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라카라 X 세라오소
여장 소재 주의.
원래는 한 편으로 마무리할 예정이었는데 분량이 길어져서 상하로 나눠 올립니다.
글을 쓰면서 개인적으로 원하는 분위기가 있었는데 그게 끝까지 잘 표현되었는지 모르겠네요.
아름다운 사람
눈을 둘 곳이 없다
그렇다고 아니 바라볼 수도 없고
그저 눈부시기만 한 사람
-나태주, 「아름다운 사람」
아, 죽고 싶다.
비유적인 의미와 직설적인 의미 모두를 포함해서 카라마츠는 진심을 담아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냥 듣기만 해도 상당히 심상찮은 내용을 품고 있는지라 그냥 넘길 수 없지만, 그것은 월요일 아침 출근길에 나서는 모든 직장인들이 공통적으로 품는 말버릇 비슷한 한탄 같은 것인지라 무게감은 묘하게 가벼웠다. 습관처럼 입에 붙어버린 말을 넋과 함께 밖으로 내보내면서도 발걸음은 착실히 출근길을 밟아나갔다. 머리는 가기 싫다고 통곡을 하는데 몸은 야속하게도 앞으로 나아갔다. 이게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이 아니겠느냐는 뻔한 설득으로 달래고서.
월요일 아침의 햇살은 다른 때보다도 맑고 눈이 부셔서 카라마츠는 잔뜩 인상을 찡그리고서 하늘을 올려다봤다. 상쾌하고 포근한 햇살을 온 몸으로 만끽하고 있음에도 그것이 주는 축복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뭐가 좋다고 저렇게 환히 빛나는가 싶어 짜증마저 울컥 일었다. 지금의 카라마츠에게 원하는 것은 맑은 하늘과 찬란한 햇빛이 아닌 전철이 멈춰서 출근을 불가능하게 만들 만큼의 폭설이었다. 그러나 하늘은 오늘도 회사의 노예로서 일하라는 뜻을 날씨로 드러내면서 억지로 등을 떠밀었다. 그렇게 카라마츠는 너덜너덜해진 삶에 대한 회의감을 잘근잘근 씹으면서 만원 전철에 억지로 몸을 우겨넣었다. 거칠고 텁텁한 입안과 갑갑한 공기에 대한 불만을 눌러 삼키고, 전철은 육중해진 몸을 힘내서 움직여 다음 역으로 달려갔다.
마츠노 카라마츠. 24세. 현재 다니는 직장은 매년 아슬아슬하게 적자를 면하고 있는 작은 중소회사. 입사 3년차. 직급은 대리.
24살이면 한참 창창한 청춘의 나이이자 절정으로 물오른 황금기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의 카라마츠에게는 흔히 젊은이들에게서 엿볼 수 있는 청춘의 싱그러움과 열정, 생기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그의 모습은 마치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아 바짝 말라버려 황폐해고 삭막함만이 처연히 감도는 황무지였다.
잔뜩 뻗혀져서 산발이 된 머리, 면도를 하지 못해 퍼렇게 꺼슬꺼슬해진 턱, 눈 밑을 점령한 시꺼먼 기미, 초점이 흐릿한 눈동자, 무기력한 눈빛, 혈기가 거의 돌지 않는 파리한 낯빛, 구부정한 등, 후줄근한 푸른 정장과 낡아빠진 구두.
그를 이루는 모든 것들이 카라마츠의 청춘을 앗아갔다. 아니, 이제는 자신에게 그런 눈부신 시절이 있었나하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처음부터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황무지 어디를 둘러봐도 오아시스는 존재하지 않았다.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안쓰럽고 걱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봤고, 간혹 힘내라는 격려를 받으며 드링크를 선물 받은 적도 있다. 카라마츠도 힘내고 싶었고, 생기 있는 모습으로 지내고도 싶었다. 세상에 어느 미친놈이 산송장 같은 몰골로 살아가고 싶겠는가. 게다가 이미 원인이라면 한참 전부터 알고 있었나. 그러나 원인을 알면 뭐하나, 해결책이 전혀 보이지 않을 만큼 눈앞이 무저갱보다 깜깜한데.
