는 그 문구를 되짚다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로우 또한 다른 사람들처럼 우둔하게도 그것을 잊고 있었다고, 망각해버렸다고 착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에 분하거나 후회할 때가 아니었으며 이제 와서 깨달았다고 해도 의미 없는 일이었다. 지금은 여기에서 나와 꿈에서 깨어날 단서를 먼저 찾는 것이 해야할 일이라고 결론을 내려 로우는 발걸음의 속도를 조금 더 올려 재촉하였다. 다만, 그렇게 생각에 깊이 잠겨있었는지라 주변을 살펴보는 것이 부주의했고, 시선이 정면이 아닌 조금 아래에 있는데다가 모자의 테가 시야의 일부분을 차단한 탓에 로우는 정면에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그대로 앞으로 나아가다가 자신의 앞에 있는 사람과 크게 부딪치고 말았다.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던 탓에 그만큼 더 세게 부딪쳐버린 로우의 작고 여린 몸은 충격을 받아내어 버티지 못하고 결국에는 그대로 뒤로 쓰러져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꼬리뼈를 타고 척추를 찡 하게 울리는 통각에 로우는 윽 하는 신음소리를 흘리고 말았다. 충격으로 금방 일어나지는 못하고 주저앉아만 있는 로우에게 맞은편의 인물이 앉아 있는 로우의 시선에 맞추기 위해 자신도 무릎을 굽혀 앉고는 난처함과 미안함이 담긴 목소리로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이런, 괜찮은 거야?”
아픔에 정신 팔려 상대를 신경 쓰지도, 보지도 못한 로우는 그 단순한 말 한마디에 모든 고통이 싹 날아가면서 머릿속이 새하얘지고 말았다. 로우로서는 결코 잊을 수 없는 목소리가 똑똑히 그의 귀에 들려왔다. 음색, 말투, 억양 하나하나가 생생했으며 그 모든 것들을 로우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제는 두 번 다시 들을 수 없는 목소리라 생각했던 그 목소리가 13년 만에 로우에게 찾아들어온 것이었다. 온몸이 덜덜 떨리고 심장이 감동으로 헐떡이게 되었다. 단지, 그 목소리를 들은 것만으로 로우의 내면 안에 있는 모든 감정을 끌어올릴 수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사무치도록 그리웠고, 몇 번이고 듣고 싶었던 소중한 사람의 목소리였기에 가능한 반응이었다. 천천히 위로 올라가는 로우의 눈동자는 버티기 힘들 정도로 몰아닥치는 감정으로 세차게 흔들려 초점을 제대로 맞추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얼굴만큼은 반드시 봐야한다는 필사적인 집념 덕분인지 로우의 눈동자만큼은 차차 진정되어 초점을 되찾아내었다. 그리하여 힘겹게 로우의 까맣고 작은 두 눈동자에 들어온 인물은 틀림없는 그 사람이었다. 트라팔가 로우의 인생에 있어서 돈키호테 도플라밍고와는 정 반대의 의미로 큰 영향을 준 남자. 로우의 생명의 은인이자 유일하게 평생토록 충성을 맹세한 보스였으며, 로우가 앞으로 언제 끝날지 모르는 복수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게 만들어 가슴 아프게 기억에 남아버린 야속한 사람. 13년 만에 로우의 앞에 등장한 그 남자는 전체적으로 도플라밍고와 닮은 인상이지만 온 몸을 휘감는 분위기만큼은 적어도 로우에게만큼은 상냥하고 다정하며 따스했다. 그 분위기는 고스란히 로우에게 전해졌고, 두 번 다시 느끼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던 그 느낌을 다시 경험하게 된 로우는 본능적으로 왈칵 울음을 먼저 터트리고 말았다. 로우의 두 눈에 뜨겁게 흘러내리는 투명한 눈물에 상대는 그것에 깜짝 놀라서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로우의 눈물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지 알고는 씁쓸하게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는 두 팔을 벌려 로우에게 자신의 품을 활짝 열어주었다. 지금의 로우에게 필요한 게 무엇이며, 그의 눈물을 받아낼 사람이 누군지 그는 알고 있었다.
