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카이 마코토의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를 모티브로 쓴 글입니다.
※ 사망소재 주의
사람은 내 것이 아니지만 기억은 내 것이기에
그 시절이 소중할 뿐이다.
-용윤선, 「울기 좋은 방」
그는 가만히, 이름을 부른다.
1.
그래. 먼저 그와의 첫 만남에 대해 이야기하자.
그 날이 유독 인상 깊게 남겨진 것은 분명 봄치고는 많은 비가 내린 덕분이다. 포근하고 눅눅한, 빗물 내음과 꽃향기가 기묘하게 섞여있는 미지근한 봄비가 주룩주룩 내리던 오후였다. 비가 후두둑 떨어져 땅에 고이는 소리가 아침부터 쭉 이어졌다. 온 세상에 축축이 젖어들었다. 올해 들어 처음 내리는 봄비는 겨울 내 차갑게 얼어붙은 땅과 초목을 부드럽게 녹여줬다. 생명의 비였다. 그러나 그런 축복받은 비는 유감스럽게도 당시의 나에게 있어서 곤혹스러운 상황 밖에 주지 못했다.
언제 버림받았냐고 묻는다면 글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기억의 시작점부터 나의 세계는 작은 종이 상자가 전부였다. 퀴퀴한 냄새가 풍기는 상자 안에서 추위를 떤 적이 없으니 나는 분명 봄이 시작된 첫날에 버림받았을 것이다. 봄의 첫 날에 사람에게 버림받은 고양이라, 뭔가 상징적이다. 그 후로 나는 계속 종이 상자 안에 박혀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밖으로 나갈 수 있지만 별로 내키지 않았다. 바깥 세상에 대한 무서움은 없었지만, 동시에 그와 상반된 호기심도 없었다. 나의 세계는 자그마한 상자 안이면 족했다. 몸을 웅크리고 있으면 아늑하고 따뜻한, 나만의 세계는 충분히 안정적이었다. 그러나 나의 세계는 연약했다. 비가 내리고 종이 박스는 빗물을 먹고 우그러졌다. 쭈글쭈글해진 상자를 보며 나는 먀-먀- 하고 울었다. 나의 세계가 고작 봄비 하나에 붕괴된 것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었다. 상자도 젖어들고, 스며든 빗물에 내 털도 젖어들었다. 추웠다. 봄비라고 해도 비는 추웠다. 아, 바깥 세계는 이렇게 추운 곳이었구나.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추위를 깨달았다.
그러다 추위 속에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낯선 감촉을 접했다. 내 몸을 손쉽게 휘감아드는 따뜻하고 안락한 감각. 그것이 내가 온 몸으로 체감한 인간의 ‘온기’였다.
그는 빗속에서 울고 있는 나를 두 손으로 감싸 안았다.
그의 집은 단출했다. 철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면 다다미가 깔린 방이 전부인 작은 공간. 내가 살았던 종이 박스가 대번 떠올라 친근감을 느껴 나는 그의 집에 금방 경계를 풀고 적응했다. 그는 보송보송한 타올을 꺼내 봄비에 젖은 내 몸을 꼼꼼하게 닦아줬다.
툭. 투둑. 툭. 툭. 투둑.
밖에는 여전히 봄비가 내렸다. 그러나 종이 상자와는 달리 이곳에는 비가 내리지 않았다. 봄비는 집 안으로 들어오고 싶은지 자꾸만 창문을 두드렸다. 창문에 빗물이 맺히고, 주르륵 흘러내려, 이윽고 땅에 내려앉아 웅덩이를 만들어 작은 파문을 그렸다. 그의 집은 컴컴했다. 봄비가 내리고 있어서인지, 불을 켜고 있지 않아서인지 그의 집은 어두웠다. 나로서는 그다지 불편하지 않는 어둠이지만, 인간인 그에게는 불편하지 않을까? 먀-. 그런 의미에서 물었지만, 그는 불을 켜지 않았다. 인간은 고양이의 말을 못 알아듣는다는 걸 몇 번이고 울어서야 알아챘다. 반대로, 그도 내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그 대신 습기가 훅 집안으로 들어와 아래서부터 조금씩 가라앉듯이 집안을 채웠다. 눅눅하고 답답한 습기에는 봄의 온기가 남아있지 않았다. 생명을 녹이는 비가 들어오지 못해서일까, 이곳에는 죽어가는 것들이 가득했다.