월급은 제법 알찼고, 사내 복지도 괜찮으며 같이 일하는 직원들과의 대인관계도 융통성 있고 원활했다. 그런 점만 봤을 때 꼭 그렇게 나쁜 회사는 아녔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다른 곳보다 업무량이 상당히 많다는 거였다. 덕분에 정시 퇴근은 기적의 힘을 빌려야지만 이룰 수 있는 것이고, 야근은 무척이나 잦은데다가 한 번 하게 되면 기본이 사흘이었다. 덕분에 젊은 직원들은 입사 후 1년도 못 버티고 사직서를 제출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카라마츠 또한 3년 동안 회사에 다니는 동안 육체적, 정신적 한계를 매번 맛보면서 품에 넣어둔 사직서를 부장님 책상 위에 놓고 싶은 충동과 내면에서 치열하게 싸웠다. 다행인지 아닌지 아직은 이성이 최후의 승자가 되어줬기에 사직서가 그의 품에서 벗어나는 일은 지금까지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3년 동안 다니면서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었고, 승진을 하게 되면 지금의 격무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있기에 카라마츠는 어떻게는 버텨내보려 했다. 승진을 하고, 여유 있게 일을 하면서, 돈을 많이 벌고 싶었다. 그러면 번듯한 집을 살 수 있고, 자가용도 타고 다닐 수 있고, 언젠가 좋은 반려자를 만나 가정을 이룰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였고, 그것을 하나라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어쨌든 일을 해야 됐다. 노예처럼 일해서 정승처럼 쓰자. 언젠가 정승이 될 날을 꿈꾸며 카라마츠는 사흘째 야근에 돌입했다.
“오늘도 상태가 말이 아니네, 카라마츠.”
뻑뻑하게 돌아가는 목을 억지로 뒤로 돌리니 쵸로마츠가 진한 블랙커피로 채워진 머그컵을 들고서 그의 뒤를 지나가던 길이었다. 카라마츠와 같은 야근 동지이긴 해도 결벽증을 기반으로 한 자기 관리가 상당히 철저한지라 겉으로 봐서는 조금 피곤한 기색한 내비칠 뿐, 전체적으로 보기에는 멀쩡해 보였다. 그에 비해 카라마츠는 얼굴 위로 새파란 모니터 화면 빛이 씌워져서 그런지 평소보다 더 심하게 보이다 못해 상당히 흉흉했다.
하하. 쵸로마츠의 말에 카라마츠는 한 박자 늦게 바짝 마른 웃음소리를 냈다. 들어보니 이미 넋은 그의 몸에서 빠져나간 지 오래였다.
“직원 휴게실 가서 눈은 붙이고 온 거야?”
“어. 10분 정도.”
“10분 가지고는 턱도 없잖아. 그걸 눈을 붙인 거라고 할 수는 있냐?”
“어쩔 수 없다. 10분만 지나도 눈이 저절로 떠지게 된다.”
실핏줄이 벌겋게 뒤덮어 충혈 된 두 눈을 거칠게 벅벅 문지른 뒤, 카라마츠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듣는 사람도 기력이 빠져 피곤해지는 고된 한숨이었다.
과도한 업무량과 잦은 야근도 문제긴 했지만, 지독한 불면증 또한 카라마츠의 인생을 구질구질 찌들게 만든 원흉 역할을 톡톡히 맡았다. 입사 초기 때만 하더라도 별 문제는 없었지만, 야근으로 밤을 새면서 빈속에 커피를 마시는 방식으로 졸음을 억지로 참아내는 짓을 자주 벌인데다가 잠을 자더라도 회사에서 1~2시간 정도의 쪽잠으로 대충 때우는 엉망진창 생활 패턴이 끝내 불면증이라는 대가로 톡톡히 되돌아오게 되었다. 간절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누워 눈을 감아도 잠은 도통 오지 않았고, 천근같이 무거우면서도 뻣뻣하게 열린 채로 굳어버린 눈꺼풀 때문에 가랑비 같은 잠조차 한 시간도 다 채우지 못했다. 효과 좋은 수면제를 구해서 먹어봐도 초기에만 효과가 좋았지, 나중에는 자주 복용하다보니 내성이 생겨버려 이제는 수면제를 먹어도 별 효과를 바라기는 어려워졌다. 병원에 찾아가 수면제 처방을 내려달라 통 사정을 해도 지금 상태에서 수면제를 먹으면 정말로 큰일 날 수 있다는 의사의 완강한 반대만 들을 수 있었다. 충분한 휴식과 안정, 그리고 장기적인 치료가 지금의 카라마츠에게는 강력한 수면제보다도 더 필요했다. 무척이나 정론이었지만, 그렇기에 실천하기가 가장 어려운 해결책이었다. 덕분에 늘어나는 것은 한숨과 담배요, 줄어드는 것은 일의 능률과 수명이다.