“이리와, 로우.”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로우는 모든 것을 잊고 그저 그의 품에 다시금 안기기 위해서만 생각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망설임 없이 그의 넓은 품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지금까지 참고 또 참을 수밖에 없었던 그를 향한 그리움과 슬픔과 죄책감, 외로움, 원망, 기쁨을 눈물로 승화하여 한껏 토해내고 말았다. 그의 목을 절대로 놓지 않을 각오로 꽉 끌어안으며 짐승의 비명처럼 오열을 토해내는 로우의 모습에 그 또한 로우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주며 말없이 위로해주었다. 그의 눈 또한 눈물을 흘리지 않을 뿐, 로우만큼이나 붉게 물들어지고 말았다. 그리하여 13년 만에 재회하게 된 두 사람은 서로를 끌어안고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5.
“그 동안 많이 컸구나. 너무 커서 처음 봤을 때 못 알아볼 정도였다니까.”
“지금은 어린애의 모습이잖아요.”
“그래도 내 눈에는 똑똑히 보인단다. 그동안 로우가 얼마나 많이, 그리고 잘 컸는지 말이야. 정말인지, 예전에는 요 꼬맹이가 언제 어른이 될지 상상도 안 되었는데 말이야.”
감격에 찬 목소리와 함께 코라손은 한 손을 뻗어 로우의 머리 위에 올리고는 그의 둥근 머리를 익숙하게 쓰다듬었다. 애정이 듬뿍 담긴 따스한 손길에 로우는 다시 한 번 목이 멜 것 같아 잠시 입술을 아래로 살짝 끌어 내렸으나 목울대를 움직여 목구멍까지 차오른 뭉근 감정을 뒤로 넘겨서 간신히 다시 우는 것을 막아낼 수 있었다. 짧고 사소한 반응들이었지만 그것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세세하게 잡아낸 코라손은 그런 로우를 위해 계속해서 그의 짧은 머리카락을 정성스레 쓰다듬어주었다.
재회 후 두 사람은 밖으로 나와 어느 작은 절벽 위에 자리를 잡고 앉게 되었다. 코라손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오면서 절벽에 도착할 그 사이에 로우는 주변의 풍경들을 살펴보면서 자신들이 있는 이곳이 어디인지 비로소 명확히 알게 되었다. 같은 바다냄새지만 그 짠 내는 다른 바다들과 달리 차갑고 옅었으며 북쪽으로 불어오는 바람에는 서늘함이 담겨있었다. 눈에 익은 풍경들은 로우에게 이곳이 노스 블루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로우의 고향이자 동시에 돈키호테 도플라밍고의 별장이 자리를 잡고 있는 이곳은 코라손이 자주 로우를 데리고 와서는 바다를 바라보며 소소한 이야기들을 나누거나 로우를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혀놓고 의학 서적의 내용들을 읽어주는 등 여가 시간을 보내는 안식처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그래서 유년 시절의 로우는 코라손과 함께 이 섬에 오는 것을 무엇보다도 좋아했다. 코라손과 단 둘이 오는 때보다도 도플라밍고와 함께 셋이서 방문하는 때가 더 많았지만 이 섬에서 보낸 시간들은 로우의 과거에서 몇 안 되게 좋은 인상으로 남아 ‘추억’이라는 낭만적이고 그리움이 담긴 단어로 부를 수 있는 기억의 일부분이었다. 해적이 되고 현재까지 살아오면서 로우는 다시 그 옛날로 돌아가고 싶다는 나약한 생각을 한 적은 없었지만 그리움이 차고 넘치는 것만큼은 막아낼 수가 없었다. 절벽의 정면에서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닷바람도, 노스 블루만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내음도, 자신을 바라보며 따뜻한 손길과 눈빛을 아낌없이 주는 코라손도, 모든 것이 그립지 않다고 하면 그것은 스스로에게 하는 거짓말이 될 것이다. 그러나 로우에게는 추억에서 우러러 나오는 그리움을 지울 방법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이제 그곳으로 돌아갈 수 없으며, 돌아간다고 해도 코라손이 없는 곳이라면 그곳으로 돌아갈 이유조차 무의미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로우는 체념한 채 복수에 매달려 이를 악 물고 앞으로 달려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 로우이기에 뜻밖의 재회가, 지금의 시간이 설령 꿈이라고 해도 소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금껏 살아온 모든 고난에 대한 보상을 받아낸 것과 같은 이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로우는 코라손의 옷자락을 꼭 잡고 놓지 않았다. 힘을 싣고 꽉 잡은 덕분에 파르르 떨리는 고사리 같은 손이 안쓰러워 코라손은 옷자락을 잡은 로우의 손을 풀어 그 대신 자신의 손을 맞잡게 하였다. 크고 온기가 그득히 담겨있는 코라손의 손에 닿자 생생한 감촉이 로우의 손에서부터 전신으로 고스란히 퍼져나가 전해졌다. 로우가 마지막에 눈물로 잡았던 차갑고 굳어버린 손이 아니라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이었다. 지금 이 모든 것들이 꿈이라는 사실이 도저히 납득되지 않을 정도로 생생한 감각에 로우는 약간 낯설고 어색한 기분이 들어 살짝 멈칫하고 말았다. 그런 로우의 작은 반응에 담긴 의미를 파악한 코라손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꿈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구나.”
