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님 리퀘 신청 연성입니다.
나츠메 우인장 패러디를 노리고 쓴 글인데 이도저도 아닌 글이 나와버렸네요(...)
“언제까지 형의 곁에 머물 작정인거죠?”
등나무 위로 앳된 목소리가 울리자 레이겐은 자신의 머리 위로 드리워진 등나무 꽃을 찬찬히 살폈다. 가지들마다 연보랏빛으로 우아하게 피어난 꽃들로 촘촘히 그려진 등나무는 수백 년 동안 한 자리를 우직하게 지켜온 세월만큼 고풍스러운 위엄 같은 것이 흘러나와 가만히 우러러 보는 것만으로도 압도되는 인상을 안겨줬다. 그런 등나무의 가장 낮은 가지에, 한 소년이 앉아있었다. 중학생 정도로 짐작되는 어린 소년은 검은 가쿠란을 입고, 그 위에는 하늘색 바탕에 제비꽃과 흰 나비가 수 놓여 진 기모노를 어깨에 걸치고 있는 기이한 차림을 갖추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소년의 미려한 인상과 신비로운 분위기에 위화감 없이 잘 어울렸다. 간만에 보는 소년의 얼굴에 레이겐은 입을 살짝 벌렸다. 인간으로서, 그의 형과 평범한 중학생으로 살아갔더라면 분명 여자애들 여럿 울렸을 것이 분명했다.
“여어, 모브 동생. 얼굴 마주보는 건 오랜만이네.”
레이겐의 호칭에 리츠는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산의 젊은 주인인 그를 ‘모브 동생’이라는 호칭으로 감히 부를 수 있는 자는 인간과 요괴 통틀어 레이겐 아라타카 한 명 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 자에게 이름으로 불리고 싶은 것은 절대로 사양인지라 리츠는 그것에 트집을 잡지 않고 비딱한 태도로 레이겐과의 대화를 이어갔다.
“딴소리 하지 말고 바른 대로 말하는 게 좋을 겁니다. 사기꾼 인간.”
“난 모브의 스승이라고. 스승이 제자의 곁을 지켜주는 건 당연하지. 그 녀석이 인간으로서 올바르게 성장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스승으로서의 내 역할이야.”
그래봤자 아무런 능력도 없이 오로지 그 가벼운 세치 혀만 놀리는 재주만 갖춘 하찮은 인간 주제에. 목구멍까지 들이찬 말을 꺼낼까말까 망설이다가, 리츠는 관두기로 했다. 지금까지 수없이 레이겐의 면전에다가 그런 비슷한 비수들을 꽂고 싶은 충동에 갈등하기도 했지만, 모브의 스승으로서의 마음가짐을 이야기할 때의 레이겐의 말에서는 한 점의 거짓과 가식이 없었기에 그 말을 듣고 비수를 던지기에는 항상 머뭇거림이 딸려오게 되고 말았다. 젠장. 이래서 레이겐 아라타카가 싫었다. 항상 인간과 요괴들을 상대로 뻔뻔하게 거짓말을 치면서도, 심지어 하나 뿐인 제자인 모브에게마저 거짓말을 일삼으면서도 그를 생각하는 마음만큼은 의심할 여지없는 진심인지라, 리츠는 레이겐이 싫었다.
형을 생각하는 마음만큼은 유일한 진실로 삼고 있는 그가, 무척이나 싫었다.
레이겐 아라카타. 어느 날 카게야마 형제 앞에 나타나 일류 퇴마사라고 자처한, 일류 사기꾼이다.
사실, 그의 말이 완전히 거짓말인 것은 아니다. 레이겐 가문은 과거에 정말로 퇴마를 가업으로 삼던 유명 퇴마사 가문이었으니까. 여러 요괴들 사이에서도 명성(이라고 쓰고 악명이라고 읽는다. 자신들을 퇴치하는 인간이니 요괴들 입장에서는 좋을 리가 없다.)이 자자했던 레이겐 가문은 퇴마사들 사이에서 실세를 장악했던 명망 높은 가문이나, 현대에 들어서면서 그 위상은 퇴색되어 빛을 잃게 되었다. 현대에 들어 요괴를 볼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인간의 수는 줄어들고 있었고, 레이겐 가문도 그 변화를 피해갈 수 없었다. 결국 수십 년 전에 레이겐 가문에서 퇴마사로의 명맥은 완전히 단절되고 말았다. 이제 레이겐의 혈통을 이었다고 해도 요괴를 퇴치하거나, 요괴를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자 레이겐 가문은 세월의 변화 앞에 저항도 해봤지만, 결국에는 무릎을 꿇고 순응했다. 그렇게 레이겐 가문은 과거의 명성을 뒤로한 채 가업인 요괴 퇴치를 완전히 그만두었다. 그리고 조금의 시간이 흐르고 몇 대를 거쳐, 레이겐 아라타카가 나타났다.