참다못한 카라마츠는 서랍 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기본적으로 사무실은 금연이기에 피워서는 안 되지만, 니코틴이라도 마셔야지 숨통이 트였다. 쵸로마츠는 잠깐 불만인 표정으로 담배를 피우는 카라마츠의 모습을 보다가, 이윽고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절로 저었다. 그도 자신의 동기가 수면 부족과 피로 과다로 얼마나 고생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딱 세 시간이라도 좋으니 중간에 깨지 않고 푹 자봤으면 좋겠군.”
마른세수를 하는 손 틈 사이로 흘러나오는 탄식은 담배 연기보다도 지독했다. 상체를 한껏 뒤로 젖히자 의자가 갑작스런 무게에 삐걱거리는 단발마를 내질렀다. 쯧쯧. 쵸로마츠는 혀를 차다가 시계를 확인하고는 잠깐 뜸을 들이다가 카라마츠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오늘은 그냥 이쯤하고 들어가 봐라. 일에 집중도 못하는 것 같고, 지금이라면 막차는 놓치지 않고 탈 수 있겠네.”
“에? 하지만 아직 마무리할 일이 조금 남아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 난 방금 전에 내 일 다 끝냈고, 너도 남은 거 얼마 없으니까 금방 끝나. 집도 회사하고 가깝고.”
“쵸로마츠….”
“지금 네 모습 계속 보고 있으면 내가 다 피곤해 죽을 것 같다. 다음에 열리는 냐짱 정기 콘서트 티켓 사주는 걸로 합의 보자고.”
“…알았다. 고맙다, 쵸로마츠.”
* * *
퇴근 시간이 훌쩍 지나고 오늘의 마지막 전철이 들어올 시간이 된 전철역은 무척이나 한산했다. 평소에는 출퇴근을 위해 사람들이 몰려들어 도떼기시장처럼 발 디딜 틈 없이 북적였는데, 지금은 그러한 인기척이 먼지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그런 정거장에서 카라마츠는 홀로 서서는 힘없이 한숨을 쉬었다. 한숨 한 덩어리가 그의 몸에서 빠져나가자 그와 동시에 어깨는 축 늘어지고 등은 더욱 구부정해져서 무척 초라해보였다. 그에 비해 밖으로 나온 옅은 한숨은 새하얗게 퍼져나가 빠르게 사라졌다. 예년보다 늦게 찾아온 겨울은 피로에 찌든 한숨도 새하얗게 얼릴 준비를 순조롭게 일궈가고 있었다.
허공을 하릴없이 방황하며 떠도는 시선을 방치하고서, 카라마츠는 자신의 안에서 꾸물꾸물 기어오르는 무언가의 기척을 감지했다. 그것은 숨이 막힐 정도로 끔찍이도 썩은 내를 풍기는 회의감이었다. 안에만 자꾸 쌓아두고, 억누르며, 겉으로만 보이지 않게 덮어놓다보니 사라지지 않고 더욱 악화되어 안에서부터 썩게 만들고 곪아 터지게 만드는 그 흉악한 모습에 카라마츠는 그저 아연했다.
왜 이렇게까지 살아야 하는가.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앞으로의 일생을 위해서라고 해도 지금이 너무 힘들고 괴로운데 무슨 의미가 있는가. 행복을 누릴 건 미래의 자신이지 현재의 내가 아녔다. 나는 결코 맛볼 수 없는 행복을, 활기를, 눈부심을 전부 아무 고생 없이 당연히 독차지할 미래의 나에게 카라마츠는 때 아닌 원망과 억울함에 견딜 수가 없어졌다. 애초에 이렇게 일한다고 해서 미래의 내가 호사를 누릴 보장도 없지 않은가.