무엇이 살고, 무엇이 죽었을까.
그는 가만히, 이름을 불렀다.
처음으로 듣게 된 그 ‘이름’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 점에 대해서는 이해해주길 바란다. 인간의 언어는 반복해서 들어야지 그 뜻과 발음을 이해할 수 있었고, 더욱이 인간의 이름은 참 복잡했기에 더 기억하기도 어려웠다. (그의 이름부터가 여전히 제대로 알지 못해 ‘그’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다. 그나마 최근에는 ‘이치’라는 발음 정도는 알아듣게 되었다. 그나마 쉬운 발음인지라 다른 고양이들도 그의 이름을 부를 때 ‘이치’로 지칭했다.) 그럼에도 내가 그 이름을 똑바로 기억하고 있는 건,
그가 가만히, 이름을 불렀기 때문일 것이다.
비는 여전히 내렸다. 온 세상을 적시는 봄비였다. 내 몸도, 그의 얼굴도, 전부 다 적셔서 모든 추위와 부정을 씻겨 내리려고 하는 경건하고 처연한, 그럼에도 온기가 잔존하고 있는 상냥한 비였다.
2.
「다녀올게.」
이것이 내가 가장 먼저 익힌 인간의 언어이다. 다녀올게. 그는 아침마다 나에게 그 말을 남겼다. 처음에는 무슨 의미인지 몰라 철문 앞에서 고개를 갸우뚱거렸지만, 그가 그 말을 남기고 밖에 나가면 늦은 시간이더라도 반드시 이곳으로 돌아왔기에 나는 막연히 그 말을 좋아했다. 나중에야 그 말이 인사라는 것을 동네 고양이들에게 배워서 나도 어느 날부터 그 말을 듣고 먀- 하고 울어줬다. 그는 내가 울어줄 때면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거친 손바닥이라 감촉은 썩 좋지 못했지만 손길은 더할 나위 없이 섬세하고 부드러웠다. 그는 나를 사랑해주고 있다.
나는 그와 함께 지내고 있다. 그러나 그에게 길들여진 것은 아니다. 종이 상자 안에 고양이 한 마리가 더 늘었을 뿐이다. 나는 그냥 그의 곁에 있었다. 나는 그가 없을 때면 밖으로 나와 마구 돌아다녔고, 그는 나의 부재에 대해 이렇다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내가 집으로 돌아오면 「어서와.」라고 말한다. 이것이 내가 두 번째로 배운 인간의 언어였다.
그는 우리들을 좋아한다. 아침 일찍 나가지 않는 날이면 통조림을 챙겨들고 밖으로 나와 골목에 있는 친구들에게 찾아가 먹이를 나눠준다. 나도 그의 뒤를 따라가 애들 사이에 끼어들어 같이 먹이를 먹는다. 그는 고양이들을 돌보는 것을 좋아했다. 나보다 먼저 그와 친해진 애들은 그를 ‘친구’라고 불렀다. 그가 우리를 친구하고 생각하니까. 우리도 그가 먹이를 줘서 좋아하고 있어. 그래, 누구든지 간에 맛있는 음식으로 배를 채워준다면 언제든지 친구로 삼아줄 수 있다. 그는 그렇게 하루 종일 동네를 돌아다니며 나도 모르는 고양이들에게 먹이를 주고 맘껏 쓰다듬었다. 그러다 보면 해는 벌써 반대편으로 훌쩍 넘어간 후였다. 여름의 저녁놀은 무척이나 붉다. 대지를 적시던 봄비와는 달리 여름의 석양은 지상의 모든 것을 불태워 집어삼킬 기세를 거리낌 없이 내보였다. 그리고 그 기세에 맞게 세상은 붉게 물들어져갔다. 나도, 그도, 붉게 물들었다.