당연히 퇴마의 힘을 잃어버린 레이겐 가문에서 태어났으니 일반인과 동일하게 요괴를 볼 수 있는 힘이나 퇴마의 능력이 없었다. 그럼에도 레이겐은 자신이 유능한 퇴마사라고 자처했다. 이유는 하나, 사람을 속여 먹기 위해서였다. 요괴라는 비현실적인 수단을 사용하면서도 그 목적은 지극히 속물적이면서, 어떤 의미에서 보면 가장 인간적이었다. 우연히 집안에서 보관 중이던 고서들을 발견한 레이겐은 이것들이 사기를 치는데 좋은 도구가 되겠다는 직감을 얻었다. 현대에 들어서면서도 사람들은 궁지에 몰리면 비과학적인 것에 매달렸다. 유령이라던가, 요괴라던가, 전설 속 동물이라던가. 레이겐은 그 점을 노려 사기 행각을 벌여왔다. 정작 본인은 누구보다도 요괴의 존재를 믿지 않고 있음에도. 사기 퇴마를 벌인다고 해서 요괴의 존재를 믿어야 한다는 법은 없다. 레이겐은 철저히 집안의 퇴마 지식을 써먹었고, 요괴들의 존재를 날조해 자신의 이익을 챙겼다.
레이겐 아라타카는 앞으로도 자신이 요괴의 존재를 절대로 믿지 않겠다고, 요괴를 볼 수 있는 인간 또한 더는 존재하지 않노라 굳게 믿었다. 아무것도 믿어서는 안 되는 사기꾼으로서 레이겐이 유일하게 믿었던 것이었다.
카게야마 형제를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카게야마 시게오. 통칭 모브.
우연히 모브를 만나게 된 레이겐은 그가 자신의 두 가지 믿음을 깨부수는 존재라는 것을 간파해냈다. 겉으로 봐서는 매사에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시큰둥한 표정에 어딘지 어설픈 행동거지를 지닌 평범한 중학생 남자애지만, 실상은 달랐다. 요괴의 피를 잇고 태어난 모브는 선천적으로 강력한 요력을 가지고 태어났고, 때문에 어렸을 적부터 당연하게 요괴의 존재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보며 성장했을 뿐만 아니라 어지간한 요괴들은 가뿐히 퇴치할 수 있는 힘까지 겸비했다. 그러나 정작 그런 특별함을 지닌 당사자는 자신의 그런 일면을 거북하게 여겼다. 그저, 평범한 인간으로서 살고 싶다. 그것이 모브가 유일하게 원하는 한 가지였다. 자신과 달리 요괴의 삶을 선택한 동생이 마음에 걸렸지만, 그래도 모브는 인간으로서 열심히 살고 싶었다. 인간으로서 살기 원하는 부모님의 바람과, 동생인 리츠의 몫까지 함께. 그러나 주변에는 모브를 도와줄 사람이 없었다. 부모님은 어렸을 적에 세상을 떠나셨고, 리츠는 산의 젊은 주인으로서 할 일이 많은데다가 요괴의 영역에 들어서 있으니 어떻게 하면 ‘평범한 인간’으로서 살 수 있는지에 대한 방법을 몰랐다.(거기에 더해 모브는 모르는 리츠의 남모를 사정도 있었다.)
그런 모브의 눈앞에 나타난 사람이 레이겐 아라타카였다.