힘들어. 지쳤어. 이젠 그만두고 싶어. 전부 잊어버리고 쉬고 싶다. 누군가에게 기대어 편안하게 눈을 감고 싶었다. 영영 눈을 뜨지 않아도 좋으니 달콤하고 깊은 잠에 한없이 몸을 내던져 정신이 아득해지도록 빠져들고 싶었다.
휘청거리는 풍경, 점멸하는 의식, 아찔한 시야.
이대로 깊이 추락하여 끝없는 안식을 취할 수 있다면.
“그렇게 멍하니 있으면 위험하다고, 아저씨.”
추락하려는 이의 옷깃을 살짝 붙잡는 앳되고 나른한 목소리가 들렸다.
퍼뜩 정신을 차린 카라마츠는 반쯤 앞으로 기울어진 상체를 뒤늦게 확인하고는 애써 균형을 잡고서 허겁지겁 뒷걸음질을 쳤다.
지금, 무슨 짓을 하려고 했지?
카라마츠는 혼란스러운 상황을 전부 받아들이지 못해 거친 숨을 헐떡이고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방금 전에 있었던 일에 몸서리를 쳤다. 젠장. 아무리 피곤해서 정신이 나갔다고 그렇지 까딱하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을 뻔 했다.
“이제 정신이 좀 들어?”
다시 들려온 천진한 목소리를 따라, 카라마츠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카라마츠의 시선이 가닿은 곳은 역내의 가장 끄트머리, 역의 안과 밖을 구분하는 경계의 바로 옆에 설치된 벤치였다. 너무 구석진 곳에 있어서 신경 써서 유심히 살펴보지 않으면 쉽게 발견할 수 없는 곳.
그곳에는 세일러복을 입은 소년이 앉아있었다.
우아한 먹빛을 바탕으로 하여 가슴에 맨 붉은 리본을 포인트로 삼은 세일러복은 상당히 고전적인 디자인이라 요즘 와서는 상당히 보기 드문 것이기도 했다. 세일러복 자체는 문제는 없었다. 현대에는 찾아보기 힘든 디자인이라 그 점이 눈길을 사로잡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딱히 이상하거나 문제 되는 건 없었다.
문제라면 그것은 여성용이고, 착용자는 남자라는 성별의 불일치였다.
허나 그것을 문제로 삼아 트집을 잡기에는 소년에게 여성용 세일러복은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오로지 소년을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세일러복은 아무런 위화감 없이 소년과 잘 어우러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소년이 여자처럼 보인다는 건 아녔다. 옷이 어울리는 것과 별개로 소년의 체격은 틀림없는 건강한 남성의 것이었고, 외모도 제법 중성적인 멋과 조금 앳된 티가 드러나 있지만 남자로 착각할 만큼 곱상하지도 않았다. 첫 눈에 봐도 남자라는 것을 확연히 알 수 있는 인상이었기에 치마를 두른다고 해서 여자로 여기는 만화에서나 볼 수 있는 착각이나 오해를 받을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대신 다른 오해는 잔뜩 사고도 남을법한 차림새라는 것이 문제였다.
덕분에 정신을 차린 카라마츠는 당혹스러운 심정으로 소년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쭉 훑어보고 있을 때, 역내에 안내음성이 또랑또랑 울려 퍼졌다.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안전선 밖으로 한 걸음 물러나주시길 바랍니다.]
오늘의 마지막 열차가 미끄러지듯 역내로 들어와 정차했다. 전철은 승객을 위해 출입문을 열어줬고, 그에 카라마츠는 허겁지겁 전철 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출퇴근 시간 때와는 달리 전철 안에는 빈자리가 차고 넘쳤다.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은 카라마츠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창 밖 너머에는 아직도 벤치에 앉아있는 소년이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카라마츠와는 달리 밤하늘을 그대로 빼다 박은 윤기 있는 검은 눈동자에는 별 대신 생기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소년은 막차에 오르지 않고 역에 남아 느긋하게 웃으면서 카라마츠에게 손을 흔들어줬다. 은은히 입가에 떠오른 호선과 나비처럼 자꾸만 제 주변을 팔랑팔랑 날아다니는 손의 흔들림이 잔망스러운 인상을 안겨줬다. 온통 검은 옷을 입고 있음에도 소년의 모습은 먼 곳에서 발하는 빛과도 같이 아득했고, 때문에 자꾸만 바라보게 만들었다.