그럴 때면 그는 가만히, 이름을 부른다.
석양빛에 녹아드는 이름은 여전히 이상하게 들렸지만 세상이 붉어질 때마다 들려서 그런지 그 이름 또한 붉었다. 흑백의 세계에서 그 이름만이 유일하게 붉은색을 지녔다.
붉은빛이 절정에 달할 때, 그는 가만히 서서, 직시하기 어려운 그 빛을 마주한다. 너무도 강렬해서 오래 바라보면 눈이 멀어버려 녹아내릴 것 같은, 그럼에도 바라보는 것을 포기할 수 없는,
가만히, 이름을
아름다운 붉은 빛이었다.
3.
전화가 왔다.
그가 전화를 확인한 때는 한밤중이었다. 그는 아침 일찍 나가 밤늦게 돌아왔다. 그는 평소에도 무기력했지만 밤에 돌아올 때면 한층 더 기운이 없었다. 그나마 남아있는 모든 기력을 저 밤하늘에다가 탈탈 쏟아 붓고 오는 것 같았다. 왜 그런 짓을 하는지 나름대로 해답을 찾아봤지만, 인간의 일은 역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너무 많았다. 그럼에도 그는 그 짓을 그만두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박차를 가했다. 그는 자신의 몸을 쥐어짜내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힘겹고, 힘겹고, 이보다 더 힘겹게 해서, 그래서 그 힘겨움에 자신을 눌러 죽이려는 것 같았다. 방 안에는 여전히 불이 켜지지 않았다. 그는 노곤한 몸을 다다미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졌다. 먀- 먀-. 전화기에서 불이 깜빡인다. 그는 불빛에 이끌려 몸을 다다미에 질질 끌었다. 삐이-. 버튼 음 소리가 났다. 부재중 음성 메시지가 한 건 있습니다.
「나다, 이치마츠. 잘 지내고 있나? 무리하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군. 네 직장에 대해 험담할 마음은 없지만 여러 소문이 안 좋다보니 쵸로마츠나 토도마츠가 이만 저만 걱정이 아닌가봐. 한 번은 시간 내서 집으로 와줬으면 좋겠구나.
봄에는 제대로 이야기도 못하고 헤어졌는데 그게 계속 마음에 걸려서 말이야. 좀 더 일찍 연락을 하고 싶었는데 이쪽도 이래저래 바쁜 나머지 이제야 연락을 하는군. …아니, 미안하다. 이것도 핑계다.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줄곧 망설였다는 게 맞겠지. 지금 이렇게 부재 중 메시지를 남긴 게 오히려 다행일 정도다.
더 길게 이야기하면 네가 부담스러워 할까봐 이만 줄인다. 하지만 이 말만큼은 꼭 남기고 싶다. 이치마츠. 혼자서 힘들어하지 마라. 네가 이러는 건… 그 녀석도, 원치 않으니까.」
목소리는 거기서 멎어졌다.
메시지를 들은 그가 잔뜩 뭉개 진 발음으로 무어라 웅얼거렸다. 무슨 쓰레기 어쩌고 하는 것 같았는데 잘 들리지 않았다. 그는 다다미에 얼굴을 묻고, 아무 말도 안했다. 적막한 가을밤은 참 스산했다. 바람이 앙상한 나뭇가지에 스쳐 울었다. 바람도, 나무도, 달도, 별도, 그도. 모두가 우는 밤이었다. 그의 얼굴에서 비가 내렸다. 처음 그의 얼굴을 적시었던 봄비와는 다른 것이었다. 그 비에는 온기가 어디에도 없었다. 생명을 적시던 온기가, 얼어붙은 모든 것들을 위로했던 따스함이, 그리움이. 어디에도. 그 희미하지만 분명 그곳에 있었던 온기는 어디로 가버린 것인가.
그래서 그는 가만히, 이름을.
나를 바라보며 불렀다.
여름의 붉은 색으로 이루어진, 아련한 봄비의 온기의 자취를 덧그린, 가을의 공허함으로 남겨진,
그 이름을.