특유의 처세술과 달변, 그리고 방대한 요괴 퇴치 관련 지식을 능숙하게 설파하는 레이겐의 모습은 누가 봐도 뛰어난 요괴 퇴치사였다. 처음 보는 퇴치사이자 자신과 같은 세계를 보는 ‘인간’으로 의심 없이 곧이곧대로 믿은 모브는 레이겐을 스승으로 삼았고, 모브의 능력을 알고서 과거에 자신의 집안 내력을 알았던 것처럼 자신의 사기에 써먹을 수 있겠다 판단을 내린 레이겐은 모브를 제자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두 사람은 조금 위태롭지만 원만한 사제지간이 되었고, 뜻밖이라는 말을 붙여도 괜찮을 만큼 레이겐은 요괴 관련 지식뿐만 아니라 어른으로서 모브를 잘 다독여줬고, 모브도 그런 레이겐의 모습을 통해 감사함과 존경심을 키워나갔다.
그래서 리츠는, 레이겐 아라타카가 무척이나 싫었다.
리츠는 눈을 가늘게 뜨고 레이겐을 흘겨봤다.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간략적으로 떠올리니 심사가 다시 뒤틀려갔다. 처음에는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하나 뿐인 형에게 속물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지금은 레이겐이라는 인간 자체가 눈에 거슬렸다. 그러나 그것은 맨 처음에 가졌던 적개심과는 성질이 조금 달랐다. 그래서인지 리츠는 그것의 정체를 아직까지도 밝혀내지 못했고, 알 수 없는 감정을 가지게 간 레이겐이 더욱 거슬렸다.
“인간이 인간을 속일 수 있어도, 요괴의 눈은 속일 수 없죠.”
“뭐?”
“요괴가 된 후로는 보고 싶지 않아도 잘 보이게 되어서 말입니다. 인간의 그늘 같은 것이.”
그리 말하고서 리츠는 훌쩍 등나무 가지에서 내려와 사뿐히 땅 위에 섰다. 어깨에 걸친 기모노를 펄럭이며 땅에 내려선 리츠의 모습은 외견상 중학생의 모습이 틀림없는데도 이질적인 기품을 스스럼없이 선보여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그 신비한 모습에 인간이 아닌 존재라는 것을 저절로 깨닫게 해줬다. 레이겐은 그런 리츠의 분위기에도 밀리지 않고 침착하게 대응했지만, 속으로는 요괴와 마주한다는 것이 이런 느낌이라는 것을 실감하고 마른 침을 삼켰다. 인간의 모습을 뒤집어쓰고 있다고 해도 본연의 힘을 완전히 감출 수 없는 것이다. 자리에서 내려온 리츠는 사박사박 발자국 소리를 내며 레이겐에게 다가갔다.
“사실은 형을 싫어하는 거 아니에요? 당신과는 달리 힘이 강한 형에게서, 그런 힘을 지녔는데도 평범한 인간으로 살고 싶다는 소리를 하는 형이 미운 거 아니냐고요.”
눈 깜짝할 새에 거리를 순식간에 좁혀온 리츠는 가시가 돋힌 말과는 반대로 손을 뻗어 부드럽게 레이겐의 뺨을 쓸어내렸다. 허나 손길과는 반대로, 손끝과 눈빛은 오싹하리만치 차가워서 레이겐은 순간 오한을 느끼고 말았다. 하지만 잠시 눈을 감았다 뜨고는, 잠시 느꼈던 오한을 떨쳐내고 리츠의 손을 덥석 잡아챘다. 갑자기 자신의 손을 낚아챈 레이겐의 예측하지 못한 행동에 이번에는 리츠 쪽에서 당황스러움을 드러냈다.
“모브 동생. 난 중학생한테 열등감이나 질투를 느낄 만큼 속 좁은 어른이 아니라고.”
그리고서 리츠와 똑바로 눈을 마주하고, 그의 손을 잡아주며, 레이겐은 침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뭐, 네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뭔지 대충은 알겠어. 몰락한 퇴마사 가문에 태어난 나로서는 솔직히 모브의 힘을 보고 아무런 감정이 안 생긴다면 그게 이상한 거지. 나한테 모브 같은 힘이 조금이라도 있었더라면, 조금은 편해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잠깐이나마 해봤고. 내가 이러고 다니는 거, 집에서는 별로 안 좋아 하거든. 사기꾼에다가, 한참 전에 관둔 요괴 퇴치를 하겠다고 나서니 눈 밖에 나는 건 당연하지.