출입문이 닫히고, 전철은 천천히 움직이더니 이윽고 빠르게 역에서 빠져나갔다. 소년의 모습도 카라마츠의 시야에서 순식간에 스치며 사라졌다.
여전히 카라마츠는 창밖을 바라봤다. 숨 가쁘게 스쳐가는 야경이 아닌, 허공에 남겨진 잔상을 더듬어가는 시선에는 약간의 왠지 모를 아쉬움 같은 것이 살짝 묻어나 있었다.
* * *
“좋은 아침.”
“좋은 아침입니다. 어머, 대리님. 오늘은 안색이 조금 괜찮아 보여요.”
“아…. 그런가요?”
“네. 티는 잘 안 나지만 유심히 살펴보면 어제보다는 나아 보여요. 자택에 돌아가셔서 푹 쉬신 것 같은데 다행이에요.”
“아, 네. 감사합니다.”
다음 날, 카라마츠는 아침 일찍 회사로 출근하니 가장 먼저 마주친 여직원이 갑자기 제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자 조금 긴장했다가, 뒤이어 듣게 된 뜻밖의 말에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여직원의 안도 섞인 말에 답해줬다. 자리를 떠난 여직원의 뒷모습을 보다가 문득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매만졌다. 여전히 푸석푸석한 피부의 감촉이 선연히 전해졌다. 그래도 여직원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분명 카라마츠의 모습은 바로 어제까지의 처참했던 모습과 비교했을 때 확실히 보기에 나아졌으니까. 그것은 카라마츠 본인도 잘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온몸을 짓누르던 피로의 무게가 어찌해서 견딜 수 있는 수준이 되었고, 거울에 비쳐진 피폐함은 다소 희석되어 있었다.
역시 사람은 잠을 자야 되는 거라고, 카라마츠는 새삼 깨달음을 얻었다.
비결은 간단했다. 아프로디테가 미의 유지를 위해 프시케를 시켜 페르세포네에게 잠을 얻어낸 것처럼, 카라마츠의 상태를 미욱하게나마 나아지게 만든 것은 깊고 편안한 숙면이었다. 눈을 감고서 한 번도 중간에 깨지 않고 출근 시간에 맞춰서 아침에 눈을 뜨는 그 상쾌한 기분은 말로 형용하기 어려울 만큼 감동스러운 것이었다. 무척 오랜만에 맛보는 감각에 카라마츠는 한참 동안 멍 때리면서 쏟아지는 아침 햇살을 만끽했다. 솔직히, 눈물이 찔끔 나오기까지 했다. 지끈거리는 두통은 없었고, 눈도 뻑뻑하지 않았고, 정신은 맑고 온전했다. 남들은 당연히 체험하는 이 감각을 카라마츠는 너무 오랜만에 가져보는 것이다. 대체 어떻게 해서 잠이 들 수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지금의 카라마츠에게는 숙면에 대한 기쁨을 만끽하는데 정신이 없는지라 진지하게 원인 분석할 생각이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였다.
또 다시 잠 못 이루는 밤이 연달아 이어졌다. 불면이 다시금 카라마츠를 괴롭히면서 되찾은 생기와 들뜬 기분은 빠른 속도로 시들어져갔다. 기미는 더욱 짙어졌고, 머리는 편두통으로 둘로 쪼개질 것처럼 아팠고, 두 눈은 바짝 마른 모래를 잔뜩 끼얹은 듯 너무 건조하고 따가워서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할 지경이었다. 카라마츠는 다시 땅이 꺼지는 한숨을 푹푹 쉬기 시작했다. 듣다보면 정말로 한숨으로 땅이 와르르 무너질 것 같았다.
그리고 다시 야밤의 전철역.
이번에도 카라마츠는 야근을 마치고 혼자서 쓸쓸히 막차를 기다렸다. 해가 저무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밤공기는 점차 차가워져 새하얀 입김을 어렵지 않게 만들 정도까지 되었다. 피로가 쌓이니 추위를 버티는 것도 힘들어지는지라 입고 있는 트렌치코트의 옷깃을 여미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얼른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바라면서도, 집으로 돌아가도 또 억지로 밤을 지새울 것이 분명했기에 카라마츠는 퇴근의 기쁨을 온전히 누리지도 못하고 막막한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그러다가 땅 꺼지겠어, 아저씨.”