“에? 아… 꿈이라고 하기는 생생하고, 옛날의 감각 그대로라서 조금, 놀랐을 뿐이에요. 지금까지 꿈을 몇 번 꾸기는 했지만 이정도로 실감이 난 적은 이번이 처음이에요. 정말로, 이게 제 꿈이 맞는 건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렇게 말하고 나니 로우는 자신의 말에서 의구심을 만들어내어 이곳이 자신의 무의식이 발현시킨 꿈이 맞는 것인지에 대한 의심에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만약 여기가 자신의 꿈이 아니라면 지금의 자신이 있는 이곳은 어디라는 것일까. 새록새록 피어오르는 불확실함에 로우에게 점차 불안감이 생겨날 쯤에, 코라손은 자신이 잡은 로우의 손을 잠깐 꽉 잡았다가 다시 풀어주는 것으로 로우의 시선과 의식을 자신에게 돌리고는 아무 걱정 하지 않아도 된다는 듯이 태평스럽게 말했다.
“너무 그렇게 깊고 어렵게 생각하지 마렴. 여기가 네 꿈이든 아니든 지금의 나로서는 로우를 이렇게 다시 만나서 좋으니까.”
그 말이 맞았다. 여기가 꿈이든 아니든 지금 여기서 다시는 못 만날 것이라 생각했던 그리운 사람을 다시 만나게 된 것만으로도 충분하고, 그것 이외의 다른 일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코라손의 말을 들은 로우는 그렇게 납득했다. 평소의 로우였다면 그런 감성적이고 안일한 말 같은 것에 넘어가지 않았을 테지만 그 말을 한 대상이 코라손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로우는 그 말에 순종적으로 따랐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로우에게 있어서 코라손의 말은 그의 안에서 절대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누구의 명령도, 지배도 받기 싫어하는 트라팔가 로우의 성격을 생각해본다면 코라손의 존재가 그만큼 로우의 안에 있어서 각별하다는 확실한 증거가 된다. 코라손의 말에 긍정한다는 의미로 몸을 옆으로 기울여 자신에게 기대는 로우의 반응에 코라손은 그 모습을 다정한 시선으로 보다가 로우에게 조용히 말을 걸었다.
“그럼, 그 문제는 그렇게 정리하기로 하고, 이제는 내가 궁금한 점에 대해서 대답해 줄래?”
“네? 뭐가 궁금한데요?”
“그야 당연히 로우가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가 궁금하지. 괜찮으면 이야기 해줄 수 있니?”