처음에는 그 이름이 내 것 인줄 알았다. 인간은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습성이 있으니 자신을 바라보며 매번 부르는 이름 또한 그런 거겠지 하고 넘겨짚었다. 그러나 그 이름의 나의 것이 아녔다. 그 이름은 어느 인간의 것이었다. 그가 그리워하는, 어느 인간의 이름이다. 그 이름은 내 이름이 아니다. 나의 이름이 아닌 그 요상한 이름을 그는 가만히, 불렀다. 봄비에 젖은 얼굴로, 여름 햇살에 달구어진 얼굴로, 가을의 스산함으로 일그러진 목소리로.
그는 가만히, 이름을 부른다.
미야아옹- 나는 길게 울음을 지었다. 그 이름을 답할 수 있는 게 나 뿐이라는 게 너무 미안했다. 미안하고 미안해서, 나라도 그리 대답해줘야 할 것 같았다. 나는 그날에서야 내가 왜 지금까지 그와 함께 있는지를, 그가 왜 나를 보며 그 이름을 불렀는지를 알았다.
4.
「다녀올게.」
그는 오늘도 같은 말을 남기고 밖을 나선다. 덜컹, 찰칵. 철문이 굳게 닫히는 소리에 이어 문을 잠그는 소리가 들렸다. 저벅, 저벅, 저벅. 길게 늘어지는 힘없는 발자국 소리가 조용히 멀어졌다. 정적으로 가득한 곳에서 소리는 서서히 새하얗게 묻혀갔다. 고요했다. 고요함이 새하얗게 뭉쳐져 소복이 쌓여갔다. 날은 추웠지만 밖이 아니라 그런지 아직은 버틸만했다. 불빛 하나 없는 종이상자 안에서 나는 하얗게 빛나며 내려오는 것들을 계속 바라봤다. 보고만 있어도 어쩐지 마음이 차분해진다. 그 또한 이 눈을 보고 있을 것이다.
그는 여전히 아침 일찍 나가 밤늦게 돌아왔고, 우리들의 먹이를 챙겨줬고, 무기력하게 죽어가며, 여전히 살아있다. 나 또한 여전히 그와 함께 지냈다. 그에게 길들여지거나 키워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냥 같은 공간 아래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우리들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서로의 살을 맞닿아 체온을 나눠 갖는 것만큼 좋은 일도 없다. 인간도 분명 그럴 것이다. 그에게도 온기를 나눠 가질 수 있는 인간이 있었으면 좋으련만. 가령, 오늘도 가만히 나를 보며 불렀던 그 이름 같이.
그는 여전히 가만히, 이름을 부른다.
앞으로도 그가 나를 보며 그 이름을 부를지는 잘 모르겠다. 그는 여전히 외로웠고, 그리워하며, 죽지 못해 살아간다. 인간의 감정은 참 복잡했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에만 치중하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그는 이해되지 않는 존재였다. 친구지만 이상한 녀석이라는 것이 동네 친구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나도 아직은 그에 대해서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오히려 모르는 것들이 너무 많아 짜증이 울컥 치솟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가 이름을 부를 때면, 누군가를 부르는 그 목소리를, 차마 외면할 수 없어서.
나는 아직도 그의 곁에 머무르는 것 같다.
언젠가 그 이름에 내가 아닌 누군가가 답해주는 날이 오지 않을까 기다리면서 말이다.
눈은 여전히 내렸다. 저 눈이 다 녹으면 다시 봄이 올 것이다. 나와 그가 만났던 봄. 어렴풋이 느낄 수 있던 봄의 온기가 다시 비에 섞여들어 찾아올 것이다. 나를 감싸 안았던 온기가, 그가 그리워하는 온기가.
그는 가만히, 이름을 부른다.
+) 이치마츠와 고양이가 만난 날은 오소마츠의 첫 번째 기일.
++) 사인은 교통사고. 그 전까지는 이치마츠가 오소마츠를 일방적으로 짝사랑하고, 오소마츠가 그걸 받아주는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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