또 다시 들리는 여상한 목소리. 카라마츠는 고개를 돌렸다.
불빛 하나 없는 어둠을 바로 옆에 두고서, 세일러복을 입은 소년이 벤치에 앉아있었다.
복장도, 외모도, 지난번과 전혀 달라지지 않은 모습이기에 카라마츠는 그가 누군지 한 번에 알아봤다. 워낙에 인상적인 생김새였으니 잊었더라도 다시 보면 어렵잖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설마 또 마주칠 줄은 몰랐기에 카라마츠는 놀란 나머지 아무 말도 못하고 멍하니 소년을 봤고, 소년도 지난번과 같은 자리에 앉아 카라마츠를 빤히 바라봤다.
대화 없는 시선이 어느 정도 오갈 쯤, 카라마츠는 지난번과는 다른 시선으로 소년의 행색을 살피기 시작했다. 어째서 여고생이 입을 법한 세일러복을 태연히 입고 있는지에 대한 의혹은 뒤로 미루고 보면 복장 자체는 지금의 계절과 조금 맞지 않았다. 입고 있는 세일러복이 긴 소매에 무릎 위까지 덮는 긴 치마로 구성되어 있어도 그걸로 추위를 견뎌내기에는 빈약한 차림새였다. 덕분에 언제부터 그곳에 앉아있었는지는 몰라도 소년의 귀와 코, 손끝은 새빨갛게 얼어서 보기만 해도 안쓰러웠다.
카라마츠는 그 모습을 유심히 살피다가 슬쩍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시선을 내리니 푸른색 싸구려 목도리가 자신의 목에 두툼하게 감겨져 있는 것이 바로 보였다.
조금 뒤, 목도리는 카라마츠의 목에서 벗어나 소년의 앞에 대령되었다.
“추워 보이는데 이거라도 쓰고 있어라.”
“어?”
“그런 차림으로 밖에 있다가는 감기 걸리기 쉬워. 시간도 너무 늦었는데 그만 집으로 돌아가라.”
어째 밤거리를 방황하는 비행 청소년을 훈계하는 간섭 많은 어른이 된 기분이 들었지만, 그래도 못 본 척 하고 넘어가는 것보다는 이편이 심적으로도 편했다. 카라마츠의 말을 들은 소년은 잠시 그의 목도리를 보면서 짐짓 고민하는 듯했으나 이윽고 서슴없이 목도리를 받아 들고는 제 목에 한 번 빙 둘러 감았다. 카라마츠가 했던 것과는 달리 엉성한 모양새였지만 소년은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
때마침 막차가 역으로 들어왔다. 열차가 정차하고 출입문이 열리자 카라마츠는 자리를 떠나 열차 안으로 몸을 실었다. 그리고 출입문이 닫힐 때가 되어서야 창문 너머에 있는 역내를 살폈다. 아까 전에 집으로 돌아가라는 카라마츠의 말을 들었음에도 소년은 이번에도 막차를 타지 않고 역에 혼자 남아있었다. 소년은 이번에도 손을 흔들며 떠나는 카라마츠를 배웅해줬다.
열차가 출발하고, 빈자리에 앉은 카라마츠는 허전해진 목을 천천히 매만졌다. 피부의 까슬까슬함 외에도, 목도리가 안겨줬던 미욱한 온기가 스치듯 손 끝에 닿았다.
* * *
오늘은 카라마츠에게 있어서 한 달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날이다.
“대리님. 월급날이기도 한데 오랜만에 한 잔 어때요?”
파릇파릇한 신입 사원이 벌써부터 저녁의 즐거움에 대한 기대와 기쁨으로 만개한 얼굴을 하고서 카라마츠에게 술잔을 기울이는 시늉을 했지만, 카라마츠는 이미 짐을 다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사무실 한쪽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분침과 시침은 일말의 오차도 없이 오후 6시를 가리켰다.
정시 퇴근. 월급과 함께 직장인에게는 듣기만 해도 귀에서 꿀이 떨어질 만큼 달콤한 단어였다.