로우와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며 배려심이 깊게 묻어난 낮은 목소리로 물어보는 코라손의 표정과 눈빛은 정말로 그간 로우의 행보가 어떠했는지 궁금하여 기대와 약간의 걱정으로 찬 모습이었다. 로우는 그러한 코라손의 모습에서 기시감을 느꼈다. 로우에게 있어서 지금의 코라손의 모습은 희귀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언제나 로우와 이야기할 때면 매번 몸을 숙여 시선을 나란히 하는 수고를 기꺼이 감수했으며 자신과 몇 십 살이나 차이나는 어린 로우를 단순히 어린아이라고 해서 가볍게 여기거나 얕잡아 보지 않고 동료이자 가족으로서 다른 이들과 동등한 대우를 해주었다. 언제나 로우를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듯이 마주하는 도플라밍고와는 정 반대의 태도였기에 로우는 그러한 코라손의 배려를 줄곧 좋아했었다. 나이는 상관없이 모두가 자신의 동료이며 가족이니 차별 없이 대해줘야 한다는 것이 코라손의 생각이었다. 로우를 특별하게 여기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것을 대놓고 표출하여 분란을 만들지 않았으며 무조건적으로 감싸지 않고 형평성 있게 분별하는 모습을 잃지 않았다. 특별하지 않기에 특별한 것일까. 코라손의 의도와는 정 반대로 로우에게 있어서는 적어도 코라손의 그러한 태도가 역으로 특별하게 다가왔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지금의 코라손의 모습은 질문의 내용과 맞물려서 로우에게 있어서 갈등을 선사했다. 코라손의 부탁이라면 뭐든지 들어줄 각오가 되어있다고 과장스럽게 말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로우였지만 과연 그에게 무슨 말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에 대한 갈피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13년. 코라손이 죽고 나서 상당히 길면서, 또 어찌 보면 찰나나 다름없는 짧은 시간이 지났다. 그 시간 안에서 수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좋은 일들만 있지 않았으며 괴롭고 힘든 나날들도 가득했다.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에 빠르게 흘러가는 잔상들을 되짚어보니 로우는 코라손의 죽음 이후 많은 시간을 보냈구나 생각했다. 그가 죽었을 때만 해도 로우로서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에 대해 그저 막막했을 뿐이라 13년의 세월을 버틴 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생각되었다. 결국 사람은 어떤 일이 일어나도 어떻게든 살아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증명하게 된 모습이었다. 그래도 이야기를 해야 한다. 코라손이 바라는 일이며, 그를 위해 살아간 시간들이었으니 마땅히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 지당한 일이다. 이것은 로우에게 내려진 하나의 임무와도 같은 것이었다. 이야기에 앞서, 로우는 버겁게 한숨을 쉬어냈다. 소리 없이 벌어진 입은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아직 결정을 못 내려 방황하는 낌새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래도 코라손은 인내심을 가지고 가만히 기다렸다. 저 작은 아이의 조각과도 같은 작은 입에서 어떤 모험들이 쏟아져 나올지에 대한 기대가 그를 차분히 기다리게 만들었다.
“…어디서부터, 뭐라고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 지….”
그렇게 운을 떼어내 이야기의 서막을 연 로우는 말문을 열게 됨과 동시에 가슴에 짓누르던 묵직한 무언가가 조금씩 움직여지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풀어놓는 것은 로우로서는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말재주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타인과 필요 이상으로 길게 이야기를 나눈 적이 드물었으며 언제나 로우는 최소한의 대화로 모든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타입이었다. 말수가 적고 과묵한 성격이 이런 건조한 회화를 만들어낸 것에 크게 일조하기도 했다. 이러한 회화가 일상적으로 자리를 잡게 되어서 그런지 로우는 말을 길게 하는 것에 익숙지 않았으며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에는 상당히 서툴고 낯설어하는 편이다. 혹여나 긴 이야기를 할 때가 되면 다른 이들에게 대신 떠넘기거나 간접적으로 알려주는 것으로 스스로 입을 여는 것을 피하였다. 그러나 이번의 경우에는 다른 누군가에게 떠넘길 수 없는 상황이며, 이 이야기는 다른 누구도 아닌 로우의 입에서만이 나올 수 있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로우는 거의 처음으로 코라손을 상대로 13년간의 이야기를 굵직하게 털어놓았다. 어려울 것이라 예상했던 이야기는 한 번 말문을 열게 되자 거침없이 흘러나왔으며 로우 스스로도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이 이렇게나 유려하게 말할 수 있다는 사실에 속으로 살짝 놀랐을 정도였다. 그러나 역시 익숙지 않은 일을 한 덕분인지 이야기가 거의 끝마쳐갈 쯤에는 슬슬 피로가 쌓이게 되었고, 모든 이야기를 정리하여 끝마치게 될 때는 로우는 속으로 말을 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지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정도로 피로감에 지쳐있었다. 쉬지 않고 말한 탓에 입과 목구멍은 바짝 말라버리게 되었으며 턱을 근육에 미미한 마비가 생겨 미약한 통증을 호소했다. 하아. 로우는 지친 한숨을 마침표 찍듯이 뱉어냈다. 그 피로는 과연 육체적 피로에 한정된 것일까. 육체적 피로라고 단순히 표현하기보다는 정신적 피로가 육체에도 영향을 주었다는 말이 더 설득력이 높았다. 이야기를 마치면서 로우는 13년의 이야기를 떠올려 그것을 말로 만들어낸다는 것은 생각 이상으로 힘든 중노동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예전부터 느끼고 있었지만 자신의 삶이 그리 순탄치만은 않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강렬하게 느끼게 되었다. 문득, 로우는 코라손이 지금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궁금하여 잠시 잊고 있었던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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