하지만 그건 내 문제고, 그 문제를 모브 탓으로 할 마음은 조금도 없어. 앞서 말한 것도 생각해서만 그친 거야. 모브의 힘은 어디까지나 모브의 것이고, 그 힘을 어떻게 하고 싶은가는 모브의 의사에 달린 일이지. 그리고 난 스승으로서, 그런 모브의 뜻을 전적으로 지지해줘야 하는 역할이고.”
사기꾼의 입장으로서 모브를 이용해 먹는다고 해도, 그것과는 별개로 스승의 입장으로서 모브를 올바르고 평범한 인간의 길로 이끌어주고 싶은 의사 또한 레이겐은 확실히 가지고 있었다. 비록 처음에는 서로의 이익을 위해 맺어진 인연이라고 해도, 그 후에 쌓여진 여러 추억들과 공감은 거짓 한 점 없이 두 사람에게 소중한 것이 되었다.
자신의 하나 뿐인 제자가, 모브가, 올바른 인간으로서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다.
모브와 둘이서, 계속 지내고 싶다.
최근 들어 레이겐 아라타카는 그런 미숙한 바람을 가지게 되었다. 스승으로서의 책임감과, 그 안에 숨겨진 의미심장한 감정을 더해서.
「리츠. 참 신기해. 처음에는 내 힘을 다룰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줬으면 하는 마음에서 스승님의 제자가 된 건데, 요즘에는 굳이 그런 이유 때문만이 아니더라도 계속 스승님과 같이 있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됐어.
스승과 제자라는 관계가 아니더라도, 스승님이, 조금 다른 의미로 내 곁에 있어줬으면 좋겠어.」
그리고 모브 또한, 그와 비슷한 바람을 레이겐을 통해 품게 되었다.
말과 눈빛에 선망과 총애와는 조금 다른 것을 섞어서 제 심정을 동생에게 고백하는 모브의 모습은, 짝사랑에 빠진 순진한 사춘기 소년의 모습을 빼다 박았다.
아아, 역시. 이 둘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래서 당신이 싫어.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형의 자리를 차지한 것부터 시작해서, 형과 가까운 사이가 되고, 함께 요괴 퇴치 일을 하고,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고, 이따금 형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흐뭇하게 미소를 짓는 당신의 모습이, 오로지 형에게만 향하고 있는 당신이, 너무나도 싫었다고.
이래서 인간이 싫었다. 이런 불필요한 감정을 느끼게 해서, 어느 틈엔가 마음을 흔들어 놔서, 그래서 포기할 수 없게 만들어서. 그런 것들이 모두 귀찮아 인간의 길을 버리고 요괴가 된 것인데, 어째서 자신은 아직도 이런 것들을 거추장스럽게 느끼고 있을까. 그것도 저 남자를 통해서.
“…당신 말대로, 형이 올바른 인간이 된 후에도, 형의 곁에 머물 셈인가요?”
그 말에 레이겐은 움찔거리며 눈을 크게 뜨고는 갈피를 못 잡는 시선을 이리저리 떠돌게 하다가, 이윽고 천천히, 신중하게 말을 떼었다.
“그건, 그 때가 되어봐야 알 수 있는 일이야. 모브 동생.”
그런가. 리츠는 속으로 레이겐의 말에 답했다. 앞일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인간도, 요괴도, 어느 누구도 앞으로 자신들에게 어떤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지 예측할 수 없는 일이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앞으로의 일이 자신의 뜻대로 풀리기를 바라며 기도를 올리는 것뿐이었다.
그래도, 자신에게는 기회가 오지 않을 것이다.
리츠는 자신의 차가운 손을 잡은 레이겐의 온기를 자신의 안에 조금씩 담아 넣었다. 인간의 온기는 미적지근했지만, 동시에 데일만큼 뜨거워 쉬이 놓칠 수도, 잡을 수도 없었다. 허나 차라리 그 온기만이라도 좋으니, 자신의 것으로 기억에 남기고 싶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레이겐은 뜻밖에도 오랫동안 리츠의 손을 잡아줬다.
아련히 불어오는 등나무 꽃의 향기가 어지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