“미안하지만 약속은 다음으로 미뤄줬으면 좋겠군. 오늘 같은 기쁜 날은 좀 더 고져스하고 스폐셜한 방식으로 축복해주지 않으면 야근의 여신에게 불경한 짓을 저지르는 셈이 되거든. 훗. 아쉽겠지만 다음에 제대로 파티를 즐겨보자고?”
“아, 네….”
기분이 너무 좋은 나머지 간만에 듣게 되는 카라마츠의 이따이한 발언에 (원래부터 이런 말투였지만 야근과 불면증으로 피로가 누적되어 역으로 말투가 정상으로 된 것이었다.) 신입사원은 차게 식어버린 표정으로 대답해줬다. 이미 그의 얼굴에는 카라마츠를 저녁 회식 자리에 데려가겠다는 의욕이 싹 사라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카라마츠는 통장으로 들어온 월급과 정시 퇴근으로 머릿속이 꽃밭이 되어 후배의 반응은 안중에도 없었다. 아직도 몸은 천근만근 피곤했지만 그것이 모두 월급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이까짓 고생쯤 전부 감당할 수 있었다. 비록 그런 기쁨이 다음날이 되면 말끔히 사라질 한순간의 꿈에 지나지 않았지만, 한 순간이라도 즐기지 않으면 이렇게 살아온 제 인생이 너무나도 초라해져 버린다.
그렇게 회사로 나와 퇴근 시간대의 전철에 오른 카라마츠는 저녁으로 포식할 고기 관련 먹거리들을 푸짐하게 떠올리면서 퇴근 시간대의 갑갑함을 견뎌내고 있었다.
그 때, 카라마츠의 눈에 심상찮은 것이 들어왔다.
교복을 입은 여학생의 뒤로 중년의 남성이 슬금슬금 거리를 좁혀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주변의 눈치를 보며 전철의 흔들림을 이용해 천천히 접근하더니 이제는 노골적으로 여학생의 바로 뒤에 서서는 거칠고 끈적끈적한 숨결을 여고생의 뒷덜미에 불어넣었다. 그리고 남자의 손이 여학생의 치마 쪽으로 다가갔을 때, 카라마츠는 바로 인파를 헤치고 남자의 손목을 낚아챘다.
“지금 뭐하는 거지? 나이를 그만큼 먹었는데도 할 짓이 그렇게도 없나?”
“뭐, 뭐야 너는! 이게 무슨 짓이야!”
“어떤 변태가 걸에게 질 나쁜 짓을 하려고 했기에 그걸 미연에 막은 것뿐인데, 뭐가 잘못 됐나?”
버럭 고함을 치는 남자의 반응에도 전혀 물러서지 않고 사나운 인상으로 남자를 노려보며 더욱 억세게 손목을 틀어잡는 카라마츠의 모습에 남자도 슬슬 겁을 먹고는 땀을 뻘뻘 흘리며 카라마츠와 주변 분위기를 살피느라 급급했다. 주변에서는 이미 웅성거림이 일어나 두 사람을 주목했고, 대부분이 성추행을 저지르려고 했던 남자를 향한 비난의 목소리였다.
그 때, 전철이 다음 역에 도착하면서 출입문을 열자 남자는 그 틈을 노려 카라마츠의 손을 뿌리치고는 허겁지겁 전철에 내려서는 꽁무니가 빠지도록 도망쳐버리고 말았다. 갑자기 도망친 남자의 반응에 카라마츠는 당황스럽기도 했고, 울컥 화나기도 해서 자신도 반사적으로 전철에서 내려 남자의 뒤를 바로 쫓았다. 그러나 한 발 늦은 사이에 남자는 인파에 몸을 숨겨 사라지고 말았다. 시야에서 사라진 남자의 모습에 카라마츠는 거칠게 혀를 차고는 바로 직원 센터로 향했다. 인상착의를 기억하고 있으니 직원 쪽을 통해 신고를 하면 금방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잠시 후, 직원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신고를 부탁한 뒤 다시 플랫폼으로 돌아온 카라마츠는 한숨을 쉬었다. 성격상 이런 일은 그냥 지나치지 않기에 귀찮다거나 손해 봤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모처럼 좋았던 기분이 이런 식으로 가라앉는 것은 영 안 좋기에 어쩔 수 없이 한숨이 나와 버렸다.
일단 중간에서 내렸기에 다시 전철을 타기 위해 안전선 밖에 섰을 때였다.
“아, 이제야 왔네.”
이것으로 세 번째 듣게 되는 목소리.
고개를 돌리니 세일러복을 입은 소년이 카라마츠의 옆에 서있었다.
“너, 너는….”
“이야, 아까 전에는 되게 멋있었어. 안 그래도 뒤에서 자꾸 숨을 불어넣기에 손이 조금이라도 닿으면 바로 거시기를 쥐어뜯을 생각으로 기다리고 있었는데 설마 거기서 아저씨가 나설 줄은 전혀 몰랐다니까.”
“자, 잠깐만! 설마 아까 전에 봤던 걸이 너였던 건가!?”
“응. 뭐야, 몰랐던 거야?”
몰랐다. 전혀 몰랐습니다.
자신이 구해준 무고한 학생이 걸이 아니라 보이였다는 사실에 카라마츠는 입이 떡 벌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소년의 모습은 인파와 남성에게 거의 가려진 채였고, 당시의 카라마츠의 위치상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은 여자 세일러복 디자인의 교복의 윤곽과 약간 마르고 아담한 체격(이 부분은 카라마츠의 착각이 가미되어 있다. 실제로 제대로 살펴본 소년은 지극히 평균이었다.)이 전부였다. 그리고 가까이 다가갔을 때에도 당시에는 남자에게만 신경 쓰느라 소년은 전혀 살펴보지도 않았다. 그렇다 보니 지금에서야 자신이 구해준 상대가 소년이라는 것을 알게 된 카라마츠는 어쩐지 속은 기분이 되어 찜찜한 표정을 지었다. 구해준 것 자체에 대한 후회는 없지만, 자신이 가진 착각은 절반 정도는 소년에게도 책임이 있었다.
그에 비해 소년은 자신을 보고 착각한 카라마츠가 재밌는지 연신 키득거리기 바빴다. 배를 감싸 쥐고 웃는 모습은 영락없는 동네 개구쟁이의 것이었다. 한참을 웃던 소년은 잠시 앞으로 넘어간 푸른 목도리를 어깨 너머로 넘겨버린 뒤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어쨌든, 도와줘서 고마워. 덕분에 살았어.”
“어? 아아, 그래. 무사하면 그걸로 됐다. 그런데 이곳에서 보는 건 처음이군. 무슨 볼일이 있나?”
“아, 맞다. 사실은 만나게 되면 부탁 좀 하고 싶어서.”
“부탁?”
“별 건 아니고, 무척 간단한 거야.”
그 말을 끝냄과 동시에 소년은 앞으로 성큼 발을 내딛었고, 카라마츠는 자신에게로 다가온 소년의 모습에 그만 당황하여 반사적으로 반 발자국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카라마츠가 도망칠수록 소년은 더욱 그에게 바짝 붙었기에 소년은 카라마츠의 가슴팍에 아슬아슬하게 닿지 않는 간격을 유지하고서 그의 턱 밑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말 그대로 바로 턱 밑까지 가까이 다가온 소년의 접근에 카라마츠는 그저 혼란스러웠다.
있잖아.
“나랑 친하게 지내지 않을래?”
그리고 보여준 미소는, 그야말로 소악마의 것이었다.
살며시 반달 모양으로 휘어진 눈웃음에는 악의 없는 짓궂음과 애살스러움이 진하게 덧그려져 쉽게 손을 대기 어려운 기이함을 품고 있으면서도 무심히 지나치지 못하게 만드는 매력과 신비로움을 은밀히 품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자신의 부탁이 거절당하지 않을 것이란 확신과 유쾌함, 천진함 같은 것이 반짝반짝 칠해졌다.
그것은 소년의 것인지, 소녀의 것인지, 세일러복의 것인지, 아니면 인간이 아닌 다른 무언가의 것인지.
처음 보는 영롱한 눈부심에 당장이라도 빛에 멀어버린 제 눈을 헌사 할 것 같았다. 그런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 카라마츠를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꿀꺽. 마른침이 가까스로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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